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 우리의 선택>이란 책에서 맥스 루카도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는가? 그가 어떻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는가? 요한이 광야로 나간 것은 사실 지혜로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광야에서 그는 한가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포와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입은 옷, 먹는 음식, 그의 행동... 그러자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광야를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영향력을 갖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지식, 명예, 그리고 업적과 재능을 선보입니다.
그러나 참된 영향력은 일치된 삶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은 교회를 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안디옥에서처럼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갈 때입니다.
유대인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일 때문에 부부의 의견이 나누어졌습니다. 아빠는 친할아버지의 이름을,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르고 싶어 한 것입니다. 할수없이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랍비가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친할아버지 이름은? 요셉입니다. 외할아버지 이름은 요셉입니다. 랍비가 기가막혔죠. 뭐가 문제입니까? 그러자 부인이 말을 합니다.
“시아버지는 말도둑이었고, 제 친정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친정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를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세요. 그리고 그 아이가 말도둑이 되는지, 정직한 사람이 되는지 지켜보세요. 그러면 누구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삶이 그 이름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성숙한 영향력의 행사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탐방을 통해서 선한목자교회를 방문했었습니다. 어려운 교회를 맡아서 건강한 교회로 변화시켜가고 있는 교회는 두가지 질문이 교회안에 늘 던져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당신은 죽고 예수가 당신안에 살았느냐?’입니다. 갈2:20절 말씀처럼 주님이 살고 당신이 죽었습니까? 이 질문을 항상 기억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그 교회에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질문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의 결정권이 주님께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처럼 행동하려고 힘쓰느냐?는 문제였습니다. 유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교회를 어렵게 건축한 후에 예수전도단 화요집회 장소로 빌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답니다. 그동안 동안교회에서 했는데 본당이 2,3층이라 이 친구들이 집회를 하면서 거의 일어서서 뛰기 때문에 교회건물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목자교회는 지하가 본당이라 뛰어도 시끄러워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빌려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회의를 소집했는데 의견이 둘로 나뉘었답니다. ‘좋은 뜻이니 빌려주자.’‘안된다 교회관리상 문제가 있다.’결론이 나지 않았답니다. 다음날까지 결정을 해주기로 한 전날 회의를 하는 중간에 한 장로님이 반대하는 장로님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장로님!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그러자 그 장로님이 ‘아 예수님 같으면야 당연히 빌려줬겠죠.’말하고 나서 입을 꽉 다물더랍니다. 그때를 노려 목사님이 ‘그럼 빌려줍시다. 우리가 예수님은 아니지만 주님이 하셨을 일 우리가 해야하지 않겠습니까?’그래서 빌려주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님의 뜻 묻지 않고, 아니 아예 고민의 거리로도 삼지 않은 우리들을 볼수 있지 않습니까?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
본문에는 귀신들려 귀먹고 입이 닫힌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코포스라는 말이 귀먹은 것 즉 듣는 것에 둔하다는 뜻이니까 이 사람은 귀가 먹고 입이 닫힌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주변을 보면 실제로 귀가 먹진 않았는데 의도적으로 듣지 않는 사람은 참 많습니다.
집안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교회안에도 있습니다. 애들은 부모 말 안듣고, 학생은 선생님들 말도 안 듣고, 성도는 죽어라 목사 말도 안듣습니다. 게다가 자기 말만 말이라고 하죠.
다른 사람 말은 무시하면서 자기 말은 존중해 주기를 바라는 이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바로 예수 믿는 우리가 할 일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선 먼저 네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예수님이 참 못된 여자를 만났습니다. 남편 바꾸는데 재주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다섯을 갈아치웠는데 성이 차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여자가 물뜨러 왔다가 주님을 만나서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물동이는 그대로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와서 보고 그의 말을 들으라!’고 외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 음성을 들으라고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고 역할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3가지 변화가 우리안에 일어납니다. 먼저 지식이 깊어집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주님을 아는 지식이 깊어집니다.
왜 제자들이 주님을 3년이나 따르며 말씀을 들었는데도 배신하고 도망친줄 아십니까?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생각 즉 예수님이 왕이 되면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 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주님을 알 수 없고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일을 위해 살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이 바뀝니다. 자꾸 들으면 생각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스스로 점검해 보세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내 생각이 바뀌고 있는가? 아니요. 점점 더 고집스러운 생각을 붙잡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건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자기 생각으로, 주관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 질문은 성경안에나 있는 질문이지 자기 생활에 적용하는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주님의 생각으로 바뀌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자기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했다는 그 일들이 주님이 모르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행동이 바뀝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그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산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지난 주 오후 ‘나를 밟고 가라’고 했는데도 가셨더라구요. 제가 그 분들 빨리 잊었습니다. 기억하고 있어봐야 제게 유익이 하나도 없잖아요.
제 성질만 나빠지지. 이렇게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 주님의 음성이라면 들었을텐데 목사의 말이라 안들었나보다 전 이해합니다. 그런데요, 이제 들으신 분들이 잘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밟고 가신 분들이 ‘들으나 안들으나 뭐가달라!’ 이런 소리 못나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삭개오라는 세리장이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빼앗은 재산은 4배로 갚고 실제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기부금으로 내놓았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돌아보십시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내게 아무런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전도하라는 분문이 아닙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고 귀신들려 자기생각에 미쳐 좀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라는 요청입니다. 이 요청에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다음부터는 나를 밟고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이 사람이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한 다른 반응이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입을 쩍 벌리고 감탄을 하고 있는데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른 사람 인정해주는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자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얼마나 시끄러웠습니까? 탄핵까지 갔잖아요. 지금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시끄럽지요? 하나님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 인정못하는 은사를 부어주셨는지 참 답답할 노릇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나라가 시끄러워야 하겠습니까? 오바마가 후보로 나오니까 ’자격‘을 따지던 미국은 경쟁하던 힐러리가 국무장관이 되어 나라를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애들말로 재수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못하면서 남이 한 것 같고 이렇쿵, 저렇쿵하는 사람 말입니다. 못하면 가만이나 있지 그게 옳으니 틀렸느니 꼭 그런 사람있죠? 물론 여러분은 아니죠?
여자 분들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왜 음식을 내놓으면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맛이 있느니 없느니 짜니 다니 그러면 얼른 밥 거둬들이세요. 인정도 못받는데 밥은 먹여 뭐해요? 밥을 잘 얻어먹고 살려면 주는대로 먹고, 수고했다고 한마디 더하고, 거기다가 정말 맛있다고 해보세요. 손 하나 까닥 안해도 대접받고 먹을 수 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의 태도의 뿌리는 외모지상주의입니다. 예수! 그들이 보기엔 형편없는 사람이에요. 출신부터가 문젭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제자된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했던 말입니다. 이게 바리새인들의 뼈에 새겨있었습니다.
우리 시대도 외모 지상주의, 학력 지상주의에 얼마나 시달리고 있습니까? 마음의 중심, 인격을 가꾸는 일 대신에 외모를 가꾸는 일에 집착하는 거죠. 이게 세상이나 교회나 똑같다면 문제아닙니까? 외모가 하나님의 사람의 기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바리새인들 입장에선 못 마땅한 거에요. 그 천한 목수의 아들이 배운 것도 없는 놈이, 그렇다고 풍채가 좋지도 않은데 성경에 보니까 흠모할 것이 없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놈이 하는 일이 이스라엘에서 본 일이 없는 일이 일어나는 거에요. 아주 환장하는 거죠. 왜 자기들은 못하는데 그 놈은 하거든요. 이게 배알이 꼴리는 거죠. 그런 능력은 자기들을 통해 나타나야 하는데 엉뚱한 놈이 하고 다니니 미치는 거죠.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빈정대는 거죠, 깍아 내릴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여러분 잘 아시죠. 남이 하면 시리즈 말입니다. 내가 하면 사랑 남이 하면 불륜, 아내 자랑도 내가 하면 애처가 남이 하면 공처가, 내가 민소매 입으면 시원해 보이는 거고, 남이 입고 다니면 아주 벗고 다니지 벗고.
다른 사람 깍아내려서 우리가 뭘 얻을 수 있을까요? 아무 것도 없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해서 이 바리새인들이 얻는게 뭘까요? 예수 깍아내리기를 통해서 뭘 얻었을까요? 속 좁은 것 티낸 거죠. 아무 유익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도 기를 쓰고 하거든요. 뭘 위해서요? 함께 죽자는 겁니다. 함께 망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이런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는 마음이 있어요. 아세요? 뿌리 깊은 외모지상주의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평일에 교회에 있을 때 편하게 옷을 입고 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목사님 어디 계세요?’하고 물어요. 그러면 웃으며 잠깐 어디 나가셨다고 그러죠. 귀찮아지지 않아서 좋아요. 그런데 제가 와이셔츠 입고 넥타이 매고 있으면 먼저 목사님! 하고 인사를 해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넥타이가 목사님이지, 난 목사님 얼굴이 아닌가봐, 좀 실망스러워요. 얼굴만 봐도 목사님해야 하는데. 우리가 어떤 사람을 존경할 때 그의 학력/ 재력/ 지위를 존경할까요? 다 가졌어도 욕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격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김새를 존경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교회는 먼저 그런 곳이 되야 한다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보다 못 배운 사람, 나보다 못 가진 사람, 나보다 못난 사람이 주님의 일을 잘하는 것을 축복하고 존경하고 따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배우는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나보다 늦게 믿고, 아는 것도 없는게 설친다고 이바구나 하고 다녀서 되겠습니까?
본문은 우리안에 뿌리깊은 외모지상주의에 대해서 깨우쳐 주시는 거에요. 주님의 능력이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기뻐하고 축복하라, 속 좁은 티 내지 말고 존경하고 따르는 겸손한 사람이 되라. 할렐루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의 성숙을 위해 은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을 그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리도록 도우십시오. 우리안에 뿌리깊은 외모지상주의를 회개하고 마음의 중심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