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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弓裔
궁예(弓裔. 857~918. 재위 기간 901~918)은 신라 진골(眞骨) 가문에서 태어나 ' 나라를 망칠 놈 "이라는 예언과 함께 모진 인생 역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타고난 힘과 재주로 사람들을 모아 드디어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우는 왕이 되었다.그는 살아있는 미륵(彌勒)으로 자처하였으며, 관심법(觀心法)이라는 특유의 술책으로 사람을 휘어 잡았다. 포악한 성격으로 주변의 인심을 잃었고, 드디어 부하인 왕건(王建)에 의해 내몰려져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과연 난세(亂世)의 영웅일까, 악(惡)한 군주의 표상일까.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최종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이었지만, 그 전대(前代)를 만들어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활동상은 많은사람들의 애정을 받으며 사실은 사실대로, 전설은 전설대로 남겨져 내려오고 있다. 그만큼 패자(敗者)에게도 기록은 엄정(嚴正)하였고, 그들에게서도 섭취할 것은 그대로 섭취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승자(勝者) 중심의 논리가 너무 강하였다. 이는 단지 기록의 문제만은 아니다. 승자(勝者)의 기록인 정사(正史)에만 지나치게 의존했다. 패자(敗者) 입장에서의 기록은 물론이고, 그 해석도 적었다. 승자(勝者)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패자(敗者)는 나름대로 정당성 조차 잃고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는 역사 속의 스타를 배양시키지 못한 것은 아닐까.
궁예의 재해석
이러한 역사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가장 많이 당한 사람이 아마도 후삼국(後三國) 시대의 걸출한 영웅인 궁예(弓裔)가 아닐까? 우리가 배운 역사 속에서 궁예는 포악한 성격으로 처자식을 비롯하여 수다한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한 폭군(暴君)으로, 그리고 자신을 미륵(彌勒)이라 사칭한 사이비 교주(似而非 敎主)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이 점은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北韓)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라(新羅)보다 고려(高麗)에서 역사적 정통성을 찾는 북한의 고려 연구는 남한보다 활발하다고 하지만, 그들은 궁예를 ' 통치기구를 꾸리고, 인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더욱 강화하고, 통치영역을 넓힐 목적으로 싸움을 끊임없이 벌려놓은 인물 '로 기록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에서 공히 폭군으로 취급받고 있는 궁예(弓裔),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평가에 적지않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 캔사스대학의 '허스트 3세' 교수는 ' 선인(善人), 악인(惡人), 그리고 추인(醜人) - 고려 왕조 창건 속의 인물들 '이란 논문에서 ' 고려 창건사에서 왕건(王建)은 선인(善人), 견훤(甄萱)은 악인(惡人), 궁예(弓裔)는 추인(醜人)의 배역을 받았으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기록된 것처럼 성(聖)스럽거나 악(惡)한 존재는 아니었다. 역사가들이 역사를 편찬하던 그 시점에 특수한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배역(配役)을 맡게 된 것처럼 보인다 '고 말하며, 정사(正史)의 진실성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위의 '허스트 3세' 교수는 이러한 의문을 바탕으로 사료(史料)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궁예(궁예)에 대하여 ' 큰 야심과 정치적 지혜가 있었으며, 개인적 권위가 있었고, 사람들의 능력을 잘 판단할 줄 아는, 곧 인재를 볼 줄 알았던 인물이며, 궁예왕국의 정치적, 행정적 업적이 오로지 왕건(王建)의 탁월한 덕성(德性)의 결과이었다고 생각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고 결론짓고 있다.
궁예(궁裔)는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과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후궁(後宮) 사이의 소생이라는 설과, 제48대 경문왕(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 그리고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숨겨진 아들이자, 장보고(張保皐)의 외손(外孫)이라는 설 등이 있다.
이는 유력 왕족의 후손임을 내세우려 했던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실은 진골(眞骨) 가운데서도 몰락하여 지방으로 흩어진 집안의 후손이 아닐까 여겨진다. 집안 못지 않게 출생과 성장과정은 더욱 비극적(非劇的)이다.
외가(外家)에서 태어난 궁에는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하니 기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는 일관(日官)의 예언을 듣는다. 그는 857년 음력 5월5일 그의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날 때부터 이가 나 있었으며, 그가 태어날 때 그 지붕 위에 달빛처럼 보이는 하얀빛이 아른거리며 긴 무지개처럼 위로 하늘까지 뻗쳐 있었다고한다. 이에 일관(日官)이 왕에게 아이가 태어난 시기, 나면서부터 있던 이, 광염 모두가 나라에 이롭지 못한 아이를 뜻하는것이라며, 그 아리르 그냥 놔두어서는 안된다고 왕에게 아뢰었고, 이에 왕은그 아리를 데려가서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이 차마 그러지 못하고 아이를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마침 젖 먹이던 종(從)이 아이를 몰래 받아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그래서 한쪽 눈이 멀었다. 그 여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 10여 세가 되도록 궁예가 장난만 치자, 여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차마 보지 못하여 오늘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러나 너의 미친 행동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들에게 일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화(禍)를 벗어나기 힘들 터, 이를 어찌 하겠느냐 ?
궁예는 길러준 어머니의 곁을 떠나기로 하였다. 울면서 밤길을 걸어 그가 도착한 곳이 세달사(世達寺)이었다. 강릉 태수의 딸에게 홀딱 반해 꿈으로 그 소원을 이루었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헛됨을 깨달았다는 조신(調信)이 일하던 바로 그 절이었다. 세달사는 나중에 흥교사(興敎寺)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강원도 영월(寧越)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고 불렀다. 훗날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고, 경전을 짓고 강설을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행동은 승려로서의 경험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조신의 꿈 調信의 꿈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像) 제4, 조신조(調信條)에 실려 전하고 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인인생의 허무를 주제로 한 ' 꿈의 문학 '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그 원조(元祖)가 되는 설화이며, 이 설화를 바탕으로 이광수(李光洙)는 '꿈'이라는 작품을 썼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꿈을 통하여 애욕(愛欲)의 무상함을 깨친 일화를 남기고 있다.
조신(調信)은 경주의 세달사(世達寺 .. 뒤의 흥교사)에 속했던 명주(溟州 ..강릉), 장원(莊園)의 지장(知莊 .. 장원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조신'은 군수인 김흔(金昕)의 딸을 본 뒤 매혹되어 낙산사(洛山寺) 대비관음상(大悲觀音像) 앞에서 그 사랑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수년 동안 정성을 다하였으나, 그녀가 이미 출가하여 자기의 소원을 이루지못하게 된 것을 알고, 관음상 앞에 가서 원망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꿈에 뜻밖에 그 여자가 나타나서 사실은 마음으로 그를 사랑해 왔으나 부모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억지로 남의 아내가 되었지만, 이제 함께 살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그는 기뻐하여 그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40년 동안 깊은 정을 나누고 살면서 자식 5남매를 거느리게 되었으나, 가난하여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10년 동안 걸식(乞食)하였다. 명주의 해현령(蟹縣嶺)에서 15세 된 큰 아들이 굶어 죽자 길가에 묻었고, 우곡현(羽曲縣)에 이르러서 길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이 부부가 늙고 병들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10살 된 딸이 걸식(乞食)하였는데, 그만 동네 개에게 물려 드러눕게 되었다. 부부가 함께 통곡하다가, 50년 동안 고락(苦樂)을 같이 했으나 이제 늙고 병들어 빌어먹기도 어렵고 자식들도 헐벗고 굶주려 어찌 할 수 없으니 헤아져서 살아갈 길을 찾자고 하였다.
부부는 아이를 둘씩 나누어 데리고 남북으로 정처없이 헤어지려던 차에 꿈에서 깨어났다. 그의 머리는 백발이 되어 있었고, 속세에 살려던 뜻이 사라졌으며, 인생의 허무(虛無)와 회한(懷恨)을 느꼈다. 그 길로 해현령(蟹縣嶺)에 가서 시체를 묻은 곳을 파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오므로, 이를 이웃 절에 봉안하였다. 그 후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였다.
기구하게 태어난 영웅은 제가 받은 힘으로 난관을 헤치기 마련이다. 사실 궁예는 일개 승려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에서는 궁예를 '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는 뱃심이 있었다 '고 평한다. 그러면서 이런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어느 날 재(齋)를 올리러 가는 길, 까마귀가 점치는 산가지를 물고 와서 궁예의 바릿대에 떨어뜨렸는데, 거기에는 왕(王)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는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않고, 적이 자부심을 품고만 살았다. 그에게는 일찍이 이렇게 왕의 꿈이 심어졌다.
궁예(弓裔)에게는 다행하게도 시대는 어지러웠다. 특히 그가 세상에 나갈 마음을 먹은 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 5년인 891년 무렵, 조정에서는 유력한 신하들 간에 패가 갈리고, 도적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궁예는 891년 세달사(世達寺)를 떠나 죽주(竹州 .. 지금의 안성시 이죽면)의 반신라적(反新羅的)인 호족(豪族)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 기훤(箕萱)은 북원(北原..원주)의 양길(梁吉)과 마찬가지로 반란을 일으켰던 지방 세력가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성질이 횡포하여 크게 떨치지는 못하였고, 푸대접을 받던 궁예는 892년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함께 기훤(箕萱)을 떠나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양길(梁吉)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군사를주어 동쪽으로 신라(新羅)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아직 경험과 힘이 모자란 궁예로서는 ' 선배 반란군 '에게 한 수 배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예가 출중한 솜씨를 발휘하여 우두머리로 올라서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문을 나선지 3년 만이 894년, 궁예는 강릉(江陵)을 거점으로 삼아 무려 3,500 명 이상의 대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그는 ' 사졸(士卒)과 함께 고생하여,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 '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마음 속으로 두려워 하고 사랑하여 장군(將軍)으로 추대하였다.
궁예가 미륵보살(彌勒보薩)을 자처하는 시기가 이즈음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세달사(世達寺)의 분위기나, 신라 말 강릉지역에 미륵사상(彌勒思想)을 전하는 진표(眞表) 같은 고승(高僧)이 끼친 영향이 궁예의 통치술 구축에 일조하였다는 것이다. 이때의 미륵보살 궁예는 곤궁한 신라 말기의 백성들에게 그야말로 미륵(彌勒) 같은 존재이었다.
태봉 泰封
궁예는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어 그의 신임을 얻고, 강원도 각지를 공략하는 한편 수년간 자기의 세력을 부식(扶植)하고 임진강(臨津江) 일대를 공취하여 차차 독자적인 기반을 닦아 898년에는 송악군(松岳郡 ..개성)에 웅거하여 자립(自立)의 기초를 세웠다. 이 무렵 왕건(王建)이 궁예의 휘하에 들어왔으므로, 그에게 철원태수(鐵圓太守)의 벼슬을 주고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에게 대항하게 하여 그 땅을 빼앗고 901년 스스로 왕(王)이라 칭하여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특히 해상무역에서 우위를 점하던 왕건가(王建家)의 협조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하게 된다.
당시 궁예는 신라(新羅)에 의하여 멸망한 고구려(高句麗)를 대신하여 복수한다고 호언하며, 서북지방의 인심을 모으려고 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으며, 신라의 관제를 참작하여 관제를 정하고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듬해 국도(國都)를 철원(鐵圓)으로 옮기고 성책(聖冊)이라 개원(改元)하였다가,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개원, 914년에 다시 정개(政開)라고 고쳤다. 궁예는 철원(鐵圓 .. 지금의 鐵原)을 중심으로 하여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의 대부분과 평안도, 충청도의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신라나 견훤(甄萱)의 후백제(後百濟) 보다도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태봉(泰封)은 계속 신라의 북쪽을 침공하는 한편 왕건(王建)으로 하여금 수군(水軍)을 이끌고 서남해 방면으로부터 후백제를 침공하게 하여 나주(羅州)를 점령하였다.
양길(梁吉)은 궁예를 거느리면서 그 활약에 힘입어 강원도 일대에 세력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궁예가 강릉으로 진격한 894년 이후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고 왕(王)을 자처하게 된 궁예를 제거하기 위하여, 899년 충주 등지의 10여 성주(城主)들과 함께 비뇌성(非惱城)으로 진군하였으나, 오히려 궁예에게 습격을 당해 패배함으로써 휘하 세력이 대거 궁예에게 흡수되었다. 그 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즉, 양길(梁吉)은 초적(草賊)을 지휘하여 신라의 붕괴를 촉진하였으나,새로운 사회를 개척할 역량을 지니지 못하였으며, 같은 무리와의 세력 다툼 속에서 제거되었다.
신정적 전제주의(神政的 專制主義)는 그 속상상 그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인물들에 의하여 유지ㅚㄹ 수 밖에 없는것이었다. 허월(許越) 등 명주출신, 종간(宗侃) 등 승려들, 은부와 이흔암(伊昕巖)과 같은 전문적인 군인 출신, 청주(淸州) 출신 등이 그 지지세력으로 지목되고 있다.그러나 이들 지지세력도 궁예의 폭정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또 저냉을 수행하고 신정적 전제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므로써 그들로부터도 반발을 샀다.
태봉 정권 말기에는 궁예의 멸망과 왕건의 등장을 예견하는 도참(圖僭)도 나타났다.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백발노인에게서 산 옛 거울에 그러한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918년 6월,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 등 4인의 마군 장군이 왕건을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관심법 觀心法
궁예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것이 관심법(관심법)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 이 신통력이 그의 말년에 갈수록 포악한 짓을 서슴치않는 데 쓰였으니, 그가 애써 이룬 공업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도 이 관심법이었다.
915년 궁예의 부인 '강씨'가,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하여 충언을 올렸다. 그러자 궁예는 부인더러 '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姦通)하니 왠일이냐 ? '라고 응수하였다. 부인이 어이없어 하자, '나는 신통력으로 보고 있다 '고 하면서 뜨거운 불로 쇠공이를 달구어 부인의 음부(淫部)를 쑤셔 죽였다. 미치광이 같은 이런 짓으로 궁예는 두 아이의 목숨마져 빼았았다. 미륵이 아니라 패륜의 극치이었다.
궁예는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고, 큰 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 막내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이라고 하여, 자신은 물론 두 아들까지 신격화시켰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멸都)'라 낮추어 신라인들은 귀화인이라도 모조리 잡아 죽였다.
복장이나 행차에 있어 나름대로 미륵불의 장엄(莊嚴)을 꾸미기도 했다. 머리에 금책을 쓰고 몸에는 가사(가사)를 걸쳤다. 밖에 나가 행차할 때에는 늘 하얀 말을 탔는데, 비단으로 말머리와 꼬리를 장식하였고, 소년과 소녀에게 깃발과 천개(天蓋), 향, 꽃 등을 들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 뒤에는 승려 200명을 동원하여 염불을 하도록 하였다.
불교 경전 20여 권을 지었고, 강설(講說)하기도 하였는데, 경전에는 자신이 하생(下生)한 미륵불이며, 자신의 치세(治世)가 미륵불이 하생(下生)한 이상세계(理想世界)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불교 경전 20여 권의 존재를 통해 기존의 불교 교단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궁예는 ' 나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관심법(觀心法)으로 능히 사람들의 마음 속을 알 수있다. 만약 내 관심법을 거스리는 자가 있으면 곧 준법을 행하리라 '는 말을 내세워 죄 없는 신하들과 왕후 그리고 두 왕자들을 철퇴를 내리쳐 죽이는 등 포악한 공포정치를 일삼았다.
이로써 궁예는 국왕이자 미륵불로서 성속(聖俗)의 권능을 오로지 하게 되었다. 지배자가 신(神) 혹은 그 후손이나 대리인으로 통치하는 형태를 신정(神政)이라 하고, 개인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것을 전제주의(專制主義)라고 한다. 이 점에서 궁예는 신정적 전제주의(神政的 專制主義)를 추구하였다고 규정할 수 있다.
미륵불로서 전지(全知)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이었다. 관심(觀心)은 본래 마음의 본바탕을 바르게 살펴본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부인(婦人)들의 비밀을 알 수 있다고 내세웠다. 그리고 반란의 음모를 적발하는 데에도 이용하였다. 왕건(王建)도 이로 말미암아 모반(謀叛)의 혐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 점에서 '미륵관심법'은 관리들을 감찰하기 위하여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내봉성(內奉省)에 사정(司正) 기능을 더하고, 내군(內軍)을 설치하여 신변 경호와 함께 군(軍)의 동향을 감시하도록 한 정치조직의 변화와 짝하는 것으로 풀이됙 ㅗ있다.
왕건과 궁예
왕건은 궁예의 장군이 되어 많은 공로를 세웠으며, 특히 그의 가문(家門)이 키워온 수군(水軍)을 이끌고 한강 유역과 서해안, 멀리는 지금의 경상남도까지 공략하여 기세를 떨쳤다. 이렇게 궁예는 왕건의 활약에 힘입어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바뀌고 있었다. 궁예는 본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지은 국명을 904년에 마진(摩震)으로, 911년에는 태봉(泰封)으로 고쳤으며 수도도 개경에서 철원으로 옮겼다. 이는 나라가 넓어지고 왕건 등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궁예가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하려고 추진한 변화이었다. 수도(首都)를 옮겨 왕건의 본거지에서 빠져나왔을 뿐 아니라, 자신을 말세(末世)에 나타나 개벽을 이룬다는 미륵의 화신이라 일컫고, 국호도 불교적 의미가 짙은 이름으로 바꿨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접고 스스로 신라 왕실의 후예라고 하면서, 금성(錦城..경주)을 '멸도(滅都)'라고 부르며 자신이야말로 타락한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창시할 구세주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힘이 커진 호족(豪族)과 장수들을 반역죄로 처형하였다. 왕건도 여기에 말려들어 하마터면 죽을 뻔 하였으나, ' 내 관심법(觀心法)으로 보니 네가 반역을 꽤했다 '라는 궁예의 힐문(詰問)에 오히려 ' 그렇습니다. 제가 감히 역모를 꾸몄습니다. 죽여주십시요 '하자 궁예가 정직해서 용서한다며 벌(罰)은 커녕 상(賞)을 내렸다고 한다.
가까스로 모면했지만 언제 궁예의 소네 숙청될지 모르는 일, 게다가 고려(고麗)를 세운 절반의 지분(持分)이 있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궁예가 독재의 길을 치달으니,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다.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박술희 등과 모의하여 918년에 궁예를 내쫒고 스스로 고려의 주인이 되었다.
기록에는 당시 왕건(王建)은 쿠데타에 반대하여 궁예에게 충성하려 했으나, 홍유 등이 간곡하게 부추기고, 부인 유씨가 '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포악한 임금을 없애는 일은 예부터의 일이다 '라며, 손수 갑옷을 가져와 남편에게 입혀 마지못해 거사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아마도 이는 왕건을 미화(美化)하려고 나중에 만들어진 말일 것이고, 실제로 왕건은 거사(擧事)에 앞서 수도에 ' 왕건이 왕이 된다 '라는 참언까지 퍼트리며 적극적으로 쿠데타를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궁예가 쫒겨나 죽은 다음 이흔암, 환선길, 김진선 등의 반란이 꼬리를 물었고, 옛 백제 지역으로 고려에 복속해 오던 공주(公州) 이북의 30여 성이 한꺼번에 후백제에 투항한 점을 보면, ' 궁예가 포악해서 널리 민심을 잃었고, 왕건이 대신 왕이 되자 온나라가 한마음으로 환호했다 '는 기록은 현실과 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로써 4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왕건은 한동안 흐트러진 기강과 민심을 바로잡고 북방의 위협(발해의 쇠퇴, 거란의 등장)에 대비하느라 통일전쟁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게 되었다. 그 사이에 견훤의 후백제가 기세를 올렸다.
아지태 사건 阿志泰 事件
아지태(阿持泰)는 충청도 청주 사람이다. 그의 자세한 생애는 알 수없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성격이 교활하여 남을 속이고 아첨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궁예가 왕위에 오른 후 폭군이되어 횡포를 부릴 때 옆에서 아첨을 일삼아 총애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같은 청주 사람인 입전(笠全), 신방(辛方), 관서(寬舒) 등을 참소하였는데, 해당 기관의 관리가 몇년이나 신문하였으나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 후 913년 왕건(王建)이 이 사건을 맡아 진실을 가려 그의 죄를 밝혀내었다. 이는 개성 사람인 왕건이 '아지태'로 대표되는 청주세력을 몰아내고 중심세력으로 부상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궁예의 최후
궁예는 결국 918년 6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궁예가 왕건을 태조(太祖)로 옹위(擁位)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서 ' 왕공(王公)이 벌써 천하를 얻었으니 내 일은 끝났다 '고 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변복(變服)을 하고 산골로 도망쳐 나왔다. 이틀 밤이 지난 후에 배가 몸씨 고파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다가 부양(부양.. 강원도 평창)의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강우너도 철원지방에서 내려오는 전설은 이와 아주 반대되는 궁예의 모습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전설을 기록한 '풍악기유(楓岳記遊)'에 따르면, '궁예는 이상(理想)을 실현하지 못한 설움을 견디지 못한 채 천명(天命)을 알고 이에 순응하여 자결한 의군(義軍) '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가 기록하는 궁예
궁예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 성과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5월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 위에 흰 빛이 있어 긴무지개처럼 위로 하늘에까지 뻗쳤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출생하였고, 나면서 이빨이 나고, 또 햇빛이 이상하니 아마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오니 마땅히 이 아이를 키우지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왕이 궁중 사람을 시켜 그 집에 가서 죽이게 하였다. 그 사람이 포대기에서 그 아이를 꺼내 처마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乳母)인 여자 종이 몰래 받다가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이 아이를 안고 도망을 가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가 되자 놀기만 하였으므로 그 유모(乳母)가 말하였다. ' 자네가 태어나서 나라의 버림을 받았는데, 내가 차마 하지 못하여 몰래 길러 오늘에 이르렀다. 자네의 경망함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자네는 함께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하면 좋은가 ? '하고 꾸짖었다.
궁예가 울면서 말하기를, ' 만약 그렇다면 내가 떠나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문득 세달사(世達寺)로 떠낚다. 그 절은 지금(고려의 흥교사(興敎寺)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장년이 되자 승려의 계율(戒律)에 구속되지 않았으며, 헌출하여 담력이 있었다. 일찍이 재(齋)에 참석하려 가는 길에 까마귀가 입에 물고 있던 물건을 들고 있던 바리때에 떨어뜨렸다. 들여다 보니 상아(象牙)로 만든 침대에 임금 '王'자가 쓰여져 있어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나 자못 자부하였다.
신라가 쇠약하여진 말기에 정치가 잘못되고 백성들이 흩어져 왕기(王畿) 밖의 읍현들이 반란세력에 따라 붙는 자가 반(半)에 이르고, 먼곳가 가까운 곳에서 뭇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 아래 백성들이 개미처럼 모여드는 것을 보고 선종(善宗)은 이런 혼란기를 타서 무리를 모으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진성왕 즉위 5년 즉, 대순(大順) 2년 891년에 안성 죽주(竹州)의 도적 괴수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기훤(箕萱)이 얕보고 거만하여 예로서 대우하지않자, 선종은 속이 답답하고 불안해 하여 기훤의 휘하에 있던 원회(元會), 신헌(申櫶)과 몰래 결합하여 벗으로 삼았다.
천복(天復) 원년 신유(901년)에 선종(善宗)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지난 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滅)하였으므로 평양의 옛 도읍이 무성한 잡초로 가득 차 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라고 하였다. 아마 이는 출생 시에 버림받은 것을 원망하여 이러한 말을 한 듯하다. 일찍이 남쪽으로 순행할 때 흥주(興州 .. 지금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신라왕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뽑아 찔렀다. 그 칼자욱이 지금도 남아 있다.
비겁한 자의 친구가 되느니, 정직한 자의 원수가 되는게 낫다 ..고 설파한 궁예(弓裔). 그는 철원(鐵圓. 896년... 현재 구철원 동송) ~ 송악(松岳. 898년)에 이어 905년에 다시 철원( 지금의 철원 풍천원)에 도읍지를 정했다. 철원에만 두번이나 도읍(都邑)을 정한 것이다.
궁예가 철원에서 뜻을 폈던 시기에 신라(新羅) 천년왕국이 뿌리채 무너지면서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미륵불(彌勒佛)을 자처하고 나타난 궁예에 홀딱 빠졌다. 세상이 끝나는 날 홀연히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미륵불이 현신했다니까, 그는 세상을 구우너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 것이다.
철원 환도(還都) 이후 궁예는 907년 무렵 삼한(三韓) 땅의 2/3를 품에 안았다. 실로 대단한 기세였다. 하지만 너무 과속한 탓일까. 궁예에게 귀부(歸附)하였던 구구려 부흥세력, 즉 왕건(王建)을 중심으로 한 송악(松岳) 세력이 반발의 기미를 보인다. 당초 궁예가 구철원(舊鐵圓)에서 송악(松岳)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왕건세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북원(北原 .. 원주)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떨친 양길(梁吉)을 제압하려면 송악(松岳) 호족(豪族)들과의 제휴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궁예는 양길(梁吉)을 제압하려는 뜻을 이루자 다시 철원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면서 청주(淸州) 지역의 1,000 가구(家口)를 철원 땅으로 이주(移住)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세력 말고도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남(南)으로 남(南)으로 세력을 키워간 궁예로서는 '고구려세력'만으로는 천하를 경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궁예를 도왔던 송악세력, 즉 고구려 부흥세력은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게다가 도읍지 건설에 엄청난 공력을 쏟았고, 때마침 흉년(凶年)이 들면서 민심이 돌아섰다.
궁예도성 弓裔都城
고대에는 왕이 있는 곳을 도성(都城)이라 하였고 또는 왕성(王城)이라고도 했는데, 오늘날의 수도(首都)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통일신라를 이룬 후 잘나가다가 망할 무렵에는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가 나라를 분할하여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것을 '후삼국'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898년 지금의 개성인 송악(松嶽)에서 후고구려를 세운 사람이 궁예읻. 그가 905년 도읍을 철원으로 옮겨 918년 왕건에게 왕권이 넘어갈 때까지 임금으로 있었던 후고구려(後高句麗)의 도성이 바로 '궁예도성'이다.
궁예는 911년에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으로 고치기도 했지만, 도읍을 옮긴 지 13년간 철원은 왕도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현재 남과 북의 휴전선인 군사분계선으 가운데 두고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내 비무장지역에 서로 반반씩 나누고 있는 위치에 궁예도성이 있었다. 지금은 강원도 철원읍, 홍원리, 월정리, 가칠리 일원의 풍천원(楓川原) 평지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궁예도성은 일제 강점기 서울에서 함경북도 원산까지 경원선을 설치할 때 도성의 남벽과 북벽의 일부로 철길이 지나가면서 파괴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궁예도성은 네모 형태의 성벽 속에 왕궁터, 절터, 석등(石燈)과 석탑 등을 갖춘 것으로 조사되었다. 규모를 보면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갖추고 있는 이중(二重)의 성(城)으로, 내성의 둘레 7.7km, 외성의 둘레 12.7km에 성벽 폭 11m 높이는 낮은 곳은 1m, 높은 곳은 4m로 조사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조사된 것이다.
그후 광복되었으나 남과 북이 분단되면서 공교롭게도 이 궁예도성(宮裔都城)이 비무장지대에 들어 있게 되었다. 궁예가 도성을 건설하고 망한 후 왕건이 송악 즉 개성에 도읍을 정해 자연히 도성의 기능을 잃고 지금까지 1,1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는 '궁예궁전의 옛터가 동주(東州 .철원의 옛 지명)의 북쪽 27리 풍천벌에 있으며, 지금 그 위성의 둘레가 1만4421척이며, 내성을 둘레는 1905척(577m)인데 절반이나 무너졌으며 궁전의 터가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위 사진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국보로 지정된 바 있으며, 지금은 그 행방이 묘연하다.
궁예에 대한 민간전설
역사서는 한결같이 궁예를 역사의 패륜아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철원지역에서 지금도 채록(採錄)되는 구비전설(口碑傳說)은 궁예왕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전한다.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전설은 ...
구레왕(궁예왕)이 재도(再圖)할 땅을 둘러보는 데 어떤 중이 나타나자, 이에 왕이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땅이 없겠느냐 하매 중은 이 병목 같은 곳에 들어와 살 길을 찾는 것이 어리석다고 하자, 궁예가 아아 천지망아(天之忘我)로다 하고 심연(深淵)을 향해 몸을 던지니, 우뚝 선 채로 운명하셨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궁예의 묘(墓)가 있는 삼방협(三防峽. 평강~안변 사이의 협곡)에서 채록하여 쓴 '풍악기유(風嶽記遊)'의 한 토막이다. 이 풍악기유는 또한 '궁예왕은 이후 이 지방의 독존신(獨存神)이 되었다' 고 하였다. 이 지역에서 채록된 이야기들은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이다. 구비전설은 물론 궁예왕의 실정(失政)을 대궐터 선택의 잘못, 방탕한 여성관계, 가학증세 그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왕건과의 갈증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원인에 대해서는 역사서와는 분명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궁예의 흔적들
구비(口碑)전설 및 지명(地名) 전설에는 궁예왕이 추종세력과 함께 보개산성(포천 관인), 명성산성(鳴聲山城.. 철원 갈말), 운악산성(雲嶽山城 ..포첞 ㅘ현) 등에서 치열한 항전을 벌인다. 이와 같이 궁예 관련 지명(地名) 전설을 보면 무려 네 곳의 대궐터가 등장하고 있다. 이는 궁예는 쫒겨난 뒤 바로 죽은 것이 아니라 왕건(王建)과 10~15년 가량을 더 항전(抗戰)하였다는자료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도 왕건과 대치하여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붙은 '여우고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다는 '궁예왕굴(鳴聲山)' 그리고 궁예가 자신의 운세와 국운을 점치려 소경과 점쟁이들을 불렀다는 '소경의 절터', 궁예와 왕건이 투석전(投石戰)을 벌였다는 운악산 인근의 '화평장터', 대패(大敗)한 궁예군의 피가 흘렀다는 '피나무골' 등 이러한 흔적들은 모두가 궁예왕에 대한 주민들의 숭모와 연민, 안타까움을 상징하고있다.
궁예 답사길
철원(鐵原)과 포천(抱川)의 산하(山河)에는 궁예의 스러진 꿈이 가득하다. 다만 철원(鐵原)이 그나마 승리의 땅이라면, 포천(抱川)은 패주(敗走)의 땅이다. 그래서 포천에서 철원에 이르는 궁예 답사는 패배의 길을 거슬러 꿈의 연원을 되짚어 가는 길이 된다. 그 길은 포천 구읍(舊邑)의 '반월성터'에서 시작한다. 당초 궁예가 축성(築城)한 것으로 알려졌던 반월성(半月城)은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이곳이 궁예에게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이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더욱이 그 자락에 미륵불(彌勒佛) 하나가 남아 있어 그 상징적 의미만으로도 궁예 답사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미륵(彌勒)이라 자처한 궁예는 곳곳에 미륵으로서의 자취를 남겼고, 민중들은 그 미륵의 꿈을 믿기도 하였다. 안성의 국사봉(國師峰) 궁예미륵(弓裔彌勒)은 여전히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성동리의 '파주골'은 그 이름이 '패주골(敗走골)'에서 비롯하였으며, 성동리산성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길 때 하룻밤 만에 쌓은 성(城)이라고 전한다. 이 성(城)을 쌓을 때 백성과 군졸들이 한탄강(漢灘江)에서부터 한 줄로 서서 돌을 날랐다고 하이, 궁예의 신망(信望)이 완전히 패주(敗走)의 그것만은 나이었지 않나 싶다. 성동리에서 일동쪽으로 길을 더하면 멀리 강씨봉(姜氏峰)과 국망봉(國望峰)의 잔영이 아련하게 보인다.강씨봉(姜氏峰)은 궁예의 부인인 '강씨'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강씨가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오' 하였다. 왕이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서 안다 '하고 무쇠방망이를 열화에 달구어 그 음부(淫部)를 쳐서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였다. 그 호르는 의심이 많고 화를 잘내니 여러 보좌와 장수,관리로부터 아래로 평민에이르기까지 죄 없이 주륙(誅戮)되는 자가 숱하며 부양(斧壤 .. 파주), 철원 일대의 사람들이 그 해독에 견디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사서(史書)에는 궁예가 왕건과 내통(內通)을 의심하여 두 아들과 함께 ㅈㄴ혹하게 죽인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부인 '강씨'가 실은 궁예의 폭정(暴政)에 간언(諫言)하다가 '강씨봉' 아래 마을로 유배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왕건애 패한 궁예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부인을 찾았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으니, 회한(懷恨)에 잠긴 궁예가 인근 산꼭대기에 올라 멀리 도성(都城) 철원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였다. 그리하여 그 산을 '국망봉(國望峰)'이라 부른다. 심지어 '강씨'가 왕건의 추격을 피하여 강씨봉아래로 숨어든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사실관계가 어찌하든 강씨봉과 국망봉은 그 줄기를 나란히 하며 포천 일대를 감싸고 있다.
중리의 보가산성(堡가山城)은 궁예 최후의 결전지이었다고 한다. 구예는 이곳에 성을 쌓고 반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패퇴한 궁예는 한밤중에 남은 군사를 이끌고 명성산(鳴聲山)으로 은거한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재기(再起)를 노려보지만 마침내 민심(民心) 마져 이반하자 스스로 군사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그때 궁예의 군사들이 3일 동안 슬피 우니 산(山)은 명성산(鳴聲山 ..울음산)이 된다.
그리고 그 울음은 애끓게 흘러 한탄강(漢灘江)으로 흐른다. 이처럼 승자(勝者)의 역사와는 관계없이 민중의 꿈은 도처하생(到處下生)에서 미륵의 희망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궁예의 도성(都城)이 있던 철원은 이제 분단(分斷)으로 땅이 갈리고, 그의 왕궁터는 DMZ에 묶여 그 잔재(잔재)마저 살피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이러저래 '외눈박이' 미륵의 꿈은 여전히 참혹하기만 한 것이다.
궁예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경기도 안성(安城) 땅에서 시작되었다. 궁예가 아성의 죽산따에서 일어난 기훤(箕萱)의 수하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삼국사기나 고려사의 기록들에는 궁예는 강퍅하고 잔인하였던 인물이었다.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달구어 하루에도 수백명 씩 사람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勝者의 記錄) '인 것이니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궁예가 가토록 포악한 인물이었다면 어찌 자신의 세력을 이끌며 태봉국(泰封國)을 열 수 있었을까? 그렇게 잔인했던 인물이었다면, 그가 죽고난 뒤 안성(安城)의 백성들이 미륵도래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 궁예미륵 (弓裔彌勒) ' 석불에 치성을 드려온 사실을 어떻게 에해하여야 할까...
안성에서 미륵을 돌아보겠다면 가장 먼저 찾아 볼 곳은 국사봉에있는 '궁예미륵'이다. 안성시 삼죽죽면 기솔리 국사봉의 정상쯤에 절집 '국사암(國師庵)'이 있고, 그 국사암의 경내에 3기의 미륵(彌勒)이 서 있다. 아담한 크기의 단벙한 생김새, 보검(寶劍)과 약병을 들고 있는 국사봉의 미륵불은 어찌나 얌전한지 언뜻 문인석(文人石)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미륵은 왼쪽의 것이 문관(文官), 오른쪽의 것은 무관(武官), 그리고 가운데 좀 큰 석불이 바로 '궁예미륵(弓裔彌勒)'이다. 이곳 인근 북좌리에서 도(道)를 닦던 궁예가 이곳으로 와서 미륵불을 조성했다고 전설은 말하지만, 실제로 이 소박한 석불은 궁예의 후대에 그를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안성사람들은 누대(累代)에 걸쳐 이곳 '궁예미륵'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예로부터 미륵불 아래 솟는 샘물이 염험하다는 소문이 났다.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소원부터(나도 몇년 전 태준 가족을 위해 빌었다. 아이 가지라고) 병을 낳게 해달라는 소망을 품고 백성들은 이곳에다 소원을 빌었다. 그곳에 흩어진 1,000년간의 시간 동안, 그 앞에서 풀어내었을 허다한 소망를, 그리고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며 꿈꾸다가 스러지고만 궁예의 꿈, 그 꿈들은 지금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
강원도 평강(平康)에서 안변(安邊)으로 향하는 경원선(京元線) 길목에 삼방협(三防峽)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上,中,下防'을 합한 말인데, 북방의 적(敵)을 막는 천혜의 협곡이다. 얼마나 험한지 호차(火車)를 앞 뒤에 달아 지그재그로 오르내릴 정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 말기 지도(地圖)인 '청구도(靑丘圖)'를 보면 바로 이 삼방협(三防峽). 그것도 '중방(中防)'에 궁예왕(弓裔王)의 묘(墓)가 분명히 표시되어 있다. 1924년 육앙 최남선(육당 최남선)이 쓴 '풍악기유(風嶽記儒)'를 보자.
삼방개울을 끼고 남으로 오리(五里)쯤 가면 조그만 전우(殿宇)가 보이는 것은 태봉(泰封)의 궁대왕(弓大王)을 숭봉(崇奉)한 곳인데, 그 당우(堂宇) 뒤로 돌담 같이 보이는 것은 석축(石築) 봉분(封墳)의 남쪽 면이요, 그 북서 양면은 고제(古制)가 온전하고....
육당 최남선은 궁예왕의 무덤 흔적을 본 것이다. 그렇다면 궁예는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일까? 918년 하유월 을묘일, 기병장군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짜고 밤중에 태조 왕건의 집으로 가서 그를 왕으로 추대할 뜻을 밝혔다. 태조는 굳이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태조에게 입히니 여러 장수들이 옹위하고 나오면서 사람을 놓아 말을 달리며 외치기를 ' 왕공(王公)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 '고 하였다. 이때에 분주히 달ㄹ와 참가한자들이 이루 셀 수 없었고, 먼저 궁문으로 와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만여 명이 되었다. 이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란 왕(王 ..궁예)은 ' 왕공이 벌써 천하를 얻었으니 나의 일은 끝났구나 '하면서 미복(微服)으로 갈아입고 암곡(巖谷)으로 도망하여 이틀밤을 머물렀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부양(斧壤 ..지금의 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려사
패자(패자)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가혹하다 못해 잔인하다. 아니 옹졸하다. 대부분의 정치적 승리는 도덕적 결함을 안고 있기 십상이어서 패자(敗者)에게 패배(敗北)보다 더 아픈 오명(汚名)을 분칠을 해대기 일쑤다. 잔신들이 모시던 군주의 등에 비수를 꽂은 구데타 세력은 한때 미륵세상을 꿈꾸던 국왕을 '관심법'을 내세워 패악을 일삼은 자로 만들고, 기어이 먹을 것을 훔쳐 먹다 백성의 손에 맞아 죽은 패주로 내몬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피 묻은 손은 슬그머니 등 뒤로 감춘다. 그에 비하여 민중의 전설에 기댄 속내는 한결 인정적이다.하지만 삼방(三防) 주민들이 전하는 전설은 이렇듯 비참한 '타살(他殺)'이 아니라 천명(天命)이 다하였음을 알고 감행한 의연한 '자살(自殺)'이다.
운거사비한 구레왕(궁예)이 발붙일 땅을 얻지 못하고 심벽한 곳을 찾아서 삼방(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풀밭을 기고 바위틈에 어엎드려 가면서 며칠을 지냈는데, 주린배는 먹을 것을 찾아마지 아니했다. 삼봉 최고지에 올라서 은피하여 재도할 땅을 둘러볼 즈음에 문득 한 중을 만나서 우선 먹을 것을 시여하라 하매, 자기도 약간 후량을 어제까지 다 먹고 이제는 죽기만 기다리노라 한다. 혹시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땅이 없겠느냐 하매, 이 병목같은 속에 들어와 살길을 찾는 것이 어리석다고 하자, 궁예는.. 아아 천지망아(天之忘我 .. 하늘이 나를 잊었다는 의미)로다 하여 봉우리에서 심연(深淵)을 향해 몸을 던졌는데 ,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시방 능(陵) 있는 곳에 와서 우뚝 선 채로 운명하였다 ..... 풍악기유(風嶽記遊)
그런데 궁예왕은 죽어서도 삼방(三防)지역의 화복(禍福)을 지배하는 신(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여기서 궁예가 구레왕 즉, 고려(고구려) 왕으로 일컬어졌다는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물론 정사(正史)를 놔두고 전설을 믿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역사란 승자(勝者)의 기록, 패배자는 암군(暗君) 또는 패륜아로 그려질 수 밖에 없다. 민간전설은 바로 그러한 정사(正史)의 허점을 보완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크다.
선각선사비의 증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