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늠
침묵의 구간이 없는 문장은 깊이가 없다죠
먼 곳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마찬가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은 거기의 당신과
여기의 나 사이
갑골의 시간을 가늠해보는 발자국
나를 키운 너의 틈
세상 모든 틈은 생명의 출구
하늘이 무너졌을 때
솟아날 구멍이 되어 주었던 틈
나를 키운 건 너의 틈이었다
허공족
외줄 한 가닥 가지고 태어났다
공중을 딛고 사는 일은 줄을 가진 자의 숙명일까
발끝 아래 세상은 늘 위태로웠다
날마다 그물의 평수를 늘려봐도 걸리는 건 바람뿐
가끔 걸린 불가사리 같은 별들로 끼니를 때우며
분절된 시간을 잇고 이었다
발끝이 어둠에 가 닿는 저녁
중력을 거슬러 지상에 발을 디디면
탑을 쌓던 세상도 잠시 높이를 내려놓는다
스티그마
꽃의 시간을
왜 버려야 하는지 묻지 말길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걸 잊지 말길
죽어도 죽지 않는 생
감꽃 지는 날엔 홀로 사무치길
눈다람쥐
도토리는 어디에 있을까
정오가 되기 전에
겨울 숲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나무의 주름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겠어
얼마나 많은 바람을 달고 살아왔는지
툭, 누군가 던진 돌덩이 가슴에 안고
파랑 치는 물살을 건너왔는지
빨래하는 날
허리 펼 날 없이 살던 어머니
야윈 늑골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 들린다
질척이는 생의 구간을 건너 오는 동안
가랑이에 들러붙은 뻘들
밀물이 밀려와 반나절 문지르고 나니
쪽빛으로 거듭난 파도의 푸른 천
김휼 시인
본명 김형미
2007년 기독공보 신춘문예
2017년 열린시학 등단
백교문학상, 여수해양문학상, 윤동주 문학상,
열린시학상, 목포문학상 본상 수상
2021년 광주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 『 그곳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