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어문생활의 초석을 놓은 외솔 최현배崔鉉培
1. 국가의 성립과 언어
언어는 인간사회 존립의 필수적 요건이며 일상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언어가 없이는 어떤 단위의 사회도 이룰 수 없다. 국가의 성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언어는 협동을 가능하게 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하며, 오래 축적된 지식의 전수를 가능하게 하는 까닭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 기본 도구이며, 같은 역사를 지닌 집단으로 하여금 전통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게 하는 인간 고유의 기본 자산이다. 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소통을 이룬다. 한 민족, 한 국가를 정신적으로 결속시키는 것이 언어다. 이때의 언어는 물론 그 민족, 그 국민의 모국어이다. 모국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민족, 그 국가의 정체성을 보이는 것이요, 그들이 하나라는 것을 뜻하며, 고유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통치를 받는 동안 우리의 국어는 일본어요, 우리말은 국어가 아닌 조선어일 뿐이었다. 공식 언어로서 일본어의 사용이 강요되었고 모든 교육이 일본어로 이루어졌다. 한글은 가르치지도 않았다. 우리는 모국어를 잃음으로써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민족적 유대가 끊어질 뻔하였다. 해방이 되어 우리말이 국어로서의 지위를 되찾고, 각급 학교의 교육이 국어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나 국어는 잘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한글맞춤법통일안’과 ‘표준어사정안’이 마련되기는 하였으나 널리 보급되지 않았으며 국민의 태반이 한글조차 읽을 수 없는 문맹이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국어를 정비하고, 우리말로 교과서를 편찬하여 국어를 교육의 도구로서 부족함이 없게 하고, 시급히 필요했던 국어교사들을 길러내어 국어 교육이 정상화하도록 하는 등의 일을 하는 한편, 한글만 쓰기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대한민국이 바로 서는 데 크게 기여한 이가 외솔 최현배이다. 언어는 국가 성립의 기본 요건이다. 원활한 언어 소통, 바르고 정확한 언어 표현력이 없이 나라가 바로 설 수가 없다. 이러한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낸 이로 우리는 외솔 최현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의 한 인물로 존경받는 국어학자이며 동시에 국어 교육자, 국어 운동가였던 그를 꼽는 까닭이 바로 이에 있다.
2. 해방 전의 외솔 최현배와 그의 애국주의
외솔 최현배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는 갑오경장이 일어나던 해, 곧 1894년에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나 1910년에 관립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면서 박동 보성학교 안의 국어강습원에서 주시경의 강의를 받았다. 이 때 “국어는 우리 민족정신의 형성 기반이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주시경 선생의 민족주의적인 언어관의 영향을 크게 받아 평생 국어 연구, 국어 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바로 이 해에 한일 합방이 되어 우리말은 ‘국어’의 지위를 잃고 일본어가 국어가 되었으며 우리말은 ‘조선어’가 되었다.
국권의 상실로 관립한성고등학교에서 이름이 바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1915년에 졸업하고 관비 유학생으로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관립학교에서 복무해야 하는 의무를 피하고 있다가 1920년에 사립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부임하여 우리말을 가르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국어의 문법 체계를 세울 목적으로 『우리말본』의 초고를 만들기 시작하여 1937년에 완본으로 『우리말본』을 출판하였다. 우리가 남의 치하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면 우선 국어부터 보존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국어가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통일된 표기법이 있어야 하고, 표준말이 정립되어 있어야 하며, 우리말을 집대성한 사전이 있어야 했다. 나아가 우리가 타민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면 우리 문화가 진작되어야 하는데 그를 위해서는 문화 창조의 도구인 국어의 어법이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26년에는 『조선민족朝鮮民族 갱생更生의 도道』를 발표하여 민족이 다시 살아나기 위한 생기 진작의 실천적 이상주의를 고취하고, 도덕 경장, 경제 진흥, 고유문화의 진흥 등의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 해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 『우리말본』의 저술을 계속하는 한편, 같은 해에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의 회원이 되어 ‘한글’지 창간, ‘한글날’ 제정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1929년에 우리 사회 각계의 유지 108인의 발기로 조직된 조선어 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까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이루어내기 위해 진력하였고 이어서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8년에 외솔은 이른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고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강제 퇴직되었다. 일제가 중국 침략을 앞에 두고 민족주의 단체 회원들을 단속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실직해 있는 중에 한글을 역사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연구한『한글갈』을 짓기 시작하여 1942년에 출판하였다. 이 해에 그는 다시 ‘조선어학회 사전’으로 검거되어 해방이 되기까지 옥중 생활을 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독립의 이념을 가지고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하는 등, 조선어의 정리 통일 보급을 위한 어문활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로 규정하여 주요 회원들을 체포, 징역형에 처한 사건이다.
3. 출옥과 조선어학회 활동 재개
해방이 되자 일제 아래서 오랜 세월 국어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국어 연구에 진력해온 사람들에게 시급히 해야 할 일은 국어 정책에 관련된 일들이었다.
학교 교육은 잠시라도 중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장 해방된 그해 가을 학기부터 학교를 열고 교육을 해야 하는데 일본어로 쓰인 교과서를 쓸 수는 없는 일이고, 준비된 교재는 없었다. 따라서 우리말로 된 각급학교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이 가장 급했다. 그중에서도 시급한 것이 국어 교재였다. 한글의 창제는 서양의 산업혁명보다 더 큰 위대한 사건이라 일컫는 이들이 있거니와, 개화기에 와서야 비로소 민족적 자각과 함께 한글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으나 뒤이은 일제 통치로 인해 그대로 방치되었다. 글을 모르고 산업이 부흥될 수 없고, 시민 사회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해방 당시에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외솔은 함흥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어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던 때에 ‘조선어’ 연구 단체를 만들어 조선어를 연구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등 한국어 관련 활동을 함으로써 독립운동을 하였다 하여 많은 국어학자들을 검거한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4년 징역의 선고를 받고 함흥 감옥에서 복역 중이었기 때문이다. 8월 15일에 해방이 되었으나 외솔은 8월 17일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함흥을 떠나 서울에 도착한 것이 19일, 그 바로 다음날인 20일에 동지들을 모아 ‘조선어학회’의 재건을 위한 회의를 열고, 9월 초에 조선어학회 안에 ‘국어교과서편찬위원회’를 구성, 국어교재 편찬에 착수했다. 동시에 조선어학회 주최로 교원강습회를 열어 교사 강습에 들어갔다.
오랫동안 국어의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만을 쓰도록 강요되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한글을 가르치지 않아서 학생들 대부분이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것이 그때의 현실이었다. 설사 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을 실시했다 하더라도 일제가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시절의 학생 수가 많지도 않은데다가 집안에서 한글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가정도 많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국어교재의 편찬, 국어교사의 양성을 서둘러야 했다. 특히 한글 교재는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외솔이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서울에 돌아와서 즉시 ‘조선어학회’의 재건을 서두르고, 이러한 일에 착수한 것이 이 때문이다. 전 국민이 한글을 제대로 읽고 쓸 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지나서다.
4. 첫 번째 편수국장시절. 국어 교육의 방향을 잡다.
해방된 지 약 한 달 후인 9월 21일에 외솔은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군정청 안에 사회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구성되어 있었는데 외솔은 그중의 교과서편찬분과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때 ‘조선교육심의회’가 결의한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은, 첫째로 초․중등학교 교과서는 모두 한글로 하되 한자는 필요한 경우에 괄호 안에 넣을 수 있게 한 것이며, 둘째로 교과서는 가로쓰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어문정책의 큰 틀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0월에 국회를 통과하여 공포된, 우리말은 한글만으로 쓰되 얼마동안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한자를 병용한다는 내용의 ‘한글 전용법’은 바로 이 교과서 편찬 방향과 맥을 같이 한다. 오늘날의 우리말 출판물이 모두 한글만을 쓰되, 가로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이때 정한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으로 인한 것이다. 당시의 신문을 비롯한 모든 출판물은 다 세로쓰기를 하고 있었고 한글보다 한자를 더 많이 쓰고 있었다. 교과서에서 시작된 한글만 쓰기와 가로쓰기를 일반 출판물 모두가 따라오게 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몇 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편수국은 그 주요 업무가 각종 교과서를 펴내는 일이다. 1945년 9월 21일에 편수국장에 취임하여 1948년 9월 21일에 퇴임하기까지 만 3년 동안 외솔은 저 유명한 ‘한글 첫걸음’을 비롯한 각종 교과서를 50가지 이상 펴냈다.
우리말 교과서를 한글로 편찬하자면 일본말이나 힘든 한자어로 된 용어들을 우리말로 다듬는 일을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 우리가 “지름, 반지름, 반올림, 마름모꼴, 꽃잎, 암술, 수술, ……”이라고 하는 말들은 각각 “직경直徑, 반경半徑, 사사오입四捨五入, 능형菱形, 화판花瓣, 자예雌蕊, 웅예雄蕊, ……” 등을 우리말로 바꾸어 만든 용어로서 외솔이 편수국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편찬한 교과서에 처음 등장하여 쓰이기 시작한 것들이다. “짝수, 홀수, 세모꼴, 제곱, 덧셈, 뺄셈, 피돌기, ……” 등이 다 그러하다. 물론 새로 만든 용어들이 전부 생명을 얻은 것은 아니다. “산수算數, 동물動物, 양서동물兩棲動物, ……” 등을 고쳐서 각각 “셈본, 옮살이, 물뭍살이, ……"라고 했던 것이 당시 교과서에 등장했으나 살아남지 못하고 다시 옛말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이때 새롭게 우리말로 바꾼 용어가 교과서에 쓰인 것은 기성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고,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어 쓰이던 “후미끼리, 벤또, 젠사이, 혼다데, 간스메, ……” 등의 일본어에서 들어온 말들을 우리말로 다듬어 만든 “건널목, 도시락, 단팥죽, 책꽂이, 통조림, ……” 등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이때의 동력이 오늘까지 이어져 그 후에 들어온 서양 외래어까지 우리말로 순화하여 쓰고자 하는 노력으로 살아 있다. 외솔의 한자 안 쓰기와 한글 가로쓰기의 주장이 그대로 정책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외솔이 1947년 5월에 펴낸 『글자의 혁명』에서 주장한 것이 바로 이 ‘한자 안 쓰기(한자 폐지)’와 ‘한글 가로쓰기’였다. 앞에서 말한 ‘조선교육심의회’의 교과서 편찬의 두 가지 기본방향이 결의되던 당시에 집필 중이던 책이다.
외솔은 한자 폐지를 주장하는 근거로, 한자는 워낙 수가 많은데다가 같은 글자가 여러 가지 뜻이 있고,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여러 글자가 있어서 배우기가 몹시 힘들고 시간과 정력을 많이 낭비하게 된다는 것, 문맹자가 많고 무식한 대중이 많은 것은 바로 한자 때문이라는 것, 활자 인쇄를 하던 당시에 한자는 인쇄하기가 불편하고 타이프라이터, 리노타이프 같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기 어렵다는 것, 과거 수백 년 동안 한자를 씀으로 인하여 우리말이 죽어 없어진 것이 많고 위축되었으며 어려운 한자 때문에 과거의 교육이 문자 교육에 너무 치우쳐 민족적 독창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 등을 들었다. ‘한글 가로쓰기’에 대해서는, 사람의 두 눈이 나란히 수평으로 나 있고, 그 눈은 가로 째져 있어 좌우로 보는 시야가 넓을 뿐 아니라 해부학적으로 보더라도 눈알을 움직이는 힘줄이 상하보다 좌우의 것이 더 튼튼해서 좌우운동이 상하운동보다 몇 배나 용이하다는 것, 팔꿈치의 운동 범위가 상하보다 좌우가 훨씬 크며 운동이 편리하고 빠르다는 것 등을 그 주장의 근거로 들었다.
한글만 쓰기, 곧 한글 전용은 이미 서재필 선생에 의해 『독닙신문』에서 시도된 바 있고, 주시경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한글만 쓰기와 한글 가로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왔으나 나라가 남의 손에 있던 그 시대에 그러한 생각을 실현할 수가 없었고, 아직은 그러한 생각에 이론적인 뒷받침도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외솔이 그것을 비로소 이론화하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되어 나라를 다시 찾은 당시에도 아직은 한자가 없는 문자생활이란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고, 가로쓰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천 몇 백 년을 헤아리는 긴 세월을 한자를 가지고 문자생활을 해왔다. 개화기 이후에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는 문체가 많이 퍼지기는 했으나 아직은 한자를 안 쓰는 한글만의 문자생활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한문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쓴다. 즉 세로쓰기를 한다. 그것도 오른쪽에서부터 써나간다. 따라서 신문, 잡지에 한글을 많이 섞어 쓰게 된 개화기 이후에도 세로쓰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던 때였다. 사회 인식이 이러하던 시절에 교과서를 한글만으로 그리고 가로쓰기로 편찬한 것은 심한 사회적 저항을 받을 만한 일이었으니, 이러한 조치는 극히 혁명적이고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후로 사십여 년 동안 한글만 쓰자는 이른바 한글 전용론자들과 한자와 한글을 섞어 써야 한다는 한자 혼용론자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제 한글만 쓰기가 정착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한자혼용론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외솔의 한글 가로쓰기의 주장은 “봄이 온다.”를 “ㅂㅗㅁl ㅇㅗㄴㄷㅏ.”와 같이 풀어서 가로쓰자는 것이었으나 지금과 같은 가로쓰기로 정착이 된 것이다.
5 조선어학회로 돌아가『큰사전』등 발간
우리의 말과 글을 바로 세우기 위한 외솔의 노력은 편수국 밖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다. 1946년 9월에는 ‘한글가로글씨연구회’를 창립하고, 1947년 5월에는 위에서 말한 『글자의 혁명』을 출판하여 그의 주장을 사회에 널리 펴고 있었다. 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일에도 힘을 쏟아 미국 록펠러 재단의 후원을 얻어 출판의 길을 열었다.
『큰사전』 발간은 1929년 10월에 사회 각계인사 108인이 모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하여 시작한 것으로, 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표준말을 사정하여 한글맞춤법에 따라 편찬한, 국민의 바른 어문생활을 위해 만든 사전이다. ‘조선어사전편찬회’는 그 취지문에서
“인류의 행복은 문화의 향상을 따라 증진되는 것이요, 문화의 발전은 언어, 문자의 합리적 정리와 통일로 말미암아 촉성되는 것이다. 어문의 정리와 통일은 제반문화의 기초를 이루며 인류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문화 발전에 뜻이 있는 민족은 언어, 문자의 정리와 통일을 급무로 하지 않은 자가 없고 이를 위해서는 표준 사전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그러한 사전이 없어 이러한 사업이 필요하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겉으로 보아 단순히 문화적 사업인 듯이 하고 있으나 실은 앞으로 언제인가 나라를 되찾을 것이고, 그때 새로운 민주 시민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시작한 준비 작업의 하나였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고유한 언어,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민족이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독립운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도 국어사전이 필요했었다. 국어사전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유한 언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전 편찬회를 발기한 사람들은 안재홍, 조만식, 유억겸, 백낙준 등과 같은 당시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 이광수, 주요한 같은 문인들, 이극로, 정인보, 이윤재, 최현배, 김윤경, 이희승 같은 학자들 108명이었고, 비밀 후원회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어학회가 원고를 작성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큰사전』이 1947년 10월 9일에 첫째 권, 1949년 5월에 둘째 권이 나왔다. 외솔은 이 편찬회의 준비위원이며 집행위원이었고, 이 사전은 외솔의 문법체계를 따라 편찬한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해방 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마련하고 표준어를 사정했으며 『큰사전』을 만든 국어 연구, 국어 운동 단체로서 해방 당시에 우리나라 어문정책을 뒷받침하고 있던, 그리고 국민의 어문생활을 주도하던, 우리말에 관한 가장 권위가 있는 학회였다. 외솔은 1948년 9월에 편수국장을 그만두고 조선어학회로 돌아가 상무이사로, 또 이사장으로 학회의 일을 보면서 학회가 주관하는 ‘세종 중등교사 양성소’의 교수로 일하기도 하였다. 외솔은 시급한 국어교사의 수급을 위해 단기 교육을 해서 자격증을 가진 국어교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임시로 차린 ‘세종 중등교사 양성소’에서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사범교육을 받고 있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도 국어문법을 가르쳤다. 한편 1949년에는 ‘한글전용촉진회’의 위원장이 되어 한글 전용의 실현을 위해 진력했다. 한글 전용을 위한 그의 노력은 그 후로도 타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6. 두 번째 편수국장 시절
외솔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51년 1월 20일에 다시 문교부 편수국장에 취임하였다. 두 번째로 편수국 일을 보는 중에 그는 우리말에 쓰이는 글자와 낱말의 사용빈도 조사를 하였다. 그가 편수국장 일을 그만둔 후인 1955년에 문교부에서 낸 『우리말에 쓰인 글자(한글, 한자)의 잦기 조사』와 1956년의 『우리말의 말수 잦기 조사』가 바로 그것이다. 한글의 사용빈도 조사는 타자기 등의 자판에 어떤 글자를 어떤 위치에 배열할 것인지를 정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통계 자료다. 한글의 기계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외솔이 아니고는 발상이 어려운 작업이었다. 한자의 사용빈도 조사도 아직 한자를 많이 쓰던 당시에 한자를 줄여 쓰자면 상용한자 제정 등에 꼭 필요한 정보이다. 단어의 사용빈도 조사는 초․중등학교의 단계적인 교재를 만드는 데도 반드시 있어야 할 자료이다. 저학년 교재에 사용빈도가 낮은 어려운 단어를 써서는 안 될 것이다. 공식적인 학습 교재뿐만 아니라 유치원, 초등, 중등 학생들을 위한 일반 읽을거리를 만드는 데 있어서도 사용빈도가 높은, 쉬운 단어부터 시작해서 차츰 단계별로 그 정도를 높여가야 한다. 진정으로 국어 교육을 걱정하지 않고서는 생각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국내에서 어휘의 사용빈도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극히 최근에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이후이다. 그만큼 외솔은 시대를 앞서 있었다.
7. 외솔의 국어연구와 국어운동
1953년 4월에 현행 맞춤법이 너무 어려우니 이를 폐지하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이전의 옛 철자법으로 고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국무총리의 훈령이 공포되고 그에 따른 맞춤법 간소화 안이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발표됨으로써 이른바 ‘한글파동’이 일어났다. 즉, ‘믿고, 믿어’를 ‘밋고, 미더’로, ‘같이’를 ‘가치’로 쓰라는 것인데 각계각층의 격렬한 반대로 약 2년 만에 없던 일이 되었지마는 이 사건으로 외솔은 1954년 1월에 편수국장을 그만두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떠났던 연희대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로 돌아가 다시 교수로 취임하였다. 이 간소화 안을 반대하자면 문교부를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외솔 최현배는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주시경 선생의 한글과 우리말 문법 강의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아 국어를 공부하기로 뜻을 세운 후 평생 국어학자로서 1937년에 『우리말본』, 1941년에 『한글갈』과 같은 국어연구사상 획기적인 큰 업적을 내었다. 오늘날의 국어문법은 『우리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바로 이 문법 체계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큰사전』 역시 이 외솔의 문법 체계를 수용하여 편찬되었다. 주시경 선생의 체계에서는 ‘먹는다’를 ‘먹’과 ‘는다’의 두 단어로 나누어 ‘먹’만을 움씨(동사)라 하고 ‘는다’를 또 하나의 다른 품사 끗씨(종결사)라고 했었다. 그런데 ‘먹는다’ 전체를 한 개의 단어인 동사로 보고, ‘먹’을 어간, ‘는다’를 어미라고 하게 된 것이 바로 『우리말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우리말본』으로 국어문법 연구의 새 시대를 열었으며, 『한글갈』로써 훈민정음, 역대 한글 문헌, 문자론, 국어 음운사 연구에 넓은 길을 닦았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크고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낸 학자요, 교수이며, 학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기까지 한 외솔은 학문의 상아탑 속에만 머물러 있던 것이 아니었다. 해방 전에는 민중 계몽과 독립구국 의식 고취 단체이던 ‘흥업구락부’에 관계하다가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잃기도 했고, 조선어학회 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해방이 되자 정부에 들어가 편수국장으로 이 나라 어문교육의 기초를 세웠다. 그의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가 단순히 학문적 관심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은 그의 논문, 저서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우리말본』 머리말에서,
“…… 한 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이제 조선말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 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적의 끼침이다. 그러므로, 조선말의 말본을 닦아서 그 이치를 밝히며, 그 법칙을 드러내며, 그 온전한 체계를 세우는 것은, 다만 앞사람의 끼친 업적을 받아 이음이 될 뿐 아니라, 나아가아 계계승승繼繼承承할 뒷사람의 영원한 창조활동의 바른 길을 닦음이 되며, 찬란한 문화건설의 터전을 마련함이 되는 것이다. ……”
라고 하였다. 외솔은 문화 창조의 도구로서의 중요성을 ‘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글’에 있어서도 역설하였다. 1937년에 낸 『한글의 바른 길』에서
“…… 사람의 겨레로서 그에게 글의 있고 없음이 그 야만의 비卑와 문명의 존尊을 가르치게 됨은 물론이거니와, 글을 가진 겨레 가운데서도, 그 가진 글의 좋고 나쁨이 그 겨레의 우優와 열劣을 가르며, 대大와 소小를 가르는 것이다. 보라! 오늘날에 있어서 세계무대에서 가장 활보하는 겨레는 다 훌륭한 글의 창작자, 또는 소유자, 또는 완전한 사용자가 아닌가? ……”
라고 하여 아직 잘 닦여지지 않은 한글을 유용한 글자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미 1926년에 발표한 『조선민족갱생朝鮮民族更生의 도道』에서 우리 민족을 다시 살려내는 길의 하나로, 우리말의 어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대중이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며, 우리 글, 곧 한글의 조직을 학리적으로 연구하여 합리적인 표기법을 만들어내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거니와 외솔의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는 실용적, 실천적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한글맞춤법의 제정과, 표준말 사정, 한글 가로쓰기, 한글만 쓰기의 주장으로 이어지고, 이들 문제를 국어 정책화하여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해방 전에, 앞으로 우리나라가 독립하였을 때 그 새 나라를 자유 시민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의 언어, 문자를 합리적으로 정리, 통일하고자 했던 애국적 국어운동의 목표가 1933년에 마련된 ‘한글맞춤법통일안’으로 큰 부분이 성취되어 그대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거니와, 이 일에 외솔이 제정위원, 수정위원, 제안 설명위원, 조선어학회의 맞춤법 통일위원회 의장 등으로 참여한 것은 그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실용적, 실천적 국어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맞춤법은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제정한 만큼 주시경 학파가 주장하던 바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마는 외솔의 생각이 크게 반영되어 있다. 용언의 활용 체계와 어간, 어미의 개념, 체언과 토의 개념은 『우리말본』의 체계가 그대로 수용된 것이며, 불규칙 용언의 활용형을 소리대로 적도록 한 것도 외솔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예를 들어, 주시경 학파의 종래 주장은 ‘돕다’ 같은 동사의 어간 ‘돕’이 어미 ‘아/어’와 만나서 ‘도와’로 발음이 되는 것도 원형을 살려서 ‘돕아’로 적자는 것인데, 이를 ‘도와’로 적도록 한 것과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때까지 ‘ㄱ, ㄴ, ㄷ, …… ㅇ’은 ‘기역, 니은, 디귿, ……’ 등의 이름이 있었으나, ‘ㅈ’ 이하는 이와 같은 두 음절 이름이 없이 ‘지, 치, 키, ……’ 등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들의 명칭을 ‘지읒, 치읓, 피읖, ……’으로 하자는 외솔의 제안이 ‘한글맞춤법통일안’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외솔은 연희대학교의 교수로 돌아와 연구생활을 하는 한편,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1951), 『한글의 투쟁』(1954), 『나라사랑의 길』(1958), 『나라 건지는 교육』(1963), 『한글만 쓰기』(1970) 등의 저서를 연달아 내면서, 한글 전용, 우리말 다듬기, 나라 사랑, 국어교육 등에 관한 주장을 펴내 국어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정부는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을 서훈하였다. 말년에는 『우리말본』에 짝할 우리의 옛말 문법 책을 집필하던 중 1970년에 작고하였다. 정부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사회장으로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