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하>마지막 탁(卓)노인 이야기 27 (3)
-남아있는 민족반역자들의 어둠의 세력
글/ 김광한
탁 노인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탁 노인의 소매를 잡았다. 노인의 입에서 이제까지 한 이야기의 결론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였다.
“왜? 할 말이 더 있소?”
“예 어르신네.”
그러자 탁 노인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탁 노인은 이제까지 자신이 한 이야기가 우리 민족의 화두(話頭)만 던진 것 같다고 여겼는지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크고 넓게 이야기하진 않겠소. 주제가 거창하면 그 방법이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오. 안 그렇소?”
조금 어려운 이야기라서 그저 ‘옳으신 말씀입니다.’하고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탁 노인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대체로 사람의 한평생이란 세월로 따져서 70년에서 80년 정도가 된다고 하오. 우리 한국 사람은 이 세월 동안 한반도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늙어죽는 비슷한 인생을 살고 있소. 그것은 사랑이오. 사랑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민족, 국가, 가족, 친구, 애인 등등 그 대상에 따라 사랑의 형태가 달라지겠지만 사랑의 본질은 결국 마찬가지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서양종교의 말처럼,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오. 바로 상대를 편하게 해주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소. 민족반역자. 친일매국노란 남을 사랑할 줄을 몰라서, 그 영악한 지식으로 빚어진 것들을 취해 혼자만 살려고 했던 것이오. 무식한 사람보다 배운 사람이 민족을 배만하거나 악한 마음을 갖게 되면 배운 만큼 더 악하게 되는 것이오.
지식인들의 반역을 용서하면 머리 좋은 지식인은 그것을 다시 이용하오. 지식인들이 민족을 배반하고 해방이 되니 그 좋은 머리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다시 교묘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오. 바로 이점이 문제요. 그러나 지금도 늦니 않소. 민족반역자들의 조상을 둔 후손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소. 내 조상이 민족 반역을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시인하고, 그래서 더욱더 나라를 위하여 노력하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오.
일본인들처럼 끝까지 역사를 왜곡하고 반성하지 않으면서 나리를 와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의 동상을 건립한다, 기념 사업회를 만든다 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소. 제 조상의 배덕의 산물인 재물과 배경을 선용하고, 우리와 함께 애국애족 운동에 나선다면 얼마나 좋겠소.
얼마 전 건국대학교 이사장으로 잇는 현승종 선생이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한다며, 일제 때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의 옷을 입고 싸운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 한다고 고백한 사실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았소. 친일 민족 반역자들이 이분과 같이 용기를 갖는다면 얼마나 좋겠소. 이분은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분이오. 참으로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이 병들어 있는 것 같소.
이런 분을 대학에서 물러가라, 퇴진하라 하면서 매도하고 있으니 정말로 친일을 한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려 하지 않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별 잘못도 없었던, 강제집행 된 일제 시대를 회고한 현승종 선생을 비웃을 것이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우리 민족은 한반도란 지역에서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깊은 뿌리의 영향을 받는 독특한 문화를 갖고 살아왔소. 오천년 동안 지속돼 온 힘의 원천은 민족을 사랑하는 선인(先人)들의 정신이었소. 그런데 일제시대,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이단아(異端兒) 무리가 생겨났던 것이오. 일종의 독버섯이오. 이른바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그들인데, 그들 역시 같은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지난 잘못을 엎드려 사좌하고, 민족에 동참할 때 우리 민족은 그들을 받아들일 것이오. 왜놈들은 복수를 미덕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민족은 용서를 최고의 가치로 알고 있기 때문이오. 선생.”
탁 노인은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친일 민족 반역자들이 왜 나쁜 줄 아시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본인들이 저지른 악행을 알아야하오. 1937년 12월 중국수도 난징(南京)의 학살 극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한 후 불과 몇 달 사이에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20만 명에서 35만 명을 살해했소. 산사람을 나무에 묶어놓고 총검술에 연습용으로 죽이고, 10만여 명의 부녀자들을 강간 살해했소.
무카이 도카시란 놈과 노다 다케시는 민간인 1백여 명의 목을 누가 먼저 베나 시합을 했소. 또 한 731부대의 악마들은 민간인들을 의학 실험용으로 사용해 죽였소. 임진왜란 때 왜놈들은 우리나라 인구 삼분의 일을 죽였소. 이들은 우리 선조들의 코나 귀를 베어 묶어 귀국하여 표창을 받았소. 악마가 아니면 도저히 상상도 못할 잔인의 극치가 아닐 수 없소.
이자들의 후손들은 그 더러운 재물을 유산으로 받아서 이 나라의 중추 세력이 되어 또다시 민족정기 말살과 부정부패 등 사회악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오. 따라서 일본도 우리를 깔보며 아무런 사죄도 없이 기고만장해 잇는 것이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소.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남의 잘못을 용서 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갖고 있소. 그들이 회개하고 지난 잘못을 뉘우칠 때 우리는 그들의 과오를 용서하고 같은 이웃으로 평화스럽게 지낼 용의가 있소. 그러나 용서란 먼저 회개가 전제돼야 하는 것이오. ‘
탁 노인은 말을 마치고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그것이 내겐 묻는 말처럼 들렸다.
“사람의 행복이란 무엇 인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소?”
“글쎄요.”
“내가 보기엔 이렇소. 우리들의 생각에 만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가면서 그들의 희로애락에 동참할 때, 우리는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어떤 든든함 같은 것을 느낄 때, 그것이 행복이 아니겠소? 그것이 가족이건, 친구이건, 안 그렇소? 때문에 민족반역자에겐 철학이 없소. 평범하고 무식한 이 늙은이에게도 이런 철학이 있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소.”
탁 노인은 이 말을 끝으로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옥양목 두루마기를 입고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탁 노인의 뒷모습에서 김구 선생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김구 선생은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아이,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현대화란 기치아래 마음마저도 교만하고 방정맞아 저 혼자만 잘살면 그만 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이기적인 생각의 한가운데, 선생의 준엄한 말소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말씀은 이랬다.
“완전 독립된 나라를 세우고 인류가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인류가 서로 네요 내요 없이 사랑하며 살라.”
이 말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불경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을 살다간 많은 성인들이 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커다란 화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구 선생은 결국 이 말에 따라 평생을 살다간 우리민족의 성인(聖人)이 아닐 수 없었다.
김구 선생은 전 세계인을 사랑한 위인이며 성인이었다는 것이 이글을 마침에 있어서의 결론이다.
끝
⊙ 발표일자 : 1999년04월 ⊙ 작품장르 :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