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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필순(1878∼1919)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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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광산(光山) |
출생지 |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
주요활동 |
만주와 내몽고 지역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했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이에 항의하던 시가전 중 부상병들을 치료하면서 민족문제에 적극 대응했고, 그 직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해 서간도, 북경을 거쳐 몽골과 가까운 치치하얼에서 병원을 열어 독립운동 기지 및 연락거점으로 활용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새로채용한 일본인조수가 건네준 우유를 마시고 독살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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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번역본 의학교과서 |
주변인물 |
안창호, 이태준, 언더우드 |
가족 |
부친 김성섬(金聖贍), 모친 안성은(安聖恩),형 김윤오(金允伍), 매형 김규식, 여동생 김구례(金求禮), 둘째 여동생 김순애(金順愛), 셋째 여동생 김필례(金弼禮), 조카 김마리아, 부인 김경순, 아들 김 영, 딸 김 위, 막내아들 김 염, 막내딸 김 로, 손자 김승기, 김필순의 증손녀 박규원 |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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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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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
세브란스병원 |
출처, 참고 |
MBC교양프로, 동아일보 |
독립운동가 김필순(김마리아의 숙부)
김필순은 광산(光山) 김씨이며, 1878년 6월 25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에서 김성섬(金聖贍)과 둘째 부인 안성은(安聖恩) 사이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났다. 김필순은 우리나라 최초 의사 7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으며, 독립운동을 하다 비록 일찍 사망했지만 그가 진정한 세브란스인의 표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집안은 일찍이 개화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집안에 속하며, 서상륜(徐相崙),서경조(徐景祚) 형제가 장연에 우리나라 최초의 소래교회를 세울 때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그의 집안에서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다수의 초창기 세브란스 출신 의사들과 인척관계를 이루어 초창기 우리나라 의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 여동생 김구례(金求禮)는 같은 장연 출신인 서병호(徐丙浩)와 결혼하였다. 서병호는 서경조의 둘째 아들로서,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발히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형인 서광호(徐光昊)는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이다. 둘째 여동생 김순애(金順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과 결혼하였다. 원래 김규식은 김순애와 혼담이 오간 적도 있었으나, 김순애의 학교 동기생 조은수를 부인으로 얻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건강이 악화되어 아들 하나를 남기고 사망하면서 유언으로 학교 동기생인 김순애와 결혼할 것을 부탁하고 주위에서 강권함에 따라 김순애와 재혼하게 된 것이었다. 김규식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그의 아들 진동과 사촌 누이동생 은식을 대동하고 몽고의 고린(庫倫)을 여행했을 때 만난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 이태준(李泰俊)은 그의 사촌 누이동생 은식과 결혼하였다. 김필순의 셋째 여동생 김필례(金弼禮)는 한국 YWCA의 창설자로서 세브란스 6회 졸업생 최영욱(崔泳旭)과 결혼하였다. 김성섬 첫째 부인의 장남인 김윤방(金允邦)의 둘째딸 김미염(金美艶, 즉 김필순의 조카)은 세브란스 6회 졸업생 방합신(方合信)과 결혼하였다. 김미염의 바로 아랫 동생은 그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이다. 김윤방의 둘째 동생이며, 김필순의 형인 김윤오(金允伍)는 세브란스 3회 졸업생 고명우(高明宇)를 사위로 맞이하였다.
김필순의 가족 배경에 대해서는 그의 동생 김필례의 전기 및 그의 아들 김염의 전기에 비교적 잘 기술되어 있다. 김필순은 한학을 수료하였으며, 일찍부터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과 자유롭게 접촉할 기회를 가졌고 1894년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95년 어느 날 언더우드는 김필순 부모에게 ‘집에 붙들어 놓고 책임지고 공부시키겠다’고 요청하여, 김필순은 서울에서 신식교육을 받게 되었다. 김필순은 언더우드 집에 머물면서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남달리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특히 영어발음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후에 에비슨의 통역을 할 수 있었고 의학교과서를 번역했으며 에비슨의 의학 강의 시간에 자주 통역하게 된 것이다.
4년간 배재에서 학업을 마친 김필순은 1899년 제중원(濟衆院)에서 처음에는 외국인 새록스의 통역 및 조수로서 일하다가, 자연스럽게 1900년에는 에비슨의 통역(通譯) 조수(助手)로 활동하였다. 그는 에비슨을 도와 그레이 해부학 교과서를 번역하였으나, 불행히도 원고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1906년 해부학교과서를 다시 번역하는 것을 필두로 외과총론, 화학, 해부생리학, 내과학 등 많은 책을 번역하였다. 이와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미 졸업 전에 저학년 학생들의 강의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창시절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는 서울로 가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필순이 행실이 좋지 않은 어떤 여자와 사귀느라 공부는 팽개쳐두고 있다는 소식이 소래마을로 전해졌다. 김필순의 어머니는 매일 밤 돗자리와 빗자루를 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가 기도를 올렸다. 어느날 어머니는 기도 중 ‘네 아들을 내가 구원했으니,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거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뒤에 안일이지만 참으로 공교롭게도 그 무렵부터 김필순이 마음을 고쳐 먹고 학업에 열중하였다.
김필순은 의학도로서 병실 및 외래에서 보조 역할을 했고 많은 책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수년 동안 병원 경영에 관해서도 상세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당시 에비슨이 그의 능력을 인정해 장차 세브란스 병원의 책임을 맡고 한국의 의학을 이끌어야 할 재목으로 키우려 했던 것은, 세브란스병원을 건축하고 있을 당시 상황을 적은 <구한말비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교재의 한글번역을 도운 의과 대학생 가운데 미스터 김이 ‘고오든’씨의 통역인으로 수고했고, 모든 일이 별다른 어려움없이 진척되었다. 드디어 난방과 배관 공사를 해야 할 순서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 분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고오든’씨와 미스터 김과 나 이렇게 셋이서 해야만 했다. 나는 경영해 오던 병원에서 여러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끝나는대로 공사장에 달려가서 두 사람과 같이 일을 했다.
한편 김필례의 전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01년 김필례는 오빠 김필순의 지시에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필순은 제중원에 있으면서 의학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환자 진찰시 통역을 맡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의술을 조금씩 배워 진찰할 수 있게 되었다. 제중원은 차차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사람들이 몰리어 환자도 늘어가니 입원환자들의 식사를 해결하는 일이 화급한 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필순은 소래마을로 연락하여 가족들이 서울로 올라오도록 했던 것이다. 인순, 순애, 필순의 아내, 어머니, 필례 등 다섯이었다.
김필순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는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국운이 기울어 갈 때였다. 그는 착실한 기독교인으로 항상 정의감에 불타 있었으나, 그가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 것은 1907년 8월에 일어난 조선군의 강제 해산과정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김필례 전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07년 구한국 군대의 해산은 민족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하였다. 보병 대대 장병들이 시가전을 벌이던 날 김필례는 둘째 오빠 윤오 집에 있었다. 김필례는 필순의 집에 있는 어머니 안씨가 걱정이 되어 필순의 집으로 찾아가는 길에 길 위에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알고 보니 온통 핏물이었다. 김필례가 세브란스 병원 안에 있는 필순의 집에 다다랐을 때 세브란스 병원도 아수라장으로 변한 뒤였다. 세브란스 병원 안은 부상자와 시체들로 가득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소달구지에 적십자기를 달고 연신 환자들을 날라오고 있었다. 김필순은 그날 하루 종일 정신없었다. 밀려드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눈코 뜰새 없었다. 가족들도 그날은 늦게서야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그는 점심먹고 있는 가족들에게 달려와, ‘어머니 일손이 달려요. 부상병 간호와 치료하는 일 좀 도와주세요’ ‘시집도 안간 양가집 규수가 아무리 부상병이라고는 하나 남정네들 간호하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니?’ ‘어머니 지금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런 걸 시시콜콜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필순은 마음이 다급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야속하기도 했다. 김필순이 그리스도의 참사랑 실천까지 들먹이자 그제서야 어머니는 마지 못하는 체하며 집안 처녀들이 부상병을 간호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리하여 함라, 미염, 마리아와 김필례, 김필순 이 다섯은 다친 군인들을 밤낮 가리지 않고 정성껏 돌보았다. 김필례는 열흘동안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부상병 간호를 했다. 밤에는 특히 부상병들의 신음소리로 아비규환이었다. 김필순의 조카인 김마리아가 뒷날 항일애국운동, 독립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어올릴 수 있게 된 것도 아마 이 세브란스 체험에 크게 힘입었음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김필순은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이동휘, 김구 등이 1907년 9월 조직한 비밀정치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 있는 그의 집에서 회의를 연 일도 있었다. 신민회에서는 본국을 떠나 중국령의 압록강 상류 북안 通化에 독립군 기지를 세운다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1908년 6월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한 김필순은 독립운동을 위해 1912년초 조국을 떠날 때까지 에비슨 교장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학교 발전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이미 졸업 전부터 후배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고, 병원 경영에 관해서도 에비슨으로부터 특별히 사사받은 그에게 많은 역할이 주어진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처음에 한국에는 한글로 된 의학서적이 없었다. 김필순은 영어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한문만 약간 알았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선생과 옆에 앉아 공부해야 했으나, 다른 임무, 환자 혹은 외국 방문객에 의해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다. 교과서 번역은 한 단원 한 단원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용어를 고안해내야 했다. 번역이 끝나면 조금씩 등사해 다른 학생들에게 배포되었다. 해부학 번역이 모두 끝났을 때 이것은 등사하기 전에 불에 타 없어졌다. 김필순은 의사가 되기 위해 거의 15년간 노력했으며, 이동안 drug clerk, 간호부 혹은 외래 및 병원 보조원으로서 일했다. 상심되는 경우도 많았고 목표에 절대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졸업 후 그의 활동은 당시 선교부에서 월간으로 발행되던 <The Korea Mission Field>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911년 1월호에는 그의 사진을 표지사진으로 넣고 후에 그의 매제가 된 김규식이 쓴 글이 실려있다. 김필순은 병원일로서는 졸업 직후 병동(病棟)과 외과(外科)의 부의사(assistant physician)로 임명되었고, 1911년에는 병원 외래 책임자가 되었다. 아울러 졸업 직후 의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1910년에는 의학교의 Manager(혹은 Director)로 임명되었다. 1910-11년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하루 3-4시간 강의를 하면서 해부학과 생물학을 담당하였고, 생리학은 Pieters 부인과, 위생학과 외과학은 에비슨 교장과 분담하여 강의하였다.
한편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도 활동했는데, 1908-1909년에는 간호원양성소에서 그가 번역한 해부생리학 교과서로 강의하였다. 1911년의 제2회 졸업식에서는 부의장(associate chairman)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렇게 바쁜 중에도 그는 많은 의학교과서를 번역했는데, 현재 해부학, 화학 및 외과 총론 교과서가 남아 있다. 이 책들은 세브란스의학교 이외에도 국내의 많은 선교 병원에 무료로 배포되어 교과서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독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김필순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큰 시련이 닥치고 말았으니, 이것이 소위 105인 사건이었다. 1911년 9월 총독부는 신민회 중심 멤버를 포함한 항일지식인 7백여명을 검거 구속하여 105인에게 실형을 언도하였던 것이다. 신민회에 대한 일제 검거를 사전에 안 김필순은 세브란스 병원에 한 통의 편지를 남겨두고 모습을 감추었다. ‘신의주에 난산을 겪고 있는 임산부가 있어 전보로 내게 왕진을 요청하는 까닭에 외출한다.’ 그날 이후 김필순은 다시는 서울 땅을 밟은 일이 없었다.
이때 김필례는 오빠의 격려에 힘입어 일본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김필례 전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필례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떄 김필순으로부터 보내지고 있던 학비가 중단되었다. 오빠가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행방불명된 것이었다. 105인 중에서 핵심 주동 세력이 김필순의 집에서 모의했다하여 일경은 김필순을 잡아들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김필순은 하는 수 없이 신의주에 있는 세브란스 분원에 출장간다는 말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사실 그는 서간도 통화현으로 가서 병원을 개업했다.
어느날 일본에 있는 김필례에게 뜻하지 않은 손님이 새벽에 기숙사로 찾아와 허리춤 속에 감추어 온 하얀 종이로 꼰 종이타래을 꺼내어 김필례에게 건네 주었다. 종이타래을 풀어보니 그것은 종이 조각마다 순서를 적어 넣은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필례 동생 보아라. 내가 긴 말을 자세히 적어 보내지 못함이 서운하나 지금 형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 나는 국내의 일로 일경에 쫓기는 몸이 되어 이곳 서간도로 왔다. 이곳에서 난 내 인생을 개척할 생각이다. 난 이곳에서 지금까지 꿈꾸어 오던 이상촌을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우리나라 독립의 기틀을 닦고자 한다. 필례야. 넌 이곳으로 와 그 동안 배운 지식을 가지고 교육을 맡아주어야겠다. 편지 전해준 분을 따라 귀국하기 바란다. 귀국 즉시 가족들을 데리고 서둘러 서간도로 오기 바란다. 이만 총총.’
귀국한 필례는 어머니의 강한 뜻을 꺾지 못하고, 언니 김순애와 필순의 가족들 짐을 챙겨 주고 서간도로 들어가는 가족들 전송만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수밖에 없었다.
필례의 언니 김순애가 필순의 어머니, 아내, 네 명 아들을 데리고 간 통화에는 신민회의 이회영 등이 건설하고 있던 조선 독립군 기지와 조선인촌이 있었다. 김필순은 이곳에서 병원을 열고, 모든 수입을 조선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였다. 그러나 통화가 점차 일제의 영향권에 들며 압박이 심해지자 1916년 몽골 근처의 치치하얼로 도피하였다. 이곳에서 김필순은 병원을 개설하고, 땅을 구입하여 평소 꿈꾸던 조선인을 위한 이상촌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 당시의 상황을 조선족 학자 현용순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김필순은 토지 구입을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땅을 구입한 것은 통화에서 멀리 떨어진 몽골 인근의 치치하얼에 이상촌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필순은 의원을 열고 어머니와 아내가 빈농을 지도하고 원조했다. 또한 신혼이었던 김필례, 최영욱 부부도 와 최영욱은 의원에서 일하고 김필례는 농민교육에 종사했다. 김필순의 목적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조선 청년을 이 이상촌에 모아 독립군 양성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한편 오빠를 도와 치치하얼에서 잠시 신혼 생활을 한 김필례의 전기에는 치치하얼의 생활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필례가 최영욱과 결혼할 무렵 김필순은 치치하얼에서 130여 리가 넘는 땅을 사서 이상촌 건설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러시아제 농기구를 구입하고 동포 빈농 30가구를 받아들였다. 김필순은 병원일에 바빴음으로 형 김윤오를 불러다가 감독일을 맡겼다. 선생의 어머니 안씨도 이곳으로 와 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흙 벽돌을 직접 찍기도 했다. 필순은 이곳에다 이상촌을 세우고 중국 일대에 흩어져 있던 애국 청년들을 이곳으로 규합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했다. 김필례가 최영욱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리자 김필순은 김필례 부부에게 치치하얼로 들어와 같이 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최영욱은 처남의 제의에 선뜻 응하고 치치하얼로 이사하였다. 최영욱은 병원 일을 주로 도왔다. 그러나 김필례가 임신을 하게 됨에 따라 그들 부부는 전라도 광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김필순은 애석하게도 일제의 특무요원으로 생각되는 이웃 일본인 의사가 전해준 우유를 먹은 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1919년 음력 윤7월 7일 영면(永眠)하였다. 이때의 정황을 막내딸 김로는 생전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씀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통화에서 의원을 연 아버님은 수입의 전부를 조선독립군에 바쳤다. 우리는 치치하얼 북관악 가호동 3호에 살았다. 아버님이 통화에서 도망해 온 다음 조선독립군은 전부 파괴되고 독립군 전대원이 감옥에 들어갔다. 1919년 어느 날 아버지는 의원의 간호부로부터 한 봉지의 우유를 받았다. 간호부가 말하기를 동료인 일본인 내과의사가 ‘김선생은 위급한 환자 치료로 피로한데다 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않으니 이것을 마시도록 주시오’하고 말하여 그녀에게 넘겨 주었다. 그렇지만 김필순은 우유를 마신 직후 기분이 나빠져 그 간호부의 부축을 받아 집에 돌아왔는데 설사는 멈추지 않았다. 다음날에는 말하는 것도 불가능해졌기에 간호부는 일본인 내과의사에게 왕진을 부탁했다. 일본인 의사는 암염으로 만든 알약을 뜨겁게 해서 김필순에게 먹였는데, 김필순은 배가 시커멓게 변하고 결국은 사망하였다. 조선인 간호부는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김필순 사망후 일본인 의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는 틀림없는 일본의 특무 요원이었을 것이다. 왜나하면 통화의 동지가 감옥에서 보석으로 풀려나 김필순을 방문할 무렵 그 일본인 의사는 김필순 의원에 모습을 나타냈고 사망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해에서 발생되던 신문인 <독립>에 그의 사망 기사가 실려 있다. 의학박사 김필순씨는 흑룡강성에 재하여 아족의 장래를 위해 개척에 노력하다가 음력 윤7월 7일에 불행히 영면하고……
1919년 김필순이 세상을 뜨자 9식구의 대가족은 갑자기 생활난에 부딪쳤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열었던 진료소의 간호부, 조산부로, 둘째는 진료소의 견습의사로 일했다.” 게다가 일본 영사관에서는 일본군을 파견해 집안을 수색했는데 다행히 김필순이 궤짝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비밀서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비밀 서류란 20여명의 혁명지사들이 서명한 ‘조선독립운동서약서’였다.
한편 김필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최영욱은 치치하얼로 가서 필순의 가족들을 광주로 데려오자고 했지만, 김필례는 장남 덕봉이의 교육만을 맡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의 교육만을 맡았다. 김필례는 덕봉이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를 만들어 볼 심산으로 세브란스의전에 입학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세브란스의전 입학은 뜻하지 않은 장애가 가로막고 있었다. 김필순이 세브란스 재직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불온사상자의 자녀로 분류되어 입학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설령 입학허가가 나더라도 덕봉이가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일본어로 하는 강의를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필례는 하는 수 없이 산동의대에 입학시켰다가 나중에 봉천의대에 편입시켜 졸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김덕봉(김영)은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세브란스병원에서 수련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당직의로 근무하였고, 나중에 산부인과 수련을 받았다. 수련을 끝낸 후 김덕봉은 간도 용정의 제창병원에서 근무하기로 하였다. 셋째 아들인 김염은 1930년대 중국 영화계에서 활동하여 ‘상해(上海)의 영화황제(映畵皇帝)’라는 호칭을 얻었으며, 그에 대한 전기가 있고, 1996월 4월 28일에는 KBS의 일요스페셜에서 ?상해의 영화황제 김염?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다. 김필순은 1997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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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순은 광산(光山) 김씨이며, 1878년 6월 25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에서 김성섬(金聖贍)과 둘째 부인 안성은(安聖恩) 사이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났다.
김필순은 우리나라 최초 의사 7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으며, 독립운동을 하다 비록 일찍 사망했지만 그가 진정한 세브란스인의 표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집안은 일찍이 개화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집안에 속하며, 서상륜(徐相崙),서경조(徐景祚) 형제가 장연에 우리나라 최초의 소래교회를 세울 때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그의 집안에서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다수의 초창기 세브란스 출신 의사들과 인척관계를 이루어 초창기 우리나라 의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 여동생 김구례(金求禮)는 같은 장연 출신인 서병호(徐丙浩)와 결혼하였다. 서병호는 서경조의 둘째 아들로서,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발히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형인 서광호(徐光昊)는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이다. 둘째 여동생 김순애(金順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과 결혼하였다. 원래 김규식은 김순애와 혼담이 오간 적도 있었으나, 김순애의 학교 동기생 조은수를 부인으로 얻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건강이 악화되어 아들 하나를 남기고 사망하면서 유언으로 학교 동기생인 김순애와 결혼할 것을 부탁하고 주위에서 강권함에 따라 김순애와 재혼하게 된 것이었다. 김규식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그의 아들 진동과 사촌 누이동생 은식을 대동하고 몽고의 고린(庫倫)을 여행했을 때 만난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 이태준(李泰俊)은 그의 사촌 누이동생 은식과 결혼하였다. 김필순의 셋째 여동생 김필례(金弼禮)는 한국 YWCA의 창설자로서 세브란스 6회 졸업생 최영욱(崔泳旭)과 결혼하였다. 김성섬 첫째 부인의 장남인 김윤방(金允邦)의 둘째딸 김미염(金美艶, 즉 김필순의 조카)은 세브란스 6회 졸업생 방합신(方合信)과 결혼하였다. 김미염의 바로 아랫 동생은 그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이다. 김윤방의 둘째 동생이며, 김필순의 형인 김윤오(金允伍)는 세브란스 3회 졸업생 고명우(高明宇)를 사위로 맞이하였다.
김필순의 가족 배경에 대해서는 그의 동생 김필례의 전기 및 그의 아들 김염의 전기에 비교적 잘 기술되어 있다. 김필순은 한학을 수료하였으며, 일찍부터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과 자유롭게 접촉할 기회를 가졌고 1894년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95년 어느 날 언더우드는 김필순 부모에게 ‘집에 붙들어 놓고 책임지고 공부시키겠다’고 요청하여, 김필순은 서울에서 신식교육을 받게 되었다. 김필순은 언더우드 집에 머물면서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남달리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특히 영어발음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후에 에비슨의 통역을 할 수 있었고 의학교과서를 번역했으며 에비슨의 의학 강의 시간에 자주 통역하게 된 것이다.
4년간 배재에서 학업을 마친 김필순은 1899년 제중원(濟衆院)에서 처음에는 외국인 새록스의 통역 및 조수로서 일하다가, 자연스럽게 1900년에는 에비슨의 통역(通譯) 조수(助手)로 활동하였다. 그는 에비슨을 도와 그레이 해부학 교과서를 번역하였으나, 불행히도 원고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1906년 해부학교과서를 다시 번역하는 것을 필두로 외과총론, 화학, 해부생리학, 내과학 등 많은 책을 번역하였다. 이와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미 졸업 전에 저학년 학생들의 강의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창시절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는 서울로 가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필순이 행실이 좋지 않은 어떤 여자와 사귀느라 공부는 팽개쳐두고 있다는 소식이 소래마을로 전해졌다. 김필순의 어머니는 매일 밤 돗자리와 빗자루를 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가 기도를 올렸다. 어느날 어머니는 기도 중 ‘네 아들을 내가 구원했으니,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거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뒤에 안일이지만 참으로 공교롭게도 그 무렵부터 김필순이 마음을 고쳐 먹고 학업에 열중하였다.
김필순은 의학도로서 병실 및 외래에서 보조 역할을 했고 많은 책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수년 동안 병원 경영에 관해서도 상세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당시 에비슨이 그의 능력을 인정해 장차 세브란스 병원의 책임을 맡고 한국의 의학을 이끌어야 할 재목으로 키우려 했던 것은, 세브란스병원을 건축하고 있을 당시 상황을 적은 <구한말비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교재의 한글번역을 도운 의과 대학생 가운데 미스터 김이 ‘고오든’씨의 통역인으로 수고했고, 모든 일이 별다른 어려움없이 진척되었다. 드디어 난방과 배관 공사를 해야 할 순서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 분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고오든’씨와 미스터 김과 나 이렇게 셋이서 해야만 했다. 나는 경영해 오던 병원에서 여러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끝나는대로 공사장에 달려가서 두 사람과 같이 일을 했다.
한편 김필례의 전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01년 김필례는 오빠 김필순의 지시에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필순은 제중원에 있으면서 의학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환자 진찰시 통역을 맡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의술을 조금씩 배워 진찰할 수 있게 되었다. 제중원은 차차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사람들이 몰리어 환자도 늘어가니 입원환자들의 식사를 해결하는 일이 화급한 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필순은 소래마을로 연락하여 가족들이 서울로 올라오도록 했던 것이다. 인순, 순애, 필순의 아내, 어머니, 필례 등 다섯이었다.
김필순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는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국운이 기울어 갈 때였다. 그는 착실한 기독교인으로 항상 정의감에 불타 있었으나, 그가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 것은 1907년 8월에 일어난 조선군의 강제 해산과정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김필례 전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07년 구한국 군대의 해산은 민족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하였다. 보병 대대 장병들이 시가전을 벌이던 날 김필례는 둘째 오빠 윤오 집에 있었다. 김필례는 필순의 집에 있는 어머니 안씨가 걱정이 되어 필순의 집으로 찾아가는 길에 길 위에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알고 보니 온통 핏물이었다. 김필례가 세브란스 병원 안에 있는 필순의 집에 다다랐을 때 세브란스 병원도 아수라장으로 변한 뒤였다. 세브란스 병원 안은 부상자와 시체들로 가득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소달구지에 적십자기를 달고 연신 환자들을 날라오고 있었다. 김필순은 그날 하루 종일 정신없었다. 밀려드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눈코 뜰새 없었다. 가족들도 그날은 늦게서야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그는 점심먹고 있는 가족들에게 달려와, ‘어머니 일손이 달려요. 부상병 간호와 치료하는 일 좀 도와주세요’ ‘시집도 안간 양가집 규수가 아무리 부상병이라고는 하나 남정네들 간호하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니?’ ‘어머니 지금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런 걸 시시콜콜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필순은 마음이 다급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야속하기도 했다. 김필순이 그리스도의 참사랑 실천까지 들먹이자 그제서야 어머니는 마지 못하는 체하며 집안 처녀들이 부상병을 간호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리하여 함라, 미염, 마리아와 김필례, 김필순 이 다섯은 다친 군인들을 밤낮 가리지 않고 정성껏 돌보았다. 김필례는 열흘동안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부상병 간호를 했다. 밤에는 특히 부상병들의 신음소리로 아비규환이었다. 김필순의 조카인 김마리아가 뒷날 항일애국운동, 독립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어올릴 수 있게 된 것도 아마 이 세브란스 체험에 크게 힘입었음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김필순은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이동휘, 김구 등이 1907년 9월 조직한 비밀정치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 있는 그의 집에서 회의를 연 일도 있었다. 신민회에서는 본국을 떠나 중국령의 압록강 상류 북안 通化에 독립군 기지를 세운다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1908년 6월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한 김필순은 독립운동을 위해 1912년초 조국을 떠날 때까지 에비슨 교장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학교 발전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이미 졸업 전부터 후배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고, 병원 경영에 관해서도 에비슨으로부터 특별히 사사받은 그에게 많은 역할이 주어진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처음에 한국에는 한글로 된 의학서적이 없었다. 김필순은 영어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한문만 약간 알았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선생과 옆에 앉아 공부해야 했으나, 다른 임무, 환자 혹은 외국 방문객에 의해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다. 교과서 번역은 한 단원 한 단원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용어를 고안해내야 했다. 번역이 끝나면 조금씩 등사해 다른 학생들에게 배포되었다. 해부학 번역이 모두 끝났을 때 이것은 등사하기 전에 불에 타 없어졌다. 김필순은 의사가 되기 위해 거의 15년간 노력했으며, 이동안 drug clerk, 간호부 혹은 외래 및 병원 보조원으로서 일했다. 상심되는 경우도 많았고 목표에 절대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졸업 후 그의 활동은 당시 선교부에서 월간으로 발행되던
한편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도 활동했는데, 1908-1909년에는 간호원양성소에서 그가 번역한 해부생리학 교과서로 강의하였다. 1911년의 제2회 졸업식에서는 부의장(associate chairman)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렇게 바쁜 중에도 그는 많은 의학교과서를 번역했는데, 현재 해부학, 화학 및 외과 총론 교과서가 남아 있다. 이 책들은 세브란스의학교 이외에도 국내의 많은 선교 병원에 무료로 배포되어 교과서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독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김필순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큰 시련이 닥치고 말았으니, 이것이 소위 105인 사건이었다. 1911년 9월 총독부는 신민회 중심 멤버를 포함한 항일지식인 7백여명을 검거 구속하여 105인에게 실형을 언도하였던 것이다. 신민회에 대한 일제 검거를 사전에 안 김필순은 세브란스 병원에 한 통의 편지를 남겨두고 모습을 감추었다. ‘신의주에 난산을 겪고 있는 임산부가 있어 전보로 내게 왕진을 요청하는 까닭에 외출한다.’ 그날 이후 김필순은 다시는 서울 땅을 밟은 일이 없었다.
이때 김필례는 오빠의 격려에 힘입어 일본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김필례 전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필례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떄 김필순으로부터 보내지고 있던 학비가 중단되었다. 오빠가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행방불명된 것이었다. 105인 중에서 핵심 주동 세력이 김필순의 집에서 모의했다하여 일경은 김필순을 잡아들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김필순은 하는 수 없이 신의주에 있는 세브란스 분원에 출장간다는 말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사실 그는 서간도 통화현으로 가서 병원을 개업했다.
어느날 일본에 있는 김필례에게 뜻하지 않은 손님이 새벽에 기숙사로 찾아와 허리춤 속에 감추어 온 하얀 종이로 꼰 새끼를 꺼내어 김필례에게 건네 주었다. 새끼를 풀어보니 그것은 종이 조각마다 순서를 적어 넣은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필례 동생 보아라. 내가 긴 말을 자세히 적어 보내지 못함이 서운하나 지금 형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 나는 국내의 일로 일경에 쫓기는 몸이 되어 이곳 서간도로 왔다. 이곳에서 난 내 인생을 개척할 생각이다. 난 이곳에서 지금까지 꿈꾸어 오던 이상촌을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우리나라 독립의 기틀을 닦고자 한다. 필례야. 넌 이곳으로 와 그 동안 배운 지식을 가지고 교육을 맡아주어야겠다. 편지 전해준 분을 따라 귀국하기 바란다. 귀국 즉시 가족들을 데리고 서둘러 서간도로 오기 바란다. 이만 총총.’
귀국한 필례는 어머니의 강한 뜻을 꺾지 못하고, 언니 김순애와 필순의 가족들 짐을 챙겨 주고 서간도로 들어가는 가족들 전송만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수밖에 없었다.
필례의 언니 김순애가 필순의 어머니, 아내, 네 명 아들을 데리고 간 통화에는 신민회의 이회영 등이 건설하고 있던 조선 독립군 기지와 조선인촌이 있었다. 김필순은 이곳에서 병원을 열고, 모든 수입을 조선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였다. 그러나 통화가 점차 일제의 영향권에 들며 압박이 심해지자 1916년 몽골 근처의 치치하얼로 도피하였다. 이곳에서 김필순은 병원을 개설하고, 땅을 구입하여 평소 꿈꾸던 조선인을 위한 이상촌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 당시의 상황을 조선족 학자 현용순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김필순은 토지 구입을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땅을 구입한 것은 통화에서 멀리 떨어진 몽골 인근의 치치하얼에 이상촌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필순은 의원을 열고 어머니와 아내가 빈농을 지도하고 원조했다. 또한 신혼이었던 김필례, 최영욱 부부도 와 최영욱은 의원에서 일하고 김필례는 농민교육에 종사했다. 김필순의 목적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조선 청년을 이 이상촌에 모아 독립군 양성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한편 오빠를 도와 치치하얼에서 잠시 신혼 생활을 한 김필례의 전기에는 치치하얼의 생활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필례가 최영욱과 결혼할 무렵 김필순은 치치하얼에서 130여 리가 넘는 땅을 사서 이상촌 건설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러시아제 농기구를 구입하고 동포 빈농 30가구를 받아들였다. 김필순은 병원일에 바빴음으로 형 김윤오를 불러다가 감독일을 맡겼다. 선생의 어머니 안씨도 이곳으로 와 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흙 벽돌을 직접 찍기도 했다. 필순은 이곳에다 이상촌을 세우고 중국 일대에 흩어져 있던 애국 청년들을 이곳으로 규합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했다. 김필례가 최영욱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리자 김필순은 김필례 부부에게 치치하얼로 들어와 같이 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최영욱은 처남의 제의에 선뜻 응하고 치치하얼로 이사하였다. 최영욱은 병원 일을 주로 도왔다. 그러나 김필례가 임신을 하게 됨에 따라 그들 부부는 전라도 광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김필순은 애석하게도 일제의 특무요원으로 생각되는 이웃 일본인 의사가 전해준 우유를 먹은 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1919년 음력 윤7월 7일 영면(永眠)하였다. 이때의 정황을 막내딸 김로는 생전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씀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통화에서 의원을 연 아버님은 수입의 전부를 조선독립군에 바쳤다. 우리는 치치하얼 북관악 가호동 3호에 살았다. 아버님이 통화에서 도망해 온 다음 조선독립군은 전부 파괴되고 독립군 전대원이 감옥에 들어갔다. 1919년 어느 날 아버지는 의원의 간호부로부터 한 봉지의 우유를 받았다. 간호부가 말하기를 동료인 일본인 내과의사가 ‘김선생은 위급한 환자 치료로 피로한데다 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않으니 이것을 마시도록 주시오’하고 말하여 그녀에게 넘겨 주었다. 그렇지만 김필순은 우유를 마신 직후 기분이 나빠져 그 간호부의 부축을 받아 집에 돌아왔는데 설사는 멈추지 않았다. 다음날에는 말하는 것도 불가능해졌기에 간호부는 일본인 내과의사에게 왕진을 부탁했다. 일본인 의사는 암염으로 만든 알약을 뜨겁게 해서 김필순에게 먹였는데, 김필순은 배가 시커멓게 변하고 결국은 사망하였다. 조선인 간호부는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김필순 사망후 일본인 의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는 틀림없는 일본의 특무 요원이었을 것이다. 왜나하면 통화의 동지가 감옥에서 보석으로 풀려나 김필순을 방문할 무렵 그 일본인 의사는 김필순 의원에 모습을 나타냈고 사망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해에서 발생되던 신문인 <독립>에 그의 사망 기사가 실려 있다.
의학박사 김필순씨는 흑룡강성에 재하여 아족의 장래를 위해 개척에 노력하다가 음력 윤7월 7일에 불행히 영면하고……
1919년 김필순이 세상을 뜨자 9식구의 대가족은 갑자기 생활난에 부딪쳤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열었던 진료소의 간호부, 조산부로, 둘째는 진료소의 견습의사로 일했다.” 게다가 일본 영사관에서는 일본군을 파견해 집안을 수색했는데 다행히 김필순이 궤짝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비밀서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비밀 서류란 20여명의 혁명지사들이 서명한 ‘조선독립운동서약서’였다.
한편 김필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최영욱은 치치하얼로 가서 필순의 가족들을 광주로 데려오자고 했지만, 김필례는 장남 덕봉이의 교육만을 맡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의 교육만을 맡았다. 김필례는 덕봉이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를 만들어 볼 심산으로 세브란스의전에 입학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세브란스의전 입학은 뜻하지 않은 장애가 가로막고 있었다. 김필순이 세브란스 재직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불온사상자의 자녀로 분류되어 입학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설령 입학허가가 나더라도 덕봉이가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일본어로 하는 강의를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필례는 하는 수 없이 산동의대에 입학시켰다가 나중에 봉천의대에 편입시켜 졸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김덕봉(김영)은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세브란스병원에서 수련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당직의로 근무하였고, 나중에 산부인과 수련을 받았다. 수련을 끝낸 후 김덕봉은 간도 용정의 제창병원에서 근무하기로 하였다. 셋째 아들인 김염은 1930년대 중국 영화계에서 활동하여 ‘상해(上海)의 영화황제(映畵皇帝)’라는 호칭을 얻었으며, 그에 대한 전기가 있고, 1996월 4월 28일에는 KBS의 일요스페셜에서 ?상해의 영화황제 김염?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다.
김필순은 1997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