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자는 2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간화선에 대해서 간략하게 고찰해보았고 3장에서 위빳사나에 대해서 사마타와 비교해보면서 비교적 상세하게 고찰해보았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4장과 5장에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살펴보겠다.
4-1. 경절문(徑截門)이다.
먼저 남북불교에서 공히 각각 간화선과 위빳사나를 각각 견성과 해탈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간명한 방법이라고 설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이것을 선종에서는 경절문이라하여 간화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들고 있다.
여기서 경절문이란 다양한 우회의 방편을 다 끊어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간명하고 적절한 방법이라는뜻이다. ‘경절’이라는 용어는 대혜가 “공부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힘을 얻지 못하면 마땅히 빠르고 간명하게 힘을 얻는 방법을 구해야 한다.”1)라고 한 말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역시 화두를 올바로 공부하는 방법을 두고 지적한 것이다. 보조 스님은 『간화결의론』에서 “경절문(徑截門)은 직접 비밀한 가르침을 전함에 있어 말도 없고 가리키는 것도 없어 듣고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법계가 막힘 없이 연기한다는 이치조차도 곧 말하고 이해하는 장애(說解之碍)가 된다. 그러니 가장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밝게 알고 완전하게 알게 되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혜심 스님의 『眞覺國師語錄』, 서산 스님의 『禪家龜鑑』, 鞭羊彦機의 『禪敎源流尋劒說』, 震虛捌開의 『三門直指』 등에서 모두 조사의 公案 상에서 이루어지는 ‘경절’의 방법 곧 화두 공부를 최고의 수행법으로 삼았다. 이는 대혜선에서 자극받은 보조 스님으로부터 비롯된 한국선의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2)
한편 미얀마에서도 위빳사나 수행은 가장 빠르고 안전하고 쉬운 수행법이라고 입을 모아 가르치고 있다. 미얀마 사가잉의 시따구 사야도(Sitagu Sayadaw)는 아비담마는 보잉 777의 슈퍼퍼스트 클라스에 미국 뉴욕행 티켓을 예매해두는 것이요 위빳사나는 실제 그런 특일등석의 최고의 자리에 앉아서 편한하고 즐겁게 지구 최상의 도시인 뉴욕으로 날아가는 것이라고 비유하고 사마타 수행은 인도 맛살라 냄새가 잔뜩 배어있는 에어인디아를 타고 ― 그것도 이코노미 클라스 제일 뒷자리에! ― 혼란의 도시 캘커타로 날아가는 것이라고 재치있게 비유하였다. 위빳사나야말로 해탈을 성취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쉽고 안전한 방법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북방 최고의 수행이라 자부하는 간화선과 남방 최고의 수행이라 힘주는 위빳사나에서 공히 각각은 견성과 해탈이라는 근본을 실현하는 가장 빠르고 간명하고 직절한 방법이라 표현되고 있다.
4-2. 챙김을 중시한다
간화선의 출발은 화두에 의정을 일으키는데 있다. 아무리 정교한 이론을 들이대고 아무리 대신심을 가지고 대분지를 촉발해도 의정을 일으키지 못하면 그것은 간화가 아니다. 화두를 향해서 끊임없고 쉼없이 의정을 촉발할 것을 종장들은 고구정녕히 설하고 있다. 한 생각이 두 생각이 되기 전에 화두를 제기하여 의정을 일으키는 것이 간화선의 출발이다. 설혹 그것이 염화두일지라도 거듭거듭 간단없이 화두를 제기하여 의정을 일으켜야한다. 그렇게 애를 쓰다보면 타성일편이 된다. 의정을 돈발하게 하는 것 이외에 간화선에 다른 방편은 없다. 의정을 돈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화두를 챙겨야한다. 한국 선방에서 정착된 화두를 챙긴다는 표현은 그래서 화두를 거듭거듭 제기하는 것을 멋지게 표현한 말이다. 생기지 않은 의정을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의정을 더욱 더 강하게 만드는 기능이 바로 챙김이다. 화두를 간단없이 챙김에 의해서 의정이 돈발하고 그것이 타성일편이 되고 은산철벽처럼 되어야사 비로소 간화라 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챙기는 것은 간화선의 핵심중의 핵심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챙김은 아래『청정도론』의 인용에서도 보듯이 마음챙김으로 사띠와 같은 심리현상이라 해야한다.
한편 위빳사나에서도 명상주제를 간단없이 챙길 것을 강조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사마타든 위빳사나든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을 간단없이 챙기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몸 느낌 마음 법으로 정리되는 위빠사나의 대상을 거듭거듭 마음을 챙겨 관찰해야한다. 대상을 챙기지 못하면 무상․고․무아를 수관할 수 없다. 그래서 『청정도론』은 이렇게 설한다.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apilāpana)을 특징으로 한다. 잊지 않는 것(asammosa)을 역할로 한다. 보호하는 것(ārakkha)으로 나타난다. 혹은 대상과 직면함(visaya-abhimukha-bhāva)으로 나타난다. 강한 인식(thira-saññā)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몸 등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확립함[念處, sati-paṭṭhāna]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기둥처럼 대상에 든든하게 서 있기 때문에(patiṭṭhitattā), 혹은 눈 등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rakkhaṇato) 문지기처럼 보아야 한다.”3)
이처럼 화두라는 특정 대상에 대해서 의정을 돈발하게 하는 간화선 수행법과 몸과 마음의 특정 현상에 대해서 무상․고․무아로 수관할 것을 가르치는 위빳사나 수행법은 화두나 법, 대상 혹은 명상주제에 마음을 챙기는 것을 수행의 출발로 삼고 있다. 이처럼 화두를 챙겨 의정을 일으키지 않고 묵묵히 앉아있는 수행은 흑산귀굴에 앉은 것으로 표현되는 묵조(삼매)의 수행이요 대상에 마음챙겨 무상․고․무아를 수관을 하지 않는 남방수행은 단지 대상에 집중하는 것만을 설하는 사마타 수행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간화와 수관은 화두와 법이라는 대상을 간단없이 챙기는 것을 통해서 마음이 매하지 않게 하는 지혜를 중시하는 수행법이라는 점에서 같다.
4-3. 깨달음의 성취 ― 견성과 해탈
이런 챙김에 바탕한 간화와 수관은 견성과 해탈로 승화되어 귀결된다.
선종의 모토를 한 마디로 말하라면 見性이다. 見性4)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종에서 설하는 마음[心]이란 술어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김태완은 “祖師들의 語錄에서 단순히 마음[心]이라고 할 경우는, 그 문맥에 따라서 3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⑴ 어떤 경우에는 性과 相을 포괄하는 一心의 의미로 사용되고, ⑵ 어떤 경우에는 無相․無住의 淸淨心인 性의 의미로 사용되며, ⑶ 어떤 경우에는 극복되어야 할 衆生心인 相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문맥에 따라서 적절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적고 있다.
선종 심성론에서는 마음을 相으로 파악되는 마음과 相으로 파악되지 않는 마음으로 나누어서 말한다. 相으로 파악되는 마음은 生滅하여 無常하다는 특색이 있고, 相으로 파악되지 않는 마음은 生滅이 없이 恒常한 것이며 머무는 장소도 없으므로 虛空과 같다고 한다. 이처럼 無相의 心을 性이라 하고, 有相의 心을 相이라 하여 一心을 性과 相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이 禪宗의 心性論에서는 일반적이다. 宗密의『都序』에서 一心을 性과 相으로 나누어 해설하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변하지 않는 것이 性이고, 인연따라 변하는 것이 相이지만, 性과 相은 모두 一心 위의 뜻[義]임을 알아야 한다. 性과 相을 2宗으로 보고 서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眞心을 알지 못한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心이라는 말을 듣기만 하면 다만 이것을 八識이라고만 여기고, 八識이 곧 眞心이 因緣에 따른 뜻임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馬鳴菩薩은 一心으로 法을 삼고, 眞如와 生滅의 二門으로 뜻을 삼았던 것이니,『起信論』에 말하기를, ‘이 마음에 의지하여 大乘의 뜻을 드러내면, 心眞如는 性이요 體이며, 心生滅은 相이요 用이다’라 한 것이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에는 “일체제법(물․심의 모든 현상)은 다만 妄念(의식의 의미작용)에 의해 [상호간의] 차별이 있을 뿐 만약 心念(수많은 의식들)을 떠나면 바로 일체 경계의 상(형상의 모습)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相을 여의고 名字의 상을 여의고 필경에는 평등하여 변이한 것이 없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견성은 相을 여읜 본자청정한 性을 체득하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사량분별이나 의지작용이 끊어진 자리요 끊어졌다는 것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견성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서 언설이나 사량분별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을 활연개오나 돈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위빳사나의 지혜가 익으면 해탈이 있게 된다.『청정도론』(XXI.66;70;71)에 의하면 위빳사나가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수행자는 수행자 자신의 성향에 따라서 결심이 서고 무상이나 괴로움 또는 무아 중 하나에 확고하게 된다. 믿음이 강한 자는 무상에 확고하게 되고 집중력이 강한 자는 괴로움에 확고하게 되고 지혜가 강한 자는 무아에 확고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위빳사나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수행자는 바로 출세간 도의 해탈을 체험하는 경지로 접근하게 된다. 그것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바로 이 ‘공함, 표상없음(無相), 원함없음(無願)’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해탈의 관문’이라고 하는 것이다.『아비담맛타 상가하』는 말한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무아의 수관은 공의 수관이라 이름하는 해탈의 관문이 된다. 전도된 표상을 버리는 무상의 수관은 표상이 없는[無相] 수관이라 불리는 해탈의 관문이 된다. 갈애로 인한 원함을 버리는 고의 수관은 원함이 없는[無願] 수관이라 불리는 해탈의 관문이 된다.”5)
이처럼 남방에서도 해탈은 아무런 자취[相]가 없고 공하고 어떤 마음의 의도도 다 끊어진 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견성이 無相인 性에 계합함인 것처럼 위빳사나를 통한 해탈도 無相이요 모든 자취나 의도가 끊어진 공한 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견성과 해탈로써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구경은 같다고 해야할 것이다.
혹자는 견성은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頓悟]이지만 남방에서 설하는 해탈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다르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간화선도 깨닫기 전에는 수많은 세월이 걸린다.6) 그러나 깨닫는 순간은 즉각적이다. 위빳사나를 통해 수관을 닦는 기간 역시 많은 세월이 걸릴지 모르나 해탈하는 순간은 즉각적이다. 『청정도론』의 설명에 의하면 범부의 경지에서 성인의 지위로 들어가는 데는 오직 네 마음찰나(心刹那)라는 엄청나게 짧은 순간만이 걸린다고 한다.7) 위빳사나의 통찰지가 깊어지면 어느 순간에 이처럼 즉각적으로 해탈은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북방의 간화선과 위빳사나는 돈오라는 입장도 공유하고 있다.
4-4. 대신심․대분지․대의정과 오근/오력(信․精進․念․定․慧)
예로부터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는 대신근(大信根), 대의단(大疑團), 대분지(大憤志)의 세 가지가 필수적인 요소로 언급되었다. 이것은 솥의 세발과 같아서 이 셋이 튼튼하게 갖추어지지 않으면 결코 화두는 타파될 수 없고 견성이란 불가능하며 간화선은 의리선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셋을 간략하게 분석해보자.
대신근은 화두 자체를 믿음과 함께 화두를 제시해 준 스승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단경에는 ‘능히 자성을 깨치지 못하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보라’8)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이 중생의 마음이 그대로 본자청정한 심진여임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 스님은 ‘이 마음이 있다면 부처가 되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사대부가 도를 배우되 대다수 스스로가 걸림돌을 만드는 것은 굳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서 자신이 화두 수행을 통해서 반드시 깨달음에 이른다는 사실과, 화두 수행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자기 자신을 통째로 믿는 것이다.
대분지는 화두참구를 줄기차게 진행시켜 나아가는 정진이다. 해태하는 마음이나 그 외 불선법들이 마음에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고 간단없이 화두를 챙기려는 노력이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화두를 들다가 죽을지언정 화두에서 물러나지 않으려는 간절한 노력이다.
그러면 무엇이 대의단인가. 화두에 강력한 의정을 일으켜서 나아갈래야 갈수도 물러설래야 설수도 없는 의단독로를 말한다. 대혜 스님은 昏沈․忘懷․黙照 등과 掉擧․著意․管帶 등 두 가지의 선병을 극복하지 못하면 생사윤회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혜 스님이 간화선을 주창하게 된 근본이유 중의 하나가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혼침과 도거(산란함)를 제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혼침은 거듭거듭 화두를 제기함으로 극복되며 이런 화두의 제기는 바로 지혜(지혜, 慧)의 기능이다. 도거는 적정처에서 면밀하게 화두를 듦에 의해서 극복되는데 이런 주도면밀함은 다름 아닌 고요함(선정, 定)을 말한다. 그래서 성적등지 적적성성 정혜쌍수를 주창하는 것이다. 한편 이런 화두를 면밀하게 제기하는 것을 우리는 화두를 챙긴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챙긴다는 것은 마음이 화두를 물샐틈없이 들고 있는 것을 말하며 이런 심리현상을 초기불교에서는 사띠(마음챙김, 念)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우리는 화두에 의정을 일으키는 현상에는 화두를 간단없이 챙기는 심리현상(사띠, 念)과 그런 화두에 대해서 덤벙대거나 성급하거나 조급한 등의 육단심을 내지 않고 고요하면서도 면밀하게 덤벙대지 않는 심리현상(定)과 나아가서 화두라는 언어와 일체 상대적인 분별을 뛰어넘으려는 심리현상(慧)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지혜는 의정의 대표적인 심리현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의정을 의혹이나 사량분별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은 간화선에서 제일 강조하는 요점이다.9)
물론 화두공부에는 이 이외에도 평온[捨, upekkhā], 희열(pīti), 행복(sukha) 등의 유익한 심리현상도 함께 작용하겠으나 자성청정심과 선지식을 신뢰하는 심리현상(信) 분발하는 심리현상(精進)과 화두를 챙기는 심리현상(念), 고요함(定), 그리고 제일 중요한 분별경계를 뛰어넘는 심리현상(慧)이라는 이런 다섯 가지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발제자가 이렇게 논지를 전개하면 이미 영리한 분들은 발제자가 대신심 대분지 대의단을 초기불교의 信․精進․念․定․慧의 五根/五力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알 것이다. 초기불교의 수행에 관계된 37조도품 모두가 중요한 것이겠으나 실참의 심리현상을 제일 적극적으로 묘사한 것은 오근/오력이다. 수행의 기본 요소가 되는 심리현상이라해서 오근이란 술어를 사용하며 이 근이 실참에 작용할 때 수행은 큰 힘을 가지게 된다고 해서 오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한편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은 그들의 영역에서 각각 확신하고(adhimokkha), 분발하고(paggaha), 확립하고(upaṭṭhāna), 산만하지 않고(avikkhepa), 판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dassana). 이렇게 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법들, 즉 우유부단함, 게으름, 부주의함, 동요, 미혹함을 극복한다. 『청정도론』의 설명을 더 살펴보자.
[청정도론 IV]: “47. 여기서 특별히 믿음과 지혜의 균등, 삼매와 정진의 균등함(samatā)을 권한다. 믿음이 강하고 지혜가 약한 자는 미신이 되고, 근거 없이 믿는다. 지혜가 강하고 믿음이 약한 자는 교활한 쪽으로 치우친다. 약으로 인해 생긴 병처럼 치료하기가 어렵다. 두 가지 모두 균등함으로써 믿을 만한 것을 믿는다. 삼매는 게으름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삼매가 강하고 정진이 약한 자는 게으름에 의해 압도된다. 정진은 들뜸(uddhacā)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정진이 강하고 삼매가 약한 자는 들뜸에 의해 압도된다. 삼매가 정진과 함께 짝이 될 때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정진이 삼매와 함께 짝이 될 때 들뜸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둘 모두 균등해야 한다. 이 둘 모두 균등함으로써 본삼매(appanā)를 얻는다.
48. 다시 삼매(사마타)를 공부하는 자에게 강한 믿음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 믿고 확신하면서 본삼매를 얻는다. 삼매[定]와 지혜[慧, 반야] 가운데서 삼매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집중(ekaggatā)이 강한 것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하여 그는 본삼매를 얻는다. 위빳사나를 공부하는 자에게 지혜가 강한 것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 그는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상을 통찰함(paṭivedha)을 얻는다. 그러나 둘 모두 균등함으로써 본삼매를 얻는다.
49.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강하게 요구된다. 마음챙김은 마음이 들뜸으로 치우치는 믿음과 정진과 지혜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 게으름으로 치우치는 삼매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이 마음챙김은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였다.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유익하다. 무슨 이유인가? 마음은 마음챙김에 의지하고, 마음챙김은 보호(ārakkha)로써 나타난다. 마음챙김이 없이는 마음의 분발(paggaha)과 절제(niggaha)가 없다”라고.”
이처럼 간화선의 기본인 신심․분심․의심은 위빳사나의 기본 요소인 信․精進․念․定․慧의 오근/오력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간화선의 의단은 초기불교와 남방불교에서 강조하는 念(마음챙김)․定(선정)․慧(지혜)의 세 가지 심리현상이 극대화된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다.
4-5. 선정보다 지혜를 중시한다.
대혜 스님이 묵조선을 흑산의 귀굴에 앉아있는 것으로 혹평을 한 연유는 묵조선의 아류에 빠져있는 자들을 적묵함에 함몰된 선정에 머물러있는 자들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묵조선에서는 본자청정에 계합하여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좌선을 천양한 것이지 그냥 묵묵히 앉아있는 것만을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대혜는 많은 수행자들이 좌선에 몰입하는 것을 본자청정을 꿰뚫지 못했으면서도 그냥 고요함에 안주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대혜 스님은「答李郞中」에서 ‘가장 하열한 무리는 黙照無言과 空空寂寂으로 귀신굴에 빠져 있으면서 그 곳에서 구경의 안락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단견이란 자기 마음의 본디 오묘한 밝은 성품을 없애고 한결같이 마음 밖에서 공을 집착하여 선적(禪寂)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대혜 스님은 서장의 여러 곳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반야의 현현으로 간주하고 있다. 대혜는 말한다.
“능히 行住坐臥에 있어 노승이 가르쳐 준 요점대로 쉬지 않고 수행해 가십시오. … 이렇게 하면 가령 금생에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가르쳐 준 대로 죽는 날까지 계속해 나아간다면 저승사자도 범접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반야 속에 머물러 있어 잡념이 일지 않기 때문입니다.”10)
대혜 스님이 행주좌와어묵동정에 간단없이 화두를 챙기는 것을 강조하고 묵조선을 흑산의 귀굴에 앉아있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일상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 자체가 반야의 실천이 되는 공부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혜가 주창한 간화선은 고요함(선정)보다는 지혜(반야)를 강조한 수행법이다. 이런 중국 남종선계통의 선을 대표하는 언구가 바로 육조단경에 나타나는 唯論見性 不論禪定解脫이다. 오직 견성만을 논할 뿐 선정을 통한 해탈은 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편 이미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위빳사나는 지혜의 다른 이름이다. 위빳사나는 선정의 고요함에만 빠져있는 사마타를 거듭거듭 경계하고 있다. 실제로 순수 위빳사나를 주창하는 미얀마 마하시 계열의 수행센터에서는 앉는 데만 집착하지 못하도록 수행자들을 독려하고 있으며 행주좌와어묵동정에 항상 정해진 대상(법)을 수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4-6. 결론
이렇게 몇 가지 측면에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같은 점을 살펴보았다. 이들 몇 가지 관점은 모두 간화선과 위빳사나는 둘다 공히 선정보다 지혜를 중시하고 있다는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간화선이 경절문인 소이도 견성을 중시하는 소이도 화두라는 참구대상을 설정하는 이유도 모두 선정의 고요함에 함몰하기 보다는 지혜로서 돈오견성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요 위빳사나가 최고의 수행법인 이유도 사마타의 적정처에 머무르지 않고 온갖 물․심의 현상이 무상․고․무아임를 통찰하여 해탈을 실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선정은 화두참구와 위빳사나를 깊이 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선정만으로는 견성이나 해탈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간화선이요 위빳사나이다.
첫댓글 스님! 감사합니다.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