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중규(郭重奎 1891~1950)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1921년 9월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던 중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비서로 취임하였고 이어 비서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에서 활동하던 동생인 곽중선(郭重善, 1907~1935)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하이의 지리와 풍습을 알려주도록 하여 훙커우공원 의거를 지원하였다.
◇ 의병의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의 뜻을 키우다
곽중규는 1891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의병 출신인 아버지 곽준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곽헌(郭憲), 곽공원(郭公園) 등의 이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의병활동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한 부친 곽준희를 통해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자주 독립의 뜻을 키웠다.
부친 곽준희(곽경희)는 1870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1907년 일제가 강제로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켜 사실상 강탈하자 장운식(張雲植)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곽준희는 이 의진에서 주로 군수품 수합 임무를 맡아 활동하던 중 1909년 3월 일경에 체포되어 같은 해 6월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곽중규 생가(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
곽중규는 1901년경부터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1909년 미국인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같은 해 상경하여 만국성서연구회에서 성서보급을 위한 업무에 종사하면서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1916년 고향으로 내려왔고 인근 영동에 대서소를 개업하여 배우지 못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한편 식민지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옥천군 이원면에서 동생 곽중선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독립운동의 방책을 모색하던 그는 1921년 9월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던 중 그 행로가 여의치 않게 되자 목적지를 바꿔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기로 하고 이듬해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비서로 취임하였으며 이어 비서장으로 승진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5월 상하이교민회에서 설립한 인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포 자녀들의 민족교육에 허신하였다. 인성학교는 임시정부 수립 이전부터 상하이에 있었던 한인학교였다. 이를 1919년 3월 교민친목회가 대한인거류민단으로 개편될 때 이 거류민단이 인성학교를 운영하였다. 인성학교는 재정관계로 커다란 난관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한인 자재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곽중규(곽헌) 등이이승만을 탄핵한 사실을 보고한 일제 비밀문서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제13회 의정원 회의에서 나창헌ㆍ최석순ㆍ강창제 등과 함께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였다. 탄핵안은 3월 18일 가결되고 이를 다시 심판에 부치기로 결정하여 심판위원장에 나창헌이 선출되고 곽중규를 비롯하여 채원개ㆍ김현구ㆍ최석순이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이 안건을 심리한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면직을 결정하고 3월 23일 희의에서 이를 발표하는 동시에 후임 대통령선거를 행하였다. 이 선거에서는 국무총리였던 박은식(朴殷植)이 만장일치로 제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 상하이교민단 단장이 되다1926년 곽중규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내의 하비로 307호에 명성(明星)사진관을 개업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연락장소로 제공하였다. 1927년 10월에는 상하이교민단의사회의 선거에서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교민단은 1919년 3월 상하이에 거주한 한국인들이 교민친목회를 조직하고, 그해 9월 이를 대한인민단으로 개편한 것이다. 1920년 1월 다시 대한거류민단으로 확대·개편하고, 3월 임시정부에서 거류민단제를 임시거류민단제로 법제화함으로써 임시정부 산하기구로 편입하였다. 10월에는 거류민단제가 자치적 성격이 가미된 교민단제로 법이 바뀜에 따라 자치적 단체의 성격을 지닌 교민단으로 개칭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외곽단체의 기능을 하면서,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자치와 국내동포의 지원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곽중규는 교민단장으로 1927년 10월부터 이후 1929년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이해에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생 곽중선을 상하이로 망명시켰다. 동생 곽중선은 상하이에 도착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에 가입하였다. 병인의용대는 1925년 말에 상하이에서 나창헌(羅昌憲)·이유필(李裕弼)·박창세(朴昌世) 등의 주도 하에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의 권위와 정신을 옹호 선양하며, 일제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적과 일제의 밀정으로 암약하는 한국인들을 처단하여 적의 세력을 약화시켜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려는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였다.
◇ 유일당운동에 참여하다1927년 말부터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의 간부겸 유호독립운동자동맹(留·獨立運動者同盟)의 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11월 9일 베이징·상하이·광둥·우한·난징 등의 각 촉성회 대표들은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운동역량을 총집중시킬 유기적 통일기관이 없다는 데서 광복운동 성적 부진의 원인을 찾은 연합회는 각지 촉성회를 연결하여 유일당의 조직을 점검할 모임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그곳에 모였던 곽중규 등은 이후 운동에 대한 방침을 토론하자는 의견을 제출하여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하였다.
곽중규 공판기사
동아일보 - 1933년12월6일
유일당운동은 1929년 10월 26일 상하이촉성회의 해체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세력은 상하이촉성회 해체 결의와 동시에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했고, 만주지역에서는 1929년 12월 조선혁명당이 조직되었으며, 임시정부 인사와 흥사단세력이 중심이 되어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
◇ 윤봉길 의거의 숨겨진 형제 조력자 1929년 상하이 프랑스조계 내로 이사한 곽중규는 그의 경험을 살려 성광(星光)사진관을 개업한 뒤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의 비밀장소로 제공하였다. 1931년 9월부터 윤봉길을 사진관이 있는 건물에 은신 기숙하게 하였으며, 동생 곽중선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하이의 지리와 풍습 등의 정보를 제공하는 등 장차 거사를 위해 은밀히 대비케 하였다.
곽중규의 손자 곽태민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곽중규의 아들, 고 곽성호)가 상하이의 사진관에서 살 때 어떤 젊은 남자가 함께 살았었는데 홍커우공원 거사 후 그분이 윤봉길 의사였음을 알았다"고 회술하였다고 한다.
독립유공자탑(옥천군 옥천읍 마암리), 곽중규와 부친, 동생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1931년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 요인에 대한 일경의 검색이 극심해지자 이를 피하여 난징, 한커우 등지를 경유하여 충칭으로 가 머무르며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1933년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밀정의 제보로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어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5년 5월 가출옥하여 텐진에 있는 동생 곽중혁의 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상하이의 가족들과 비밀연락을 취하던 동생 곽중선이 괴한의 총격으로 사거하였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동생의 죽음에 애통해 하였으나 신변의 위협으로 상하이로 가지 못하고 1938년 스좌장(石家莊)으로 이주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1945년 조국광복 이후 소식이 두절되었고 후손들에 의하여 1950년 9월10일자로 사망신고 처리되었다.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했던 일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 광복 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였던 것 같다고 하며 이후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곽중규 일가는 오래 전에 고향인 옥천을 떠나 중국 등지로 망명 했을 뿐만 아니라 일가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해 그들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아 서훈도 뒤늦게 이뤄졌다. 그의 생가지인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 옛 집은 흔적은 남아있으나 후손들은 살고 있지 않으며 오래 전부터 선산 곽씨 문중 재실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으로 기려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부친 곽준희는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동생 곽중선은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으니 부자 독립운동가이고, 형제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고장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문 가문이라 할 수 있다.
/ 이순아(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