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유일당인 신간회의 중앙위원 및 평양지회장으로 활동
1927년 민족의 좌우합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가 서울에서 조직되자 선생은 신간회 중앙위원과 평양시 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민족단일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항일투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려는 대전제와 민족과 사회가 한 덩어리가 되어 항일 공동전선을 펴나가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선생은 이 무렵 육신의 곤고함을 잊어버리면서 청년회 조직과 강연회 토론회 등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때의 별명이 ‘무주랑 빗자루’였다. 키는 작았으나 담대했고, 얼굴 빛과 흰 머리카락은 청초한 모습이었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열띤 웅변을 할 때는 듣는 사람마다 공명을 얻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광복 후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 평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평남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동년 8월 18일 평남 도청에서 있었던 일본군 항복조인식에 입회하는 형식으로 참석하였다. 8월 26일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당을 평양 호텔로 초청하고 연립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선생이 위원장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 측에서도 여러 명이 조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립정권의 수립은 이때까지는 선생의 지도력을 배제할 수 없어 이뤄진 부득이한 방편이었다. 이러는 한편 공산당의 위상은 날로 떠오르고 소련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인민위원회는 날치기 행정으로 제 세력을 키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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