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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용수의 사상·저술·생애의 모든 것
나가르주나(용수), 가쓰라쇼류, 배경아 옮김, 불광출판사, 2018. 6. 27. P. 424.
- 나가르주나(산스크리트어: नागार्जुन, Nāgārjuna) 용수(龍樹: 150?-250?)
- 가츠라 쇼류(桂紹隆, 1944-) 일본 불교학자.
- 배경아(裵慶娥, 1969-) 동국대 경주: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나가르주나가 당대에 불(佛)의 진실성을 왜곡하는 두 부류, 바깥의 학자(외도)와 내부의 학자(유부)에 대한 반론으로 쓰였다고 한다. 하나는 정지를 우선으로, 다른 하나는 자아(오성, 지성, 이성)를 우선으로 보았다는 것이 오류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이 두 가지는 파사현정(破邪顯正)[악순환: 순환논증의 오류 지적]하는 방식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벩송의 EC 3장에도 있다. 두 가지, 자연의 통일성이 선전제로서 있다는 착각과 이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선전제로서 있다는 착각으로 둘 다 순환논증의 오류이며, 이 두 가지를 토대로 무질서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착각이라는 것이며, 질서는 두 종류가 있는데 상향하는 의식활동과 하향하는 의식활동이다. 중론에서 나가르주나의 파사현정이 무질서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두 길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나아가는 길(중론)이 무엇인가? 답을 먼저 말할 수 없기에 같이 가면서 풀어갈 수밖에 없다. 대중(인민)과 함께 가는 것이다. 가는 길의 경향성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데, 노력이 필요하다. 선업을 쌓자고(법구경), 그런 선업에서 느낌은 법화경과 같고, 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교감하고 공감하면서 하는 세상은 화엄경과 같을 것이다. 이런 느낌을 기원에서 또는 원인에서 탐색한 이는 싯달다일 것이다. 함께 가야하니까, 그러니까 대승이라고 한다. 싯달다의 설법 함께 가면서 온우주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세상 불법의 세상이고 그를 이룬 것이 열반이니 어디를 가고 오고가 없는 것이다.
이런 노력은 영혼이 신체를 떠나서 하는 신체없는 도, 인민 없는 온우주도 아니다. 신체와 더불어 있는 영혼이 의식이다. 이 의식은 영혼처럼 신체없는 사고도 할 수 있지만, 물질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방식도 알고 있다. 이 의식이 기원이 무엇인가? 또는 원인이 무엇인가? 이것은 플로티노스의 문제였기도 하고 벩송의 문제 였기도 하다.
그러면 서양철학사에서 의식은 무엇이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의식은 누스도 로고스도 아니면서도 이 두 가지에 닿을 수 있지만, 신체를 지니는 한에서는 물리적(신체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 상태는 신체적으로 고통을 느끼면서 해소하고자 노력하고, 또한 도덕적으로 외로움과 편안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하는 중에 있는 상태이다.
엘레아의 제논이 자신의 스승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의 성립과 진리를 방어하기 위해 운동론자들에게 파사현정(破邪顯正) 즉 귀류법(歸謬法)의 논리로 존재의 부동과 영원성 그리고 동일성을 확보하였다고 철학사는 말한다. 그리고 서양 철학사의 근대철학에서 인간의 인식능력이 파사현정을 통해 우주인식과 진리인식을 할 수 있다는 쪽에서도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방식으로 현상의 비존재를 귀류법으로 판단하고 심판하여, 지성(속좁은 이성)이 진리를 파악한다고 주장한다. 부동도 없고, 부동성을 파악하는 지성(이성)도 있는 것이 아니라고하는 파사현정을, 또는 악순환의 분쇄를, 주장하는 이는 벩송이다.
그러면 고대 그리스에서도 근세의 인식론에서도 귀류법을 통하여 학설의 한 부분들을 인정하는 것으로 계속되어 왔는가? 이런 물음을 불교에서도 여전히 물을 수 있다. 여기에서 저기로 공간도 어제에서 아제에로 시간도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 운동만이 있다고 하고 또한 이것을 파악하는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성만이 있다고 하여, 정지를 부정하고 대상화와 주체화의 작업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논법을 나가르주나가 전개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기서 문제제기의 시각은 존재라는 의미이다. 존재는 현존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양철학의 존재는 이데아와 같은 것으로 부동이다. 불성을 이데아처럼 부동으로 고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존재가 아니라 현존이라고 할 때 현존은 무엇인가? 현존은 우주상으로 지구상에 현재하는 사물들의 총체이다. 사람도 동물도 포함하고, 사유하는 대상도 사유하는 인식도 포함하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총체성이 경험적으로, 무매개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고대의 말기까지도 동서양의 현자는 상식(공통감각)이라는 틀안에서 사고하였고, 상식에 준해서 대상들의 정도의 차이를 구별하려고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정도의 차이들을 각각이 서로 섞이지 않은 대상들로 구별하여 범주화(미분화)를 지식의 극한 정도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누스의 단계(불성의 단계), 로고스의 단계(불이의 단계로서 파사현정) 그리고 의식 상태로서 추억들(현상세계와 표상들의 단계), 그리고 살아있는 한 버릴 수 도 없고 그렇다고 교정과 교화로서 하나의 통일성을 만들 수 없는 물질성의 단계(현실계, 신체계), 그리고 생명의 지니지 않지만 삶에서 필수적인 물질성의 단계(아페이론, 무의 세계 또는 공의 세계)인데 이 단계가 단지 무도 아니고 공도 아니며, 서양철학적으로 경계가 없다고 해서 무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고대 현자들이 상식에 기반한 사유의 대상화에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있으니, 움직이는 무엇, 움직임 자체를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 없다. 그 설명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움직임(en sof), 벩송 표현으로 그 운동이 지속이며, 형상으로도 형식으로도 또는 범주로서도 자리를 차지하지 않지만 그대로 여전히 현존하는 지속, 그 속에 단번에 무매개적으로 위치하는 것이 온자아, 불법(佛法)이다. 이를 개체적 자아에 복속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성이 외부에서 파악하는 대상화도 주체화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법은 우주의 살아있는 활동성일 것이며, 우주의 영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였던 철학자가 플로티노스 인데, 나가르주나(용수)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왜 온우주 속에 신체를 지닌 불가분의 개체로서 인간이 있느냐가 문제인데, 신체와 영혼 사이를 분리하면 문제를 풀 수가 없다는 것도 알았고,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가 있기는 한데 서로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 달라서 연관이 있고 연대가 있다고 보는 쪽이 플로티노스이고, 나가르주나는 양자와 연관들이 문제가 아니라 원인이 무엇이냐는 문제로 환원시켜서 인연연기에 벗어나는 불성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현자는 인간이 현실에서 신체를 지니고 살면서 고통과 고독의 문제가 절실하다는 것을 버리지 않았다는 장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나, 신체를 통한 해소가 어렵다고 여겨, 영혼의 상승을 주장하는 점에서도 닮았고, 게다가 영혼은 그 극한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불성이든 우주 영혼 누스든 합일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점에서 상식을 기반으로 하는 절대치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하여, 누구나 노력하면 제일원인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신체를 통한 통일성(단위)을 지속하여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신체의 인지능력으로 안이비설신(의)은 하나의 통합된 방식의 단위가 아니라는 것을 두 현자는 알았다. 그럼에도 통합된 단위가 이루어지는 방식과 과정을 탐구하기보다 이 단위가 통합하려는 노력으로 상호침투, 교감, 공감, 공명 등을 인정하여 하나가 이루어지고, 이 단위를 여기 현세에서 저넘어로 넘어가자 또는 합일의 길을 가자는 지혜를 닦아야 함을 강조한다. 즉 삶에서 노력, 작은 선행이라도 꾸준히 실행하면서 선업을 쌓아 도피안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신체적 고통과 도덕적 고독(고뇌)를 넘어서는 꾸준한 선행, 그것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에서야 모든 중생들 또는 인민들이 불성 또는 현자에 당연히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자들은 파사현정(破邪顯正), 또는 귀류법을 사용하여 완전한 진리를 제시하면서, 중생 또는 인민을 함께 큰 수레 태워서 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현자는 사(邪)를[추론과 판단만을] 중심에 놓은 지자가 완전자에 이른다는 것을 오만이라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탐모치에 벗어나자고 하고, 서양철학사는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에 벗어나자고 한다. 두 표현이 다른 것은 탐모치는 인민의 삶과 연결성이 많고, 허무주의 극복은 상층이 인민의 삶에 대해 배제 후에 배려하자는 쪽이다. (55SKI)
책의 제목을 한역본 중론(中論)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지에 대해 의문이다. 산스크리트 원본인 찬드라키르티의『프라산나파다』이라 한다. 누구는 중(中)이란 길(도 道)라고 한다. 불법(佛法)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는 논저(論著)라는 의미이라 한다. 그 길(도 道)을 한마디로 여기서 저쪽으로넘어가자는, 차안에서 피안으로 즉 도피안(到彼岸)이다. 《반야심경》에서 “가자 가자 피안으로. 피안으로 아주 가자, 영원한 깨달음으로.”와 같은 의미이다. 노력하여 가자는 것이다. 대립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이기는 한쪽이 지는 것이 아니라, 둘다 아니라른 불이(不二)로서 다른 길 즉 중론을 노력하자는 것이다. - 우리는 도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왔다 - 인민이 남북에서 8천만이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자는, 이항대립이 아닌, 불이의 노력이 길을 가는 경향성, 즉 중론(中論)이다. -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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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론: 목차 --
귀경게(歸敬偈)
제1장 네 가지 조건[四緣]의 고찰 [원인(cause)와 아르케에 대한 고찰]
제2장 걷는 행위의 과거·현재·미래 고찰 [시간의 공간화..]
제3장 12처(十二處)의 고찰 [의식의 공간화]
제4장 5온(五蘊)의 고찰 [감성의 공간화]
제5장 6계(六界)의 고찰 [영혼의 공간화]
제6장 욕망과 욕망을 갖는 자의 고찰
제7장 유위법(有爲法)의 생기상·지속상·소멸상 고찰 45-52.
제8장 행위자와 행위대상의 고찰 [삶과 재인식]
제9장 집착의 대상과 집착하는 자의 전후 관계 고찰
제10장 불과 연료의 고찰 [영혼과 신체]
제11장 윤회의 시작에 대한 고찰 [인과성의 필연성]
제12장 괴로움[苦]의 고찰 [결정론의 발현: 고(苦)
제13장 모든 행(行)의 진실에 대한 고찰
제14장 행위·행위대상·행위자의 결합에 대한 고찰
제15장 존재하는 것[有]과 존재하지 않는 것[無]의 고찰
제16장 번뇌로 인한 속박과 윤회로부터의 해탈에 대한 고찰
제17장 업(業)과 업의 과보(果報)에 대한 고찰
제18장 자기와 법의 고찰
제19장 시간의 고찰
제20장 인과(因果)의 고찰
제21장 생성과 소멸의 고찰
제22장 여래의 고찰
제23장 잘못된 견해[顚倒]의 고찰
제24장 4성제(四聖諦)의 고찰
제25장 열반의 고찰 [도피안(到彼岸)에서 ]
제26장 12연기의 고찰 [4x3 의 판단의 필요없음]
제27장 나쁜 견해의 고찰
*** 내용 중에서
I. 중론 번역편 10-147
* 귀경게(歸敬偈) 20-21
붓다에 대한 존경의 서두:
소멸하지 않으면서 생겨나지 않고, 끊어지지 않으면서 항상 있지 않고 동일하지 않으면서 다르지 않고, 오지 않으면서 가지 않고, 희론(戱論)을 적멸하면서 상서로운 연기[원인성]을 설하신 설법자 중 최고의 설법자 붓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20)
[원인성은 아페이론과 같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언어의 다원성, 즉 희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운동하는 실재성’(고르기아스에서 카이로스와 같다)이다.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인데도 이런 론을 쓸 수밖에 없으니까? 소크라테스 이래로 검은 아이러니라고 한다. - 희론(戱論)을 전개해도 결국에는 말조차도 필요없다. 논리를 전개해서 불법(佛法)이라고 해도 그게 말로서 된 것은 불법(佛法)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면 말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알려지는 것이 없다. 불법은 알려져야 하고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처럼, 여기를 넘어서는 차안을 넘어서 피안으로, 도피안으로 인도가 불법(佛法)인데, 여기서 넘어가는 것이지, 여기를 끊어내고 초월하여 넘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로 해야 하는 아이러니이니 백색 아이러니이다. 그래도 말을 해야 넘어가는 어떤 과정을 겪을 수 있듯이, 현실을 살면서 행동하면서 고통과 고독을 넘어가야 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기에 삶의 이야기를 한다. 과정에서 언어이든 삶의 행동이든 대상과 인식이 아니라 교감과 공감으로 넘어가야 하기에 새로운 영역 불법(佛法)의 영역이라 하며, 도피안(到彼岸)으로서 열반이다. 이 불법과 열반은 그래도 현실을 벗어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지금 있는 것이기도 하고, 우주의 흐름과 같은 겪고 있다는 의미에서 중생들과 함께 가야하고 그대로 큰 수레에 함께 싣고 가는 것이다. - 현실의 긍정에서 삶을 풀어가는 것은 함께 노력하며 교감과 공감을 확장하고 약속과 계약을 의지 즉 불법(佛法)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55SLE)
제1장 네 가지 조건[四緣]의 고찰 [1. Conditions]
네 가지 연관들인데, 1)영혼, 2)신체, 3) 영혼과 신체 관계 4) 자연의 자기생성과 연관들. 이 원인 또는 기원에 관한 서양철학사의 주제는 존재와 무, 두 요건의 각각과 양자관계, 둘을 성립시키면서 나온 넷의 연관, 셋의 경우에 8가지 연관 등의 사변적 논의는 무수히(무한정하게) 확장되어 간다. 그 확장의 기원 또는 원인에서 하나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요청, 전제, 선전제, 믿음, 신앙) 등으로 사유할 수밖에 없다고들 한다. 이런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필연을 부여하는데 대한 반박이 자유의 기원이다. 필연에 대한, 결정론에 대한 반박에서 가장 기본은 시초에 하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대상도 아니고 인식하는 사유도 아니다. 그러면서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실재성이며, 작동(l’acte)이다. 이것을 불교에서 공(空)이라고 한다. 공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으면서 모습이 없고, 작동하면서도 하나의 방식이 아니 작동들이며, 움직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 하나,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현존이다. 이 현존에서 아픔과 고독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 이 현존, 움직이고 변화하고 흐르는 현존에 아픔과 고독이 있다는 것이 언어로 성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인간이 아픔과 고독을 부정하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일까? 여기서 불교든 플로티노스든 원인을 시점 또는 장소를 정하지 않고 과정으로 그리고 혼성(composant)으로 설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논리적이고 수학적 4라는 규정에서 벗어나는 사유가 필요하다. 왜 이런 사유가 등장했느냐는 그리스 철학이 훨씬 명석하고 정확하게 규정하려 했다. 인도사상과 불교사상은 추론을 무한정 확대하였다고 하더라도 4의 연관 속에 있는 2의 연관의 정확성을 그리고 일의 양면성을 거꾸로 들어가지 않은 것 같다. 인도는 윤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는 영원과 순간(지상의 변화)의 대립을 하늘과 땅으로 설명하려 하였고, 그것을 시간이란 이름으로 대립적으로 풀어보려고 하였으나, 결국 수학의 장점에 말려들어 공간화의 방식으로 정확성을 확보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싯달다는 기나긴 설교를 했으며, 그 속에 이런 순환과 흐름, 영원과 찰나, 공간과 지속의 환원할 수 없는 연관을 잘 분간해서 설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설교에서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때, 중생은 사고에 혼동을 가져온다. 확고한 대상의 사고를 바라는 중생은 보살보다 부처가 분명하게 존재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느 종교에서나 그 기원과 절대자는 모습이 없다. 그럼에도 중생과 인민의 요구에 타협하고 제도를 통해 인민의 잉여를 차지하려는 자들은 대상을 표상화하고 대상에 이르는 논리를 개발하여 인민 위에 군림하고자 하였다. 이런 시기가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참주, 동방에서 황제를 만드는 시기이다. 그리스 철학이 신화에서 벗어나려는 즈음에, 동방의 영향으로 로마가 다시 참주(황제)의 길을 가려고 할 때, 철학은 아프로디니에우스의 사고와 플로티노스의 사유로 경향의 이원성을 드러내 보인다. 인도에서는 나가르주나가 논리적 사고와 제도적 구성을 대상으로 삼는 불교 이해를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길을 연다. 아마도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이런 관심에서 일반화의 대상이나 추상화의 대상으로 사고하는 길과 달리, 구체적이고 실재적 작동에 의한 현실화와 구현화를 사유하려는 플로티노스가 등장 할 것이다.
제7장 유위법(有爲法)의 생기상·지속상·소멸상 고찰 45-52. [7. Composés]
제9게송 용수실제로 빛이란 어둠의 파괴자이지만 등불자신과 그 등불이 있는 장소에 어둠은 존재하지[현존하지] 않는다. [등불을 빛으로 읽으면 플로티노스와 같다.]
제34게송: 생기도 지속도 소멸도, “환영과 같이 꿈과 같이 신기루와 같이”라고 {모든 붓다는} 말씀하였다. (52) [환타지, 꿈, 신기루의 예는 플로티누스에도 있다.]
제8장 행위자와 행위대상의 고찰 53-60. [8. Acte et agent.]
제27장 나쁜 견해의 고찰 141-147 27. [27. Opinions.]
제30게송: .. 바른 법을 설하신 고따마에게 나는 귀의 합니다. (147)
[마지막 찬불(讚佛), 불법에 귀의 – 싯달다의 위대함은 6년의 고독한 수행과 47년을 인민과 더불어 삶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삶이 보살, 즉 불성이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욕망이다. 소크라테스의 사랑이 욕망이듯이. 그가 없어도 인류의 기억으로 잔존하여 사랑(사모 思慕)하는 것이다. 추억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의식 속에서 기억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II. 중론 해설편 149-408.
제1장 용수 사상 150-307
(1) 모든 법은 자신으로부터 생긴다.
(2) 모든 법은 타자로부터 생긴다.
(3) 모든 법은 자신과 타자의 양쪽으로부터 생긴다.
(4) 모든 법은 원인 없는 것으로부터 생긴다. (182)
이런 논리는 우주의 생성과 자아의 생성에 대한 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떤 현존을 대상을 삼을 때 의식이 활동하는 양태에 관한 것이다. 1)신, 2)자아, 3)세계 속의 자아(의식), 4) 우주의 자기 가능성 이라는 방식으로 바꾸어도 될 것이다. 추론의 일반화를 넘어서 추상화에서는 1)존재와 2)비존재의 대립, 그리고 3)양자의 관계에서 공간, 4)둘의 어떤 연관없이도 지속하는 흐름, A, B, AB, ~(AB)라는 순수 추상으로 나열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라는 현실은 이런 논리에 의해 생성되는 것도 생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원인으로 움직임이, 운동이, 흐름이, 변화가 있으며, 그 현실화 또는 구현화의 경향은 다양한 방향의 길을 제시할 것이다. 태음 소음, 소양 태양으로 나누는 것은 세계의 순환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생성에서 변화 그리고 비결정(자유)로 향하는 길이 없기에 서양형상론은 결정론으로 더 이상 논의를 전개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비결정의 영역이 확보되지 않기에, 비존재(태음)의 실재성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근세 이후로 과학이 발달할 수 있는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비존재, 말로할 수 없은 것이지만, 파라독스 또는 아이러니에 걸리더라도 말을 하거나 다루어야 하는 것은, 인간에서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완전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은 경향성을 다루어야 한다. 여기에 불교의 설법이 있고, 철학에서 표현 설명이 있다. 설명과 표현은 해석과 의미 분석과는 다른 길일 수 밖에 없다. 설명과 표현하면서 교감과 공감으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공동체에 율이 있을 경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이 적은 공동체는 율(律)이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55SLE)]
제2장 용수의 저술. 308-382.
제3장 용수의 생애. 383-408.
참고문헌 410-413.
저자후기: 고시마 기요타카. 414-420.
역자후기: 배경아(2018년 6월) 422-423.
* 인명록 ****
150 나가르주나(산스크리트어: नागार्जुन, Nāgārjuna) 용수(龍樹: 150?-250?)
500 청변(淸辯, Bhavaviveka 490-570년경), 남인도의 승려로 타나갈책가국에서 태어났다. 범어로 바비베카. 바비폐가(婆毘吠伽)로 음역한다. <般若燈論>
600 월칭(月稱, Candrakirti, 찬드라키르티, 600경-650경), 티벳의 중관논사(中觀論師), 귀류논증파 남인도 사민티국 출신,
1925 가지야마 유이치(梶山 雄一, 미산 웅일 かじやま ゆういち、1925-2004)일본 불교학자. 文学博士。京都大学名誉教授。대승과 회향(김재천 역, 여래, 2002년 07월 05일, P.234)
1944 가츠라 쇼류(桂紹隆, 계소륭 1944-) 일본 불교학자.
1946 마크 시더리츠(Mark Siderits, 1946-), 2012 서울대 교수 은퇴, Buddhism as philosophy, 2007, "Buddha",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ring 2015 Edition), Edward N. Zalta (ed.), How Things Are: An Introduction to Buddhist Metaphysics (Buddhist Philosophy for Philosophers), 2021 / Nagarjuna's Middle Way: Mulamadhyamakakarika(with Shoryu Katsura, 2013)
1948 고시마 기요타카(五島 淸隆, 오도청륭, Kiyotaka Goshima ,ごしま きよたか, 1948-) 일본 후쿠시마현 출생. 인도 초기대승불교를 전문분야로 연구하고 있으며 용수 연구의 권위자. 교토(京都)대학 대학원 박사 수료. 현재 붓쿄대학과 도시샤(同志社)대학 강사로 활동
?-? 예샤오융(葉少勇, 엽소용: 叶少勇: 협소용, ?-?), 베이징 대학 교수, 중론송: 범장한합교, 도독, 역주(中論頌: 梵藏漢合校, 導讀, 譯註, 2011)(出版社:百家出版社,作者:葉少勇,出版日期:2011/06/01)
1954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1954-), 몬트리올 출생, 캐나다의 심리학자. The Language Instinct : How the Mind Creates Language (1994)(언어 본능: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김한영, 문미선, 신효식 옮김, 동녘사이언스)
1957 김성철(金星喆, 1957-) 법명은 도남(圖南).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한 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인도불교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20년 현재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티벳장경연구소장과 ≪불교평론≫ 편집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불교의 중심철학, 1995(중관학 개론서). 중론 개정본(오타쿠, 2021).
1969 배경아(裵慶娥, 1969-) 동국대 경주: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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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라빤짜(prapanca, 희론, 戱論)을 잠재적 언어활동이라는 의미로 ‘언어적 다원성’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스토아학파가 플라톤주의의 언어의 규정성을 비판하면 언어의 다원성이라기 보다 내적 감성과 의식을 표현하는 방식 때문에 나온 논쟁인 것과 같다.]
***감사의 말씀 : 배경아(裵慶娥, 1969-)
나가오 가진(長尾雅人, ながお がじん, 1907-2005) 일본의 불교학자이자 티베트학을 확립한 학자이다.
프리츠 스탈(Frits Staal, Johan Frederik "Frits" Staal, 1930–2012) 그리스와 인도의 논리와 철학과 산스크리트어 문법의 학자 Advaita and Neoplatonism, 1961(University of Madras, 1961).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Advaita는 주요한 두 Vedanta 학파 중의 하나, Brahman의 존재만을 주장하고 현상계(現象界)는 무지에 바탕을 둔 환영(幻影)이라고 주장.]
오지하라 유타카(大地原豊 대지원풍, ?-?) 상스쓰리뜨학 전공
핫토리 마사아키(服部正明 복부정명, はっとり まさあき、1924-)日本の仏教学者、古代インド哲学研究者。
가지야마 유이치(梶山雄一, 1925-2004) 불교학 [오지하라 유타카, 핫토리 마사아키와 동료이다.]
와더/워르더(Anthony Kennedy Warder, 1924–2013) 영국 태생 인도학자. 인도 고전 문학인 시적전통의 카비야(Kāvya)문학 전공자이다.
레슬리 가와무라(Leslie S. 河村, 하촌, ?-?) Leslie S Kawamura, Mind in Buddhist psychology(공동저자, Tshe-mchog-glin Ye-śes-rgyal-mtshan; Herbert V Guenther; Leslie S Kawamura, 1975, 영어본)
단치 데루요시(丹治智義, 단치지의, ?-?)
사이토 아키라(斉藤明, 제등명, 1950-) 일본 도쿄(東京) 출생. 도쿄(東京)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오스트리아 국립대학 박사. 불교전공, 인도 대승불교 중관학 전공자, 현재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 교수.
1946 마크 시더리츠(Mark Siderits, 1946-), 2012 서울대 교수 은퇴, Buddhism as philosophy, 2007,
앤 맥도널드(Anne MacDonald)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의 교수,
(7:18, 55SLE) (8:07, 55S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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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1. 프랑스어판 27장 444 문장
1. Conditions
2. *Mouvement
3. Facultés (vue...)
4. *Cinq agrégats
5. Éléments
6. *Désir
7. Composés
8. Acte et agent
9. Sujet préexistant
10. Feu et combustible
11. Commencement et fin
12. Souffrance
13. Réalités composites
14. Union
15. Être en soi
16. Lien et délivrance
17. L'acte et ses fruits
18. Moi
19. Temps
20. Complexe des causes et conditions
21. Fait d'apparaître et de disparaître
22. Tathāgata
23. Méprises
24. Nobles vérités
25. Nirvâna [25장 열반장, 여기서 끝나야 ...]
26. Douze nidâna
27. Opinions
# 참조 2
제1 관인연품(16게)
제2 관거래품(25게)
제3 관육정품(8게)
제4 관오음품(9게)
제5 관육종품(8게)
제6 관염자품(10게)
제7 관삼상품(35게)
제8 관작작자품(12게)
제9 관본주품(12게)
제10 관연가연품(16게)
제11 관본제품(8게)
제12 관고품(10게)
제13 관행품(9게)
제14 관합품(8게)
제15 관유무품(11게)
제16 관박해품(10게)
제17 관업품(33게)
제18 관법품(12게)
제19 관시품(6게)
제20 관인과품(24게)
제21 관성괴품(20게)
제22 관여래품(16게)
제23 관전도품(24게)
제24 관사제품(40게)
제25 관열반품(24게)
제26 관십이인연품(9게)
제27 관사견품(30게)
# 참조3.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인문한국(HK)연구단 2018년 국제학술대회 : 증론과 중관사상
일시: 2018년 7월 27일(금) 오전 10시 30분∼오후 5시 30분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의 앤 맥도널드교수는 “이방인들과의 대화: 언어와 해탈”에 대해, 북경대 예 샤오용교수는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용수(龍樹, Nāgārjuna) 저작 내의 맥락적 탐구”에 대해 각각 발표합니다. 또한 일본 무사시노 대학의 니사쿠 요시아키교수는 “『쁘라산나빠다』제18장의『팔천송반야』인용에 대하여”를, 보스턴대학의 데이비드 엑켈교수는 “바비베까의 신(神; Īśvara) 개념 비판: ‘그는 어떤 이에게는 즐거움을 주고 어떤 이에게는 고통을 야기한다.’”, 일본 국제불교학대학원대학의 사이토 아키라교수는 “바비베카 vs 찬드라끼르티: MMK 1.1에 나타난 논리(四不生의 비판)를 중심으로”를 발표합니다. 마지막으로 동국대 HK연구단의조윤경교수는 “길장의 팔불중도(八不中道)에 대한 사상사적 이해”를 발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