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집 스님의 금강경에서 상(相)은 산스끄리트어 산냐(samjan)을 옮긴 것이다.
구마라집 스님이 산냐를 상(想)으로 번역하지 않고 상(相)으로 옮긴 점은 정말 수승하다. 단순히 인식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마음을 궁글리는 차원을 넘어 마음에 어떤 상(相)을 굳게 만들어서 가지는 상태를 산냐로 파악한 것이다. 마음에 굳게 그리거나 만들어가지고 있는 것은 이념, 신념, 관념, 고정관념, 경계 등을 말한다.
금강경은 산냐(相)를 극복하는 것을 설한 경이지 산냐(相) 없음에 몰두하는 것을 설한 것이 아니다. 금강경은 공(空)을 설한 것이 아니다. 초기불교에서 부처님께서 고구정녕(苦口丁寧)히 설하신 ‘산냐를 극복하라.(sannanam uparodhana)’는 말씀을 따르는 경이다. 공관(空觀)의 지혜를 설하기에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산냐를 뛰어넘는 참 지혜를 설하기에 반야바라밀이다.
구마라집 금강경은 축자적(逐字的)이고 운율과 깊은 의미까지 갖춰 지금까지 불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구마라집 금강경'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있어 매일 몇 독씩 하면 무명장수에 지혜가 생기고 귀신들이 보이고 영가가 천도된다는 정말 이상한 상(산냐)을 만드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출처 : 각묵스님( 금강경 역해 : 산스끄리트어 원전분석 및 주해)
첫댓글 왜 그랬산냐? 다 네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