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레이스키와 사할린동포들의 고혼을 위로하며 | ||
| ||
언젠가 기회가 되면 사할린을 찾아가서 사할린 억류동포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었던 나는 ‘사할린’이란 문구에 가슴에서 슬픔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 ||
| ||
역사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다 보니 최근에 낸 책들 중에서 과거 우리민족이 수난을 당했던 소재를 찾아 쓴 장편들이 몇 권이 있다.
2009년 출간된 청소년소설 <에네껜 아이들>은 1904년 일본인 ‘다시노가니찌’가 벌인 사기극으로 낯선 땅 멕시코까지 가서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조선소년들의 이야기이다. | ||
(당시 까레이스키 17만여명을 태웠던 ‘라즈돌로예 역의 현재 모습 ) | ||
<2012년 9월 라즈돌로예 역사 앞에 선 필자> | ||
까레이스키들은 겨울 시베리아를 달리는 동안 열차 안에서 4만여 명이 추위와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야 했고, 이주지에 도착한 후에도 풍토병과 굶주림으로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했다. | ||
(까레이스키들의 강제이주 경로) | ||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에 있는 까레이스키들의 최초 정착지를 알리는 기념비) | ||
까레이스키들은 스탈린 통치하에서 일본인들의 스파이란 누명을 쓴 채, 강제이주를 당한 후에도 적성민족이란 꼬리표를 달고 부자유스럽게 살아야 했다. 그 후 이들은 소련이 붕괴되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독립할 때까지 조국을 그리며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했다.
까레이스키의 시련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중앙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이 독립국이 되었다. 국적이 없는 까레이스키들은 독립국에서 실시하는 자국민우선정책으로 언어도 러시어가 아닌 고유의 민족어를 쓰는 바람에 또 다시 오갈 데 없는 이방인으로 밀려나야 했다. 독립국의 고유언어는 까레이스키들이 하루아침에 습득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피땀으로 일군 터전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빈손으로 연해주로 재이주를 한 까레이스키들은 국적이 없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까지 누리지 못하고 있다. 뒤늦게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 어렵게 러시아 국적을 얻고 있지만 이들의 진정한 바람은 대한민국의 국적을 회복하는 것이다.
과거 일본과 소련의 정치적 틈바구니에서 조국과 단절된 채 낯선 땅에 억류되어 고통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 또 있는데, 이들이 바로 사할린에 강제동원 되었던 조선인들이다. 사할린은 1905년에 러.일 강화조약을 통해 러시아가 남사할린을 일본에 양도하면서 당시 약소국이었던 우리민족의 수난이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1919년 조선인 광부 500명을 시작으로 1939년부터 1943년까지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남사할린에 조선인 남자 1만 6113명을 강제동원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탄광에서 석탄을 캐고 원시림에서 벌목을 했다. 일본은 이후 탄광노동자 가족 일부를 사할린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1944년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남사할린을 점령하게 되었다. 사할린 전체가 소련영토가 되고 조선인의 비극은 더 가중되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을 맞았는데도 사할린이 소련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조선인은 사할린에 억류되어 조국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직후 1946년 미.소 귀환협정으로 사할린에 살던 일본인 29만여 명이 일본으로 귀환했지만, 조선인은 일본인이 아니라고 송환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1956년부터 59년까지 일.소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일본은 일본인과 결혼한 조선인 가족 2300여명을 일본으로 귀환시켰지만, 억류상태로 남은 조선인들은 1990년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되기 전까지 무국적자 상태로 발이 묶여 조국을 그리며 살아야 했다.
해방된 대한민국은 사할린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돌아 볼 힘이 없었고, 일본은 자기들이 강제로 데려다 일을 시킨 조선인들을 전쟁이 끝나자 사할린에 팽개쳐 버린 것이다. 당시 사할린에서 일했던 조선인들은 매달 60엔에서 70엔 정도의 임금을 받았고, 식대로 10엔을 뗀 나머지 50엔을 사할린에 있는 일본우체국에 꼬박꼬박 저축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정부에서 강제동원되었던 사람들에게 지급할 위로금을 산정하면서 당시의 1엔을 지금의 우리 돈 2000원으로 환산해서 지급하고 있는데 이에 준하면 매월 100만원씩 저축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액수도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대체로 수천만 원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이 돈 조차 돌려주지 않고 있다. 해방이 되었어도 조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조선인들은 태평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코르사코프시 언덕에서 자신들을 데리러 올 배가 나타나기를 마냥 기다리다가, 끝내 배가 나타나지 않아 절망을 하고 바다에 몸을 던진 사람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조선인들은 소련과 북한이 같은 체제라서 북한 국적을 얻으면 쉽게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고 북한 국적을 얻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북한 국적을 포기하고 끝까지 무국적으로 남은 사람들이 많았다. 1990년 이전까지 조국으로 돌아올 꿈을 포기하지 않고 무국적 상태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조선인이 무려 5000여명이 넘었다고 하니 이들의 억울함은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일제강점시대에 강제동원된 사람들에게 지급하는 위로금조차 한국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해방 후 1946년에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의 수가 43,000여명으로 집게 되었다.
이들 중 7명이 1990년 한.러 수교가 된 후 개인적인 노력으로 영주귀국을 했고, 그 후 2012년까지 6,008명이 조국으로 돌아와 전국 20여개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조국으로 돌아온 이들도 사할린에 남아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디아스포라로 인한 고통을 껴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있다. 사할린에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조국을 그리다 낯선 땅에 묻혀 이미 백골이 되었다.
이제라도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고 간 일본의 기업들에게 책임을 지워 사할린 에 묻힌 조선인들의 유골을 찾아내서 조국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왜 우리 민족은 과거 곳곳에서 뼈아픈 시련을 많이 당해야 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나약한 조국을 두었던 때문이다. 우리정부가 이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줘야 하고, 외교채널을 적극 활용해서 일본의 관심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으로부터 사죄를 받아내야 할 것이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2012년 말로 업무를 종료하려다 6개월이 연장되었다 하는데, 앞으로 이 기구를 존속하여 강제동원희생자와 유족들의 억울함을 국가가 앞장서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