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 시인의 시는 현재를 만들어놓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발을 담그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속에 들어가 그때는 차마 마주할 수 없었던 것들을 다시 꺼내놓고 실체를 밝히는 작업, 시작詩作은 시인에게 또 다른 고통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시 속의 화자들이 대부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에 휩쓸리지 않고 맡은 바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간다. 그것은 이미 그들이 충분히 고통에 단련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렇듯 스스로가 고통 속에 들어가 그것을 기록할 수 있는 힘은 세계에 대한, 삶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일 것이다. 사라진 것들을 향한 원망과 그리움이 시적 화자들을 절망의 세계로 몰고 가지만 그들 중 어느 하나도 그대로 포기하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지쳐 삶을 외면해버린 사람들이 다시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고통을 다른 차원의 삶으로 승화시킬 방법을 끝없이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방아쇠를 당기는 아침』은 그 치열함으로 완성시킨 하나의 생존기라 할 수 있다.
-----길상호 시인
박은주 시인은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2016년 애지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작품발표를 시작했다. 한남대학교 사회문화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아침 여섯시/ 낯익은 탄환이 장전된다/ 어제와 같은 과녁을 향해 총구가 세워지고/ 용수철 따라 화약을 토하는 눈알/ 침대 아래 구겨진 그림자가/ 발바닥까지 기어 나오면/비로소 사람처럼 일어선다//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 밑바닥에 깔린 온기를 긁어모아/ 이를 악물고/ 이제 내게 복수해야 할 시간/ 태어난 죄를 묻고/ 너의 거짓말을 믿은 죄를 심판하려고// 신호가 울리면/ 숨을 깊이 마시고/ 어깨를 단정히 하고/ 아침마다 방아쇠를 당긴다
---[방아쇠를 당기는 아침] 전문
박은주 시인의 [방아쇠를 당기는 아침]은 임전무퇴의 소산이며, 제일급의 저격수의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방아쇠는 총알을 장전하고 총알을 쏠 수 있는 장치이며, 따라서 방아쇠를 당긴다는 것은 누군가를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총을 쏜다는 것을 뜻한다. 총을 쏜다는 것은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이며, 타인의 생명을 빼앗지 않으면 내가 살해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총을 쏘고 총을 맞는다는 것, 비로 이것이 생존경쟁의 진면목이며, 모든 생존경쟁은‘제로 섬 게임’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방아쇠를 당기는 아침]은 임전무퇴의 아침이며, 그만큼 살기가 가득차고 피가 튀는 저격수의 아침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침 여섯시/ 낯익은 탄환이 장전된다”는 것은 그가 출근 준비를 한다는 것을 뜻하고,“어제와 같은 과녁을 향해 총구가 세워”진다는 것은 어제와 똑같은 일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용수철 따라 화약을 토하는 눈알”은 용수철의 힘에 따라서 화약을 터뜨려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침대 아래 구겨진 그림자가/ 발바닥까지 기어 나오면/ 비로소 사람처럼 일어선다”는 것은 나는 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출근하기 싫고 그 어떤 싸움도 싫어하지만, 그러나 나는 타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타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이며, 타인의 명령에 따라서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나의 주인이 되고 싶지만, 그러나 그림자는 그 주인이 되고 싶은 나를 감시한다. 나는 내 속의 타자, 즉, 그림자를 한 방에 쏘아죽이고 싶지만, 그러나 내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만으로 그 살해욕망을 잠 재운다. 왜냐하면 내가 내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의 시간은“밑바닥에 깔린 온기를 긁어모아/ 이를 악물고/ 이제 내게 복수해야 할 시간/ 태어난 죄를 묻고/ 너의 거짓말을 믿은 죄를 심판”하고 싶은 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 내가 나의 일을 통하여 그 모든 것을 다스리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 꿈의 실현은 영원히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타자, 즉, 악마에게 나의 영혼을 팔았고, 그 영혼을 팔아버린 댓가로 저격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로 숨쉬고, 거짓말로 밥을 먹는다. 이 후회와 자책감이 “이를 악물고/ 이제 내게 복수해야 할 시간/ 태어난 죄를 묻고/ 너의 거짓말을 믿은 죄를 심판”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어느덧 출근시간이 되면 곱디 곱게 단장을 하고,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 싶은 욕망과 타자의 노예가 된 나를 살해하고 싶은 욕망을 잠 재우고 일터로 나가게 된다.
방아쇠를 당기는 아침이다. 나도 총을 쏘고, 너도 총을 쏜다.
모든 일터는 전장이며,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저격수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총을 쏘는 사수이면서도 총알을 맞은 희생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싸움은 밥그릇 싸움이고, 이 밥그릇 싸움에서 총성이 울려퍼지고 시체가 즐비하게 된다. 밥그릇의 권력, 밥그릇의 명예, 밥그릇의 돈, 밥그릇의 육탄전, 밥그릇의 핵전쟁, 밥그릇의 논쟁, 밥그릇의 발차기, 밥그릇의 배신, 밥그릇의 안면몰수, 밥그릇의 십자가, 밥그릇의 고문, 밥그릇의 전쟁, 밥그릇의 살인, 밥그릇의 음모, 밥그릇의 사랑, 밥그릇의 자비----. 요컨대 밥그릇은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고, 밥그릇은 그 어떤 우주보다도 더 많은 생명들을 품어 기른다.
밥그릇이 방아쇠를 당기게 하고, 방아쇠가 밥그릇을 사수하게 만든다.
네버랜드에는 규칙이 있어요/ 규칙을 어긴 사람은 피터팬이 처리하죠, 소리 없이// 볼펜과 계산기를 지나/ 이름보다 숫자가 가까워지면/ 망막에 잉크를 칠하고 문밖을 상상하지 않아요/ 지키지 않을 약속에 손가락 걸고/ 가짜 이름에도 설탕가루 뿌리며/ 서랍마다 자물쇠를 채우죠// 저녁마다 가슴에 불 지르지만 한 번도 라이터를 켜지 못해요/ 악어가 아니면서 악어인 척/ 의자에 붙어 속임수를 재단하는 취미가 생겼다면/ 규칙을 어긴 거예요// 안개가 깊숙이 차오르는 새벽/ 흉터뿐인 거울을 들여다보며/나는 피터팬을 기다려요
---[피터팬의 상식] 전문
네버랜드는 볼펜과 계산기를 지나 존재한다. 볼펜으로는 네버랜드를 적어야 하고, 계산기로는 네버랜드에 다가갈 수 있는 공식을 두들겨 보아야 한다. 불펜으로 네버랜드를 적고 네버랜드에 다가갈 수 있는 공식을 계산기로 두들겨 보면 네버랜드는 이름보다 숫자에 가까워진다. 따라서 이름보다 숫자에 가까워진 네버랜드는 거의 100%의 믿음이라는 확률로 다가오게 되고, 바로 이때쯤이면 그 이상의 신봉자들은 망막에 잉크를 칠하고 그 이상 밖을 상상조차도 해보지 않게 된다.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는다는 광신도들의 무리들처럼,“지키지 않을 약속에 손가락 걸고/ 가짜 이름에도 설탕가루 뿌리며/ 서랍마다 자물쇠를” 채운다. 모두가 다같이 자유롭고 모두가 다같이 행복하다는 네버랜드는 하나의 신기루이고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 상징조작에 현혹된 자들에게는 그 얼마나 달콤한 설탕과도 같은 이상낙원이란 말인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구체적인 증거이자 그 실체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같이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한 자물쇠를 채우게 된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 그러나 이 이상낙원의 세계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도 없고, 어느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다.“저녁마다 가슴에 불 지르지만 한 번도 라이터를 켜지 못해요”라는 시구는 그 믿음에 대한 회의가 생겼지만, 그러나 그 믿음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버리는 순간 광신도로서의 자기 자신의 생애와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악어가 아니면서 악어인 척/ 의자에 붙어 속임수를 재단하는 취미가 생겼다면/ 규칙을 어긴 거예요”라는 시구는 네버랜드라는 상징을 물어뜯고 그 상징조작자들을 처형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하고, 오히려, 거꾸로 피터팬과도 같은 상징조작자들의 권력 앞에서 복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상징은 설탕과도 같이 달콤하고, 상징조작에는 무서운 피비린내가 배어 있다. 피터팬의 네버랜드는 피터팬이 있기 때문에 행복하고, 또한 피터팬의 네버랜드는 피터팬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자신의 음모를 고발하는 복종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수도, 부처도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도, 극락도 존재하지 않는다. 피터팬도, 네버랜드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최고급의 문화적 영웅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와 그 통치술의 정당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상징의 세계만이 존재한다.
상징은 환영이며 마약이고, 이 상징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면 누구나 다같이 광신도가 되어버린다.
피터팬, 피터팬, 상징조작자----. 피터팬, 피터팬, 머리에서 발끝까지 사기꾼의 피가 흐르는 상징조작자----.
오오, 우리들의 가짜 영웅들이여!!
첫댓글 박은주시인님 첫 시집 상재를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