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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拓境立碑(척경입비)
高麗 睿宗朝命守司徒中書侍郎平章事尹瓘爲
고려 예종조명수사도중서시랑평장사윤관위
行營大元帥 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吳延寵爲副
행영대원수 지추밀원사한림학사승지오연총위부
元帥發兵十七萬號二十萬擊逐女眞拓地新築六城置
원수발병십칠만호이십만격축여진척지신축육성치
咸福雄英州吉及公嶮鎭遂立碑于先春嶺以爲界嶺
함복웅영주길급공험진수립비우선춘령이위계영
今在鍾城直北七百里碑面有書爲胡人剝去後有人掘其
금재종성직북칠백리비면유서위호인박거후유인굴기
根有高麗之境四字
근유고려지경사자
1. 영토의 경계를 넓히고 비를 세우다.
고려 예종 때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 윤관을 행영대원수로, 지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 오연총을 부원수로 명하여 징발한 병사 17만 명을 20만 대군이라고 칭하고 (이를 이끌고) 여진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여진을 몰아내고 개척한 땅에 6성을 쌓고, 함주, 복주, 웅주, 영주, 길주와 공험진을 두고, 마침내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나라의 경계로 삼았다. 선춘령은 지금의 (함경북도) 종성(두만강 북쪽 지방)에서 정북으로 700리의 위에 있고, 비석에 글자가 있었는데, 여진 사람이 글자를 벗겨내었고 이후에는 어떤 사람이 비석을 뽑아내었다. 비석에는 「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새겨 있었다.
※ 公嶮鎭(공험진): 두만강 이북 700리 소하강(蘇下江) 강변에 있다고 함.
2. 夜宴射樽(야연사준)
我 世宗朝都巡門察理使金宗瑞旣設六鎭專尙威猛以慴
아 세종조도순문찰리사김종서기설육진전상위맹이습
獷俗日置酒張樂燕餼極豊偏裨之前皆供一牛頭吏民苦之
광속일치주장악연희극풍편비지전개공일우두이민고지
或言其不可宗瑞曰風沙絶塞將士飢苦吾以約始之後必無終
혹언기불가종서왈풍사절새장사기고오이약시지후필무종
一日夜宴有飛矢中酒樽左右驚擾宗瑞自若人請其故宗
일일야연유비시중주준좌우경요종서자약인청기고종
瑞曰姦人試我耳 何能爲哉請捕之曰走已遠矣捕之何得乃
서왈간인시아이 하능위재청포지왈주이원의포지하득내
極飮終宴
극음종연
2. 밤중의 잔치에 술통을 쏘다.
우리(조선) 세종 때 도순문찰리사 김종서가 6진을 설치하고 오직 위맹함을 높여서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보통 날에도 술자리를 만들고 음악을 펼쳤는데 잔치 음식이 매우 풍성하였다. 모든 부장들에게는 소머리 하나씩을 바치게 하여 관리들과 백성들이 노고하게 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자 김종서가 말하기를 바람에 모래가 날리는 멀고 먼 변방에서 장수와 병사들이 굶주려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가 처음부터 (장졸들이 먹는 것을) 아낀다면 그 다음은 끝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밤중에 술잔치를 열었는데 술통에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주위 사람들이 놀라 소란스러웠는데 김종서는 태연자약하게 있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김종서가 대답하기를 간사한 사람이 나를 시험해본 것일 뿐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체포하자고 하니 말하기를 달아나서 이미 멀리 갔을 것이니, 어떻게 잡겠는가?라고 말하고 이어서 실컷 마시고 난 다음에 잔치를 끝냈다.
※ 六鎭(육진): 조선 세종 때 동북방면의 여진족에 대비해 두만강 하류 남안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충지. 즉,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여섯 진을 말한다
3. 夜戰賦詩(야전부시)
世祖朝六鎭蕃胡反側命申叔舟爲元帥往征分道深入
세조조육진번호반측명신숙주위원수왕정분도심입
擊破之虜乘夜來襲營中喧呼應戰叔舟堅臥不動召
격파지로승야래습영중훤호응전숙주견와부동소
幕僚口占一絶曰虜中霜落塞垣寒鐵馬縱橫百里間夜戰
막료구점일절왈노중상락새원한철마종횡백리간야전
未休天欲曉臥看星斗正闌干將士觀其安閒賴以不擾
미휴천욕효와간성두정난간장사관기안한뢰이불요
3. 밤 전투에서 시를 읊다.
세조 때 6진에 살던 (여진족의 야인들인) 번호가 반기를 들자 신숙주를 명하여 원수로 삼아 정벌하게 하였다. (신숙주는) 길을 나누어 깊이 (번호에) 들어가 이들을 격파하였는데, 이들 중 일부가 밤을 타고 와 (신숙주의) 군영을 습격하였다. 군영의 병사들이 소란스럽게 외치며 싸움에 응하고 있었는데, 신숙주는 굳건하게 누워 동요도 없이 참모를 불러 칠언절구의 시를 읊어 주었다. 오랑캐 무리에 서리가 내리니 변방의 담장은 차갑고, 철마는 종횡으로 백리를 달리는구나. 밤 전투는 끝나지 않고 날은 밝아오는데, 누워서 북두성을 보니 난간 바로 위에 있구나. 장수와 병사들이 (신숙주의) 안정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를) 믿고 동요하지 않게 되었다.
※ 蕃胡(번호): 조선 초 6진에 살았던 여진족을 가리킨다.
4. 出奇破賊(출기파적)
世祖朝丁亥吉州人李施愛據州以叛道內列郡邑爭應之朝庭
세조조정해길주인이시애거주이반도내열군읍쟁응지조정
遣魚有沼討之大戰于洪原又戰于北靑又戰于蔓嶺賊乘高
견어유소토지대전우홍원우전우북청우전우만령적승고
據險矢下如雨我軍不得上有沼詣以小舟載精兵著靑衣與
거험시하여우아군부득상유소예이소주재정병착청의여
草木色無別由海曲攀木緣崖續出上峯 俯視賊背鼓譟賊
초목색무별유해곡반목연애속출상봉 부시적배고조적
大驚嶺下之軍乘勢蟻附以上賊不能支遂潰
대경영하지군승세의부이상적불능지수궤
4. 기발한 방법으로 반란군을 격파하다.
세조 정해년(1467년) 길주 사람 이시애가 길주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도내의 각 고을에서 다투어 이에 응하였다. 조정에서는 어유소를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홍원에서 크게 싸우고 북청에서도 싸우고 만령에서도 싸웠다. (만령에서는) 반란군이 높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화살을 내려 쏘아 화살이 비 오듯 하므로 아군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어유소가 작은 배들을 가져다 놓고 정예 병사에게 푸른 색 옷을 입혀 나무와 풀의 색깔과 구분이 되지 않게 한 다음 배에 태워 바닷가의 굽이를 따라 돌아가서 나무를 잡고 벼랑을 올라가게 하였다. 이들이 속속 높은 봉우리로 나와 아래로 적의 뒤를 내려다보며 북을 치니 반란군들이 크게 놀랐다. 아래에 있던 군사들이 그 기세를 타고 개미떼처럼 붙어서 (공격해) 올라가니 반란군들이 지탱하지 못하고 마침내 허물어졌다.
※ 洪原(홍원):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동해에 연접한 군이다.
※ 北靑(북청): 함경남도 북청군으로 홍원군과 연접하고 있다.
※ 蔓嶺(만령): 북청 동쪽 68리에 있는 매우 험한 고개이다.
5. 登臨詠懷(등림영회)
南怡宜城尉之子也生於綺紈而驍勇絶倫年在弱冠征從李
남이의성위지자야생어기환이효용절륜연재약관정종이
施愛先登力戰榮功第一等纔報捷皇朝有夾功建州三衛
시애선등력전영공제일등재보첩황조유협공건주삼위
野人之命朝庭使怡等回軍赴之直到巢穴斬馘無筭掃
야인지명조정사이등회군부지직도소혈참괵무산소
蕩而還登白頭山作詩曰白頭山石磨刀盡豆滿江波飮馬
탕이환등백두산작시왈백두산석마도진두만강파음마
無南兒二十不平國後世誰稱大丈夫
무남아이십불평국후세수칭대장부
5. 높은 곳에 올라 품고 있던 생각을 노래로 읊다.
남이는 의성위(宜城尉)의 아들이다. 지위가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날래고 용맹함이 매우 뛰어났다. 나이 20대에(26세 때) 이시애의 난을 정벌하는데 종사하여 선봉에 서서 힘을 대해 싸워 영광스러운 공이 일등이었다. (이시애 군사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보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 황제가 건주삼위의 여진족을 협공하자는 요청이 있어 조정에서 남이 장군 등에게 군대를 돌려 (건주위로) 진격하게 하였다. 남이 장군 등은 곧바로 여진족의 고을로 쳐들어가 무수하게 많은 적을 베었다. (남이 장군은) 여진족을 소탕하고 돌아오다가 백두산에 올라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백두산 돌들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결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
사나이 20대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후세에 어느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
※ 建州三衛野人(건주삼위야인): 명나라가 남만주에 설치한 건주위에 살던 여진의 3부족을 말한다. 남이 장군은 주장(총사령관) 강순(康純)의 우상대장(右廂大將)으로 좌상대장인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 명나라 황제의 요청으로 이들과 함께 건주위의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어유소 장군은 북관유적도첩의 4번째(바로 앞)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6. 一箭解圍(일전해위)
宣祖癸未春賊胡萬餘騎來圍訓戎鎭撤長城門作爲衝
선조계미춘적호만여기래위훈융진철장성문작위충
橋毁城城中矢盡力竭垂陷穩城府使申砬聞變從間道馳
교회성성중시진력갈수람온성부사신립문변종간도치
來直突其圍急擊之賊胡有知砬面者見其快射魁首一矢
래직돌기위급격지적호유지립면자견기쾌사괴수일시
而斃驚曰穩城令公來也卽揮弓退北城中知外救至開
이폐경왈온성영공래야즉휘궁퇴배성중지외구지개
門夾擊乘勝直擣盡蕩窮廬
문협격스승직도진탕궁려
6. 화살 한 개로 포위를 풀다.
선조 계미년 봄에 여진족 오랑캐가 1만여 기의 군사로 훈융진을 포위하고 장성문을 헐며 충차와 판교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였다. 성 안에는 화살이 모두 떨어지고 힘도 다하여 성이 함락될 지경이 되었다. 이때 온성부사 신립이 이 소식을 듣고 기병을 이끌고 사잇길로 달려와 곧바로 포위망을 정면으로 뚫고 돌진하며 공격하였다. 신립이 한 개의 화살로 적의 대장을 쏘아 죽이니, 신립의 얼굴을 알아보는 여진족 병사들이 놀라서 말하기를 온성 수령이다!라고 외치며 활을 휘저으며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이에 성 안에서도 밖에 원군이 도달한 것을 알고 문을 열고 적의 향해 달려가 마구 공격하였으며, 적의 마을까지 진격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 癸未(계미): 선조 16년, 1583년이다.
※ 衝橋(충교): 성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충차(衝車)와 판교(板橋)
※ 直擣(직도): 적의 진중으로 곧바로 달려가서 마구 짓침.
※ 窮廬(궁려): 허술하게 지은 집이란 뜻인데, 적들의 마을을 가리킴.
7. 守柵拒敵(수책거적)
宣祖朝丁亥巡察使鄭彦信設屯田于鹿屯島令造山萬戶
선조조정해순찰사정언신설둔전우녹둔도영조산만호
李舜臣掌其事至秋收穫之際蕃胡諸酋與深處亐知个
이순신장기사지추수확지제번호제추여심처울지개
等嘯聚藏兵楸島見收護孤弱農民布野擧衆突出先
등소취장병추도견수호고약농민포야거중돌출선
使騎兵來圍木柵縱兵大掠時柵中將士皆出場頭餘者
사기병래위목책종병대략시책중장사개출장두여자
無幾將不能支吾酋長亇尼應个跳壕而入將欲踰柵自
무기장불능지오추장마니응개도호이입장욕유책자
柵中一箭射倒賊徒退走舜臣開柵追擊奪還農民
책중일전사도적도퇴주순신개책추격탈환농민
7. 선조 정해년에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조산만호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가을에 이르러 수확할 때가 되자 주변에 살던 여진족 오랑캐의 여러 추장과 내륙 깊은 곳에 살던 추장 울지개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추도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 그러다가 수비군이 얼마 되지 않고 약한 농민들이 들판에 퍼져 일하자 무리를 일으켜 돌입하였다. 먼저 기병으로 하여금 와서 목책을 포위하게 하고 노략질을 하였다. 이 때 목책 중의 군사는 모두 들에 나가고 머릿수가 얼마 되지 않아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여진족 추장 마니응개가 참호를 뛰어넘어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 하였다. 이때 목책 가운데서 한 화살이 날아가 마니응개를 쏘아 꺼꾸러뜨리니 적의 무리가 패주하였다. 이순신은 목책을 열고 추격하여 잡혀간 농민들을 빼앗아 돌아왔다.
※ 宣祖朝丁亥(선조정해): 선조 20년, 1587년.
※ 鹿屯島(녹둔도): 함경북도 선봉군 조산리에서 약 4㎞ 거리에 있는 섬. 조선 세종 때 6진(鎭)을 개척한 이래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亇尼應个(마니응개): (~ 1587) 여진족의 추장. 녹둔도에 와서 노략질을 하는 과정에서 참호를 뛰어넘어 들어오다가 이몽서라는 조선군 병사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8. 倡義討倭(창의토왜)
宣祖壬辰倭敵長驅入北道內叛民爭縛官吏以與賊鏡城寺奴
선조임진왜적장구입북도내반민쟁박관리이여적경성사노
鞠世必受倭署官聲勢尤張北評事鄭文孚陷賊中脫身
국세필수왜서관성세우장북평사정문부함적중탈신
逃走至魚郞里李鵬壽家鵬壽與崔配天池達源等推文
도주지어랑리이붕수가붕수여최배천지달원등추문
孚爲倡義大將號召散亡得三百餘人至府城誘脅世必引
부위창의대장호소산망득삼백여인지부성유협세필인
兵入城未幾倭賊掠至城南文孚開門擊走之建大將旗于
병입성미기왜적약지성남문부개문격주지건대장기우
南門樓正位而坐諸將官皆入鞠躬行禮世必繼入使姜文佑
남문루정위이좌제장관개입국필행례세필계입사강문우
等執之並其黨十餘人數其罪斬之懸首號令於是軍聲
등집지병기당십여인수기죄참지현수호령어시군세
遂震
수진
8.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선조 임진년에 왜적(일본군)이 멀리 좇아와 함경북도에까지 이르렀다. 도내에는 나라를 배반한 백성들이 관리와 엮여서 왜적을 도왔다. 경성의 절에서 노비일을 하던 국세필이 왜적이 장악한 관청의 일을 맡아서 명성과 위세가 대단하였다. 북평사 정문부는 왜적에게 성이 함락되자 탈출 도주하여 어랑리의 이붕수의 집에 이르렀다. 이붕수와 최배천과 지달원 등이 정문부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들은 흩어진 사람 300여 명을 불러 모아 부성에 이르러 국세필을 회유하고 위협하여 의병을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들이 약탈하면 성의 남쪽에 이르렀다. 정문부가 성문을 열고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장기를 남문 누각에 세우고 정 위치에 앉으니 장수와 관리들이 모두 들어와 몸을 숙이고 예를 행하였다. 국세필이 이어서 들어오자 강문우로 하여금 국세필과 그 무리 10여인을 붙잡게 하고 그들의 죄를 헤아리면서 목을 베라고 호령하였다. 이에 정문부 의병군의 명성이 떨치게 되었다.
※ 北評事(북평사): 조선시대 함경도에 있는 북병영에 딸린 정6품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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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았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씨도 좋고 그림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잘~~봤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