化城喩品(화성유품) 第七
3. 대통지승불의 성도(成道)
(1) 십겁 (十劫)이 지나고 불법이 현전(現前)하다 1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통지승불의 수명(壽命)은 오백 사십만 억 나유타 겁이니라.
그 부처님이 처음 도량에 앉아서 마군들을 깨뜨리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으나 불법(佛法)이 앞에 나타나지 아니하여
이와 같은 일 소겁으로부터 십 소겁이 되도록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과 마음을 동하지 않았지마는 불법은 오히려 앞에 나타나지 않았느니라.
이것을 승가에서는 금강경 구절을 통해서 그러죠.
'일체법 개시불법(一切法皆是佛法)' 그런 말이 있습니다.
금강경에 이 말을 듣고 아주 편안해졌어요.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불법만 불법인 줄 알았어요.
어릴 때는 불법 외에 어떤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전혀 불법 밖의 존재로 생각이 들어서 솔직한 표현으로 좀 불쌍하게 보고
아주 유치하게 보고 천하게 보고 또 가엽게 보고
그런 그야말로 유치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내가 좋아 하고 금강경에 대해서 쓴 책도 여러 가지죠.
금강경 전서라고 해서 금강경 여섯 가지 번역이 있는데 그걸 다 비교하구요.
은해사에 있을 때는 <금강경전서>라고 하는 책을
학인들과 함께 합작으로 낸 적도 있고 한데
그것과 뭐 금강경 강의, 금강경 이야기, 금강경 오가해(五家解)
또 금강경만 단순하게 번역한 것을 교재로 쓰기도 하고 등등 그랬습니다.
그런데 ‘일체법이 다 불법이다’ 하는 그 말에
그만 나는 아주 마음이 편안해 졌고 정말 그 뭐라고 합니까?
말뚝신심 그렇지요.
처음 입문해 가지고 불교가 아주 좋고 신나고 그
리고 불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만이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속인들은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이상한 잘못된 우월감에 되어서
유치한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을 때,
‘일체법이 다 불법이다.’ 어느 것 하나 불법 아닌 것이 없다 하는 그 말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세속에 살든 사찰에 살든 기독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지 간에
최소한도 내가 보기엔 다 도인이고 그대로 잘 살고,
인생을 출가해서 이렇게 독특하게 편협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모자라는 삶을 살고 부족한 삶을 살고 더 훨씬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더라구요.
일체법이 다 불법인데... 얼마나 편안 합니까.
우리가 어떤 기준을 설정 해놓고 그 기준에 가까워지려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기분이 좋고 뭔가 뿌듯하고,
하루에 천배를 했든지 삼천 배를 했으면 비로소 그때사 마음이 뿌듯하고
그렇게 못 했을 때는 그만 풀이 죽은 사람같이 아무것도 못한 것 같고
사람 사는 것 같지 않고 이렇게 생각하고 산 것이 참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초심자에게는 물론 그런 것도 한 때는 필요 하긴 하죠.
그런 잘못 된 우월감도 간혹 필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얼른 거기에서 벗어나야 되죠.
그래서 비로소 일체법이 개시불법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삶을 살든지 간에 그대로가 사람의 삶이고
진리의 삶이고 부처의 삶이다 라고 하는 이 경지까지 되어야 하는 거죠.
금강경 하나만 제대로 우리가 소화해도 바로 그런 입장이 됩니다.
‘일체법이 개시불법.’ 기가 막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 십겁을 앉아 있었지만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일체법이 개시불법 인데 따로 나타날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십겁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불법이 나타났다 하는 소리는
어떤 특별한 불법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대로 불법이다 라고 하는 거죠.
무슨 불법이 특별한 게 있어서 나타났겠어요.
나타났다면 그럼 석가모니 이후로 지금까지 아둥바둥 애를 써가지고
그 인생을 다 바쳐서 수행에 몰두한 그런 분들이 성취한 불법이
세상에 가득 찼을 것 아니예요.
세상에 가득 찼을 거라구요.
저기 히말라야 산보다도 훨씬 더 큰 산들이 이 우주 안에 꽉 차야 될 거예요.
그런데 불법이라고 하는 것이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이
온 생애를 다 바쳐서 터득한 불법이지만
하나도 어디 먼지만한 것도 어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먼지만한 것도 어디 따로 있지 않아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두두물물이 개시불법이야, 일체법이 개시불법이야.’
여기에 우리가 눈을 떠야 된다는 것이지요.
이 법화경 구절 중에서 선사들이 가장 호감을 갖고
선문에 잘 활용되는 것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십겁을 앉아 있었는데 불법이 나타나지 아니했다.
기가 막힌 소리다.
모든 것이 다 불법인데 불법이 안 나타났다는 게
그 얼마나 근사한 표현이냐 이 말이죠.
그럼 십겁이 지난 후에 불법이 나타났다는 말은 뭐냐.
비로소 모든 것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나타나기는 뭐 특별히 없든 게 쑥 내밀어가지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 이야기가 선사들이 좋아하고 선문에서 많이 인용을 하는
그런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일, 소겁으로부터 십 소겁이 되도록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과 마음을 동하지 않았지만 불법은 오히려 앞에 나타나지 않았느니라.
안 나타나야죠 나타날게 뭐가 있습니까?
일체법이 다 불법인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