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병원
한국 최초의 사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1885년 미국인 뉴턴 알렌의 건의로 재동에 설립하였고 제중원으로 변경하였다. 제중원의 운영권을 1894년 미국 북장로교선교부로 이관하였고 이후 운영자인 에비슨이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하였다.
서울대 의과대학
1899년에 경성의학교가 설립되었고 지석영이 교장이었다. 총무 위생을 담당하던 내부소속의 내부병원이 광제원이 되어 1916년 경성의학교와 함께 대한의원으로 통합되었다. 대한의원이 조선총독부의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거쳐 서울대 의과대학이 되었다.
성북구 휘경동 삼육보건대학교
사도세자의 배봉산 수은묘 (정조 때 영우원이라 고침)가 수원 화성으로 옮기기전의 위치이다. 1968년 서울 위생병원 뒤 간호학교 신축지에서 사도세자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지금의 휘경동 29-1번지에서 출토되어 신고하였다. 휘경은 아름답고 경사스러운 곳이라는 의미로 순조가 생모인 정조의 수빈 박씨 묘를 휘경원으로 정하였다. 휘경원은 배봉산 영우원 왼쪽에 있었으나 남양주로 이전 하였다. 휘경원 자리가 경성요양원, 서울위생병원을 거쳐 삼육의료원이 되었다.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사옥
원래 용호영이 잇던 자리엿으나 수빈 박씨를 모신 사당인 경우궁이 있었다. 갑신정변 때 고종 과 황후,후궁들이 이곳으로 일시 피신하였고 개화파가 수구파를 죽인 곳이다. 갑신정변 후 고종이 경우궁을 자수궁터로 옮기고 경우궁터는 이조,예조,공조,병조 판서를 지낸 민영휘의 소유가 된다. 민영휘는 이곳에 광성의숙을 열어 관상감 터에 교사를 신축하였고 고종이 민영휘의 휘자를 따서 친히 휘문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다. 휘문중고등학교가 대치동으로 이전 할 때에 대치동 부지는 민영휘의 손자 민병유가 희문의숙에 기증한 땅이다. 휘문고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현대에서 매입하여 현대그룹의 빌딩이 들어섰다. 현대빌딩 앞에는 관상감 관천대가 있는데 보물 1740호이다. 관천대는 천문관측 기구인 소간의를 설치한 대인데 임진왜란 때 훼손되고 관천대만 남아 있다.
연세대학교
영조의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모친)는 세도세자 사후 2년 후 사망하였다. 영빈 이씨 묘인 수경원이 있던 자리이다. 1915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대학을 세웟고 사촌형 토마스 언더우드가 1917년 연희전문학교를 세웠다. 1946년 연희대학교, 1955년 세브란스의과대학, 1957년 연희대와 세브란스의대가 통합하여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진명여고, 숙명여고
고종의 후궁인 영친왕의 생모인 엄황귀비는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었다. 엄상궁이 고종의 성은을 입어 명성황후가 궁 밖으로 쫓아냇는데 면상황후 사후에 다시 궁으로 불러 들였다.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하여 황자를 낳았으나 황후가 아닌 황귀비의 직위를 얻었다. 황귀비는 못생긴 엄상궁이라 불렸으나 똑똑하였다고 전한다. 일본의 야욕을 알아차린 황귀비는 동생인 엄준원에게 교육에 힘쓸것을 당부하여 진명여학교를 설립하엿으며 명진(숙명)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숙명여자전문대, 용동궁
현재의 중구 서소문동 정동에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의 용동궁이 있었는데 종로구 수성동으로 옮겨 지었다. 순회세자 사후 덕빈 윤씨가 선조 25년에 창경궁 동궁에서 별세하였는데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떠나며 이를 잊고 떠났다가 벽제에 이르러서야 생각이 나 후원에 가매장을 명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환궁한 후에 가매장지를 찾지 못하여 허장을 하였다. 용동궁은양자로 들어온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의 동생 민겸호의 소유였으나 임오군란 때 민겸호가 살해되었고 이후 살려는 사람이 없어 고종이 뮐렌도르프에게 하사하였다. 이후 고종의 귀빈 엄씨 소유가 되었다. 엄황귀비가 용동궁을 하사하여 명신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영친왕의 아호가 명신재여서 교명을 숙명고등여학교로 변경하였다. 1920년경 조선 여성의 고등교육의 필요성으로 숙명여자전문학교설립 모금 운동이 일어나 시민의 참여와 영친왕이 기금을 하사하여 1934년 숙명여자전문학교로 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