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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화당(穠華堂)의 의미 |
농화당이란 뜻은 하기14항에서와 같이<此(차) 穠(농)華(화)堂(당)의 穠(농)字(자)는 蓋(개)取(취)諸(제)의 何(하)彼(피)穠(농)矣(의)이며, 華(화)字(자)는 如(여)桃(도)季(계)之(지)義(의)라 豈(기)不(불)美(미)아니랴> 한 바와 같이 穠자는 삼국지에 삼고초려(三顧草廬 ; 유비가 제갈공명을 세 번이나 찾아가 군사(軍師)로 맞이하던 일) 이전에 제갈공명이 농사를 지어며 살던 그 산간초옥에서 따온 것이며, 華자는 유비가 장비, 관운장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면서, 복숭아 꽃이 만발한 동산 한가운데서 형제의 의(義)를 맺기로 했던 도원결의(桃園結義)와 같은 것이니, 이 어찌 아름다운 이름이 아니리오라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삼국지의 고사(古事)를 인용해서 일가 친족끼리 화목, 단결을 이루고저 함이요, 둘째는 한문의 뜻 그대로 나무가 빽빽이 많은 모양의 농(穠)자와 꽃필화, 빛날화, 영화로울 화(華)자로서 중국의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말하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별천지와 같이 아름다운 곳이란 뜻이다.
이를 종합하면 약 2년여에 걸쳐 지은 이건물에서 일가들끼리 형제의 의(義)를 맺듯이 화목하게 잘 지내라는 뜻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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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농화당 중건기(1891년 고종28 신묘년 건립)
--- 원문 : 술선록 42P 참조 ---
① 농화당은 즉 이조 태종대왕(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넷째딸 정선공주와 혼인한 임금의 사위(부마)로서, 정 1품인 숭록대부를 지내시고, 처음에는 임금이나 왕세자의 사위들의 예우를 관리하는 부서인 의빈부에서, 정 1품인 의산위(宜山尉)로 봉해졌다가, 최고의 칭호인 군호(君號)를 받으셨으며, 시호는 소간공이시고 이름은 휘(暉)이신 이의 봄, 가을 제사를 드릴시에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하고, 더러운 일을 피하는 신성한 집이다.
② 본래 건립할시는 구봉서원의 강당이였던 것을, 금번에 보수하여 개축하므로서, 어찌 7세조 휘와 정선공주를 모시는데, 부족함이 없는 재실이라 하지 않으리요.
③ 또한 의산군과 정선공주를 모시는, 별묘(의산궁)과 함께 있으므로 해서, 본래는 부마공이 돌아가시자 마자, 건립하여야 당연한 것이다.
④ 태종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차아(의산군)는 개국공신으로 시호가 충경인 영의정을 지낸 남재의 손자로서, 공훈이 많은 신하의 자손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많은 사람이며, 대대로 덕을 쌓은 가문의 행실이 다른가문과 다르니, 임금의 사위로 삼는다”고 한것을 보면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그 이름이 유명 하였던 것이다.
⑤ 公이 조정에 나아가서는, 일찍이 전부터 느껴왔던바를 조리있게 주상(임금에게 말씀드려)한바, 첫째 불교를 배척하여 유교를 숭상토록하고, 둘재 세금과 부역을 가볍게 하고, 셋째 과거를 보아 인재를 등용하는 3가지로서, 고려말의 폐단을 없애도록 건의하니, 임금이 기쁘게 받아들여 채용하였다.
⑥ 公이 집에있을 때는 사서오경등 중국의 성인과 현인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이나 역사를 기록한 책을 통달하였고, 문장에 능술하여 보통 사람들은 이에 따르지 못했으며, 또한 조정에 가서는 충성을 다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말하면 모든 것이 정치의 요체가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에고치가 실뽑아 내듯이 할아버지(남재)가 젊었을때 말하는 것과 꼭 빼닮았다.” 고 칭찬 하였다.
⑦ 公이 돌아가신지 수백년만에 신주를 모신 믿음직한 처소를 건립하고, 아름다운 장식을 하니, 종중의 공론이 자연히 화합하여 소망하는 바가 잘 이루어질 것이며, 농화당 중건을 들은즉 나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⑧ 나 또한 일찍이 국승(나라의 역사)과 야사를 살펴본즉, 의산군의 장손인 병조판서를 지낸 남이는 세조 임금때 100년에 한사람 날까말까한 날쌔고 용감한 장군으로서,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여진족의 이만국을 멸망 시킬때에, 선봉에 나서 함락하니,그 공로가 제일이라 파격적으로 병조판서에 임명되니 그때 공로가 너무나 빛나 세상사람들의 이목을 진동 시켰으나, 시운이 불행하여 소인배 유자광의 참소로 역모혐의를 입어 돌아가심에 따라 그 후로 소간공의 제사도 지내지 못해 벌레 울음 소리만 들려왔다.
⑨ 순조무인년 봄에 장군의 방손(일가친척)으로 당시 우의정을 지낸 남공철이 임금이 왕자를 가르치고 있는 자리에서 보고를 드리니(건백) 임금이 특별히 허락하여 남이장군의 관직과 작위를 옛날대로 복구 하였다.
⑩ 또 들은바에 의하면 장군의 동생 군수公 남초의 10대손 되는 익권등이 소간공의 제사를 받들겠다고 하니 허락하면서 형이 죽어 아우가 차종손으로 제사를 받들겠다고 하니 가상히 여기면서 기꺼이 허락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⑪ 아!아! 의산군은 당시에 국가 창업기에 대대로 큰 공이 많았으므로 임금이 의산군으로 봉하니 부마(임금의 사위)로서 君에 봉해지는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 우의를 지키는 것은 모든 일에 근원이니 한 가지를 미루어 보아 백가지를 다 알 수 있겠구나.
⑫ 또한 의빈부 벽상에 걸린公이 지은 시에 “나물 죽이라도 배불리 먹을수 있고 나아가 벼슬을 하게되면, 청렴결백하게 조정 일을 돕는 것을 서민들도 관심을 가지는 바인데, 이를 모르는 사람은 무슨 화를 당할까봐 구름 속에 가려진 산의 나무와 같이, 자기의 경륜을 펴지않고 숨어서 일생을 보내고 만다”는 시였다.
이 시는 공경(고관의 총칭)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같이 산림속에 들어가 뜻을 펴지않고 숨어사는 것을 개탄한 시 이다.
⑬ 그후 세월이 흘러 남재(在)의 후예들은 취산(영산읍 뒷산 : 영취산, 영축산 이라고도 함)동쪽 구산에 살고 있는, 즉 충경공(남재)의 자손들의 일부가 사는 큰 마을을 두었고, 후손들이 제사드리던 원우전(구봉서원)이 철폐 된 후, 이 농화당은 의산군을 제사 드리기 위한 재실이다.
⑭ 이 농화당의 이름은 穠자는 <꽃과 나무가 빽빽이 많은 모양의 농>자로서 제갈량의 하피농에서 딴 것이며, 華 자는 <꽃필 화, 빛날 화, 영화로울 화>자로서 도계지의와 같은 뜻이니 어찌 아름다운 이름이 아니리오.
⑮ 의산군의 15대손 사과(오위의 정6품의 軍職)를 지낸 정묵 (술선록을 저술한 현 종손 세우의 3대祖) 14대손 경원, 길원이 나에게 중건기를 써 주도록 청해, 내 비록 문장이 능숙하지는 못하나 굳이 사양할 수 없고, 나 역시 태종대왕의 제 2남인 효녕대군의 13대손으로서, 효녕대군은 의산군과 매형제 인즉, 정묵은 내 가문의 외후예이니 어찌 부족한 글 이나마 청을 못 들은 척 하랴.
⑯ 중건일은 경인년(1890년고종27년)봄에 시작하여 신묘년(1891년고종28년) 가을에 마치고 계사(1893년고종30년)3월 상사일에 삼가 중건기를 쓰다.
(2) 농화당 재건축(1999년)
☞ 공사개요
0 기간 : 1998년 ~ 1999년 12월 0 장소 : 구산리 261번지 (구 농화당 부지) 0 대지 : 1,954 m (591평) 0 연건평 : 39평(관리사 미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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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사내역/ 소요액 : 3억 7,700여만원
재실 건물 재건축 |
농화당 본당 22.7평 입구 정문 솟을 대문 6.5평 의산군 사당 7.6평 사당 출입문 2평 |
2억2천만원 * 시공자 : 밀양 청도면 덕법리 도목수 김무언 |
토목 및 석축 부속 공사 |
구 건물 철거 및 석축공사 바닥, 계단및 화장실 담장, 허묘 정화, 계단 변경 등 |
9,360만원 * 남철수(구산리) 시공 |
단청공사 |
의산궁, 출입문 |
1,200만원 |
진입로 확장 |
남상대가옥 매입/ 철거 |
1,750만원 |
주차장 부지 매입 |
남정태 가옥 매입 |
600만원 |
부대비용 및 잡비 |
전기및 조명(64만원)포함 |
2,800여 만원 |
1999년도에 재건축을 완공하고 2008년에 세운 헌성금 비(碑)
[농화당 재건축 헌성록 비문 내용]
농화당이 1821년(신사)에 건립되고 누차 보수되었으나, 장구한 세월에 노후하여 1996년(병자) 봄에 종회(宗會)는 구 건물을 철거하고 중건(重建)하기로 합의하여 재실 재건축 위원회를 구성 모금을 시작하였다.
전국각지의 뜻있는 종원 제위께서 헌성금하여 주시고 특히 충경공 종회가 거액을 지원하여 주신 덕분으로 1999년(을묘)에 농화당 의산궁 사우(祠宇, 不遷之位) 제 건물이 웅장한 모습으로 완공 되었다. 종회는 헌성금을 주신 고마운 뜻을 기리기 위하여 비석에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노라
2008년 8월 일
의령 남씨 위산위공파 종회
2008년 8월 일
의령 남씨 위산위공파 종회
1999년 재건축 완공후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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