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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동: 재산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ropriété? ou Recherche sur le principe du Droit et du Gouvernement, 1840),
P. Ansart,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 2031-2032. (P.2190.)
- 해제: 앙사르(Pierre Ansart, 1922-2016) 파리 7대학 교수, 철학과 사회학의 연관 연구.
-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 프랑스의 상호주의 철학자, 언론인. 프루동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 한다. 재산이란 무엇인가?(1840),로만가톨릭교회를 비판한 혁명과 교회의 정의론(1858)
* 원과 구의 중심에서 원주 또는 공의 표면을 원자들의 모임으로 간주한다면, 각 점들 또는 원자들은 자기 완결성으로서 이루어져 있고 또한 각각은 방향(경향)이 모두 다르지만, 하나의 중심에서 퍼져나간 방향(힘의 계열)이며, 이 각각의 점들의 집합이 원 또는 공(구球)이다. 퍼져나간 각각의 점들에서 추론하건데, 중심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것들의 복합체로서 다양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중심이 하나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수학적 추론의 귀결일 것이다. 좌표 상에서 점과 원을 그려보면, 높이가 없고 길이만 있는 반지름(좌표상의 x축)의 삼각형이고, 길이가 없이 높이만 있는 반지름(좌표상의 y축)도 삼각형이며, 높이도 길이도 없는 점(촛점)도 삼각형이다. 둥글다는 경우에 외부로서 추론의 한계가 원주 또는 공의 표면인데 비해, 내부로서 한계가 점이다. 점과 구주(원주) 사이에 무수히 많은 원을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무수히 많은 동심원이 성립한다. - 단순 추론에서 현존은 점과 무한 둘레라는 두 극한 사이이다. 그러나 존재론에서 존재는 둘레의 점들이며 또한 내부의 초점의 점이다. 이 두 점이라는 용어가 전혀 다름에도 점으로 쓰인다.
원의 아름다움에 취한 그리스인들이 우선 하늘의 원(구)의 완전함에 비추어 내부의 한계에 이르는 무수한 동심원들도 외부 한계의 원과 동일한 성질을 갖는다는 추론에서 인생사에 비춰보았을 것이다. 플라톤의 영원과 시간의 관계는 이런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원주 또는 구주의 무수히 많은 점들이, - 마치 천구의 무수히 많은 별들처럼 – 각각이 자기의 성질을 갖고 조화롭게 운행하여 매번 동일한 자리에 되돌아오는 동일반복의 각각의 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데 감탄했으리라. 그 각각을 플라톤은 이데아들의 다수성으로 간주하고 다수성의 조화 – 피타고라스의 음악의 조화를 하늘의 조화에 빗댄 것처럼 – 각각의 고유성으로서 조화를 그리스 폴리스들의 각각의 고유성을 지닌 조화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 아름답고 완전하며 불멸성 같은 하늘의 세계가 아니라, 지상의 세계는 덧없고 항상성도 없으며 변화하고 소멸한다. 이 절대적 대립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려 했을까? 고대는 우선 상층이 완전하니 진실이고,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바탕은 종잡을 수 없으니 가상으로 여기는 것이 편했다. 고대를 이어서 중세에는 당연히 현실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고, 내세의 삶을 강조하기 위해 하늘의 완전을 천국으로 추론하는 것도 당연하였으리라. 그럼에도 허상과 같은 삶의 기간, 즉 일생이 짧다고만 할 수 없는 기간이다. 이 기간의 삶을 즐겁고 유쾌하게 사는 방법도 있을 것 같은데, 왜 하늘나라에 가서 사는 것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독단이 아닐까? 그렇다고 반박할 수 없는 동일성에 대해 저항 또는 봉기한다는 것은 곧 죽음 또는 마녀사냥으로 사라진다는 것도 백성들은 알고 있었다. 그냥 백성들은 터전(영토)위에서 일생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 일생 동안에 작은 신체적 아픔이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때의 외로움, 즉 고통과 고독은 타인이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기에 하소연으로 저넘어에 빌기도 하지만, 그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평생이 되돌릴 수 없다는 불가역성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생을 거의 같이 지나가는 세대들 사이에서, 꼭 필요한 것은 있다. 숙명적으로 태어나서 산다는 것이기에, 어느 길을 선택하는 운명과 달리, 중생들은 서로를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품앗이, 상부상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뭐라고 짝짓기가 중요하다고. - 그 문제를 제기하는 쪽은 이미 제도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짝짓기는 남녀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차원의 즉 n-1 차원의 공동체 방식이 있다. 지금도 다양한 방식으로 2인 이상이 삶의 영역을 만들고 있다.
태어나서 산다, 그 태어남에서도 산다는 것에서도 함께 노력한다는 것이 생명 유지의 필수적이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혼자서 되는 일은 없다. 사실, 사건, 제도, 체계 등은 많은 관계들과 직접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연관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 사람의 일생도 관계, 연관 또는 연결방식들에 의해 살아간다. 그 삶의 과정에서 작은 노력이든 큰 노력이든 삶의 계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계열에서 생산이 있어서 소모하면서 살아간다. 이 계열들의 활동을 분할하여 분업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분할의 방식과 더불어 생성과 생산의 차이를 인류를 오랜 과정에서 습관적으로 알아챘다. 그 계열 노력들의 함심은 개별의의 하나 더하기 하나의 계산과는 전혀 다른 생산, 즉 잉여생산이 있다는 것은 인간들은 알아챘다. 잉여는 당연히 힘 센 자가 가져갔을 것이고, 족장 부족장, 참주, 황제를 생겨나게 했을 것이다.
증기기관과 원동기(모터)의 발명으로 가장 힘센 자라는 개념 또는 구체적 대상이 없어졌다. 조직화에 따른 합의에서 힘센 방식이 등장한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두 힘센자, 종교와 국가의 우두머리를 제거하면서,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계약, 제헌 헌법을 만든다.
과정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 간다. 인민들의 의사의 수렴은 생산물들에 의해 의식의 변화만큼이나 빨리 변한다. 이 모든 제도적 집단의 생산물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노력하여 관여하는, 즉 생산에 노동을 실행하는 더 나아가 생산의 전 과정에서 노동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생각을 토지위에서가 아니라, 공업생산으로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아담스미스가 생각했을까? 설명하기 편하니깐. 그러나 그 잉여는 어디로 갔는가? 힘센 자, 권위있는 자, 권력있는 자에게 가는가?
*** 기나긴 인류역사에서 속도만큼이나 분화의 길을 걷는다. - [마차, 자동차, 비행기, 우주선만큼이나 전령, 마파발, 봉수대, 전신, 전화, 휴대폰, 스마트폰 등의 생산 속도.] - 기계적 생산의 상품과 화폐로 가치의 환원과 토지 생산에서 생산물과 그 가치의 분배는 전혀 다른 계열로서 “차히”가 있다. 전자의 소통에서 화폐의 유통이 있다면, 후자에서 소통에서 생산물의 소비-재생산의 순환이 개입되어 있다. 전자에서 차이는 소비-재생산이 아니라, 자본-재자본으로 환원되는 수학적이고 공간화된 계속이 있는데 비해, 후자에서는 소비-재생산은 삶의 단위(일년이든 평생이든)의 흐름이 있다. 자본의 재자본은 보다 큰 동심원으로 추상하며 확대되어 가는데 비해, 삶의 단위는 삶다가 늙고 떠난다는 과정이 있다. 전자에서는 인간이 없다는 점에서 비인격적인데 비해 후자에서는 인격적이다.
사람들은 그 비인격을 재산 상속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에게 법률적으로 물려준다고 한다. 삶을 물려주지는 못한다. 다음 세대, 아제인간은 새로운 삶을 영위한다. 그 삶의 과정과 단위는 그 흐름에서 동일하지도 동일 확대 재생산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동일재생산에 매이고 있는 것은 종교가 그렇게 해온 것이 오래되어 관습에 붙에 있기 때문이다. 그 관습, 이루어진 사실들에, 경계를 그은 인과론에 진위를 규정하며 협력하는(포로된) 지식인들이 그 기능을 한다. 현집단의 구호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라고 하는 것도, 페라스 안에서는 규정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주지주의자들의 견해일 뿐이다. 그 주지주의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인공지능(AI)인데, 이들의 표현으로 “머리를 빌리면 된다”는 것이다. 왜 AI의 작업이 인간의 두뇌를 모방하고, 나아가 신체를 모방하려고 하는 지 생각해보라. 법대로, 머리대로, 그 신체대로 중생을 데카르트이래로 계몽기 프랑스의 소박한 유물론자들의 “동물기계론”에서 답을 찾으려는 오만이며, 제국의 탐진치에 마름의 기능을 지성주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3:10, 55R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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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루동: 재산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ropriété? ou Recherche sur le principe du Droit et du Gouvernement, 1840),
왜냐하면 가치들이란 노동에 의해서만, 즉 개인들의 노력들이 “집단적 힘”으로 통합에 의해만 생산되기 때문에, 자본들의 소유자는 자기 이익(bénéfice)을 단지 가치들로부터 - 가치들을 생산했던 자들에게 합법적으로 되돌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 유보하고 훔치면서(도적질하면서) 끌어낸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단지 그들의 노동력을 유지하는데 해당하는 봉급을 제공한다. 자본가는 노동의 조직화로부터 생겨나는 집단적 힘을 독차지 한다(전유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익들의 독차지(l’appropriation, 전유)는 도둑질(un vol)로 간주되어야 한다.
가치의 기원에 관한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의 주제를 급진화한 이런 분석으로부터, 프루동(Proudhon, 1809-1865)은 재산에 대한 합법적인 이론들에 대해 -자연법의 전통적 학설들 또는 사회계약에 의한 정당화 방식들의 중요성에 대해 - 체계적인 비판을 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가치들이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는 것을 인정할 때부터, 사람들은 가치들의 독차지는 불법이라고 결론을 내야만 했고, 이는 마치 소유자들과 무산자들 사이에 사회적 분할이 불법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집합적 가치의 이익을 가져가야할 소유자도 무산자도 없다. 그러므로 공적이익은 사회시설과 복지에 투자되어야 한다.]
따라서 재산[사적소유]이란 “불가능”하다.재산은 계급들 간의 전쟁과 사회적 폭력을 필연적으로 생성하게 한다. 정의를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이 좋다. 유일한 노동 위에 “정의의 관념”을 규정하는 것, 이것은 재산 고발의 목표이다.
맑스(Karl Marx, 1818-1883)는 이 원문에 대해 신성가족(La Sainte Famille (1844/45)(엥겔스와 공저)에서 찬사를 보냈다. 왜냐하면 프루동이 처음으로 정치경제학을 진실한 학문으로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루동이 어떠한 결론을 공산주의로 내리지 못하였다. 그는 반대로 경고했다. 자신의 비판은 자본에 의한 착취에 관한 것이지, 재화(un bien)로부터 이익이나 “횡재”(une aubaine)를 끌어내지 않고 재화를 유지하는 단순한 사실일 뿐인 “소유(possession)”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라 한다.
(55R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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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3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 철학자, 경제학자. 글라스고 대학 도덕 철학 교수. 흄의 영향을 받았다.
1809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 가난하여 독학했다. 프랑스의 상호주의 철학자, 언론인. 프루동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 한다. 1858년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혁명과 교회의 정의론, 재산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ropriété? ou Recherche sur le principe du Droit et du Gouvernement, 1840),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독일 철학자, 역사가, 경제학자, 기자, 혁명이론가. 공산주의자.
1820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 철학자, 인류학자,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가.
* 국내학자.
이용재(李鎔在, 1960-) 서울대. 전북대교수 <Syndicalisme de metier et Syndicalisme d'industrie: les ouvriers du batiments 1880-1914(직능 노조주의와 산업 노조주의-프랑스 건설노동자 노동조합의 이념과 활동 1880-1914), 1998, 파리1대학, JEAN LOUIS ROBERT.>, “1968년 5월운동과 지식인의 앙가주망: 레몽 아롱과 ‘알 수 없는 혁명’”- 2018, 프랑스사 연구, 한국프랑스사학회. “`도둑질`인가 `자유`인가: P. J. 프루동의 소유 이론에 대한 고찰”, 2006, 전북사학.
- 레이몽 아롱(Raymond Claude Ferdinand Aron, 1905-1983) 유태계,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 역사가. 사르트르와 니잔과 ENS 동기(교수자격, 1928년 1등). 그는 당시(1968-1972) 라디오 <유럽1>의 편집장이었다. 찾을 수 없는 혁명: 1968 5월 사건들의 반성들(La Révolution introuvable. Réflexions sur les événements de mai, 1968)]
(3:17, 55RLH) (4:27, 55R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