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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afe.daum.net/YEsarang/QQl4/393
우암 송시열의 생애와 서예
[필자 주]; 이 글은 2017년 "향교 서원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회덕향교에서 개최한 '달빛 인문학'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참고로 2016년은 동춘 송준길, 금년은 우암 송시열 선생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가 있었습니다. 1.
머리말
우암 송시열(1607~1689)은 대전의
대학자로서 자랑스러운 선현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송시열을 제한된 지면으로 다 말하기는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등장한다는 그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의 시각이 공존하는 게 사실이다. 숙종실록에는 송시열(卒記)을 이렇게 쓰고 있다. “송시열은 타고난 자질이 엄의·강대하여 어려서부터 성학에 뜻을 두었고, 자라서는 김장생에게 배웠다. 뜻이 독실하고 힘써 실천하여 더욱 채우고 밝힘을 더하니, 마침내 동방이학의 적전이 되었다. 학문은 주자를 주로 하고 이이(李珥)를 제일로 삼았다. 언행·진퇴는 주문(朱門)의 법을 따랐으며, 성취한 바는 정밀하고 원대하여 근세의 선비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사진 : 우암의 74세 시, 영정] [肅宗 21卷; 時烈 恩津人 其父甲祚 嘗夢孔子率群弟子至家 而生時烈 故小字聖? 天資嚴毅剛大 自幼已志于聖學 及長學于金長生 篤志力踐 益加充闡 卒之爲東方理學之嫡傳 蓋其學 一主於朱子 而於東儒 則必以李珥爲第一 其言行語默 出處進退 動遵朱門程法 就其所成就而論之 其高密遠大 非近世群儒所可及也]
송시열은 1607년 11월 12일 부친 송갑조(睡翁 宋甲祚, 1574~1628)와 모친 선산 곽 씨(善山郭氏)의 3남으로 옥천군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이때 수옹(睡翁) 공이 종가의 제사로 청산의 아사(衙舍)에 있으면서 공자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오는 꿈을 꾸었는데, 조금 있다가 해산했다는 기별이 왔다. 그래서 어릴 때 이름을 성뢰(聖賚)라고 했다. 아래에 문중의 자료를 근거로 구성한 송시열의 가계(家系)와 생애는 다음과 같다. 2. 송시열의 가계와 생애 송시열은, 전술한대로 1607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 촌 외가에서 태어났다. 8세 때 회덕 송이창의 집에서 그의 아들 송준길과 함께 공부를 했다. 뒤에 연산의 김장생과 아들 김집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27세가 되던 1633년 생원시에서 장원을 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다음 해 정월 인조가 항복을 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충북 영동의 황간(冷泉)에 우거하며 학문에 힘썼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거의 나아가지 않았다. 43세가 되던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출사의 길에 나섰다. 효종 재위 중 한 때 청(淸)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를 꿈꾸기도 했으나 효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뜻을 접어야 했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 연간(1659~1674)에는 예송(禮訟, 기해예송 · 갑인예송)을 겪으면서 인생의 시련과 부침(浮沈)을 겪는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평생 정치적 동지였던 동춘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도 사별한다.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양사(兩司, 司憲府와 司諫院)의 논핵(論劾)으로 삭탈관직 되어 함경도 덕원부로 귀양을 갔다. 69세 때인 1675년부터 시작된 귀양살이는 장기(長?)에 위리안치 되고, 다시 거제도로 이배되었다. 74세가 되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석방되어 회덕으로 돌아왔다. 이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1683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로 물러났다. 83세가 되던 1689년(숙종 15년) 1월 원자책봉이 너무 이르다고 상소했다가 숙종의 미움으로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같은 해 6월 나국(拿鞠)의 명으로 상경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영욕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3. 우암의 서예와 양송체(兩宋體) 우리나라의 서예는 대체로 기원 전 2세기 무렵, 중국의 한자를 수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영향을 받았으며, 7세기 중반부터 당(唐)나라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가 유행했다. 고려시대에는 미불(米?),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등 중국 북송(北宋) 서예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10세기 전반에는 구양순체가 바탕이 된 날카롭고 강한 필치의 글씨가 비석의 글씨로 쓰였으며 11세기부터 왕희지의 행서체가 유행했다. 조선 전기에는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했다. 글씨를 잘 써서 당대의 명필로 꼽혔던 안평대군은 원나라 조맹부(趙孟?)의 송설체에 뛰어났다. 이로부터 송설체 유행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조선 서예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에는 송설체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과 함께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기반으로 한호(韓濩)의 석봉체(石峯體)가 나왔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양송체(兩宋體)와 허목(許穆, 1595~1682)의 미수체(眉?體)가 등장했다. 문자로 표현하는 예술을 우리는 서예(書藝)라 부른다. 이를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라 한다. 서예는 먹물과 붓으로 선(線)의 움직임과 변화로 감정을 나타내고 글자로 정신을 전달한다. 서예는 예로부터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교양의 하나로 아름다운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여겼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서예를 위해서 글씨를 열심히 썼다. 뿐만 아니라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인격을 닦아서 고결한 정신을 갖추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글씨를 쓰려면 여러 용구들이 필요하지만, 지·필·묵·연(紙筆墨硯)은 필수적이다. 그 중에도 “사흘 동안 세수는 못해도 벼루는 씻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벼루를 소중하게 여겼다. 사진은 동춘이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다. 대전 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벼루 갑에는 ‘임지청사(臨池淸事)’라 썼는데 중국(後漢)의 장지(張芝)가 글씨를 열심히 써서 연못의 물이 검게 변했다는 고사를 따온 말이다. 동춘도 이런 심정으로 글씨를 익혀 우암과 더불어 이른바 양송체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握筆濡毫 붓을 잡아 먹물로
적시고 우암이 생전에 쓰던 서예용구가 지금껏 전해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서예나 간찰에 사용했던 낙관(落款)과 수결(手決)은 남아있다.(사진) 또 1666년 홍석(洪錫)에게 써준 칠물명(七物銘)에 벼루와 붓과 먹의 기록이 있어서 글씨를 쓰는 우암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벼루 : 밖은 방정하여 바뀌지 않고/안은 비어서 먹물을 용납하네/오직 부지런히 씻어서/끝내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소(硯 : 外方不遷 內虛能容 惟勤洗濯 毋與垢終) 붓 : 몸이 예리하고 동작이 빈번하여/수(壽)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니/이 점을 경계로 삼아/오직 인(仁)을 힘쓰게나(筆 : 體銳動? 宜爾不壽 斯可爲戒 惟仁是務) 먹 : 멀리하면 사용할 수 없고/가까이하면 물들기 쉬우니/멀리하고 가까이하는 데는/점검을 잘해야 하느니(墨 : 遠之缺用 近則易染 親疏之際 正好點檢) 옛 선비들에게 필기용구인 문방사우는 깊은 애정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의인화(擬人化)해서 벼루는 도홍(陶泓), 먹은 진현(陳玄), 붓은 모영(毛潁), 종이는 저선생(楮先生)으로 부르기도 했다. 또 선비들은 하나같이 자호(字號)를 가지고 있었다. 송시열의 호는 ‘우암(尤庵)’으로 김익희가 지어주었다. 우암 말고도 華陽洞主 · 巴谷病? · 南澗老? · 橋山老父 등이 더 있다. 동춘당(현판)의 ‘華陽洞主’가 그것이다. 젊어서 한 때는 ‘泉隱’이라고도 했다. 병자호란 후 벼슬할 뜻을 버리고 황간(冷泉)에 숨어살 때다. 김익희(金益熙, 1610~1656)의 문집 창주유고(滄洲遺稿)에 “泉隱은 尤庵의 舊號”라는 기록이 있다. 이 사실은 한남대학교 한기범 교수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1). 양송 체의 근간 본고의 양송(兩宋)은 동춘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을 말한다. 따라서 양송체(兩宋體)는 두 사람의 서체를 일컫는 말이다. 양송체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학예일치(學藝一致)를 추구하며 선호했던 서체의 하나였다. 동춘 · 우암은 학문적 연원이 기호학파로서 당시 유행하던 석봉체(石峰體)를 기본으로 삼았다. 여기에 장중한 무게와 기품을 더해서 새로운 형태의 서체를 형성했다. 이러한 현상은 만년으로 갈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동춘과 우암의 서체는 한석봉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중국의 안진경(顔眞卿)과 주자(朱熹)의 필법을 포괄하고 있다. 특히 우암은 이를 바탕으로 활달하고 거침없는 큰 글씨(大字)를 잘 썼다. 반면 동춘은 행초서(行草書)에 능했는데, 유려하면서도 단정한 선비의 덕을 서예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유묵(遺墨)으로 본 우암의 서예 부귀이득 명절난보(富貴易得 名節難保)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富貴易得名節難保(부귀이득 명절난보) 천지생만물(天地生萬物 聖人應萬事 惟一直字而已)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의 대자첩(大字帖)이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성균관대학교는 ‘성대 600주년기념관’ 개관 50주년을 기념해 성대박물관(관장 이준식)에서 우암 송시열 선생 대자첩 등을 전시하고 있다. 대자첩 글귀 ‘富貴易得名節難保(부귀이득명절난보)’는 ‘부귀는 얻기 쉬우나 명예와 절개는 지키기 어렵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글자 하나가 대략 89×90cm에, 전체 길이가 7m에 이르고, 국내 서예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 쓴 가장 큰 글씨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씨는 우암이 소론에 의해 모함을 받았을 때, 목숨을 걸고 변론해준 제자 농계 이수언(1636~1697)에게 써준 것으로, 중국의 성리학자 주희의 저서 '주자대전(朱子大全)' 제54권에 나오는 내용이다. 1853년(철종 4년) 우암의 8대손으로 좌의정에 오른 송근수(1818∼1903)가 쓴 ‘대자첩’의 발문을 보면 ‘농계의 후손인 이인로에게 글씨를 돌려받아 첩(帖)으로 만들어 보물로 간직한다’고 소장하게 된 계기가 자세히 쓰여 있다. 성균관대 박물관에서는 지난 1976년부터 이 대자첩을 소장해 왔으며 이번이 첫 공개다. 또한, 이번 전시회에는 박물관이 지난 50년 동안 수집해온 고려와 조선시대의 청자와 분청자, 백자 등도 함께 공개되고 있다. 주자의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고 성인이 만사에 대응하는 것은 오직 直 한 글자일 뿐이다.”라는 글로 우암의 ‘直’사상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글씨의 구성에서 ‘地’자의 ‘也’획을 간결하게 처리해서 여백을 두었다. 조선 말 유학자 임헌회(任憲晦, 1811~1876)가 서첩으로 전한 것이다. 마지막 두 폭에는 임헌회와 그의 문인 전우(田愚, 1842~1922)의 발문이 있다. 담박·명지·영정·치원(澹泊·明志·寧靜·致遠) : 대전 시립박물관 소장 대자 병풍으로 대전 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마음에 욕심이 없고 깨끗해야 뜻을 밝게 가질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야 원대한 이상에 이를 수 있다.”는 제갈량의 명구(名句)이다. 거친 듯 활달한 필치와 필속(筆速)의 빠른 속도가 빚어낸 비백(飛白)이 시선을 멎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여백이 적어서 답답한 느낌이 없지 않다. 후세로 오면서 글씨 주변이 재단된 것으로 보여 아쉬움이 남는다. 역무이 등운곡(歷武夷 登雲谷) : 강릉오죽헌 시립박물관 소장 우암이 문인 심징(沈澄, 1621~1702)에게 써준 병풍이다. 글씨가 쓰인 시기는 1675년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강릉을 지나면서 쓴 것이다. “무이를 지나 운곡에 오른다.” 이 글은 당시 경포호수 동쪽에 무이산이 있고 북쪽에 운곡이 있었는데, 정자와 주자가 살던 곳과 이름이 같대서 써주었다고 한다. 자형과 필세가 거침이 없다. 237x154 크기로 하단의 작은 글씨는 후손의 발문(跋文)이다. 사마시 장원시권(司馬試 壯元試券) : 대전우암사적공원 유물관소장(영인본) 우암이 27세이던 1633년 사마시에서 장원을 한 시험답안지이다. 이때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 시관(試官)이었는데 역의(易義) “한 음과 한 양을 도라 한다(一陰一陽之謂道)”를 시제(試題)로 내걸었다. 뜻이 매우 어려워서 다른 선비들은 손도 대지 못했는데, 우암은 일필휘지로 써내려가서 장원이 되었다고 한다. 동춘당(同春堂) : 은진송씨 동춘당문정공파종중 소장 대전시민이면 너무나 익숙한 글씨다. 동춘당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지금 걸려있는 현판은 모각품(模刻品)이다. 원판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종중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 현판 속 ‘崇禎戊午暮春’은 ‘1678년 3월’로 동춘 사후 6년 뒤에 쓴 것이다. 글씨 전체가 단정하면서 강직한 느낌이 있다. ‘同春’은 송준길의 자호(自號)로 “만물과 더불어 봄을 함께 한다(蓋取與物同春之義)”는 뜻이다. 1649년 부친의 별당(淸坐窩)을 옮겨 짓고 자신의 호(同春)를 당의 이름으로 삼았다. 확연루(廓然樓) : 전남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
안분(安分) : 개인 소장 “安分”은 풀이대로 ‘자신의 분수를 편안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우암의 삶의 철학이리라. 이 글씨는 2008년 서울 예술의전당(서예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이때 어느 평론가가 “글자 안분은 단순히 글자가 아니다. 이것은 예술이다. 갓머리변의 한 획은 노련한 무용수가 몸을 엎드려 허리를 펴고 힘차게 솟구쳤다가 허리를 휘는 동작이다. 갓머리 아래 계집녀(女) 역시 두 무용수가 교차하며 혼을 불사르는 것 같은 몸짓을 하고 있다. 분(分)의 여덟팔(八) 왼쪽 삐침은 무사가 땅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고, 오른쪽 삐침은 무사와 대적하려 허공으로 차올라 버티는 모습이다. 아래 칼도(刀)의 왼쪽 삐침과 휘어진 굵은 붓질은 날렵함을 떠받드는 무사의 몸짓 같다. 한 글자에 부드러운 곡선과 날렵한 강기, 격렬하게 휘어진 힘과 춤추는 여인의 한이 서려있다. 휘어짐의 고통을 견디는 인고와 자유롭게 치닫는 무사의 혼이 보이는, 형태로도 무수한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글자다.” 이런 찬사를 달았다. 안분은 원래 내려 쓴 글씨(縱書)를 옆으로 편집한 것이다. 필자가 이토록 긴 설명을 덧붙인 것은 단순한 글자에서 이런 평가도 할 수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해동건곤 · 존주대의(海東乾坤·尊周大義)’는 ‘조선의 하늘과 땅이 중국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이어받은 이상적 국가 주나라의 정신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우암은 효종이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할 때 ‘존주대의와 부수설치’를 역설하는 상소로 신임을 얻어 효종과 북벌계획을 추진하였다. 효종 사후, 1664년 단오(天中)에 쓴 글씨(時 皇命崇禎甲辰五月天中 恩津宋時烈書)다. 증주벽립(曾朱壁立) :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7호) 증·주(曾·朱)는 공자의 제자 증자와 송(宋)의
유학자 주희를 가리킨다. 벽립(壁立)은 ‘벽에 서있다.’는 말, 두 선현이 우뚝 서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를 본받아 소신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우암의 학문하는 태도와 강직한 성품이 잘 나타나 있다. ‘立’의 짜임이 정연한 균제미(均齊美)가
있다. 치(恥) : 대전우암사적공원 유물관(영인본) ‘치(恥)’는 치욕스럽다는 의미다.
아마도 복수설치(復讐雪恥)를 다지며
사진 오른쪽의, 유모 헌비(乳母 憲菲)는 우암이 82세에 썼다. 부친을 키워준 여종에게 보은의 정표로 세워준 묘표(墓表)다. 노비를 배려한 우암의 따뜻한 면모가 엿보인다. 문중에서는 매년 벌초를 하여 우암의 뜻을 기린다. “영의정에 증직된 수옹 송공 유모 헌비의 묘, 아들 강수문의 묘는 서쪽에 있다. 숭정 61년(1688) 2월에 세웠다.(贈領議政睡翁宋公乳母憲菲之墓 子姜?文墓在右 崇禎六十一年二月日立)”는 내용이다. 노령 탓이었을까? 연호 숭정 61년의 ‘해 秊’자가 ‘끝 季’자로 쓰였다. 한벽루(寒碧樓) : 충북 제천시 청풍면 청풍 한벽루는 1347(고려 충숙왕 4)년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다. 편액에는 대체로 서자(書者)를 밝히지 않는데 ‘화양노부서(華陽老夫書)’라 쓰고 낙관도 했다. 초서로 쓴 ‘華陽老夫書’의 흐름이 매우 ‘유려(流麗)’하다. 정려비(旌閭碑) :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석의 큰 글씨는
‘烈夫高麗進士宋克己妻高興柳氏之閭’이다. 고흥 유 씨는 우암의 9대 조모이다. 사후 200여 년이 지나 1653년 8대손 송준길이 조정에 의뢰하여
정려의 은전을 받았다. 당시 은진 송 씨들의 금석문은 거의 우암이 짓고, 동춘이 썼으나, 이 비문은 동춘이 짓고 우암이 썼다.
정려를 받기 위해 은진 송 씨 문중이 진정서를 내고 관찰사가 장계를 올렸다. 예조판서 이후원(李厚源)의 주청으로 윤허를 받았다. 영중추 이경여(李敬輿)와 영돈령 이경석(李景奭)이 도왔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갱(金坑), 우의정 이시백(李時白)도 정려를 내릴 것을 주장했다. 이로써 1653년 쌍청당(雙淸堂) 앞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당시 동춘, 우암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시경 진로(詩經 振鷺) : 개인 소장 우암은 큰 글씨를 잘 쓰고, 동춘은 작은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동춘도 우암 못지않은 대자(大字)를 남겼다. 사진의 작품은 시경의 “저쪽에서도 미워함이 없고/이쪽에서도
싫어함이 없네/바라건대 밤낮으로 힘써서/길이 명예로움을 마치게 하라(在彼無惡 在此无? 庶幾夙夜 以永終譽)”는 내용이다. 군자의 덕을 찬양하는
글이다. 글자가 획수가 많아서 필획을 전체적으로 가늘게 썼다. 특히 예(譽)자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 이체(異體, )로 쓴 것이 특이하다.
청명재궁 지기여신(淸明在躬 志氣如神) : 개인 소장 동춘이 65세 되던 1670년에 둘째 손자 송병하(宋炳夏, 1646~1697)에게 써준 잠명(箴銘)이다. 검은 색을 띤 종이(紺紙)에 송홧가루(松花粉)로 썼다. “청명이 몸에 있으면 지기(志氣)가 신과 같고, 인욕(人欲)이 깨끗이 없어지면 천리가 유행한다.(淸明在躬 志氣如神 人欲淨盡 天理流行)”는 글이다. 말미는 ‘경술년 3월 조부 춘옹이 써서 손자 병하에게 준다(庚戌季春春翁書與炳夏孫)’이다. 4. 맺는 말 우암의 서예는 기호학파의 서체가 그랬듯이 석봉체를 바탕으로 했다. 안진경체, 주자체가 혼재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서체를 이루었다. 유묵이나 편액 암각 등에 나타난 그의 글씨는 장중하면서도 정형화 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있다. 기교 없는 질박한 아름다움과 격식에 구애받지 않은 분방함이 조화를 이룬다. 특히 우암의 서예는 한마디로 ‘직필서예’라고 할 수 있다. “천지가 만물을 낳게 하고 성인이 만사에 대응하는 것은 오직 ‘直’ 뿐”이라고 했듯이 언행도 문장도 서법도 直과 일통하는 삶이었다. 이것이 우암서예에 대한 후세의 평가다. 그러나 우암은 정작 자신의 글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인 박광일(朴光一, 1655~1723)이 어느 날 스승에게 묻는다. “선생님도 안진경체를 익히셨는데 그렇습니까?” “내가 안진경을 익혔으면 벌써 숙련이 되었을 텐데 못난 재주로 주자를 흉내 내려다가, 범을 그린다는 것이 개를 그린 꼴이 되었다.” 그러나 최신(崔愼, 1642~1708)은 “(선생님이) 글씨를 쓰실 때는 반드시 술 한 잔을 드시고 약간 취기가 돈 뒤에 일필휘지하시니, 운필의 기상이 호방하고 힘찼다.”고 했다. [宋子大全附錄卷十六 語錄 朴光一錄; 先生曰 吾若習?魯公體 則當已練熟矣 以不逮之才 效朱子體 故今?虎不成矣//宋子大全附錄卷十八 語錄 崔愼錄(下); 每於寫字時 必以一杯酒致其微? 乃把筆揮之 筆端豪健] 17세기 조선의 서예를 말할 때 동춘과 우암을 빼놓을 수 없다. 혈족으로 평생지기로 당대 대표적인 유학자이면서 정치적 동지였다. 최고의 명필가로 세상 사람들은 이들의 글씨를 양송체(兩宋體)라 불렀다. 동춘은 자질이 온순하고 예법과 태도가 탁 트인 반면, 우암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답게 고집스럽고 강직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동춘을 빙옥(氷玉)에, 우암을 태산(泰山)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들의 글씨엔 이런 각자의 성정(性情)이 잘 드러나 있다. 동춘의 글씨는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단정해서 정제(整齊)된 아름다움이 있다. 우암의 글씨는 대담하고 자유분방하다. 작품 중 대표적인 글씨가 제자들에게 당부로 써 준 ‘刻苦’를 들 수 있다. 사람 키만큼 큰 종이에 장중하고 힘이 넘치는 획 하나하나에서 우암의 성향과 내면을 읽을 수 있다. 뜻도 심장하지만 획이 꿈틀거리며 화선지 밖으로 튀어 나올 듯 생동감이 넘친다. 이러한 면이 일세를 풍미했던 우암의 서예였다고 할 수 있다. 퇴계가 ‘글씨의 법은 마음의 법을 따라 나오는 것(字法從來心法餘)’ 이라 했다. 그래서인가? 양송(兩宋)은 양송답게 각자 개성 있는 양송의 글씨를 써서 오늘에 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07(11.12); 戌時(오후 7~9시)
沃川 九龍村에서 태어나다. 1677 (71세); 3월, 夫人 李氏의 상을
당하다. [사후기록]; 1694; 甲戌換局으로 老論이 득세하자 관작이
회복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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