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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成三問) | |
출생 | 1418년 조선 충청남도 홍주 (현 홍성군) |
사망 | 1456년 6월 8일 조선 한성부 |
사인 | 사형(거열형) |
거주지 | 조선 충청남도 홍주→한성부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근보, 눌옹, 호는 매죽헌 |
학력 | 1447년 중시에 장원 |
직업 | 문신, 유학자, 한글학자, 정치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신씨, 김씨 |
자녀 | 맹첨, 맹평, 맹종, 헌, 택 |
부모 | 성승 / 죽산 박씨 |
친척 | 형제 삼빙, 삼고, 삼성, 조카 성한, 사돈 유자미, 유성원 |
웹사이트 | 생육신/사육신 |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회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생육신인 성담수, 성담년은 그와 6촌간이며 이기, 이행 등은 외종질이다. 그의 남계 친족은 모두 몰살당했고, 외손 박호의 후손, 외손 엄찬의 후손과 유자미 [1]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의 후손만이 현전한다. 성종 때부터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숙종 때 가서 복권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추앙받게 된다. 충청남도 출신.
생애
생애 초반
1418년 성삼문은 충청남도 홍주(洪州, 현재의 홍성군) 홍북면 노은동(魯恩洞)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를 막 낳으려고 할 때에 공중에서 하늘이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하늘이 세번 물었다 하여 그의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형제인 삼빙, 삼고, 삼성이 있는데, 이 중 성삼빙은 성삼문의 형인지 동생인지 여부는 다소 불확실하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 이후 관직에 올라 집현전의 학사의 한사람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이때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가 그의 과거 급제 동기생이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을 지냈다.
관료생활 초기, 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신숙주와 함께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신숙주와 함께 13 차례나 요동에 다녀오기도 했다.
집현전 학사 시절
집현전과 훈민 정음
귀국 후 집현전수찬을 거쳐 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한양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 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이어 세종대왕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여하여,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이개(李塏), 최항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가장 공이 컸는데 종의 명으로 당시 성균관 주부로 재직 중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과 함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를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마침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 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만나게 되어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고 되돌아왔다.
또한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는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학자들을 만나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와 이를 보고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1447년 중시(重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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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생활
1447년 경연시강관(侍講官), 사간원 우사간,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는데 참여하였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학문을 강론하였다.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 성삼문과 박팽년·신숙주·최항·이개 등을 항상 대동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 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후 예조 참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와 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세종은 병약한 세자(문종)도 오래살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서 어린 원손 홍위(후일의 단종)를 부탁한다는 유지를 여러 번 남겼다. 성삼문 역시 집현전 학사로 그의 유지를 받들게 되었다.
정치 활동
계유정난 전후.
1453년(단종 1)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를 사살하고 집현전 여러 신하들에게 정난 공신(靖難功臣)에 책록한다.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36명과 함께 그를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한 공이 있다고 하여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성삼문은 수치로 여기고 혼자만이 연회를 베푸는데 참여하지 않았다.
1453년(단종 1년) 사간원좌사간, 1454년 집현전 부제학, 예조 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1455년 여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단종의 양위 직후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양위로 즉위하자 그는 이를 찬탈로 규정했다. 왕위에 오르니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하였다. 성삼문은 "국새(國璽)는 옮겨졌지만 주상(主上)이 아직 계시고 우리가 있으니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며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후 받은 녹봉은 월별로 표시하여 취하지 않고 집 근처의 곡간에 별도로 쌓아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할 때 신숙주에게 참여를 요청하였지만 신숙주는 비현실적이라며 참여를 거절한다.
한편 신숙주는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세조와의 갈등
수양대군의 집권과 권력 장악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양대군의 특별 배려로 그는 집현전의 다른 학사들과 함께 등용되고 그의 자문역할로서 배려를 받았지만 그는 수양대군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단종의 복위를 역설했고 집현전 학사들과 조정의 신하들 중 일부는 그의 결의에 동조했다.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복위운동에 나섰던 것은, 단종에 대해 충절을 지킨다는 유교적 명분이 있었지만, 그는 세조의 독단에 반대했고 관료지배체제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았기에 세조의 독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세조가 즉위 직후부터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조치를 취하자 집현전 출신 유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거사와 최후
단종 복위 운동
단종 복위 운동은 그를 포함하여 집현전 출신 관료들과 그 주변 무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세조 부자를 죽이거나 거병을 하면 각지에서 호응할 계획도 세워놓았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朴仲林), 박팽년, 유응부, 권자신(權自愼), 금성대군, 이개, 유성원, 윤영손(尹鈴孫), 김질(金礩)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세조의 반정에 반대하여 외부로 나가거나 사퇴한 전직 관료들과도 연락하였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 바로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왕의 운검(雲劒, 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맡은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세조와 의경세자 부자 및 그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 한명회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사 당일 이들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본 한명회와 신숙주의 권고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성삼문은 거사를 중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에 갑자기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김질은 전부터 이를 알고 있던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권고와 회유로 이를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였다. 바로 성삼문은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의금부에 체포, 투옥되었다.
단종 복위 실패와 투옥
아버지 성승·박팽년 등과 같이 상왕(上王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에 착오가 생겨 세조의 직접 심문과 가혹한 고문 끝에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와 함께 군기시(軍器寺)(지금의 태평로 근처)에서 처형되었으니 이를 사육신이라 한다.
사형에 임하여 그는 죽기 전에 시 한수를 지었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굶주려 죽을진들 채미를 먹는 건가
비록에 부새엣것인들 그 뉘 땅에서 났다니
처음에 그들은 명(明)나라의 사신이 왔다가 돌아가는 송별연회 석상에서 세조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정인지·권남 등 일파를 없애버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연회 당일, 세조는 갑자기 자리가 좁으니 운검(雲劍)은 그만두라고 지시하였다. 이 운검은 임금이 정좌한 앞에 큰 칼을 들고 서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도총관으로 있던 성승(成勝: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가 운검으로 내정되어 그 자리에서 처치하기로 한 것이었다. 유응부는 그대로 하려고 주장하였으나 성삼문이 극구 말려서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에 같이 모의하던 김질이 성사가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사실을 밀고하니 그들은 체포되었다.
형문과 최후
6월 체포된 다음 날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을 뚫고 팔을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를 배신자, 반역자라며 꾸짖고 고집을 꺾지 않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그는 성승,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박중림, 김문기, 박쟁(朴崝)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이일로 인해 성삼문은 처형되고 성삼문의 일가는 멸족을 당했는데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을 비롯해 동생 성삼빙, 성삼고, 성삼성과 아들 성맹첨(孟瞻), 성맹년(孟年), 성맹종(孟終) 등 남자는 모조리 살해당해 혈손이 끊기고 조부 성달생의 묘는 훼손되었으며], 그의 아내와 딸은 박종우의 집 노비로 분배[6]되었고 다른 딸들은 관비가 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미 박씨와 엄씨 집으로 시집 간 두 딸만이 화를 모면하였다. 그 외에 그의 가까운 일족으로 당숙 성희 등은 유배되었다.
사후
거열형에 처해진 그의 시신은 조선 8도에 조리돌림되었고, 그의 시신과 그의 일가족의 시신 일부를 김시습 등이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하였다. 이 묘는 후에 누군가 비석을 세워 성씨지묘 라 하였다. 한편 팔도로 보내진 시신 중 한쪽 다리 부분은 충청남도 연산군 은진 양촌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 안장되었다. 이후 비석이 없던 논산의 묘소는 숙종 때 가서 비석과 신도비가 세워지고 사당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또한 그의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그의 부모 묘소 근처에도 성삼문의 유품을 동리 선비들이 묻고 제사를 지내던 가묘가 전한다. 그의 유품을 모신 묘소 근처에는 1668년(현종 9년) 송시열의 문인이자 관찰사로 왔던 민유중이 추모표를 세우고, 뒤이어 숙종때 우암 송시열이 묘소의 실전을 막기 위해서 친필로 쓴 유허비가 세워졌다.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혹형, 처형, 유배 등을 당했고 그 관련자 500여 명도 처형당했으며 부녀자들은 관비나 기생, 공신의 여종, 첩으로 분배되었다. 그 중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형 성삼고(成三顧), 동생 성삼빙(成三聘), 성삼성(成三省)과 조카들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일가족은 몰살당하고 만다.
복권
성삼문은 대역죄인으로 처형을 당했으나 그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림 집권후 계속되었다. 김종직, 조광조, 홍섬, 이이, 김집, 송시열 등이 그의 충절을 논했으며, 사육신의 복권 여론을 주청했으나 실패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자신의 저서 〈추강집 秋江集〉에서 그를 비롯하여 단종복위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명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성종 때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복권 여론이 나타났다. 그 뒤 중종 때 조광조 등 사림이 집권하면서 다시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기묘사화로 사림이 몰살당하면서 다시 수그러들었다. 이후 숙종 때 다시 노론 계열에 의해 복권 여론이 나타났다.
1691년(숙종 17년) 사육신의 관직이 복구될 때 관작이 복구되었고, 노량진 사당에는 민절(愍節)이라는 사액을 내려졌다.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은 녹운서원(綠雲書院)이 되었다. 영조 조에 들어서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노량진 민절서원, 의절사(義節祠),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홍주 노은서원, 논산의 사당,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 물계세덕사(勿溪世德祠), 연산(連山) 충곡서원(忠谷書院), 충청남도 공주의 동학사 숙모전(東鶴寺 肅慕殿) 등에 6신 및 단종 때의 순절신들과 함께 배향되었다.
현대
흥선대원군 때 홍성군의 노은서원이 헐리자, 후일 홍성의 유림들은 위패를 근처에 묻고 노은단을 세워서 계속 제사하고 있다.
1910년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육신은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져왔고 성삼문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받았다. 1960년대에 이르러 노량진의 사육신 묘소가 현창되었고, 1970년대에 와서는 충청남도 홍성군에 있는 본부인의 묘소와 아버지 성승과 생모의 묘소가 모두 성역화되었다.
논산군에 있는 시신 일부를 매장한 묘소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로 지정되었다.
저서
《성근보집 (成謹甫集)》
《매죽헌집 (梅竹軒集)》
가족 관계
생육신의 한 사람인 성담수, 성종때의 학자 성담년 등은 그의 6촌 형제간이다. 아내 차산과 미혼의 딸 효옥은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석방 시점은 알 수 없으며 차산(연안김씨)은 성삼문의 위패를 만들어서 제사지냈다 한다. 김씨부인이 죽은 후 성삼문의 제사는 장녀의 둘째 아들 박호가 승계했으나 후손이 없고, 임란에 인왕산에 성삼문과 그 외손 내외의 신주를 묻었는데 1672년 사태난 골짜기에서 신주 3위가 발견되어 송시열 등이 다시 묻지않고 홍주로 이봉하였다.
성삼문 일가가 처형당할 무렵 박임경에게 시집간 그의 장녀는 연좌되지 않았다. 둘째아들 맹년의 딸은 유성원의 일족인 서산공 유자미가 비밀리에 피신시켜 길러서 자신의 일곱째 며느리(柳輯 부인)로 삼았다 한다.
조부 : 성달생(成達生)
조모 : 풍양조씨(趙氏), 조운개(趙云价)의 딸
아버지 : 성승(成勝, ? - 1456년)
어머니 : 죽산박씨, 박첨의 딸
형님 : 성삼빙(成三聘, ? - 1456년)
형수 : 의정(義貞),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권개(權愷)의 노비가 되었다.
동생 : 성삼고(成三顧, ? - 1456년)
제수 : 김씨(金氏, 한림(翰林) 김수손(金首孫)과 재혼하였다.), 이름은 사금(四今.[8])
동생 : 성삼성(成三省, ? - 1456년)
제수 : 명수(命守), 홍달손(洪達孫)의 노비가 되었다.
계모 : 미치(未致), 계림군(雞林君) 이흥상(李興商)의 노비가 되었다.
서모 : 이름 미상
이복 여동생 : 성금(性今), 신숙주(申叔舟)의 노비가 되었다.
이복 여동생 : 옥동(玉童), 박원형(朴元亨)의 노비가 되었다.
본처 : 신씨
후처 : 연안김씨(延安金氏, 연안 김잉(仍)의 딸, 차산(次山, 박종우의 노속에서 성삼문 제사를 지냄.
장남 : 성맹첨(成孟瞻, ? - 1456년)
자부 : 현비(現非), 전균(田畇)의 노비가 되었다.
차남 : 성맹년(成孟年, ? - 1456년)
손녀 : 성씨, 성맹년의 딸, 유자미의 며느리
삼남 : 성맹종(成孟終, ? - 1456년)
장녀 : 효옥(사육신 처형 당시 미혼으로, 노비가 됨)
차녀 : 성씨(成氏, 1439 ~ 1489)
사위 : 박림경(朴臨卿 1436 ~ 1485)
삼녀 : 성씨(成氏, ? ~ ?)
사위 : 엄정구(嚴鼎耉)
사돈 : 한명회(韓明澮)
사돈 : 유자미(柳自湄, 사육신의 한사람인 유성원의 친척)
관련 작품
드라마
《설중매》 (MBC, 1984년~1985년 배우:임채무)
《한명회》 (KBS, 1994년~1994년 배우:백윤식)
《왕과 비》 (KBS, 1998년~2000년 배우:박진성)
《공주의 남자》 (KBS, 2011년~2011년 배우:박철호)
《뿌리깊은 나무》 (SBS, 2011년~2011년 배우:현우)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배우:김세민)
연극 영화
이광후 - 2005년 《길》, 연극
신현종 - 2005년 《길》, 연극
박상석 - 2012년 《전하의 봄》, 연극
성삼문의 부인
조선왕조실록에 성삼문의 처로서 노비로 분배된 차산(김씨)은 1456년 9월 7일 딸 효옥과 함께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의 노비로 끌려갔고, 뒤에 석방되었으나 다시 성종 때인 1475년 5월 7일 딸 효옥과 함께 다시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이후 차산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죽은 후 성삼문 신주는 외손 박호가로 갔으나 후손이 없어 인왕산에 묻혔다. 한편 성삼문의 부인 연안김씨의 묘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성승장군 묘 앞산에 있다. 뒤에 숙종 때 송시열, 민유중 등이 성삼문 유허지를 정비할 때 연안김씨 부인의 묘소도 단장, 정비하였다. 1668년 송시열이 지은 성삼문유허비는 1744년 홍주목사 이기진의 청으로 윤봉구가 음기를 추가하여 비로소 늦게 큰 비석하나로 세워졌다.
약력
1418년(태종 18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출생.
1438년(세종 20년):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급제.
1442년: 신숙주 하위지등과 사가독서를 함.
1446년: 집현전 수찬으로서[13] 훈민정음을 창제에 지대한 공헌을 함.
1447년: 문과중시 장원.
1456년: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 혹독한 고문 끝에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을 당하고 효시(梟示)됨.
평가
긍정적 평가
후일 남효온의 사육신전 등을 통해 그는 충절, 절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를 절의의 상징으로 여기는 시각은 중종 때 조광조 일파가 집권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숙종 때의 송시열, 김수항 등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충절과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계속되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작가인 이광수의 단종애사 등은 널리 읽히는 소설이었고 이는 한국의 광복 이후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단종애사의 유행 역시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는데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읽으며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훌쩍거린 적도 있다. 특히 ‘단종애사’는 어린 시절 깊은 감동과 함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단종애사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절의(節義)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반면 수양대군과 그의 추종자였던 신숙주(申叔舟)에 분노한다는 것이다.
기타
집현전 학자로서 글씨를 잘 썼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세종에게 앞날을 축복받았고, 일찍 신숙주 등과 같이 정음청에서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여하였다. 그와 함께 단종 복위에 가담한 하위지는 당시 최만리, 정창손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후손으로는 딸 효옥, 박림경에게 시집간 딸과 류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 등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맏딸은 무안박씨 박림경에게 시집갔고 이후 성삼문의 제사는 둘째 외손자 박호에 의해 봉사되었다. 다른 딸 효옥은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둘째아들 성맹년의 어린 딸은 사육신의 다른 한사람이기도 한 유성원의 일족인 은사 유자미가 구출하여 몰래 먼 곳에서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 길렀으며 뒤에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다.
생육신인 성담수, 성담년은 그의 6촌 동생들로 아버지 성승의 사촌 형제인 성희의 아들들이었다.[15] 뒤에 성종 때 6촌 동생 성담년이 관직에 다시 출사하게 된다.
성삼문의 글
다음과 같은 시조가 전한다.
“ |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 |
| — 성삼문, 《청구영언》 |
|
“ | 영해당(詠海棠 |
| — 성삼문, |
신숙주와의 비교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한 것이고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했다. 성삼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 길을 갔다..현실이 중요하다고, 조카의 보험금을 삼촌이 가로채는 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과 바꿀려고 해서 바꾼것이 아니라 실패해서 바꾸어 진 것일 뿐이다. 올바른 현실을 위해서. 잘못된 현실은 현실로 보지 않았다
신숙주와 달리 성삼문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을 더 짙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경륜은 그리 중요할 것이 없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충군과 절의, 그리고 학문이었다.
하위지(河緯地)
하위지(河緯地, 1412년 ~ 1456년)는 조선시대의 전기의 문신, 정치인, 학자이며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 때의 학자로 최만리, 정창손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의 측근들에 의해 강압을 받아 양위하자, 성승, 유응부, 성삼문, 김질 등과 함께 세조 3부자를 타살하고 단종 복위를 거사했다가 회유 또는 실패를 예상한 성균관 사예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세조는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여 친히 국문을 하면서도 여러번 그에게 회유를 권고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자(字)는 천장(天章)ᆞ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 적촌(赤村), 연풍(延風)이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본관은 진주(晋州). 사육신 중 박팽년가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경상도(현재 경상북도) 출신
생애
출생과 가계
하위지는 경상북도 선산군 출신으로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하담(河澹)이고,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증조부는 하윤(河胤),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하지백(河之伯)이다. 하위지는 진양 하씨로 고려 후기에 주부를 지낸 하성(河成)의 후손이었다. 위로 형 하강지, 동생 하기지 등이 있었다. 하위지의 출생년도는 불확실하여 1387년생과 1412년생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출생한 날로부터 3일 동안 그의 생가집 앞을 흐르던 시냇물이 붉게 물들었다 하며, 하위지는 여기에서 자신의 아호를 따서 단계(丹溪)라 하였다 한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한 그는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과거 급제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 생원이 되고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바로 세종대왕의 특별 명령으로 성삼문, 김질, 신숙주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기도 했다. 그 뒤 집현전 학자가 되었으며,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정치를 보살폈다.
관료 생활
1440년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특별히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경상도 관찰사에게도 그를 구료하도록 특별 전지(傳旨)를 내렸다. 1444년(세종 26) 집현전 교리에 임명되어 《오례의주》(五禮儀註) 편찬에 참여했다.
1446년 전라도 나주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탐람죄를 범하여 탄핵을 받자 전라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형 하강지는 병중이었고 스스로 인책사퇴로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옥중에 있던 형 하강지의 병을 간호하였다.
1446년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그는 최만리, 정창손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가 한때 세종의 진노를 사기도 했다.
그 뒤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세종의 명으로 집현전에서 《역대병요》(歷代炳燿)의 편집을 착수했는데 당시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당시 이를 총재하였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의 편찬, 개수 작업에 합류하였다.
세종의 유지
세종은 평소에도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손자 단종을 부탁한다고 거듭 지시하였는데, 1450년 장남 왕세자 향은 병약하여 일찍 죽을 것을 예감한 세종은 자신이 병으로 임종하게 되자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 어린 손자 홍위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하위지도 집현전의 다른 학사들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 즉위 직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1451년(문종 1) 수양대군을 보좌하여 《진설》(陣說)의 교정과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하던 중 직집현전으로 승진했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수양대군과의 갈등
한편 세종때부터 간행한 《역대병요》가 1453년(단종 1) 봄에 이르러 간행되니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청하여 편집에 공로가 많은 신하들에게 가자(加資)하게 되었다. 하위지는 당시 사헌부집의(執義)로 중직에 승진했으나 이를 굳이 사퇴하면서 임금의 나이가 어려서 나라가 위태로운데 왕족(수양대군을 가리킴)이 작상(爵賞)을 가지고 조신(朝臣)을 농락하면 안 된다고 규탄하였다. 이 일로 훈신들이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비난했으나 수양대군과는 사적으로 친한 사이였으므로 수양대군은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1453년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 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상도 영산(靈山)의 온정(溫井)으로 내려갔다.
생애 후반
계유정난 전후
1453년 음력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의정부 영의정 겸 섭정에 오르자 하위지는 벼슬을 버리고 전사간(前司諫)의 자격으로 선산에 물러가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청하여 좌사간(左司諫)으로 불렀으나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454년(단종 2)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佛堂)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동년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겸임 춘추관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청에서 경연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부제학·예조 참의 등을 역임하고 1455년(단종 3) 다시 직제학이 되었다가 예조 참의가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고 예조 참판으로 부르니 마지못해 취임했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녹을 받는 대로 별실에다 쌓아두기만 했다. 곧 이어 세자 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 뒤 예조 판서로 다시 승진 제수되었다.
세조의 강권정치 반대
세조는 즉위 직후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의 삼정승과 좌찬성,우찬성이 육조 판서들의 정무를 결재하는 의정부서사제에서 왕이 직접 육조 판서들의 서류를 결재하고 정무를 주관하는 육조 직계제로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예조 참판인 하위지가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즉위 직후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와 신념을 아껴 그에게 여러번 교서를 내려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본 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먹지를 않았다 한다. 그러나 하위지는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는 즉위하자 왕권강화책으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署事制)를 폐지시키고 육조가 관장사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상계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반대하고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 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단종 복위 실패와 처형
그러나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이개·유응부·유성원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배반으로 붙잡혀 의금부에 끌려가 국문을 당한 후 함께 순절(殉節)했다. 이때 국문장에 나타난 세조는 하위지와 사적으로 친한 사이라 그에게 "잘못을 했다"는 말을 한다면 용서해 줄것이라고 하여 설득하였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고 사형당한다.
그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다. 죽은 후 갈기갈기 찢어진 시신은 김시습 등에 의해 수습되어 서울 노량진에 안장되어 사육신묘라 한다. 그러나 선산군 서쪽 고방산(古方山)에도 그의 묘가 있다.
사형 직전
사육신 중 박팽년과 함께 후손이 전한다. 사후 그의 아버지와 형제와 두 아들이 사형당하였으나 미성년자인 조카 셋이 살아남아 그 중 동생 하기지의 아들 하원이 양자가 되어 대를 이었다.
1456년 세조를 죽여 단종을 복위하려고 꾀한 사육신의 변이 일어나자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를 아껴 몰래 그에게 모의한 사실을 고백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타일렀으나 그는 일소(一笑)에 부쳤다. 문초를 받을 때 그는 “이미 반역자로 정해져서 사형을 받게 된 바에야 새삼 물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라고 대답하여 세조도 노여움이 좀 풀려 하위지만이 낙형(烙刑)을 받지 않았다.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 하였다.] 세조는 국문장에서 그에게 자신의 편으로 올 것을 요청하였지만 하위지는 모두 거절하였다. 그는 국문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形,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박(珀)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다.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을 두려워함이 없이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이미 살해되었는데 제가 어찌 혼자 살아남겠습니까? 조명(朝命)이 없더라도 자결해야 마땅할 입장입니다.”라면서 노비로 끌려가게 된 누이동생더러 여자의 의리를 지켜 두 주인을 섬기지 말 것을 부탁한 다음 태연히 죽음을 받으니, 모두들 그 아버지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라 칭찬했다.
아들 하담과 하박은 처형당하였으나 16세 미만이었던 미성년자 조카 하포, 하귀동(동생 하기지의 아들), 하분(형 하강지의 아들)은 살아남았다. 하귀동은 뒤에 이름을 하원으로 개명하고 하위지의 양자가 되었다. 세조는 다른 사육신은 아들, 아버지, 형제, 조카들까지 처형하였으나 하위지에게만은 예외를 두어 그의 어린 조카들인 하포, 하원은 사형에 처하지 않고 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하위지 가문은 손자 박일산이 살아남아 후손을 전하는 박팽년 가문과 함께 직계후손이 전하는 가문이기도 하다.
사후
숙종 때 복권되어 증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강원도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경북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의 충곡서원, 경상북도 의성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가족 관계
형제들은 모두 처형당했으나, 특별히 수양대군과 친하게 지냈던 덕에 어린 조카 세 명은 무사하였다. 이는 성삼문의 조카들과 종손들이 처형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후일 동생 하기지의 아들 귀동이 하원으로 개명하고 양자가 되어 그의 제사를 받들었다.
연좌된 조카 세 명은 1468년 9월 6일 석방되었다.
아버지 : 하담(河澹, ? - 1456년)
형 : 하강지( ? - 1456년))
조카 : 하분(河汾, 미성년자라 처형을 모면하였다.])
동생 : 하기지( ? - 1456년))
조카 : 하포(河浦, 미성년자라 처형을 모면하였다)
아내 : 귀금(貴今, 지병조사(知兵曹事) 권언(權躽)의 노비로 분배되었다)
딸 : 목금(木今, 지병조사(知兵曹事) 권언(權躽)의 노비가 되었다.)
아들 : 하담
아들 : 하호(河琥, ? - 1456년))
아들 : 하박(河珀, ? - 1456년))
양 아들 : 하원(처음 이름은 하귀동(河龜同), 동생 하기지의 아들, 미성년자라 처형을 모면하였다.)
평가
성미가 과묵하고 공손했으며, 항상 집현전에서 경연(經筵)에 왕을 모시면서 학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문종 초기 왕이 병약하고 힘이 없자 권력을 농단하는 대신들의 월권행위와 실정, 부패행위 등을 적극적으로 공격, 비토하다가 대신들과 문종으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鄭而漢)과 정창손(鄭昌孫)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은 자신의 저서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 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세조의 월권행위 비판
단종 즉위 초,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역대병요≫와 병서(兵書)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학사의 품계를 승진시키려 하였다. 역대병요와 병서의 책임자가 수양대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들어 단종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기타
하위지가 자신의 두 조카 하원과 하포는 연좌되지 않은 것을 알고, 하원과 하포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유산 상속 분재기가 현재 전한다.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거사했던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하위지는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유응부(兪應孚)
유응부(兪應孚, ? ~ 1456년)는 조선의 무신이다. 자는 신지, 호는 벽량, 시호 충목(忠穆), 본관은 기계이다. 포천 출신.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이 모두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출처:유응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생애
일찍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448년에 첨지중추원사, 1449년에는 경원도호부사·경원절제사를 거쳐, 1452년(단종 즉위)에는 의주목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1453년에는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해 윤6월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동지중추원사를 지냈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세종 30)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1449년 경원도호부사·경원절제사, 1452년(단종 즉위년) 의주목사를 거쳐 1453년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 해 윤6월에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유응부와 성승(成勝 : 성삼문의 아버지) 등을 별운검(別雲劒 : 2품 이상의 武官이 칼을 차고서 임금 옆에서 호위하던 임시 벼슬)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왕이 운검(雲劒)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왕을 따라 연회장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하려고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공(公)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羽翼 : 보좌하는 신하)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千載一時)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말려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 때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서 급히 달려가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알리고 함께 반역을 고발해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는 세조의 국문에 그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足下 :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세조를 가리켜 부른 말)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김질을 가리킴)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하니 세조가 노해 꾸짖었다.
“너는 상왕(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핑계하고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고 한 짓이지.” 하고 즉시 무사를 시켜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서 정상(情狀)을 신문했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으며,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효성이 지극해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생활은 지극히 청렴해 벼슬이 재상급(宰相級)의 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웠고 고기 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 또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니 처자가 이를 원망했는데, 그가 죽던 날 그 아내가 울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도 남에게 의지함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고 하였다.
단종이 세조에 의해 축출되자 단종복위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처형된다. 그리하여 사육신 중 한명이 된다. 활을 잘 쏘고 학식이 깊어 세종·문종의 사랑을 받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재상급인 종2품에 이르러서도 끼니를 거를 정도로 청렴결백하였다. 무장이면서 학문에 뛰어나 절의파 학자로 알려졌고, 시조 3수가 전한다.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과천(果川)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출처: 유응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 작품
드라마
《한명회》 (KBS2, 1994년~1994년 배우: 박해상
《왕과비》 (KBS1, 1998년~1999년 배우: 최선균
《공주의 남자》 (KBS2, 2011년~2011년 배우: 이석구
박팽년(朴彭年)
박팽년(朴彭年) | |
출생 | 1417년 |
사망 | 1456년 |
국적 | 조선 |
직업 | 정치인 |
박팽년(朴彭年, 1417년 ~ 1456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학사로 활동했고, 관직은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손자 박일산이 생존하여 사육신 중 하위지가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본관은 순천으로 자(字)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생애
조선 세종 때인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보인·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과 단종을 보필하였다. 세종 말년에 신숙주, 성삼문, 윤기견, 윤회, 김종서 등과 고려사절요, 고려사의 편찬과 간행에 참여하였다.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전후해서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454년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455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그를 형조 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 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6월 2일 잡혀 갔으며, 고문 받던 중 6월7일 사망하였다.
사후
뒤에 아버지와 동생, 아들까지 사형당했으나, 사육신 중 하위지와 함께 유일하게 친후손이 존재한다. 그의 며느리이며 장남 박순(朴珣)의 아내 이씨는 사육신에 연좌되어 노비가 되었는데, 며느리 이씨와 한 여종의 기지로 그의 아들은 무사하였다 한다. 뒤에 그 아이는 박비라는 이름으로 숨어 지내다가 성종때 자수하여 성종으로부터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숙종은 그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절개를 표창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저서
《취금헌 천자문》
가족 관계
증조부 : 박원상(朴元象)
할아버지 : 박안생(朴安生)
숙부 : 박종림(朴終林)
사촌 : 박사제(朴斯梯, 경북 경주 기장으로 귀양을 갔다.)
아버지 : 박중림(朴仲林, ? - 1456년)
형님 : 박대년(朴大年,성균관 박사,? - 1456년)
동생 : 박인년(朴引年,집현전교리(校理),? - 1456년)
동생 : 박기년(朴耆年,집현전수찬(修撰),? - 1456년)
누이 : 박씨
매부 : 봉여해(奉汝諧)
장남 : 박순(朴珣, ? - 1456년 )
자부 : 이씨(李氏, ? - ?)
손자 : 박일산(朴一山, 1457년 - ?)
장녀 : 박씨
사위 : 김자무(金自茂)
차녀 : 군부인 박씨
사위 : 영풍군, 세종의 서자, 혜빈 양씨의 셋째 아들.
관련 작품
드라마
《한명회》 (KBS2, 1994년~1994년 배우: 이운우
《왕과비》 (KBS1, 1998년~2000년 배우: 김하균
《공주의 남자》 (KBS, 2011년~2011년 배우: 이용진
기타
왕조실록에 의하면 그의 형 박대년(朴大年)의 아내 윤씨(尹氏)는 해평(海平)의 거족이었다.
형수 윤씨는 진무부위(進武副尉) 윤연령(尹延齡)과 고성박씨(지합천군사를 지낸 박취신(朴就新)의 딸)의 딸[3]로, 윤근수, 윤두수의 증대고모가 된다.
또한 중종 반정을 일으킨 박원종의 조부 박기소는 그와 8촌간이었다.
이개(李塏)
이개(李塏, 1417년 ~ 1456년)는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이자 관리이며, 성삼문, 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하였다. 또한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다. 고려시대 말기의 학자 목은 이색의 증손자이다.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은 그의 종증손이고, 조선 중기의 동인, 북인의 당수 아계 이산해는 그의 종고손이 된다.
생애
1436년 문과에 급제한 후, 1441년 세종에 의해 집현전 학자가 되었다. 그해 저작랑(著作郞)으로 《명황계감》(明皇戒鑑)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집현전 학사로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했다.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하였다.
1448년 교리가 되었고, 세종의 임종에 즈음하여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들었다. 그 뒤 당상관에 승진하였다가 1450년에 문종이 왕위에 오른 뒤, 후에 단종이 된 왕자의 개인 교사 역할을 하였다. 1455년에 단종이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자, 1456년(세조 2) 이개는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되었으나 고위 관리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붙잡혀 형문을 당한 후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시문(詩文)과 글씨를 잘 지었다.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충주 노운서원(魯雲書院), 과천 민절서원(愍節書院), 의성 충렬사(忠烈祠)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의열(義烈)이었다가 뒤에 충간(忠簡)으로 시호가 개정되었다.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이 그의 종증손이고, 종고손은 동인과 북인의 당수이며 3번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와 임진왜란 때 명나라군 파병을 위해 노력하다가 과로사한 이산보이다.
가족 관계
조부 : 이종선(李種善)
조모 : 권근(權近)의 딸
아버지 : 이계주(李季疇)
어머니 : 진명례(陳明禮)의 딸
부인 : 이률(李栗)의 딸
관련 작품
드라마
《한명회》 (KBS2, 1994년~1994년 배우:김경하
《왕과비》 (KBS1, 1998년~1999년 배우:이동신
《공주의 남자》 (KBS2, 2011년~2011년 배우:엄효섭)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배우:주우)
유성원(柳誠源)
유성원(柳誠源, ?~ 1456년)은 조선의 문신이자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태초(太初), 시호는 절의(節義), 뒤에 충경(忠景)을 더하였다.
생애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사인(舍人) 유사근(柳士根)의 아들로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1477년(세종 29)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호당(湖當)에 들고,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등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호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를 겸한 뒤, 교서(敎書)를 만들어 그 훈공을 기록하려 할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했으나, 유성원만이 혼자 잡혀서 협박 끝에 정난공신의 공로를 기록하는 교서를 쓰고 집에 돌아와 통곡했다.
그 후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탄로되자 집에 돌아와 아내와 이별의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에서 칼로 자결하였다.
사후
자결을 한 후 시체는 1456년(세조 2) 6월 7일 거열형(車裂刑, 다리를 두 개의 수레에 각각 묶어 몸을 찢어 죽이던 형벌)을 당하였고, 같은 해 9월 7일에는 아내 미치(未致) 와 딸 백대(百代)는 좌승지(左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분배되었다. 1691년(숙종 17)에 복관(復官)되고, 영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1902년에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려졌다. 현재 과천의 민절사(愍節祠), 연산의 팔현서원(八賢書院), 홍주의 녹운서원(綠雲書院),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 忠烈祠),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서 제향되고 있다. 《가곡원류》에 시조 1수가 전한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유호(柳滸)
아버지 : 유사근(柳士根)
어머니 : 윤임(尹臨)의 딸
동생 : 유승순(柳承順)
아내 : 미치(未致)
딸 : 백대(百代)
김문기金文起)
김문기(金文起, 1399년 ~ 1456년)는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혹은 마암(馬巖), 본관은 김녕(金寧) 충의공파, 충청북도 옥천 출신으로 조선의 문신이며 단종의 충신 즉, 삼중신 중 한명이다. 단종에 충절을 지켰지만 남효온이 쓴 《추강집》(秋江集) 육신전(六臣傳)의 ‘육신’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육신전의 사육신은 세조실록 기사와 배치되며 선조는 육신전을 망서로 규정하였다)
현재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공원에 가묘가 설치되어 있다.
생애
김문기는 1399년(정종 초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출생, 1426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루는 동안 관직에 임명되지 않았다. 이후 예문관 검열 · 사간원 좌헌납을 거쳐 함길도 도진무(都鎭撫)에 임명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 · 병조 참의 · 형조 참판 등을 지냈다. 처음 이름은 김효기(金孝起)였으나, 장인의 이름이 효정(孝貞)이어서 문기로 고쳤다. 영의정에 추증된 김관(金觀)이 아버지이고, 그의 아들 김현석(金玄錫)은 영월군수로 재직 중 아버지와 함께 순절하였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공조판서겸삼군도진무로 있으면서 은밀히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김질,정창손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되자 김문기를 비롯하여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은 체포되었으며, 류성원은 자결하였다. 김문기는 모진 고문에도 뜻을 굽히지 않다가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상훈과 제향
1731년(영조 7) 김문기의 후손 김정구의 청으로 복관되었고, 1778년(정조 2)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정할 때 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과 함께 3중신으로 선정되었다. 김천의 섬계서원과 사육신공원의 의절사 등에 제향되었다.
또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오정각길 35에 건립된 오정각(五旌閣,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호)에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표창하여 동네에 정문을 세웠는데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의 충신 정려각, 김충주(김문기의 손자) · 김경남(김문기의 증손) · 김약전(김문기의 현손)의 효자 정려각 등 5대에 걸친 충효 정려각이 있다.
논란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절개를 지켜 죽음을 당한 6인을 가리켜 절의(節義)의‘사육신’이라고 한다. ‘사육신’이라는 말은 생육신이었던 남효온이 쓴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육신전에는 성삼문, 백팽년, 이개, 하위지, 류성원, 유응부만 등장한다. (육신전의 사육신은 세조실록 기사와 배치된다.선조실록에서 선조는 육신전을 망서로 규정하였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遺示, 벼슬을 버려 공석이 된 상부의 남긴 지시)를 끝까지 받들어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고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는 것이 논란을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세조실록에서 1456년 성삼문 · ·박팽년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그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은 확실하게 증명되기에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노량진 사육신묘에 김문기의 가묘를 꾸며 놓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찬반 양론이 벌어졌으며 신문 지상에 논설이 게재되어 논란을 만들기도 하였다.
2008년 12월 18일 국사편찬위원회는 1982년 11월 11일 합의사항[6]에서 ‘종래의 사육신 구성을 변경한 바 없음’을 확인하였고, 사육신의 구성은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류성원, 유응부의 6인으로 정의를 하였다.
가족 관계
아버지 : 김관(金觀)
부인 : 선산 김씨
아들 : 김현석(金玄錫)
손자 : 김충주(金忠柱)
저서
《백촌유사》 (白村遺事,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한 김문기의 유사를 모아 편찬한 책)
《백촌선생문집》 (白村先生文集, 김문기의 시문집으로 1928년에 후손 김연석(金淵錫) 등이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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