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은 일본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시기다. 내년은 을미사변(1895년) 120주년, 광복(1945년) 70주년, 한일 수교(1965년) 5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년은 을미년(乙未年)으로 120년 전 발생한 을미사변(乙未事變)과 같은 간지(干支)에 해당돼 그 역사적 상징성의 의미가 더욱 크다. 을미사변은 조선 역사와 한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런 사건 중 하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일국의 왕비를 그것도 다른 나라 깡패들이 궁으로 쳐들어와 무참히 살해한 사건은 조선 백성들은 물론 멀리서 소식을 접한 외국인들에게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세기 말의 조선은 내부로는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외부로는 제국 열강들의 시달림을 받았다. 그 혼란의 시기에 고종과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는 조선을 지키고자 국왕과 국모의 역할을 다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정치적 갈등이 심했고 결국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명성황후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조선의 국모, 시대의 여걸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가 하면 일가친척을 국정에 끌어들이고 국고를 탕진한 왕비라는 부정적 인식도 존재한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은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평가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명성황후에 있어 달라질 수 없는 역사적 인식은 명성황후가 고종의 왕비이며 일본의 만행에 의해 시해됐다는 점이다. 또 열강들 사이에서 벌인 명성황후의 외교술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는 점도 인정받고 있다. 을미사변은 단순한 시해 사건이라고 할 수 없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우리 민족 침략의 원흉 일본제국이 조선과 한민족에 저지른 온갖 만행의 시작이었다. 이후 일본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상흔을 남겼다. 지금도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과거 자신들이 한민족에게 행한 잘못에 대해 어떤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을미사변 120주년이 되는 2015년을 맞아 당시 사건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과하지 않는 일본은 지금도 우리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우경화와 양적 완화 정책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한국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스카이데일리가 다가오는 을미사변 120주년을 맞아 을미사변의 경과의 의미를 재조명해본다. |
▲ 명성황후는 숙종의 정비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증(閔維重)의 6대 직계후손이다. 공조판서를 지낸 민진후가 5대조이며, 사헌부 장령을 지낸 민익수가 고조다. 증조 민백분과 조부 민기현은 각각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아버지 민치록은 장릉 참봉을 시작으로 종4품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을 역임했다. 장악원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이다. 사진은 경기도 여주의 명성황후 기념관 내 명성황후 초상화 ⓒ스카이데일리 아들을 왕으로 앉히며 등장한 흥선대원군, 16세 나이 왕비가 된 명성황후
19세기 들어 조선은 혼란의 늪에 빠져들었다. 혼란은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면서 시작됐다. 정조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지만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했고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 정치가 막을 올렸다.
▲ 홍릉(洪陵)은 명성황후와 제26대 고종황후를 합장한 릉이다. 영의정·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의 딸인 명성황후는 고종 3년(1866년) 왕비가 된 후 고종 10년(1873년) 왕의 친정을 계기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고종 32년(1895년) 을미년 친러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 자객들에 의해 무참하게 피살됐다. 사진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내 홍릉의 전경 ⓒ스카이데일리 외척의 세도정치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위세를 떨쳤다. 안동 김씨의 등쌀에서 숨죽여 지냈던 흥선군 이하응이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앉히면서 바야흐로 왕족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한 나라이지만 안동 김씨의 실정을 두 눈으로 목도한 왕족 이하응,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에 골몰하게 됐다. 개혁을 통해 양반 세도가들의 힘을 빼앗고 아울러 왕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기도 했다.
▲ 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스카이데일리 세자비 간택에 있어 힘이 없는 집안이 우선시 됐다. 자신의 부인인 대부대인 민씨가 추천한 민치록의 어린 딸은 대원군의 마음에 쏙 들었다. 외척 행세를 할 남자 형제가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대원군의 마음에 들었다.
대원군은 자신의 아들 고종에게 민씨의 딸을 점지해 주었고 1866년, 민씨는 16세의 나이로 일국의 왕비가 됐다. 이때부터 시아버지 흥성대원군과 며느리 명성황후의 인연이 시작됐다.
미언론 “조선 왕비가 일본 야심 막아”… 명성황후, 낭인들 손에 무참히 시해
▲ 명성황후의 추모비문 내용 “이 추모비는 명성황후의 애국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작됐다. 두 개의 직사각형은 과거와 현대를 상징하는 기둥이며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명성황후의 모습을 비문으로 표현했고 조상 상흥부에는 빛의 표현으로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날 명성황후의 상징으로 표현했다”<글·김남조/글씨·구자송/조각·이영섭 신건화> 사진은 경기도 여주의 명성황후 생가에 있는 추모비 ⓒ스카이데일리 조선 26대 왕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1851년 세상에 태어났다. 아버지 민치록은 숙종의 정비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증의 5대 직계후손으로 명성황후는 6대 자손이 된다. 명성황후는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이를 데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총명함은 집안의 친척 아주머니의 눈에도 띄었다. 민씨 부인은 명성황후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는데 이 부인은 다름 아닌 대원군의 아내인 부대부인 민씨였다. 민씨 부인은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이 양자로 들인 민승호의 누나이기도 했다. 부대부인은 명성황후가 훗날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살이 되던 1866년 당시 15살이었던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면서 궁에 입성했다. 이후 첫째아들을 낳았으나 5일만에 죽고 다음에 낳은 둘째아들 이척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됐다.
명성황후가 입궁할 즈음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을 왕위에 앉히고 오랫동안 섭정을 계속해왔다. 어린 고종이 20대의 성인이 되자 고종은 아버지 대신 왕으로서 왕권을 확립하려는 데 힘쓰기 시작했다. 왕비였던 명성황후도 남편 고종을 도와 왕권을 찾는 데 함께 노력했다.
1873년 명성황후는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통해 이른바 ‘대원군 하야 상소’를 고종에게 올리도록 했다. 상소는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고 섭정중인 대원군이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내용이었다. 고종이 이를 받아들이고 대원군은 아들 고종에 의해 정계에서 강제적으로 은퇴했다.
▲ 1895년 양력 10월 8일 새벽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두 번째로 칼을 휘둘러 명성황후를 절명케 한 천인공노할 칼이다. 1m20cm의 길이인 이 칼은 성인이 한 손으로 휘두르기에 힘겨울 정도로 무겁고 아직도 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살상용이다. 칼집에는一瞬電光刺老狐(일순전광자노호,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섬뜩한 글이 적혀 있으며, 작전명 ‘여우사냥’이라고 써 있어 일제의 음험한 마수를 증거한다. 이 칼은 일본의 시해 당사자인 토우 카츠아키가 “민비를 베었을 때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와서는 안 본다”고 하면서 번민을 하다가 쿠시다(櫛田) 신사에 기탁됐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명성황후 시해도와 같은 모양의 복제품 ⓒ스카이데일리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1882년 임오군란을 이용해 재기에 성공했다. 명성황후는 군란을 피해 궁을 떠나기도 했지만 청군의 힘을 얻어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이후 조선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겪고 심한 내홍을 겪었다.
밖으로는 일본, 러시아, 청,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열강들이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눈독을 들이는 상황이었다. 조선은 그야말로 늑대 무리에 둘러싸인 양의 처지였고 명성왕후는 절묘한 외교정책을 발휘하며 조선의 운명을 연장시켰다. 특히 조선을 식민화하려는 일본을 저지한 것이 명성황후였다.
이런 상황은 당시 미국 언론에 의해서 확인됐다. 미국 언론, 이브닝 스타는 1895년 보도에서 “일본의 (조선 합병) 계획은 늘 왕비로 인해 좌절됐다. 가장 판단력이 좋은 일본의 외교관들이 한국에 왔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전했다.
자신들의 의도가 번번이 막히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정부는 당시 조선의 일본 공사였던 미우라 고로를 시켜 명성황후 시해를 지시했다. 미우라는 떠돌이 일본 무사인 낭인(浪人)을 불러모았고 거사일을 을미년인 1895년, 음력 8월 20일로 정했다.
▲ 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스카이데일리 8월 20일 새벽, 낭인들은 경복궁에 칼을 들고 무단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군사적 충돌이 있었고 이를 뚫고 들어간 낭인들은 명성황후의 침실인 옥호루로 침입했다. 떠돌이 무사들은 일본도로 일국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무참해 살해했다. 그리고 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산에 묻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두려움에 치를 떨었고 백성들은 왕비의 원한을 갚겠다며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고종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가(아관파천), 돌아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선포한 대한제국의 운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1910년 이완용 등 친일세력이 일본과 한일 합방 조약을 맺으면서(경술국치) 대한제국과 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대 일본 우경화 지속, 120년전 국운 꺼뜨린 ‘을미사변’ 절치부심 기억해야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 일본의 만행은 극으로 치달았다. 걸림돌이던 명성황후가 사라진 후 15년만에 조선 즉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고 30년이 넘도록 일본의 식민지가 돼서 일본에게 갖은 수탈과 모욕을 당하고 살아왔다.
▲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이다. 1687년(숙종 13)에 부원군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됐는데, 당시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뿐이었다. 1975년과 1976년에 한번 중수를 거쳐 1996년에 다시 수리하면서 행랑과 사랑, 별당 등을 함께 복원하고 기념관, 추모비, 동상, 조각공원 등 성역화 사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사진은 경기도 여주의 명성황후 생가 ⓒ스카이데일리 1945년에는 자력이 아닌 외세에 의해 조선이 해방됐고 1965년에는 일본과 국교를 맺기도 했다. 이처럼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을미사변 이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수난의 시대로 접어든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본은 아베 정권이 재집권하면서 우경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군사제국을 꿈꾸는 일본이 다시 군사제국이 돼 한국과 주변국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120년 전 벌어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사뭇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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