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은 신약의 그림자가 아니다
신학자 연쇄 인터뷰 네 번째 주인공은 기독연구원느헤미야 김근주 교수다. 김 교수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이사야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수도권에 위치한 한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학교 당국의 비리에 문제를 제기했고 파면당했다. 구약 선지자들을 연구해 온 신학자의 운명일까. 그 이후 제도 신학교로 가지 않고 대안적 신학 운동에 투신했다.
김 교수와 구약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약은 한국교회에서 빛 좋은 개살구 취급을 받는다. 한 교계 언론은 목사들의 설교 본문이 압도적으로 신약에 치우친 것은 구약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글을 실었다. 구약 본문 설교는 대부분 스토리 위주고 신학적 고찰을 찾기가 쉽지 않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복음의 의미를 축소해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구약을 충분히 알아야 하는데, 특정 교리에 치우친 복음 이해가 구약을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게 한다는 말이다.
복음과 구약. 한국교회에서 자란 입장에서, 언뜻 이 두 단어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이겠다. 이제부터라도 구약을 읽자.
11월 말, 기독연구원느헤미야 근처 카페에서 김근주 교수와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김근주 교수와 만났다. 김 교수는 <특강 예레미야>(IVP),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SFC), <구약의 숲>(대장간),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 등 여러 권의 책을 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구약에 나타난 복음
사도 바울을 비롯해 신약에서 말하는 복음은 '주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이 분명하다.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지 않았나. 반면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을 직접 하신 적은 없다. 주로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의 내용은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였다.
신학자 중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과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다르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독실한 기독교인 본연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웃음) 예수님과 바울이 말한 복음은 그 본질이 같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지금의 삶을 회개하고 다가오는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복음이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전향'이다. 예수님이 말씀한 회개는 과거의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반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세상 나라 백성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겠다는 선언이다. 사회주의자가 갑자기 자유주의자가 되거나, 그 반대 경우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달라진다. 근본적인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는 전향이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도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 말의 의미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말씀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과 바울이 말한 복음이 일치한다. 복음을 달리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알아야 복음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하나님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구약을 통해서다.
지금까지 교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구약을 오해해 왔다. 가령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제라거나, 구약은 모형이고 신약이 실체라는 설명은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만약 구약이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절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 해가 지면 사라지는 것이 그림자인데 실제를 앞에 두고 무엇 때문에 그림자에 시간을 낭비하나? 구약이 옛 약속이고 신약이 새 약속이라는 말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금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데, 특별한 취향이 아니라면 다시 폴더폰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약을 옛 약속으로 치부해 버리면 도무지 구약을 읽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는 더 바람직한 관점은 구약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언약이고 신약이 두 번째 언약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두 언약의 권위는 동등하다. 많은 사람이 구약에는 구원이 없고 신약에 와서야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이는 심각한 오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동일하게 일어났다.
구약시대에는 동물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이 일어났고 신약시대에는 동물 제사 대신 예수의 피를 근거 삼아 죄 사함이 일어난다고 가르치는 교회가 많다. 인간이 져야 할 죗값을 동물이 대신 지고 죽는다는 논리는 제사의 의미, 십자가의 의미를 축소한다. 상식적으로 하나님이 동물의 피를 근거로 인간을 용서하신다는 말이 이상하지 않은가. 구약의 제사는 상징으로 봐야 한다. 인간의 죄가 정말로 동물에게 전가되어 인간이 져야 할 죗값이 대속되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 여러 제사가 있다. 특별히 속죄제는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다. 그런데 성경은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다른 제물 기준을 제시한다. 부자는 소, 그 다음은 염소, 양, 비둘기로 내려간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은 곡식 가루를 드리게 했다. 곡식 가루에는 피가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죄 사함이 인간이 드리는 제물 내용과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피를 흘려야만 속죄가 가능했다는 가르침은 제사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고 예물을 드리는 것은 인간이 본래 치렀어야 할 죗값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내가 뭔가를 바쳤으니 죄를 용서해 주실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가 아닐 수 없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전적인 하나님 은혜로만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 신분이 무엇이든, 재물이 얼마나 있든 상관없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전적인 하나님 은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장면에서 이 원칙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사야 53장이 그리는 대속적 구원의 의미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것은 구약, 신학 모두 증거하는 대속적 구원의 본질이다. 지금까지 강조되어 왔던 형벌적 대속론, 즉 우리가 져야 할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가 실질적으로 대신 받았다는 식의 설명은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불완전한 개념이다. 특별히 원죄와 결합되어 인간의 책임을 면제하는 논리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다.
백성이 벌받는 것을 불쌍히 여긴 왕이 죄와 무관한 아들에게 대신 벌을 내리고 백성의 죄를 사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납득이 가는가? 이러한 구원 이해는 성도를 죄책감으로 속박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그분을 너무 기괴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
보통 이사야 53장을 근거로 대속적 구원 원리를 이야기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을 성경의 맥락과 상관없이 수학 공식처럼 이해하는 분이 많다. 이 말씀을 기록한 이사야가 살았던 시대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많은 선지자가 이러한 삶을 살았다. 특별히 예레미야는 사역 기간 중 마지막 10년 동안 아무 이유 없이 숱한 고난을 받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겪을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사야가 말하듯 이스라엘 민족 대신 받는 고난이기도 하다. 선지자들의 삶이 대체로 그러했다.
이러한 대속적 삶이 예수님을 통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셨듯이 선지자의 전통 위에 서신 분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할 때 "내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다"는 고백만큼이나 "우리도 그 본을 따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야 한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주님처럼 민족이 당할 고난을 먼저 당하고, 대신 당하는 존재로 부름받았다는 의미다.
베드로전서 저자는 이사야 53장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설명하기 전에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장 21절)라고 한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단순히 '내 죗값이 사라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빈약한 이해다. 이사야서 53장의 대속적 고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어야 할 말씀이다.
이사야서에는 53장의 대속 메시지를 비롯하여 네 가지 종의 노래가 나온다. 이 네 노래 모두 예수님과 관련이 되어 있다. 또한 이사야서 53장에 대한 베드로전서 해석과 같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교리적으로만 구약에 접근하다 보니 자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신앙이 머물러 있다. 예수님께만 십자가를 지우고 우리는 그 밑에서 기도나 하는 것이 신앙일 수 없다.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
전적 타락이 아닌 인간에 대한 기대
형벌적 대속 교리와 더불어 구약을 오해하게 만드는 또 다른 교리는 인간의 전적 타락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의에 대해 무능하다는 바울의 고백을 면죄부로 사용하고 있다. 특별히 사회제도의 부조리를 고치려는 노력을 폄하하는 데 인간의 죄성, 혹은 원죄가 동원된다. 인간의 전적 타락을 잘못 해석했을 때 교회가 얼마나 파렴치한 집단으로 변절할 수 있는지 수없이 봐 왔다. 인간이 악해서 생겨나는 부조리를 마땅히 고쳐야 함에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모든 문제를 죄 탓, 마귀 탓으로 돌리는 태도는 비성경적이다.
구약성경은 단 한 번도 아담과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범죄가 끊이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은 계속 선지자를 보내셔서 돌아설 것을 촉구하신다. 예언자를 보내셔서 돌아서라고 요구하시는 것에서 인간에 대한 주님의 기대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예언자 중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드러낸 경우도 있다.
예레미야는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예레미야 13:23)라는 강한 반어법으로 인간에 대한 절망을 표현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평생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결국 돌아서지 않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지만, 그 다음에 이루어질 영광의 날들에 대한 기대로 마무리한다. 이 모든 과정이 인간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를 보여 준다. 애초에 회개가 불가능한 존재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의 무능과 불의를 우리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돌아설 것을 호소하신다. 그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우리가 애초에 죄로 물든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체념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우리의 무능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 무능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면서도 이렇게 기대하시고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날 부르시니 뜻이 있겠구나'라고 응답하는 게 옳다. 그렇게 한 걸음을 나아가면 변화가 일어난다. 나의 가능성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나아갈 때 5년,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신앙이다. 구약은 철저히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이야기한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 곡식 가루를 보고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구약이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이야기한다고 강조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김근주 교수의 설명은 많은 질문을 해결한다. 마가복음 1장 15절은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기록한다.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은 뭐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복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김근주 교수에 의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의 내용은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 전체이고 그것은 곧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나라'다.
구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복음에 대한 이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읽었던 유일한 성경은 구약이었고, 구약 이해를 바탕으로 신약을 썼기 때문이다. 당연히 구약을 알아야 신학을 이해할 수 있다. 더 깊은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인터뷰 2부에서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나라를 조금 더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