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taph에 새겨진 시인의 초상
강서일(시인)
홍신선시집『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
홍신선 시인의 신작 시집『가을 근방 가재골』은 시인이 귀농 후“일철
돌아오며 빈 전가(田家)에서/ 이 낙화 세상을 만났으니 나는 홀로 나를
만나/ 벚나무 몸 안의 범람하는 강물 소리를 진종일 듣”고「( 이 낙화 세
상을 만났으니」) 들으며, 지난 5년 가까이 썼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엮은 것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 시집의 작품들은 주로 관조와 침잠
의 이미지가 주류를 이룰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말랑해
보이는 표피와는 달리, 각각의 시편들이 품고 있는 속 내용은 자신의 삶
과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가득하여 그 깊고 넓은 아우라가 눈부시
다. 그것은 번잡한 도시를 떠난 후“시와 농사가 하나라고”「( 도시농부」)
믿는 시인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갖가지 자연현상들을 무슨 경전처
럼 받들고 읽”으면서,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지닌 의미와 값을”(시인의
말) 누구보다 치열하게 새겨보려는 까닭이다.
지하 갱 속 대오 잘 갖춘 병마용들처럼
창검을 빗겨 든 풀들이 뚫고 올라온다.
일진이 무너지면 이진이, 다시 삼진이…
계속 올라와 구몰한다.
내 호미 날 일합(一合)에
어깨 어슷 잘린 놈도
혹 실날같은 뿌리 하나 흙 틈에 붙어 있으면
그 자리서 외레 더 꼿꼿이 일어선다,
함지박만 한 하늘,
저를 점지한 하늘을 머리 위 떠메 이고.
외경하노니 이 지구의 낭심을 움켜잡고 한사코 놓지 않는
병마용들의 저 동물적 맹목의 생명력들을.
나는 오늘도 호미 끝으로
풀들의 대장경을 한 대문(大文) 한 대문 파헤치며 읽는다.
—「터앝을 읽다」전문
‘터앝’은 집의 울안에 있는 작은 밭이다. 시인은 그 밭에서 자생하는
풀들과 일전을 벌인다. 그러다 문득 쳐내고 쳐내도 끊임없이 번식하는
저들의“동물적 맹목의 생명력들을”경외하며, 그들을 마침내 (영생불사
를 꿈꾸었던 진시황을 2천년 이상 지켜온) 병마용에 빗댄다. 이 작품의
백미는“나는 오늘도 호미 끝으로/ 풀들의 대장경을 한 대문(大文) 한 대
문 파헤치며 읽는다.”는 마지막 연이다. 오호, ‘풀의 대장경’이라! 그리
고 풀 한포기 한포기마다 거기에 실린 대문을 읽어내는 시인의 공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농사의 기본인 김매기를 통하여 시인이 느끼는 바는 여러 가지겠지만,
한두 가지만 꼽으라면 아마 다음과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어쩔 수 없이
예초기를 들어 풀들을 제거하면서도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왜
냐하면 이 세상 두두물물이 모두 저마다의 존재이유가 있고“살고자 점
지된 목숨”들「( 호모사피엔스」)인데, 유정한 그것들을 편의에 따라 무작
정 없애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하여 무릇 죄 없는 목숨들까지 애먼 희생을 같이 강요당하
고 있으니 말이다. 그 결과“강한 풀내음 속에는 시산혈해를 이룬/ 허벅
지 잘린 방아깨비, 더듬이 뭉개진 사마귀,/ 또 무언가의 떨어진 귀때기
들.”「( 죄의 빛깔」)을 목도하면서 시인은 스스로 자문한다,“ 이 도륙의 죄
는 무슨 빛깔일까”라고. 그리하여“그동안 먹었던 과일 하나도/ 실은 얼
마나 숱한 다른 도사리들의 희생과 헌납이/ 깊이 떠받들어진 것이었는
지”「( 열매를 솎으며」)와 같은 깊은 성찰에 이르게 된다. 그 배경에는 언
어도단의 불교적 사유와 시인의 오래된 사랑이 숨어 있다. 따라서 이 작
품은 단순한 김매기의 행위만을 묘사하는 것은 아니고, 연기설을 망각
한 이 세상에서 횡행하고 있는 제 현상에 대한 강한 은유이며 또 다른
알레고리로 읽힐 수도 있겠다.
끝으로 시집에 실린 여러 명편들을 이 자리에서 다 언급할 수는 없으
니, 마지막으로 시집 맨 끝에 실려 있는 작품 하나만 더 살펴보자.
여기 시(詩)의 나그네였던 한 사람 잠들어 있다.
왼 인생 말 뒤꽁무니만 따라다녔던 외길 한 가닥의 긴 행로를 접고
뒷날에 묻는 뭇 시편들 남겨두고
세상에서 내려와 총총히 더 먼 시간 속으로 돌아간
시의 길손 한 사람 여기 쉬고 있다.
—「Epitaph」전문
한 갑자 동안 실존론적 고민과 함께 시를 써온 시인의 과거-현재-미
래가 이 한 편의 묘비명에 다 녹아 있다. 시인은 과거에도 시(詩)의 나그
네였고, 현재도 시의 길손이며, 미래의 그 어느 날 자신처럼“해탈한 낙
과들 편안하게 뒹굴고 있”을「( 낙과를 보며」) 그날까지, 시의 사도로 외
길을 걸어갈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만천하
에 공개하며 새삼 다짐하는 것이리라. 시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는 어떠
해야 하는지, 시 속에 스며든 우리 삶의 강물은 다양한 변주를 일으키며
어떤 양태로 흘러가는지를, 시인은 이 시집에서 여러 방식으로 보여주
고 있다. 오늘을 사는 독자 여러분에게 일독을 권하며, 이 짧은 글을 마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