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처 : 고구려연구회-www.koguryo.org
壁畵을 통해서 본 高句麗 音樂과 樂器 -고구려 음악 문화에 관한 재검토(대회 3일 A
壁畵을 통해서 본 高句麗 音樂과 樂器
-고구려 음악 문화에 관한 재검토
이진원
1. 머리말
고구려 벽화는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음악에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을 검증해주며, 이를 통해서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음악적 정보를 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여러 음악적 자료 중에서 악기와 관련된 부분의 연구가 많이 진척되어 있으며, 총체적 벽화 연구를 통해서 악대 구성이라든지, 인접 국가와의 교류 문제 등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소극적인 연구가 진행되었을 뿐이다.
얼마전까지는 고구려 벽화가 있는 북한과 중국 지역이 개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벽화 분야에서 특히 음악 분야는 크게 연구되지 않았으나 최근에 북한 정부 수립이후 연구성과와 중국의 벽화관련 연구 성과물들이 알려지면서 활기를 띠어 남한학자가 북한학자들의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 음악과 관련된 논저들을 살펴보고 정리한 보고서 등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벽화는 말이 없다. 즉,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 그들이 사용하는 악기, 사용되는 장소에 대한 구체적 도상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음악에 대해서는 정보를 주고 있지 못하다. 어떠한 음악을 연주했는가 하는 문제, 악곡명, 악곡구조, 음조직, 선율형, 장단에 대한 논의는 벽화를 통해 알아낼 수 없는 것도 벽화 연구에서의 한계이다.
필자는 본 고에서 벽화를 통해서 고구려의 음악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먼저 문헌에 보이는 고구려 음악과 악기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였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서 고구려 벽화에 깃들어 있는 진정한 고구려 음악 문화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헌과 고분벽화 유물이외에 현재 중국과 일본에 남아있는 고구려 음악에 대한 흔적을 찾아 이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악기, 악대 등의 제반 음악적 상황에 대해 보다 사실에 가까운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2. 고구려 음악 문화에 관한 문헌 사료 검토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음악 문화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문헌에 등장하는 고구려 음악 관련 자료들을 재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사전 문헌 분석없이는 정확히 고분벽화의 고구려 음악 문화를 짚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문헌에서 고구려의 음악을 기록한 가장 이른 사서는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에 담겨진 고구려음악 관련 내용은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된 바 있다. 이러한 연구에는 주로 고구려의 주요한 현악기인 거문고의 유래에 대해서 비교적 깊은 논의가 있었으며, 수당대 중국 궁정에서 사용되었던 고려기에 사용된 악기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고구려 음악의 국제성에 대한 논의가 그 뒤를 잇는다. 먼저 『삼국사기』 등장하는 현금에 대한 기록를 살펴본다.
<인용 1> 현금은 중국 악부의 금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금조』에는 “복희가 금을 만들어 수신 수양하여, 하늘이 내려준 천성을 회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금의 길이는 석 자 여섯 치 여섯 푼이니 366일을 상징하고, 넓이는 여섯 치이니 육합을 상징하였으며, 판 위를 지(池)[지는 연못이니 공평함을 의미한다.]라 하고, 판 밑을 빈(濱)[빈은 복종을 의미한다.]이라 하였으며, 앞이 넓고 뒤가 좁은 것은 사람의 존비를 표시함이오, 위가 둥글고 아래가 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모방한 것이며, 다섯 줄은 오행을 상징한 것이오, 큰 줄은 임금, 10줄은 신하를 나타내는데, 문왕과 무왕이 두 줄을 더 첨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풍속통』에는 “금의 길이는 넉 자 다섯 치이니 이는 사시와 오행을 모방한 것이오, 일곱 줄은 칠성을 모방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용 2> 현금의 제작과 관련하여 『신라고기』에는 “처음에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음률과 연주법을 알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 중에 그 음률을 알아서 연주할 수 있는 자를 구하여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 때 둘째 재상인 왕 산악이 칠현금의 원 형태를 그대로 두고, 만드는 방법을 약간 고쳐서 이를 다시 만들었다. 동시에 1백여 곡을 지어 그것을 연주하였다. 이 때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마침내 현학금(玄鶴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 뒤로는 다만 현금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윗 <인용 1>과 <인용 2>에서 볼 수 있듯이 거문고의 현악기인 현금의 창제에 관련된 중요한 언급이다. 즉 거문고는 진으로부터 건너온 칠현금을 모방하여 창제된 것이라는 것이며, 이는 거문고 유래의 제일 중요한 사료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거문고 유래는 진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부재, 칠현금이라는 악기가 오늘날 현재 중국에서 전승되는 고금(古琴)과 같은지 않은지의 여부 등에 많은 문제점을 간직하고 있는 기록으로 보여진다. 필자는 이 기록과 고구려 고분벽화와 인접 중국과 일본의 여러 자료들을 비교 분석하여 거문고의 기원을 고찰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인용 3> 신라 사람 사찬 공영의 아들 옥 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금을 연구하였다. 그는 스스로 30곡을 새로 지어 이것을 속명득에게 전하였고, 속명득은 이것을 귀금 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 선생이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니 신라왕이 금의 연주법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이찬 윤흥에게 명령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그 법을 배워 오게 하고, 마침내 그에게 남원의 공사를 맡겼다. 윤흥이 임지에 도착하여 총명한 소년 두 명, 즉 안장과 청장을 선발하여 지리산에 가서 금의 연주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귀금 선생이 그들에게 금의 연주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그 미묘한 부분은 알려 주지 않았다. 윤흥이 자기 처와 함께 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나를 남원으로 보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의 기술을 이으려는 것인데, 지금까지 3년이 되었으나 선생이 숨기면서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있으니, 내가 왕에게 복명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윤흥은 술을 들고 그의 처는 잔을 잡고 무릎으로 기어 예의와 정성을 다하니, 그렇게 한 뒤에야 그가 숨겼던 표풍(飄風) 등의 세 곡을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과 극종에게 전하여 극종이 일곱 곡을 지었으며, 극종의 뒤에는 금으로써 자기의 업을 삼은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은 음률에는 두 가지 조가 있었는데 첫째는 평조(平調)요 둘째는 우조(羽調)이며 전부가 187곡이었다. 그 나머지의 곡이 세상에 유행하였으나 기록할만한 것이 거의 없었으며, 기타의 것은 모두 흩어져 없어졌으므로 여기에 모두 등재하지 못한다.
<인용 3>은 거문고의 신라 정착과 발전에 대한 것으로 연주법과 창작곡, 그리고 그 음악의 조식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인용 4> 고구려 음악에 대해서는 『통전』에 “악공들은 자색 비단 모자에 새 깃을 장식하고, 황색의 큰 소매옷에 자색 비단 띠를 띠었으며, 통이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 물을 들인 끈으로 장식하였다. 춤추는 자는 네 명인데, 복상투를 뒤에 늘이고, 붉은 수건을 이마에 매고, 금고리로 장식하였다. 두 명은 황색 치마 저고리에 적황색 바지를 입고, 두 명은 적황색 치마 저고리에 바지를 입었는데, 소매를 매우 길게 하였으며, 검은 가죽신을 신고, 두 명씩 나란히 서서 춤을 춘다. 악기로는 탄쟁 하나, 추쟁 하나, 와공후 하나, 수공후 하나, 비파 하나, 오현금 하나, 의취적 하나, 생(笙) 하나, 횡적 하나, 퉁소 하나, 소필률 하나, 대필률 하나, 도피필률 하나, 요고 하나, 제고 하나, 담고 하나, 패 하나를 사용하였다. 당 무태후 때도 25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곡만을 익힐 수 있고, 의상마저 점점 낡고 없어져서 그 원래 풍습을 상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책부원귀』에는 “악기에 오현금, 쟁, 필률, 횡취, 소, 고 등이 있고 갈대를 불어서 곡조를 조화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용 4>에는 고구려 악공들의 복식, 악기, 당 무태후 시절 연주된 악곡 수 등에 대한 기록으로 중국의 『통전』과 『책부원귀』 에 실린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와같이 <인용 4>를 보면 『삼국사기』 악지에 당(唐)의 두우(杜佑 735-812)의 『통전』(通典)과 『북사』(北史)를 인용하여 고구려악에 사용되는 탄쟁(彈箏)․추쟁(搊箏)․와공후(臥箜ꨞ)․수공후(竪箜ꨞ)․비파(琵琶)․오현(五絃)․의취적(義觜笛)․생(笙)․횡적(橫笛)․소(簫)․소필률(小觱篥)․대필률(大觱篥)․도피필률(桃皮觱篥)․요고(腰鼓)․제고(齊鼓)․담고(擔鼓)․패(貝) 등의 17종의 악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밖에 『수서』(隋書)의 동이전(東夷傳)에는 오현(五絃)․금(琴)․쟁(箏)․필률(觱篥)․횡취(橫吹)․소(簫)․고(鼓),․吹蘆 등 7종의 악기가 소개되어 있다. 또 『수서』 음악지(音樂志)의 고려기(高麗伎)에 와공후․비파․오현․탄쟁․추쟁․생․소․필률․도피필률․적․패․요고․제고․담고 등의 악기가 소개되어 있는데, 모두 14종으로 동이전에 기록된 악기 수보다 7종이 많다. 『구당서』(舊唐書) 예악지(禮樂志)에 보이는 십부기(十部伎) 중 구부기(九部伎)의 고려기(高麗伎)에서 보이는 악기 외에 봉수공후(鳳首箜篌)․추쟁․구두고(龜頭鼓)․철판(鐵版)․대필률(大觱篥) 등의 5종의 악기가 더 보인다.
이와같이 중국의 문헌인 『북사』, 『수서』, 『구당서』 등에 고구려악에 사용되는 악기가 소개되어 있고, 이것은 수당대의 중국 궁중에 진설된 기악의 하나로 고려기에 사용된 악기이므로 이를 고구려 영토 내에서 사용되던 악기들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들의 악기명이 기타 다른 기악의 악기명과 통하는 것으로부터 고구려악에 사용되던 악기들의 악기적 특징이 상호 관련성이 있음을 짐작할 뿐이며, 오늘날 한국전통음악에서 사용되는 악기명과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표 1> 중국 문헌에 보이는 고구려 악기
이외에도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고구려의 고각(鼓角)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다. 이규보(李奎報)는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인용하여 동명왕편에서 국초에 비류사자(沸流使者)의 왕래에 고각의장(鼓角儀仗)이 없었으며, 부분노(扶芬奴) 장군이 비류로부터 고(鼓)를 가져온 일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같이 고구려에서는 국초에 고를 갖추게 되었는데, 송방송(宋芳松)은 이러한 고각의장에 대하여 고취(鼓吹)와 같은 의장에서 쓰였음과 후대 낙랑군 적병의 습격을 알리는 자명고(自鳴鼓) 및 신라 효소왕(孝昭王)시 병고안의 고각이 저절로 우는 일이 발생한 것들을 보면 만파식적과 같은 신물처럼 어느 왕권의 정치적 정당성과 신성함을 의미하는 상징적 보물로 해석될 수 있고, 그 사용은 군대의 고취의장에서 공격의 신호로 사용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고구려 음악은 일본에도 전해졌다. 일본에 건너간 고구려악에 대하여 이혜구는 “고구려음악과 백제음악의 국제성”에서 『직원령』(職員令)이나 『속일본기』(續日本紀)․『일본후기』(日本後紀) 등의 문헌 등을 참조하여 고려악에는 횡적․막모(莫牟)․군후․고(敲)의 4종의 악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밝히고, 그것이 중국내의 고려기에서 사용되는 악기와 다른 이유를 각 국가의 신분차등(身分差等)에 따라 편성을 달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악지에는 고구려악에 존재하였던 실제 악곡명이 기록되어 있다.
<인용 5> 내원성(來遠城) 내원성은 고구려 정주(靜州)에 있는 곳으로서 수중(水中)의 땅이다. 오랑캐가 투항해 오면 여기에 두었는데, 이에 성 이름을 내원성이라 하였고, 노래도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연양(延陽延山府) 연양에 어떤 남에게 쓰여지는 바 된 자가 있었는데 그자는 죽기를 무릅쓰고 열심히 일했다. 자기를 나무에 비유해서 말하기를 “나무가 불을 도우려면 반드시 자체를 해치는 화를 초래하지만, 그래도 쓰여지는 것을 다행하게 생각하고, 비록 재가 되어 다 타버리기에 이른 바 되어도 사양하지 않는다”고 했다. 명주(溟洲) 세상에 전하기는 서생이 외지에 나가 공부를 하는데 명주에 이르러 한 양가(良家)의 딸을 만났는데 자색이 아름다웠고 서생을 꽤 알아주어 서생은 번번이 시로써 그녀를 도발(挑發)하였다. 그녀가 말하였다. “여자는 망령되이 사람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당신 과거에 뽑힌 후 부모님께서 명령이 계시면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서생은 곧 서울로 돌아가 과거공부를 했다. 그런데 그 여자 집에서는 사위를 보려고 했다. 그 여자는 평소에 못가에 가서 물고기에 모이를 주곤 했는데, 물고기들은 그녀의 기침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와서 모이를 먹곤했다. 그녀는 물고기에 모이를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오랫동안 안 길러주었으니 내 마음을 알 것이다”하고 깁에 쓴 편지를 던지는 큰 물고기 한 마리가 뛰어올라 그 편지를 물로 연연히 가버렸다. 서생이 서울에서 어느날 부모의 반찬을 마련하려고 장에서 물고기를 사가지고 돌아와 그 물고기를 가르니 깁에 쓴 편지가 나왔다. 서생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곧 그 깁에 쓴 편지와 자기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곧장 그녀의 집으로 곧장 그녀의 집으로 갔더니 이미 사위가 그녀의 집 문에까지 와 있었다. 서생이 편지를 그녀의 집안 사람에게 보여주고 마침내 이 가락을 노래했다. 그녀의 부모가 이 일을 이상하게 여기고 이르기를 “이 것은 정성에 감동되어 이루어진 일이지 사람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 하고 그 사위를 돌려보내고 서생을 사위로 받아들였다.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내원성, 연양, 명주는 모두 지명으로써 악곡의 이름을 한 것으로 그 지방색을 강하게 띠고 있는 향악곡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들이 있다. 내원성은 “오랑케”들이 거주하던 지역의 음악이었으므로 분명 다른 지역의 고구려 음악과는 다른 외래적인 특징을 간직한 음악으로 보인다.
고구려를 포함하여 한반도의 음악은 일본에서 고려악으로 전승되고 있으나 일본의 고려악에서 얼마만큼 고구려의 음악이 전승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최근 일본에서 전승되는 고려악의 악조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당 속악 28조와 같은 조식명을 통한 비교 연구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형편이다. 또한 중국의 학자 엽동(葉棟)과 김건민(金建民)은 『인지요록』(仁智要錄) 등과 같은 일본의 고악보(古樂譜)에 남겨진 고려악곡을 분석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고구려 멸망이후 고려악을 담고 있는 악보며, 분명 일본화한 음악이므로 고구려의 음악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에 대한 연구로 고구려 음악에 대한 편린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문헌을 통해서 우리는 고구려의 음악문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고구려 음악에 있어서 고취악의 사용이 건국초기부터 있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류로부터 얻은 고에 대한 기록으로부터 알 수 있다. 다음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기인 거문고 유래에 대한 기록으로 중국의 악기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각 지역의 지명을 딴 음악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외에도 고구려악의 국제성을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수당대의 칠부기, 구부기, 십부기 등과 같은 기악에 고려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많은 악기를 구비한 악대를 가진 음악을 구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것이 서역악과 고려악이 서로 교류하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고 한다. 일본에 건너간 고구려악에서도 고구려의 음악 문화를 살펴볼 수 있었다.
3.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악과 악기
이러한 문헌들을 통해서 고구려악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고, 이는 고고음악학적 자료의 충분한 분석을 통해 보충되어질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문헌상의 오류에 대하여 바로 잡을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한다. 고구려악의 경우 당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고분벽화가 존재하므로 이를 통해 고구려 음악문화를 다른 차원에서 검토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살펴볼 수 있는 벽화고분은 현재 85기가 확인되었다고 하며, 그 분포지역은 주로 평양일대와 안악일대, 그리고 집안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평양시일원에 22기, 남포시일대에 20기, 순천시일대에 12기(1기는 甑山郡), 안악일대 11기, 그리고 집안일대에 20기가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벽화묘는 앞으로 발굴작업을 통해 더욱 늘어날 전망이라 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현실과 내세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으며, 크게 인물풍속도, 사신도로 나누기도 하며, 인물풍속, 동물, 풍경, 장식 등으로 그 내용을 분류하기도 한다.
고구려의 무덤 주인공들은 왕족이나 귀족들로서 현세에서 부귀 영화가 내세에까지 이어지기는 바랐으며, 생전의 생활모습을 자세히 벽화로 남기게 된 것이다. 고구려 음악문화를 알 수 있는 벽화가 있는 무덤은 19기 정도로 4세기로부터 7세기 중엽까지 고구려 중․말기의 음악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표 2>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악기
<표 2>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악기들을 주재걸이 “고구려 사람들의 예술활동에 관한 연구(음악, 무용을 중심으로)”에서 정리하여 표로 작성한 것이다. <표 2>에 보이는 악기명은 고증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특히 현악기에서 눕혀서 연주하는 거문고 관련 현악기들의 고증이 학자들간에 차이가 있고, 필자는 이를 정리하여 “현금과 와공후”라는 논문에서 과학적으로 살펴본 바 있다.
최근에 석현주도 “낙랑고지와 집안의 고구려음악 -고구려 고분벽화의 악기에 기하여-”라는 논문을 통해서 17기 고분벽화의 악기를 고증하기도 하였다. 그의 고증은 주재걸의 고증과 차이가 있어서 <표 3>에 전재하여 보았다.
<표 2>와 <표 3>에서 차이점을 살펴보자. 먼저 <표 3>에는 쌍기둥무덤과 통구4신무덤의 악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악기 수량에서도 참고한 벽화도상의 한계로 말미암아 북한의 풍부한 1차 자료를 기반으로 정리된 <표 2>과 차이가 있다. 다섯무덤 중 제5무덤에 보이는 생황은 어떠한 모습인지 아직 도상으로 공개된 적이 없어 흥미를 자아낸다. 생황은 <
표 3>에 보이지 않고 있다.
먼저 안악3호무덤에 보이는 고구려음악과 악기를 살펴보자. 이혜구는 안악3호분의 벽화를 통해서 중국 한 대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기마행렬도의 악대편성이 한 대의 고취와 유사하고, 주악도의 소규모 반주악대의 구성 또한 중국의 여러 벽화에서 보이는 주악도와 흡사한 것에 기인한다.
<표 3> 석현주 정리 고구려 고분벽화의 악기
한 대의 고취악은 타악기와 관악기가 중심이 되는 음악으로 타악기에는 고가 중요하며, 관악기에는 배소(排簫), 횡적(橫笛), 가(笳), 각(角) 등이 있다. 대개 가창(歌唱)도 있는데 같은 고취라도 악대의 조직과 용처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한 대 고취악은 횡취(橫吹)와 고취가 있는데 초기에는 가와 각을 공히 사용하였다. 그중 하나는 후대에 배소와 가를 주요한 악기를 쓰고 의장대가 행진할 대 연주한 것으로 고취로 계속적으로 불리었고, 다른 하나는 고와 각을 주로 사용하고 군악으로 마상에서 주로 연주하였고 횡취라고 하였다. 고취의 시작은 진나라 말기에 반일(班壹)이라는 사람이 병란을 피해 북방 소수 민족과 함께 접경지방에서 거주하며 사냥시 고취를 사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횡취는 장건이 서역에서 가지고 온 악곡을 음악가 이연년이 개편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고취와 횡취의 구분이외에 말을 타고 행진할 때 쓴 곡을 기취(騎吹)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일반의 상례에 사용하는 예가 있었다. 이는 『진서』 예지에 “한나라와 위나라의 선례에 장례를 치를 때면 길사와 흉사의 노부를 설치하였는데 모두 고취가 있었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한다면 안악3호분은 상례에 사용된 기취가 아니였을까 생각된다.
안악3호분 회랑(回廊)의 대행렬도<기마행렬도>에 보이는 악기들은 관악기와 타악기로만 되어 있으므로, 바로 고취악대의 행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주재걸은 관악기에는 소와 대각(大角, 뿔나팔), 소각(小角) 등이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이혜구 등은 이를 가(笳)라 보고 있다. 대각은 짐승의 뿔과 같이 휘어져있으며, 그 크기가 사람머리보다 크다. 그러나 한 대 화상전에서 보이는 가는 보통 한 손으로 잡고 연주하는데 그 끝이 바깥으로 조금 나오는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안악3호분에서 회랑 기마행렬도에서 대각보다 작은 관악기는 가로 추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가라는 관악기의 명칭이 중국 문헌에 소개된 고구려 악기명에 등장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회랑의 기마행렬도가 고취를 묘사하는 것임은 확실하나 그렇다고 해서 한 대의 고취에 사용하는 악기 이름인 가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더 합리적인 악기명이 있지 않을까 고려해야 한다.
필자는 “막목의 문헌적 재검토”라는 글에서 막목과 도피필률과의 관계를 고찰하면서 도피필률과 가의 유사성에 대하여 논의한 적이 있다. 일본에 건너간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에 사용되던 막목이라는 악기가 아마도 도피필률이 아니였을까 논의한 것이다. 중국내의 고취악의 악대편성 변화를 살펴보면 도피필률이 고취악대에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료금대의 고취편성에 도피필률이 고취에 사용되고 있는 것인데, 도피필률이 고구려만의 독자적 악기였음을 상기하면 안악3호분에 회랑의 기마행렬도에 보이는 작은 관악기는 도피필률일 가능성도 있다.
본래 한의 고취악은 군악계통에 속하는 음악의 총칭으로 고(鼓)․요(鐃)․가(笳)․소(簫)로 구성되었고, 당시에는 단소요가(短簫鐃歌)로도 불렀다. 이러한 악기 구성에서 고, 요, 소, 그리고 가와 비견될 수 있는 도피필률, 혹은 가로 볼 수 있는 관악기가 사용된 악대는 분명 고취이다. 『악부시집』(樂府詩集)에는 수대의 고취가 사부(四部)로 분류되어 있다. 먼저 강고부(掆鼓部)에는 강고, 금정(金鉦), 대고(大鼓), 소고(小鼓), 장명각(長鳴角), 차명각(次鳴角), 대각(大角) 4종이 있고, 요고부(鐃鼓部)에는 가(歌), 고, 소, 가(笳) 4종이 있으며, 이것은 한 대의 단소요가(短簫鐃歌)에 상당한다. 대횡취부에는 각, 절고, 적, 소, 필률, 가(笳), 도피필률 7종이 보이며, 소횡취부에는 각, 적, 소, 필률, 가, 도피필률 등 6종의 악기가 있다. 하지만 안악3호분의 조성연대가 4세기 경이므로 수의 확대된 고취악대에 도피필률이 편성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를 가로 보는 것이 현재까지는 더 합리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마행렬도의 고취는 분명 한 대의 고취악과 관련이 있으나, 그 기원이 모두 한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기에는 힘들다. 『구삼국사』의 기록을 참고하여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비류로부터 고를 얻었다고 하였다. 동명왕시 비류를 복속하고 그 의장대를 얻은 것으로 본다면 국초부터 고취악대가 겸하여진 것을 알 수 있고, 고와 각이 그 주요한 악기였음을 알 수 있다. 안악3호분은 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고구려 중기에 해당하며 고구려가 이미 낙랑 등을 정복하고 나서 만들어진 고분으로 한 대의 여러 고취문화를 흡수하였을 것이며, 기존의 고각의장이 점차 확대되어 고취, 그중에서도 단소요가와 같은 형식를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관악기에 대하여 살펴보자. 최무장은 “중국 사서와 고구려 벽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의 음악(2)”라는 글에서 필률이 오회분 4호묘에 나타난다 적고 있다. “집안 오회분 4호묘 천장 제2중석 북벽에 한 사람의 악인이 손에 필률을 들고 있다. 그것은 대필률인지 소필률인지 알 수 없으나 필률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원 보고서에는 오른쪽 팔뚝을 굽히고, 몸을 가까이 기대고 손에는 하나의 권축(卷軸)을 들고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으나, 그것은 권축이 아니고 문헌에서 기록된 필률이다. 필률의 형상은 화축(畵軸)과 같다. 그러나 오회분 4호묘 내에 악인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결코 화축이 아니다. 화축 양끝은 거칠고 가늘며, 길고 짧게 되어 있다. 그 한 끝(상단)은 길고 가늘어서 취주(吹奏)용의 일단이며, 다른 한 끝(하단)은 비교적 짧다. 그것은 관자(管子)의 형태와 같다. 다만 음건공(音鍵孔)은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다. 전체 화면에 3인이 있으며 모두 악기를 가지고 있다. 1인은 금을 연주하고, 다른 1인은 북을 치고 있다. 나머지 1인은 필률을 들고 있다. 상기한 내용 중 3번째 사람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합(盒) 같은 것은 노취초(蘆嘴哨)를 갖춘 합자(盒子)이다.”
필률은 서역계 악기로 중국 사서에 보이는 고려기의 중요한 악기로 되어 있다. 대필률, 소필률, 그리고 도피필률이 그것으로 그중 도피필률은 고려기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필자가 『집안고구려고분벽화』(集安高句麗古墳壁畵)에 소개된 도상을 확인한 결과 벽화 인물의 왼손에 들려진 것이 무엇인지 확인이 불가능하고 오른손에 들려있는 것이 또 다른 도상에도 그대로 보이며 합이라 보기보다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사발(완)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하다 할 수 있고, 오히려 채로 사발을 때려 소리를 내는 타악기로 보는 것이 현재로서 더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벽화인물이 들고있는 것이 권축인지, 화축인지, 필률인지, 타악기의 채인지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힘들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타악기들은 주로 그 겉모습으로 명명을 한다. 안악3호분 전실 주악도에 보이는 북은 세워져 있으므로 세운북 혹은 입고(立鼓) 혹은 건고(建鼓)라고 불린다. 중국 문헌에 보이는 고구려의 타악기가 요고(腰鼓)․제고(齊鼓)․담고(擔鼓) 삼종 존재하는데 요고는 오늘날 장고와 그 형태가 유사한 북임을 알 수 있으나, 제고와 담고는 그 모습을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담고는 메는북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 안악3호분의 기마행렬도에 보인다. 하지만 이 담고도 고분벽화에 보이는 것에 따라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안악3호분에 보이는 것과 같이 볼률감이 느껴지는 담고로 치는 타고면(打鼓面)에 아무런 문양이 없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약수리고분과 수산리고분에서와 같이 화려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담고를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타고면이 가죽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금고(金鼓)와 같이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인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 동남아시아의 금고와 연결하여 연구할 수 있는 과제로 생각된다. 금고는 반자(盤子)라고도 하여 현재 사찰에서 사용되고 있다. 예전에는 군대나 사찰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동기(銅器)이다. 대부분 옆면과 위아래에 2, 3개의 고리가 있어 매달아 치게 되어 있으며, 이것이 약수리고분과 수산리고분의 것과 흡사하며, 더욱이 중앙에 연꽃 등의 무늬를 장식하고 둘레에는 보상화나 구름, 여의주, 당초문 등의 무늬를 새기고 있어 동남아시아의 동고(銅鼓)와 연관성이 있어보인다. 안악1호분에 보이는 현고(매단북)는 세워놓은 북틀에 말그대로 매단 것으로 들어 매고 움직일 수 있게 한 담고와는 다르다. 또한 북틀 상부에 매달려있는 북의 북통의 길이가 비교적 길다.
안악3호분의 후실 무악도에 보이는 소규모 관현악대 편성을 살펴본다. 필자는 “한국 고고음악학 사료 중의 악기 명명법 고찰 - 몇가지 출토 유물에 보이는 고악기를 중심으로 -”라는 글을 통해서 후실 무악도의 세로로 부는 긴 관악기를 장적(長笛)으로 고증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으며, “현금과 와공후”를 통해서 안악3호분의 현악기는 그를 고증할 수 없음을 논의한 적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혜구의 “安岳 第三號墳壁畵의 奏樂圖”에서 가로로 눕혀 타는 현악기를 ‘현금(?)’이라 부르고 있는 것과 같다. 필자가 “현금과 와공후”에서 고증한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가로로 눕혀 타는 현악기를 살펴본다.
아래 <표 4>에서 안악3호분의 현악기를 살펴보면 고정주의 유무, 현의 수, 줄감개의 유무 등이 모두 정확치 않으므로 가로로 눕혀 타는 현악기 임을 알 뿐이다. 이러한 현악기와 함께 완함, 장적이 같이 소악대를 구성하는데 이러한 악대 구성은 중국 대륙의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태성리1호분의 현악기도 어떠한 악기인지 고증할 수 없다. 현의 수가 6현이며, 두 개의 줄감개가 있는 것은 알 수 있으나, 고정주가 있는 지, 없는 지 알 수 없으므로 현악기를 고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윗표의 장천1호분의 현악기까지 모두 해당된다. 무용총이후조성된 무덤벽화에 나타난 관련 현악기는 필자가 4현의 거문고로 보았다. 이것은 『삼국사기』 악지에 기록된 현금의 제작에 관한 『신라본기』의 기록과 현재 중국고고학 유물들에 대하여 검토한 후 고구려의 왕산악이 개량을 진행한 칠현금은 고정주, 즉 괘가 있는 7현악기 즉, 와공후로부터 개량되었음을 고찰한 결과에 의한 것이다.
<표 4> 고구려 현금 관련 고분 벽화 현악기의 특징
안악3호분 후실의 무악도에 보이는 악기하나인 완함에 대해서 살펴보자. 완함은 그 모양과 연주법이 비파(琵琶)와 비슷하며,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함이 비파에 능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당나라 때의 것은 둥근 몸통에 긴 자루(棹)를 박았는데, 이 자루에는 13개의 고정주(固定柱)이 있으며, 줄감개<絃軸>에 네 줄을 매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비파와 흡사한 둥근 울림통에 긴 자루를 가지는 현악기를 완함이라 고증하는 데에 큰 문제없이 남북한 학자들 모두 동의하고 있다. 동한의 부현(傅玄)의 비파부(琵琶賦)에 의하면 완(阮)이 당시 사람들이 금(琴), 쟁(箏), 축(筑), 공후(箜篌) 등을 참고하여 창제한 것이라 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진비파(秦琵琶) 혹은 월금(月琴)이라 부른 기록이 있다 한다. 남북한 학자들 모두 완함이라 부르는데 크게 이견이 있으므로 완함이라 불러도 무방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무용총에 무용도에는 본디 완함의 연주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주재걸이 작성한 <표 2>에서 무용총의 악기에 완함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 악기에 비파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현악기는 탄쟁, 추쟁, 와공후, 수공후를 제외한 비파와 오현이 있다. 여기서 오현이 어떠 악기인지 현재 학계에서는 그 설이 분분하다. 오현이 직경비파인 오현비파를 말하는 것인지, 오현이 칠현금의 모체가 된 오현금, 즉 금인지 고증할 수는 없다. 당대 오현비파가 이형(梨形)이며, 월형(月形)이 아니긴 하지만 『통전』에 “완함은 5현이다. 진비파보다 그 자루가 길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오현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완함을 말할 수도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완함관련 현악기를 울림통의 모양을 중시하여 4현이건 5현이건 간에 모두 완함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가 생겼으며, 또한 5현인 현악기를 오현으로 부르고 4현인 것은 완함으로 구분해서 볼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럼 주재걸의 <표 2>를 중심으로 해서 완함관련 악기들의 악기적 특징을 조사해 보면 <표 5>와 같이 도표화할 수 있다.
<표 5> 고구려 완함 관련 고분 벽화 현악기의 특징
<표 5>에서 볼 수 있듯이 조사한 무덤벽화에 보이는 완함관련 유물들의 줄감개의 수가 4개인 것과 5개인 것이 있다. 세칸무덤과 장천1호분에서 4개로 추정되는 줄감개를 가진 것이 보이며, 오회분 5호묘와 장천1호분에 5개인 것이 있다. 송방송은 “長川1號墳의 音樂史學的 點檢”에서 장천1호분에 줄감개가 4개인 완함과 5개인 오현(비파)가 있다고 고증하고 있으니 원형의 울림통을 가진 비파류 악기를 줄감개 수의 여부에 따라 완함과 오현으로 구분한 것이다. 이러한 구분에 대해 진일보된 연구를 통한 고증이 기대된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의 오회분 5호묘(다섯무덤중 제5호무덤)에는 독특한 횡취관악기가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하여 “고구려 횡취관악기 연구”에서 고구려 횡취관악기가 횡적과 의취적 두가지 종류가 있으며, 이들 두 종류의 횡취관악기 중에서 오회분 5호묘의 횡적은 중국 문헌에 보이는 의취적이며,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에 전승되는 의취적, 즉 지와 다른 구조인 의취적, 지임을 밝혔다.
오회분 5호묘의 횡취관악기가 횡취로 연주하고 있지만, 관의 4분의 3정도 되는 곳에 입술을 대고 양 옆으로 있는 관을 오른손으로 장심이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하여 오른편을 잡고, 왼손으로는 왼편의 관신을 떠 받치는 듯 지탱하며 연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다른 고분 벽화에서 보이는 종취관악기와 연주하는 모습 자체가 아주 다르기 때문에 단순하게 이를 횡적으로 고증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임겸삼은 『동아악기고』에서 이를 미얀마의 무지공(無指孔) 양두적(兩頭笛)이거나 이와는 전혀 다른 구조의 가로로 부는 관악기일 것이라 추론한 바 있었다.
하지만 먼저 중국 문헌에 나타난 고구려 악기의 조사를 통해 의취적이라는 악기를 문헌을 통해 검사하는 과정에서 관끝이 막혀있으며, 취구와 지공이 90도 각도를 유지하는 횡취관악기임을 알았으며, 이러한 취구와 지공의 각도로부터 미얀마의 양두적일 가능성을 배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재육(朱載堉)의 『율려정의』(律呂精義)에 소개되어 있는 황종지(黃鐘龠虒)가 오회분 5호묘의 횡취관악기의 모습과 거의 같으므로 이를 지라 할 수 있고 바로 의취적이라 고증할 수 있게 되었다.
편관악기인 소가 그려져있는 벽화를 살펴보자. 소가 고취에 사용되는 악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는 안악3호분에 나타난다. 이외에도 6세기말 7세기의 오회분 4호묘, 5호묘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고분에 나타난 소는 아마도 모두 열쇠형(鍵形)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백일형은 “북한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악기 소고”에서 안악 3호분에 보이는 소의 고증에 있어서 이혜구와 전주농의 견해가 다름을 언급한 바 있다. 필자는 “한국 고고음악학 사료 중의 악기 명명법 고찰 - 몇가지 출토 유물에 보이는 고악기를 중심으로 -”라는 글에서 안악3호분의 것이 열쇠형일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안악3호분의 기마행렬도도 훼손이 심가하여 이전에 찍은 사진에서도 정확한 모습을 알기 어렵다. 『조선의 미술』에 보이는 행렬도에는 ‘⌈’형태의 배소와 같이 보이며, 전주농의 논문에서는 ‘∩’형태의 봉소와 같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뒤 조성된 오회분 4호묘, 5호묘에서는 모두 배소형태의 소가 그려져 있으므로 안악3호분의 소는 배소라 고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표 2>에서 나타나는 쌍뿔나팔로 고증한 악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악기는 『진서』 악지에 “횡취에 쌍각이 있는 것이 호악이다. 장건이 서역에 갔다가 그 연주법을 서경에 전하였으나 ⌈마가두륵⌋ 한 곡만 남아있다. 이언년은 호곡을 고쳐 새 노래 28곡을 지었다. 황제는 무악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을 볼 때 쌍각이라 고증할 수 있으며, 고구려의 악기가 서역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여 준다.
이상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악대와 악기들을 여러가지 각도로 재검토해 보았다. 먼저 한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안악3호분의 고취악대는 이혜구의 고증과 같이 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었지만 문헌 사료를 통해서 국초의 고각의장의 발전된 모습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새롭게 점검할 수 있었다. 또한 담고가 금고와 관련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고, 동남아시아의 동고와의 비교 연구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그리고 현악기 중 거문고 관련 악기에 대한 필자의 새로운 해석을 다시 한번 제시하였으며, 완함으로 해석되던 현악기를 재 검토하여 수당대의 고려기에서 보이는 악기인 오현과의 연관성 문제를 다루었다. 관악기에서는 오회분 5호묘의 횡취관악기가 수당대 고려기의 의취적임을 밝힌 필자의 연구결과를 다시 한번 언급하였다.
4. 고구려악의 음악적 특징에 대한 고찰
앞서 필자는 고구려악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고구려악이 고려악이라는 현재까지 일본에 전해지는 음악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를 실질적으로 분석 연구한다면 고구려음악의 편린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언급하였다.
그러면 먼저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고려악에 대한 간략한 검토를 통해 고구려악의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에서는 684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음악을 삼한악(三韓樂)으로 총칭하고 일본 궁정에서 연주하였다. 인명천황(仁明天皇, 833-849)시기에는 좌방악(左方樂)과 우방악(右方樂)으로 음악을 나누고 삼한악을 고려악이라 하여 우방악으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고려악의 전통은 계속 이어져 1171년에는 일본음악가 후지하라(藤原) 사장(師長)이 쟁곡집(箏曲集) 『인지요록』과 비파곡집(琵琶曲集) 『삼오요록』(三五要錄)을 편집하였는데, 각기 12권의 악보가 전해지며, 그 중 고려곡권이 한권씩 있다.
『인지요록』에 보이는 고려곡은 중국의 엽동과 김건민에 의하여 역보되고 연구된 바 있다. 다음은 엽동과 김건민의 『인지요록』에 보이는 고려곡에 대한 분석을 <표 6>로 정리하여 본 것이다. 『인지요록』의 고려곡에는 모두 태식조(太食調) 26수, 평조(平調) 1수, 쌍조(雙調) 등 세가지 조식(調式)로 구성되어 있다. 임겸삼(林謙三)은 『동아악기고』(東亞樂器考)에서 이러한 조식들에 대한 쟁 조현법을 연구하여 태식조는 태주상(太簇商), 평조는 임종우(林鐘羽), 쌍조는 일월성조로 조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표 6>에서 볼 수 있듯이 12세기 일본 고려악에서는 7음음계의 음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식조, 쌍조, 평조 중에서 대식조의 곡이 26수로 제일 많음을 알 수 있다. 대식조는 고음계(古音階) E상조(商調), 혹은 신음계(新音階) E궁조(宮調)로 해석된다. 고음계 E상조, 혹은 신음계 E궁조는 그 출현음이 같은 것이다. 당 속악 28조에서 대식조는 칠상(七商)에 해당하는 상조식이라 할 수 있다.
김형동은 “한국음악의 일본전파”라는 글에서 우리나라 전통음악에서 보이는 상조식에 대한 흔적을 탐색하고자 노력한 바 있으며, 일본에 전해진 고려일월조(高麗壹越調)의 조식이 상선법(商旋法)이며 그것은 당 연악 28조에서 보이는 월조(越調) 즉, 황종위상(黃鐘爲商)과 장2도차이가 나는 같은 조식임을 살펴보았다. 또한 세종대에 박연의 상소문 등에서 보이는 무역궁(無射宮) 우조(羽調)가 바로 지조식(之調式)으로 무역균지상조(無射均之商調)이고, 위조식(爲調式)으로 황종위상(黃鐘爲商)이 됨을 고찰함으로서 세종당시에도 상조식의 음악이 널리 연주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이상을 종합하자면 일본에 건너간 고려악에 주로 상조식으로 이루어진 음악이 많은 것을 『인지요록』의 대식조, 평조, 쌍조가 대부분 중국 7음음계의 하나인 고음계의 해석으로 모두 상조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 전승되는 고려악에 사용되는 고려일월조도 상조식을 하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음악도 7음음계의 상조식 음악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한국전통음악에서 7음음계의 음악은 문묘제례악의 음악이외에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중국의 오조이론으로 민요를 분석해 보았을 때 서도소리에서 상조식에 해당되는 민요들이 많이 보이는 것은 고구려 음악의 5음음계화에 따른 변화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하게 한다.
엽동과 김건민의 글에서는 『인지요록』의 고려곡에 차자(借字), 구구쌍(句句雙), 가쾌간화(加快簡化), 연환구(連環句) 등의 중국민간음악에 자주 보이는 음악 발전 수법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수법들은 고구려의 음악이 현대의 음악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없는 뛰어난 음악적 내용을 가지는 음악들이었음을 밝혀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차자는 일종의 전조수법이고, 구구쌍은 음악적 형식이 댓구를 이루는 것이며, 가쾌간화는 일종의 판식변화체로 오늘날 줄풍류에서 보이는 일종의 박자변화를 통한 악곡생성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연환구는 앞 악구의 음악선율을 다음 구에서 받아 반복하며 시작하는 것과 같은 선율 진행 방식이다.
<표 6> 엽동․긴건민의 『인지요록』 분석 결과
이제까지 일본에 전해진 고구려악을 담고있는 고려악을 살펴보고 고구려의 실제 음악의 조식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렇다면 현재 중국에는 고려악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는가. 필자는 그 흔적을 중국 요동(遼東) 남부에 전승되는 쇄납곡(嗩吶曲)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중국의 료동 남부에는 쇄납곡이 전해지고 있다. 이 쇄납곡은 우리나라의 태평소에 해당하는 쇄납과 타악기로 구성된 악대의 고취악곡으로 료동지방에 전체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쇄납곡 중에서 한 곡, 고려가(高麗歌)가 필자의 주의를 끌었다.
중국에서 남아있는 고려(즉, 고구려)관련 지명을 살펴보면 삼국시대의 고구려에 관련된 성 등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것은 고구려의 세력이 료동지역에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자료로서 전해진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 내에 고려가라는 이름의 악곡이 있다는 것은 중국 음악내의 고구려 음악이 잔존하고 있음을 실증하는 자료로서 그 의미가 깊으며, 실제로 그 음악을 살펴보고 분석할 수 있다는 더더욱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고려가의 음악을 살펴보기 전에 고려가의 음악이 속해있는 요남고취악(遼南鼓吹樂)에 대하여 먼저 간단히 살펴보자. 원정방이 『민족기악』(民族器樂)에서 소개하는 요남고취악은 다음과 같다.
“요남고취악은 중국 요령성 전역과 특히 남부지방인 안산, 해성, 우장 및 심양 등지에서 활발히 전승되고 있다. 50년대 예인들이 보관해오던 악보들이 대부분이 청대의 도광, 함풍, 광서, 선통시기에 전해진 것으로 최소한 청 중엽이전에 요남고취악이 널리 연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남고취는 민간에서 고악반 혹은 고악방이라 불리는 단체가 연주하는데 참가자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예술 활동을 하는 일반인들이다. 고취악은 주요하게 결혼과 장례에 사용된다. 요남고취의 악곡명으로 보아 적지않은 곡들이 원명이래의 남북곡패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아울러 당지의 민가와 기악 곡패들을 흡수하여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남고취의 악곡은 한취(漢吹), 대패자곡(大牌子曲), 소패자곡(小牌子曲), 수곡(水曲) 등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한취란 장례식에 쓰이며 좌붕(座棚)형식으로 연주한다. 한취의 구조는 인자(引子), 신자(身子), 미파(尾巴), 초곡(梢曲)의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인자는 산판의 자유리듬으로 되어 있고, 신자는 4/4박자의 느리게 연주되는데 왕왕 몇번씩 반복한다. 미파는 2/4박자로 시작하여 1/4박자로 바뀐다. 초곡은 민간소곡을 사용한다.
다음 대패자곡은 결혼식에 연주되는 음악으로 한취와 같이 좌붕형식으로 연주한다. 음악적 특징은 신자, 미파, 공척상(工尺上)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자와 미파는 한취의 것과 같고 공척상은 다른 곡패로 대치될 수 있다.
소패자곡은 결혼식과 장례식의 각종 의식에서 사용되는 음악이다. 그 음악적 특징은 간단한 곡패의 변주로 볼 수 있다. 소패자곡은 인자와 미파가 없으므로 일촬강(一撮腔)이라 한다. 마지막 수곡은 결혼식과 장례식에 사용하는 것으로 좌붕형식으로 연주된다. 수곡의 형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신자만 있는 것, 인자와 신자가 있는 것, 그리고 인자, 신자, 미파를 모두 갖춘 것이 그것이다.
요남고취악의 악대 편성은 주로 쇄납, 관, 적과 같은 세종의 관악기가 각기 주 선율을 리드해가는 형식이 있으나 가장 보편적으로 보이는 연주 형식은 쇄납이 주 선율을 이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결혼식에 사용하는 악대 편성은 소쇄납(2), 당고, 소발(小鈸), 세악 각기 하나로 되어있고, 장례식에 사용하는 악대 편성은 대쇄납(2), 당고, 소발, 세악, 동고 각기 하나의 편성으로 되어 있다.
요남고취악에서 주로 사용하는 조식은 본조(本調, 1=G), 배조(倍調, 1=C)가 있고 기타 매화조(梅花調, 1=B), 노본조(老本調, 1=D), 민공조(悶工調, 1=E), 사조(四調, 1=F)가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고려가는 소패자곡으로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모두 사용된다 하며, 앞서 소개한 글에 보이는 악대 편성을 따른다. 이 곡은 1956년 음악출판사(音樂出版社)에서 발행한 『쇄납곡집』(嗩吶曲集)에는 수록되어 있으나 그 뒤 1980년이후 중국민간민족기악곡집성(中國民間民族器樂曲集成) 계획하에 발행된 『중국민간민족기악곡집성․요녕권』(中國民間民族器樂曲集成․遼寧卷)에는 그 악곡이 누락되었다.
그러면 안산지역에서 전승되던 이 곡의 악보를 살펴보자.
<악보 1>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곡은 2/4박자의 중간빠르기를 하고 있다. 이 음악은 32마디인데 종지음이 2로 끝나고 2, 3, 5, 6, i의 오음을 사용하고 있는 오조 중의 상조식 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일본에 전해진 고려악의 대부분이 상조식 음악이었음을 살펴본 바 있다. 역사적으로 고구려의 영토에 전승되던 고취악에 ‘고려’의 이름이 들어간 악곡이 존재하며 그 악곡이 또 상조식의 음악이라고 하는 것에서 분명 고구려 음악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요남고취악에서 주로 사용하는 조식에 노본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1=D, 즉 궁이 D음인 조이며, 이로부터 상음이 E음에 해당하므로 『인지요록』의 대식조에서 고음계E상조의 첫음과 같다는 것으로부터 고구려 음악에 사용되던 조식과 요남고취악의 조식 체계와 연관성이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노본조라는 것은 옛 요남고취악의 본래의 조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음악과 악기를 중심으로 고구려 음악을 전반적으로 살펴보았다. 고구려 음악을 기록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사서 등의 문헌을 먼저 검토해보고 고구려의 음악에 고취악대가 있었음과 그것이 비류로부터 시작되어 한의 고취악의 영향을 받아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수당대의 칠부기, 구부기, 십부기 등의 기악에서 사용되었던 고려기의 악기명칭을 살펴보았으며, 이러한 명칭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악기를 고증하는데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이러한 고려기의 악기 중에서는 서역의 영향을 받은 악기들이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현악기인 거문고가 중국의 칠현금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기록이 있음을 보았으며, 이 기록과 고구려 고분벽화의 거문고 관련 도상 및 인접 국가의 관련자료들을 비교하여 거문고가 범아시아적으로 사용되던 와공후 계통의 7현의 현악기를 참조하여 개량된 것임을 알았다. 이외에도 문헌을 통해서 고구려 악사의 복식을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다음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음악관련 도상의 분석을 통해 기존의 해석과 다르거나 전혀 보이지 않았던 몇가지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안악3호분의 고취악대에서 보이는 담고의 재질에 관련된 것으로 동남아시아에 널리 분포되는 동고와 우리나라 사찰에서 사용되는 금고와의 관련성을 연구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두 번째 완함과 관련있는 현악기들을 조사하여 그 고증과 명명에 있어 신중하여야 함을 논의하였다. 원함은 중감개의 수가 4개 혹은 5개 즉, 그 현이 4현, 5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오회분 5호묘에 보이는 횡취관악기가 의취적임을 밝힌 본인의 논지를 다시 소개하였다. 네 번째로 오회분 4호묘에 필률로 보인다고 주장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음을 밝혔다. 이와같이 고분벽화의 악기 및 이를 포함하는 음악문화를 고증하는데에 있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이 동원되어야 함이 중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건너간 고구려음악의 흔적과 중국내에 남아있는 고구려음악의 흔적을 더듬어 고구려음악에는 주로 상조식의 선법을 가지는 음악이 많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중국내 요남고취악에 남아있는 고려가를 발굴하였고, 그 음악이 고구려음악의 상선법을 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추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자료를 찾아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