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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부는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계룡산하면 동학사, 갑사, 신원사를 떠올리게 되고 산행길로 천황봉을 자주 거론하면서 정감록을 포함한 종교적인 신비감을 가지고 있는 산으로만 알고 있으면서 왜 수천년 동안 우리선조와 우리가 그토록 열망해 왔는지를 알지를 못한다.
사실 알려고 하는 노력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올바른 것 같은데 신도안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면 어느 누구도 선뜻 대답을 못한다. 하물며 신도안이라는 지명조차 남아있지 않으니(최근에서야 남선면을 신도안면으로 개칭하고 있으니) 현재의 삼군본부가 위치한 계룡시가 신도안이라고 하면 그 낯설음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이 참 많다.
신도안은 계룡산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그 유명한 암용추, 숫용추, 조선초 왕궁터, 삼신당, 그리고 신도안 종교집성촌이 위치했던 지역이다. 숫용추에는 대통령의 별장이, 왕궁터 옆에는 삼군본부인 계룡대본부가 위치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예나 저나 그 중요성은 계속되어 오는 지역이 아닐는지.
그리고 이지역이 우리의 역사의 주무대로 정신문화의 창출지로 기록되고 있으니 백제의 계백과 신라의 관창의 무대인 관동벌, 그 유적으로 계백장군의 묘소가 남아있고, 백제군사박물관이 지어져 있다. 왕건과 견훤의 아들 신검의 최후대결장으로 고려를 세운 왕건의 영정과 개태사, 개태사를 중심으로 한 정여립,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총지휘를 하신 분 수기화상, 수기화상은 이러한 작업의 여정을 일일이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 30권이다. 그렇다면 수기스님이 계신 개태사는 이미 고려조에서 경판을 만드는 기술이 많이 축척되어 있는 절이었을 것 같다.
주역의 3대 고수이신 김일부, 탄허스님, 야산 이달 그리고 제자 김석진옹, 소태산 박중빈과 원불교 그리고 삼동원, 조선성리학의 중심지 김장생과 그의 제자인 송시열, 그리고 기호학파의 중심 거점지, 김대건신부와 나바위성당이 그 면면이다.
이쯤되면 한 시대를 풍미한 정신문화의 요람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중에서 조선말 이후 우리의 정신세계를 이끌어오고 있는 후천개벽과 상생의 발생지인 김일부 선생과 그 유적지 향적산방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해 보자.
계룡산에 들어서기 위하여 입구를 지키는 관문에 위치한 향적산방을 찾아가는 길은 국사봉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금은 새로 도로를 잘 뚫어 놔서 다니기는 편하나 예전 만 못하다. 예전의 계곡을 잘 살리는 형태로 했으면 좋으련만 여기도 계곡을 죽이는 기술은 어찌하겠는가. 우리나라는 요사이 무엇이든지 죽이는 기술이 많이 발전하고 있다.
이곳 향적산방이 위치한 지역은 향한리라고 불리우는데 향한리香汗里는 향기로울 향香과 땀 한汗이 어울려져 향적산과 향한면의 이름을 따서 불리었다한다.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라는 뜻이 아닌가? 공부하고 도 닦는데 열중하는 사람들의 땀의 쌓여 있는 산이라고도 하고 계룡산향기가 가장 많이 나는 산이라 불리우게 된 향적산에는 조선초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할 때 친히 올라 국사를 논했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국사봉이 있는바 아담하고 등산하기가 편해 많은 분들이 산행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그 유명한 ‘무상사’가 있다. 한국불교의 해외포교에 앞서온 숭산선사가 전 세계의 모든 불자들이 와서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국제선원을 계룡산에 세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터를 찾던 중 현재의 무상사 자리가 이 산의 주봉으로부터 내려오는 기의 중심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선택하였다는 곳이다.
국사봉은 계룡산과 대둔산의 중심에서 계룡산에 들어가는 관문역할을 해오는 산으로 바로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던 곳이 아닌가?
이 절에는 외국인 도반들이 참 많이 보인다. 가끔 산행 길에 나설 때면 마주치는데 마음의 안정을 구하고자 고국을 떠나 머나먼 외국에서 이것까지 와서 수행을 하는 것을 보면 경외로움이 앞선다.
얻고자 보고자 하는 것이 마음인데 이들이 찾아가는 것은 무엇인지, ‘남이 장에 가니까 거름지고 나서’는 세상에, 강남에 가서 살지 못해서, 미국사람이 못되어 안달 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세상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에 숙연해진다.
이 절에 TV 다규멘터리 ‘만행’으로 널리 알려진 벽안의 선승이 있으니,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진리를 찾아 정진해면서,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내놓은 그 현각 스님이 있으셨고 지금도 외국인스님들이 용맹정진하고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종교를 뛰어 넘어 가정과 명문대학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숭산선사를 만나는 과정을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리오.
더구나 내가 잘 아는 건축사 정연배는 - 이분은 거꾸로 캐나다로 꿈을 캐러 갔다. - 이 절의 건축비문제로 딴소리를 하고 있으니 ‘도道가 돈’이라는 세상 이치가 알듯 말듯 알쏭달쏭해지면서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거북바위와 귀룡정사에 들기 전 우측 야산을 지나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그곳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한숨을 돌리고 언덕 하나를 넘으면 집 몇 채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요사이 자유롭게 쓰고 있는 후천개벽, 상생의 미래를 예지한 정역의 완성자 김일부 선생이 공부해온 향적산방이 있는 곳이다.
김일부는 호로 본명이 김항金恒이다. 1826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당골에서 태어났다.
그러고 보면 이 일대의 광산김씨 가문에서는 자랑할 만한 인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조선유학의 제도권 거두로 조선중기 이후 송시열 등을 가르친 스승으로서 국가의 존망을 좌우지했던 김장생, 김집 부자父子 그리고 재야 거두로 김일부 선생이 있었다.
김장생, 김집부자는 기호학파의 영수로서 예학을 중심으로 커다란 유학의 기둥을 완성하신 분들이고 특히 김일부 선생은 정역을 완성하여 이분이 돌아가시자 영남지역에서 내노라 하는 유생들은 천리가 멀다 않고 문상했다고 하며, 전라도 진안지회鎭安支會에서는 김일부를 성인으로 추앙했던 찬양문讚揚文이 있을 정도이니 위대한 인물들을 배출한 저력은 무엇일까?
김일부는 젊어서 옛 조선의 선비집안이 그랬듯이 성리학과 예학에 빠졌으나 훌륭한 스승을 만나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고 한다. 그의 스승이 유명한 연담 이운규李雲圭이다. 동학의 씨를 뿌린 최제우, 불교혁신의 뿌리인 남학의 김광화, 그리고 김일부가 모두 그 분의 제자들이니, 역시 위대한 분들은 훌륭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법인 모양이다.
스승은 김일부에게 서경과 주역의 다독을 권하면서 “맑은 것을 보는 데는 물만 같은 것이 없고, 덕을 좋아함은 어짊을 행함이 마땅하다. 달빛이 천심 월에서 움직이니 그대에게 권하노니 이 진리를 찾아보시게나. ”觀淡은 莫如水요 好德은 宜行仁을 影動天心月하니 勸君尋此眞하소”라는 한 토막 시적인 화두를 주었다고 한다.
김일부는 영가무도의 정진과 더불어 해와 달의 변화에 대한 복잡한 이론들을 종합하고 관통하여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의 진리를 깨닫고, 내놓은 결과가 바로 정역팔괘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역의 완성에 이르기 까지 일부선생은 독특한 수련법을 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영가무도詠歌舞蹈’이다.
무형문화재 27호인 이애주 교수는 “예로부터 몸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길게 늘여 노래하며 춤추고 뛰는 것이 곧 ‘영가무도’로써 그 행위가 담고 있는 의미는 우주 자연의 변화 과정이며 자연의 이치이다.”라고 말하며, “단기고사에 보면 ‘노인은 영가하고 아이는 무도 한다’라는 말이 있어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가무백희가 나오지요. 이것이 바로 영가무도입니다. 음악과 노래, 춤이 완전히 일치되는 상태지요. 선(禪)과 춤과 음악이 결합된 치유의 춤, 평화의 춤 입니다”
이와 같이 영가무도는 우리 민족에게서 발단하여 전해오다가 그 맥이 끊긴 것을 김일부 선생께서 제창하신 것이다. 김일부 선생께서는 사색 중 영감을 얻으시어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소리 '음 아 어 이 우’를 그대로 불렀을 뿐이며, 또한 아니 부르고는 못 견딜 만큼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기운을 독창적인 창법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열중 하셨다.
그의 출생지인 충남 논산군 양촌면 남산리 당골 잔디가 사그라지도록 뛰며 노래하여 사람들은 그를 광인이라 여길 정도였으며 심지어는 문중 족보에서 파헤쳐질 정도로 온갖 비아냥거림을 받아 왔다고 한다.
그러나 주역을 완성하는 '정역正易'을 선포하자 그 간의 비웃음은 사라지고 그를 성인으로 받들게 되었다 한다. 이곳에서 창시된 정역은 이후 우리나라 신흥종교가 불꽃처럼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고 한국유학의 새로운 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영가무도를 오래하면 오장에 가벼운 감전과 같은 상쾌한 현상이 생기고 궁둥이가 벌벌 떨리기도 하며 또한 이마가 짜릿짜릿하며 머리가 온통 덮어 씌우는 듯 한 감각으로 기분을 매우 유쾌하게 한다고 한다.
갑자기 김도향이 TV에 나와 ‘항문을 조입시다.’라고 하는 노래가 왜 떠오르는지,
“지하철에서 또는 버스에서/쓸데없이 잡담 말고 졸지도 말고/편안하게 눈감고 고요히 앉아/다른 사람 모르게 명상하듯이/조용히 항문을 조 입시다/너무너무 화날 때/너무너무 힘이 들 때/너무너무 슬플 때/너무너무 괴로울 때/정신 차려지고 기분이 좋아져/가끔씩 조이면 정말 좋아/조용히 항문을 조입시다.
인터넷 할 때/TV 볼 때/너무너무 어깨에 힘주지 말고/편안하게 허리 펴고 고요히 앉아/다른 사람 모르게 명상하듯이/조용히 항문을 조 입시다/사랑싸움할 때도/미운 사람 있을 때도/스트레스 받을 때도/정력제가 필요할 때도/정신 차려지고 기분이 좋아져/가끔씩 조이면 정말로 좋아/조용히~ 조였다 놨다/조였다 놨다/에브리바디 항문을 조입시다.”
이것도 영가무도의 변형인가 이것은 춤추는 것이 아니라 똥꼬 만 벌름벌름하는 것인데, 하긴 이것도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원리가 있는 운동이겠지
영가詠歌와 무도舞蹈는 뗄 수 없는 관계인지라 흥겹게 노래 부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춤을 추게 마련이지만 이 모두는 정역사상을 근거로 수련해야만 그 깊은 뜻을 알 수 있고 정역사상을 근거로 삼지 않은 영가는 맹목적이고, 영가가 뒷받침되지 않는 정역사상은 무의미하다고 보여 진다.
시간이 나면 정신세계사나 정역과 관련된 도장에서 주관하는 영가무도와 관련된 강좌도 참석해본다면 정신생활의 윤택함에 도움이 될 것이다.
김일부 선생이 계룡산에서 공부 할 당시 우리나라는 몇 차례의 전쟁을 치루면서 민심은 피폐해지고 서구열강과 일제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여성과 하층민의 삶은 형편없었고 아무런 희망이 없어 엄청난 시대적 모순에 몸부림치고 있었을 때이다.
이런 시절에 새로운 시대를 내다보고 다가올 시대를 ‘정역팔괘正易八卦’라는 단순한 프로그램에 압축시켜 표현했으니, 지구상의 축의 변화에 따는 총체적인 변화가 따르고 지축이 바뀌므로 후천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하였다.
억압과 패권, 상극의 시대에서 평화와 조화, 협동과 평등의 시대를, 남성우위에서 여성의 지위가 우월해지는 새로운 시대, 노예의 해방, 부녀자들의 해방 ,남녀평등,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도래와 사회개혁의 대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구원의 희망을 안겨주려고 했었다.
이것이 강증산의 상생과 최제우의 동학혁명을 거쳐 커다란 민주주의의 한 뿌리를 형성했으면서도 아깝게도 조선말 기득권에 사로잡힌 수구적인 권력집단의 이익도모와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군을 끌어들이고 결국 그 뜻이 꺽 이면서 커다란 사회혁명까지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들이 보고 이루고자 했던 후천의 실제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은 그 후 유럽과 미국사람들이다. 평등과 자유와 창조와 행복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사회’가 그것이다.
그 당시 이러한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나라는 한국뿐이었으나 그것이 실패로 끝나게 되었을지라도 새로운 문명의 메시지는 동학을 통해 그것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더 큰 형태로 승화되게 된 것이다.
어렵게 민주주의를 얻었지만 김일부 선생이 외친 평등과 자유의 세계는 그 이상의 영성적이고 심미안적인 질적인 민주주의를 거쳐야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니 감성, 형제애, 솜씨 등 우리가 가진 응축된 힘을 새로운 영성의 미학으로 문화로 예술로 승화시켜내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이고, 김일부 선생이나, 강중산, 최시형, 최제우, 박중빈, 전봉준, 동학 그리고 당시의 의로운 선조들이 진정으로 원하고자 했던 가슴과 영혼이 살아나는 새로운 시대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한바다저 3천년의 약속 중에서)
우리가 짧은 사이에 이러한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애초부터 간직 되어 온 우리의 민주주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발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민주화를 위해 희생되신 모든 분들의 영혼에 감사를 드려야 할 차례이다.
김일부, 이 분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가슴을 열어주고 녹여줄 수 있는 진실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미래의 희망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힘이 있었던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계룡산은 이러한 위대한 사상이 나올 수 있는 에너지 터인 것이다.
김일부 선생이 여성지위의 우월시대를 제시한 이래 동학의 최시형선생은 여성들을 중시하여 ‘바로 저들이 한울’이라고 선언했고, 강증산선생은 태안읍내에서 좁은 길에 들어섰다가 한 여인과 마주치고는 그는 여인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여자들이 길을 비켜야 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인지라 그 여자는 못내 송구스러워하며 길을 지나갔다. 제자들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지난 선천시대에는 여자가 길을 비켜주었지만 앞으로 올 후천시대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길을 양보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당시로는 대단한 혁명적인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요즈음은 여성우위의 후천시대가 훌쩍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호적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었고 호주를 중심으로 가家단위로 호적을 편제하던 방식을 국민 개인별로 등록기준지에 따라 ‘가족관계 등록부 ’ 가 만들어져 대법원에서 이에 필요한 규정을 정비했으니 여성분들은 호주제 폐지가 가져올 양성 평등사회에 대한 설레는 기대감이 클 것으로 보인다.
여성분들이 이러한 남녀평등을 넘어선 여성 우월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보고 이러한 ‘호주제 폐지는 단순한 신분등록제의 변화가 아니라 부계혈통제가 생물학적, 정치적, 도덕적으로 틀려서 없앤 거구나.’ 하면서 본적 없는 본적아 사라져라, 성씨는 자유롭게라면서 쟁취감에 도취되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가정의 평화, 자식의 교육문제, 남녀 간의 협동을 도외시 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된다.
이제는 ‘딸 셋을 키우면 기둥뿌리가 팬다.’ ‘시집살이 못하면 동네 개가 다 업신여긴다.’ ‘딸자식 치운다.’라는 소리가 없어질 터이고 그동안 억눌려 왔던 여성들이 폭발할 시점도 되었으니 이제는 술 좀 자제하고 궁중마님에게 잘 보여야 하겠다.
그렇지만 여성분들은 이러한 미래를 보고 이를 실천하려고 했던 훌륭한 선조 분들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보고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시간이 난다면 가족화합 차원에서 최제우를 모시는 ‘수운교’도 찾아보기를 권한다. 계룡산맥의 줄기인 금병산 아래 자운대가 있는 초입에 있으니 찾기가 쉽다.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별나게 되어있고 건물내부의 배치형태도 특이하고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며 때리면 쇠 소리가 나는 ‘석종’이 특이하다.
쇠 소리 나는 돌은 철분이 많아서 나는 소리인데 경남 밀양시 만어사에는 커다란 물고기 모양의 돌이 서있고, 주변골짜기 너덜지대에는 가득 메운 돌들이 있는데 이 돌들을 작은 돌로 두드리면 맑은 소리의 종소리가 난다.
이렇듯이 우리에게 위대한 사상을 남긴 김일부는 그러면 과연 득도한 후 어찌 되었을까?
차길진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따금씩 일부가 천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며 섭섭해 한다. 국사봉에서 정역에 천착, 후천개벽의 이치를 깨친 반인 반신半人半神급 학자 김일부(1826~1898)를 보고 싶다는 얘기다. 생전의 김일부를 상제上帝와 만나게 해주는 특혜를 베풀었을 정도로 할머니는 그를 아낀다.” 결국 그는 무언가를 얻어 후천시대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의 묘지는 현재 당골에 있다. 논산시 양촌면 남선리 당골 마을에는 예전에 충남대 총장을 역임하신 이정호 박사 등이 앞장서서 묘지를 조성해 놓았는데 한눈에 보아도 좋은 자리인 것 같다. 뒤 주봉이 오도산五道山 이다.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당골 마을의 촌로 한분이 탁 쪼그리고 않으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이곳에는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예전에 어떤 스님한분이 지나가면서 이곳에 쉬더니 이 마을이 앞에 흐르는 논산 천과 함께 활궁의 시위대에 해당하여 인물이 많이 나겠네요. 하고는 가버렸어.
그래서 후에 마을회관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이 말을 했더니 뭐 그러냐고 면박을 받았는데 그것이 그게 아니더라고 이곳에는 김일부 선생만 나신 것이 아니라 송영무 해군참모총장이 나셨고 또 건양대학교를 설립한 김희수 총장의 부모묘역이 바로 이 옆에 있어요. 매년 풍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보고 가곤 하지요.
이곳이 당골인 이유는 옛날에 여기 마을 앞으로 큰물이 들어차서 배가 다닐 때 이 앞산에 배를 묶어두었다고 합디다, 그래서 배를 묶어두는 당골이라고 했다지요” ‘당골’이란 지명은 아무래도 단군과 관계가 있는 듯한데 자랑할 만도 한곳이다. 계속 쪼그리고 듣고 있으려니 재미는 있지만 쪼그리고 않는 자세에 익숙하지 않아 그만 내려 왔다. 언제 시간이 나면 한 번 더 찾아가 좋은 말씀을 들어보아야 하겠다.
부연하면 이곳 남산리는 교사선생님 40여분이 배출되어서 마을 자랑거리가 된 곳이기도 하니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는 참 인물이 많이 나는 지역인 것 같다.
시간이 나면 한번 들러서 좋은 산기운도 마시고 김일부 선생 묘소 주변에는 둥굴레가 만개했으니 적당히 취사해서 차를 끓여 먹어도 좋을 듯하다.
이쯤 했으면 이제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시던 향적산방香積山房을 둘러보아야 하지 않을까?
충남대 총장을 지낸 이정호李正浩선생도 1950년대 중반에 이 터에다 작은 사택을 지어놓고 제자들과 함께 정역공부를 했는데, 이 향적산방 앞에 보이는 산이 아주 보기 좋은 토산이다. 지금도 옛집이 남아있다. 예전에는 산제당山祭堂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는 가끔 김일부 선생과 관련된 모임이 열린다고 하는데 이곳을 양정 고개 초입에 계룡암이라는 암자를 가지고 있었던 ‘임덕순’보살이 지키고 있다.
이곳에 거북바위동굴과 용바위가 있다. 김일부 선생은 이곳이 계룡산의 중심이고 한국의 중심이자 나아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했다. 거북바위는 바로 김일부 선생이 크게 깨달은 장소로 반 동굴로 되어있다.
여기가 지구역사가 생긴 이래 모든 운명의 파동이 공명으로 전해 내려오는 장소라고 해피타오라는 정신적인 단체를 이끌고 있는 ‘한바다’가 말한 곳이다.
짬을 내서 조용히 동굴 속에 앉아 명상에 잠기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지나치게 콘크리트로 내부를 정리 해놓았는데 좀 어색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평반에 물 담은 듯’ 시원하면서도 차분한 마음이 든다.
아래 용바위는 누군가 기다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 정역연구자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렇듯이 김일부 선생이 가르친 사상은 동학을 통하여 세계에 알려지고 민주주의 형성에 큰 모템이 되었고 이것이 현재에도 우리의 정신사적인 모태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와 이를 실천할 동학사상을 배태한 정신사적으로 위대한 사상을 가진 학자를 쉽게 지나치는 세태에 한숨이 나올 법도 하지만 이제라도 이분의 뜻을 기리고 고양시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할 일이 아닐 런지? 이제 정역을 알기위해 산방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할 것 같다. [출처] 김일부는 누구인가?|작성자 byunsdd71074un |
첫댓글 예전 생각이 나게 하네요. 많이 들락거렸던 향적산방, 용바위, 거북바위, 어렸을 때 가봤던 신도안의 암용추, 숫용추 그리고 암용추 숫용추 놀러가려고 꽉찬 버스와 신도안의 커다란 집들과 흰 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암용추, 숫용추를 가려고 산 능선의 꼬리를 이은 사람들... 지리적 정보를 제대로 아시는 분이 쓴글이네요. 오래전의 일들을 생각나게 하는 문구들이 많이 보이네요
반갑습니다. 더운 날씨에 건안하신지요? 국사봉 향적산방을 몇년전에 올랐는데 기도도량으로 변해 있고 정역의 자취는 사라져 씁쓰레한 기분으로 정한수 한잔 올리고 온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예전에 이정호 박사님이 향적산방에 계실때 이 거북바위에서 100일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때는 시멘트가 없이 순수한 돌 그자체로 되어 있어서 더 영험스럽게 느껴졌었습니다. 지금은 시멘트로 떡칠? 해놓고 마치 무속인들의 사유지 처럼 막을 쳐놓고 사람들 출입할 수 없는 것처럼 꾸며 놓았습니다. 정역의 자취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만큼 사람들 마음속에서 정역도 사라지는 듯합니다.
송철화선생의 묘소도 앞에 계시고 이정호전생의 공부하시던 방도 보이고 삼정 권영원 선생 천문의 푸른 하늘도 있더이다만 용바위 거북바위는 쓸쓸하기만 하였습니다. 선천의 하도 용바위와 낙서 거북바위와 함께 후천의 정역바위가 있어야 하는데 정역바위는 찾을 수가 없어 1박할려다 그만 그냥 내려 왔습니다. 그래도 이정호 선생, 관중 유남상선생이 계실 땐 정역에 대한 열정이 보이기도 합디만 요즈음은 그 열정도 사그라 들고 있는 거 같아서 서운한 마음으로 있습니다.
ㅎㅎ 대단하십니다. 정역바위를 생각하시다니...
허허! 삐트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앉아 있는 넓적바위 같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