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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세대주의의 역사 (http://www.wikiwand.com/en/Dispensationalism에서 인용) |
결국 고전적 세대주의는 이스라엘은 새 땅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교회는 새 하늘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철저한 이원론적 시각을 특징으로 한다. 다윗왕조의 회복과 그로 말미암은 신정왕국의 등장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영원한 왕국의 의미로 본 것으로 이는 인간의 영원한 최종상태를 이중 구조적으로 이해한 것이다.30)
b. 수정(revised) 세대주의 또는 본질적(essentialist) 세대주의
오늘날 세대주의의 주류를 이루는 신학이며 여기에는 개정판 스코필드 관주성경(Revised Scofield Reference Bible, 1967), 찰스 라이리(Charles Ryrie), 존 왈부드(John F. Walvoord), 펜티코스트(J. Dwight Pentecost), 맥클레인(Alva J. McClain) 등이 속한다. 중요한 특징은 첫째, “하나님의 두 백성” 개념을 사실상 포기해서 천상백성과 지상백성 사이의 영원한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과 교회가 누리게 될 영생이 그 질과 영역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 차이는 없다고 본다. 둘째, 이스라엘에 주어진 언약의 축복을 교회도 함께 누린다고 보면서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연속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셋째, 고전적 세대주의의 잦은 영해를 지양하면서 더 일관된 문자주의적 해석을 시도했다. 문자주의가 세대주의의 본질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넷째,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구분을 상당히 포기했고 심지어 이들이 서로 교호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31) 다섯째,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를 인정하는 추세이며 맥클레인 등은 여전히 이것을 전적인 미래의 일로 생각한다.32)
비록 이들이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 심지어 동의어로 보기도 한다 - 이스라엘과 교회가 영원한 최종상태에서는 결국 구분되지 않고 연합된다고 보지만, 여전히 구약 예언을 이 땅에서의 다윗왕권의 회복으로 보며 교회의 환난전 휴거설을 주장하는 등 고전적 세대주의에서 많이 벗어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33)
c. 점진적(진보적, progressive) 세대주의
1980-1990년대에 언약신학이나 역사적 전천년주의에 보다 가까워진 형태의 새로운 세대주의가 생겨났고 이들은 전통적 세대주의자들로부터 비세대주의(non-dispensationalism)라는 비판도 듣는다. 여기에는 사우스웨스턴의 크레이그 블레이싱(Craig Blaising), 달라스신학교의 대럴 박(Darrell Bock), 탈봇신학대학원의 소시(Robert Saucy)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특징은 첫째, 각 세대 간의 구별은 인정하면서도 그들 간의 점진적인 연속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세대의 갯수도 7개가 아니라 3~4개 정도로 나누는데, 모든 세대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 실현되는 영원한 왕국을 향해 점진(progress)한다고 본다. 따라서 현 교회(은혜) 시대는 이전과 이후 시대의 key(또는 vital) link 역할을 한다. 둘째, 구약 예언의 점진적 성취(fulfillment)를 주장한다. 즉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언약들이 현 세대에 성취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며, 메시아 왕국은 그리스도의 승천 때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물론 그 정치적-사회적 통치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현재 이미 영적통치 가운데 있다. 즉 ‘이미 그러나 아직’의 종말론적 구도를 따른다. 셋째, 구원론적으로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은 하나 서로 완전히 평행선을 긋는다고 보지 않으며, 교회를 삽입구 즉 하나님의 구속계획에 원래 없었던 또는 이차적인 계획으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이 없어질 것으로 본다.34) 넷째, 천년왕국과 영원한 왕국 사이에 더 큰 연속성을 부여한다. 블레이싱에 따르면 천년왕국과 영원한 왕국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만 있지 이들을 종류의 차이로 볼 수 없다. 즉 천년왕국을 과도기로 보는 것이다.35)
(3) 천년왕국과 관련된 종말의 사건들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 단계로 일어난다고 이해한다. 첫 단계는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인데 이 때 구약시대 성도들을 제외한 죽은 성도들의 부활, 살아있던 이방인과 유대인 성도들의 영화 그리고 이들의 휴거가 발생한다.36) 이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 7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벌인다.37)
이 7년 동안 다음의 사건들이 일어난다. (단 9:27)의 환난이 시작되는데 그 후반기가 소위 ‘대환난’이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한다. 지상 거민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임한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38)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며, 이들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이들을 통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계 7:9). 하지만 땅의 왕들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군대가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기 위해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킨다. 7년이 끝나면 그리스도가 교회와 함께 영광중에 지상에 재림하셔서 원수를 멸하시고 전쟁을 끝내신다. 살아있던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그리스도께 돌아와 구원을 받아 구약-신약의 예언이 성취된다. 마귀는 결박되고 무저갱에 던져져 천년 동안 인봉된다. 7년 환난 기간 중에 죽은 성도들은 이때 부활하는데 이들은 곧 시작되는 천년왕국에는 들어가지 않으며 하늘에서 휴거된 교회를 구성하는 부활/영화된 성도들과 합류하게 된다. 곧이어 살아있는 자들에 대한 이방인심판(마 25:31-46)과 유대인심판(겔 20:33-38)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양과 염소가 구분되어 각각 천년왕국에 참여하거나 영원한 불 속으로 던져진다.39)
이제 천년왕국이 시작된다. 역사적 전천년설과는 달리 세대주의 전천년설에선 천년왕국이 시작될 때 오직 구원받은 사람들만 지상에 남아있다. 이들은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대다수는 살다가 죽을 것이다. 인간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번영의 시대가 이루어진다. 예배는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그 제사는 속죄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기념제의 성격을 가질 것이다. 부활한 성도들은 천년왕국 기간 동안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된다. 지상에는 많은 자녀들이 새로 태어나는데 이들 대다수는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며 반역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천년이 끝날 때 사탄이 풀려나서 이들을 규합해 마지막 반란을 일으킬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궤멸되고 원수들은 멸망당하고 사탄은 불못에 던지운다. 천년이 끝나기 전에 이 기간 중 죽었던 성도들은 모두 부활할 것이고 천년이 끝나면 불신자들이 모두 부활하여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지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그 다음이 최종상태이다. 부활한 성도들이 거하던 하늘의 새 예루살렘은 ‘새 땅’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여기서도 구속받은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는 영원한 구분이 있다.40)
(4) 주요 쟁점
후크마가 그의 종말론 책의 한 장(章)을 온전히 세대주의 비평에 할애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41) 그 내용들 중 중요한 쟁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에 대해 하나님이 근본적이고 영속적인 다른 목표를 가지고 계시다고 주장한다. 즉 성경이 교회를 말할 때 육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스라엘에 대해 말할 때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믿는 이방인의 미래와 믿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분리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용어가 신약교회 전체를 상징하는 신약 본문이 하나 이상 있고(갈 6:15-16) 베드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묘사할 때 사용된 어휘들인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을 사용해서 이방인들이 중심이었던 신약교회를 지칭하였으며(벧전 2:9) “아브라함의 자손”도 기독교인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고(갈 3:28-29) 이는 시온과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히 12:22-24; 계 21:2).42)
둘째, 세대주의에선 구약이 지상에서의 천년왕국이 있을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고 말한다(사 65:17-25; 사 11:6-10; 겔 40-48장; 사 2:1-4). 하지만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그 본문들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최종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43)
셋째, 천년왕국 시대에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회복되어 돌아간다고 보는 세대주의의 시각은 주석학적 오류에 기인한다.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이 자기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예언(사 11:11-16; 렘 23:3,7-8)은 BC 6세기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귀환할 때 이미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많은 구약본문들은 이처럼 문자적 의미에서, 신약교회의 기적적인 탄생과 성장에 대한 비유적 의미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최종적인 “새 땅”에서 달성될 원형적 의미에서 그 성취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44)
넷째, 세대주의가 하나님 나라의 지연을 가르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예수님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주님을 거부해서 하나님 나라를 연기하셨다는 이론이 모순된 것은, 이미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이 성경에 분명히 나오고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마 12:28)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과 달리 지상에서 보좌에 오르려고 노력하셨던 분도 아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8:36). 세대주의적 가르침은 당대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그대로 받아들였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까 하는 의문을 일으킬 뿐이다.45)
다섯째, 세대주의자들은 각종 사회현상들에 대해 지나치게 요한계시록의 구체적인 종말사건들과 일치시키려는 “일간신문 접근방법(newspaper approach)”을 취하고 있다. 이는 요한계시록을 일종의 예언목록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마겟돈 전쟁으로 오판했던 여러 전쟁들은 더 이상 세계전쟁으로 확산되지 않고 끝났으며 이에 대해 세대주의자들은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46)
다. 후천년설 (postmillennialism)의 주장과 쟁점
(1) 천년왕국과 관련된 종말의 사건들
후천년설의 기본 개념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고 따라서 세계는 점점 기독교화될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서 신자의 수는 증가할 것이며 죄는 완전제거의 수준은 아니지만 점점 최소한으로 축소될 것이다. 인류의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분야는 점점 향상되고 부는 널리 공유되며 국가 간에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적 원리가 예외가 아니라 기준과 규칙으로 된 기독교화된 세계로 재림하실 것이다.47)
그런데 각론으로 들어가면 후천년설 내에 여러 이견들이 존재하는 것에 당황하게 된다. 우선 청교도들이나 19세기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속했던 ‘고전적인 후천년주의자’들은 (계 20:1-6)에 언급된 ‘천년’을 문자적인 기간으로 보는 반면 ‘현대의 후천년주의자’들은 천년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고전적인 후천년주의자들은 천년이 시작되는 시기가 현재가 아닌 가까운 미래이며 세상을 주님께로 돌리는 교회의 사명이 곧 완성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후천년주의자들은 우리가 이미 그 천년의 시기에 살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더 강한 낙관론을 보이고 있다.48)
천년왕국이 하늘의 왕국인지 지상의 왕국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즉 천년왕국이 교회시대 동안 사탄은 결박되고 하늘에서는 신자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개념이라는 벤자민 워필드와 로레인 뵈트너의 주장과는 달리 마셀러스 킥은 교회시대 동안의 사탄 결박은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할 사람들은 현재 지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주장한다. 킥의 이런 주장은 요한계시록 20장 6절의 ‘첫째 부활’을 지상에서 신자들이 거듭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었다.49) 사탄의 결박 시기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노먼 셰퍼드의 경우 첫째 부활을 신자들의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존재는 지상에서의 신자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킥과 같지만 사탄의 결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이라고 주장하였다.50)
마태복음 24장의 대환난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배교는 이미 지나갔다고 보는 것이 후천년설의 일반적 입장이다. 하지만 뵈트너는 요한계시록 20장 7-10절 말씀대로 주님의 재림 전에 ‘사탄의 놓임’ 즉 교회를 공격하는 제한된 악의 출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 기간은 짧을 것이고 결국 교회에 해악을 끼치지는 못할 것이다.51)
(롬 11:25-26)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의 독립적인 왕국적 회복으로 이해하지는 않지만 미래에 유대 민족의 대대적인 대규모 회심이 있을 것으로는 생각한다. (마 28:18-20)의 지상명령은 단순한 명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림하기 전까지 모든 민족에게 효과적으로 전도가 이루어질 것임에 대한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이해한다. (마 16:18)에 언급된 지옥의 문들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교회의 공격적이고 지속적인 선교를 세상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아울러 메시아의 보편적인 승리적 통치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은 아직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도 아니면서 그리스도 재림 이후의 통치를 말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민 14:21; 시 2:8; 22:27-29, 72; 사 2:2-4; 11:6-9, 65, 66; 렘 31:31-34; 슥 9:9이하; 13:1, 14:9). 따라서 이 본문들은 주님의 재림보다 앞서는 미래의 사건(천년왕국)으로 이해한다.52)
(눅 17:20-21)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대격변적이고 비연속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하는 전천년설에 대한 반대증거로 취한다. 이 말씀은 ‘지금’ 자라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때에’ 온전하게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강한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 13:33)의 천국에 대한 누룩 비유도 하나님 나라의 지속적이고 우주적인 확장을 말한다고 본다. 따라서 세상의 타락과 악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다고 하는 전천년설의 패배주의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성경의 위대한 약속들은 간혹 좌절을 겪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도 있겠지만 교회는 결국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53)
(3) 주요 쟁점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여러 공통점이 있다. 첫째, 천년왕국을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보좌에 앉으셔서 지상을 가시적으로 통치하시는 기간으로 보지 않고 둘째, ‘천년’을 문자적으로 정확히 1,000년으로 보지 않으며 셋째,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후에 이루어질 사건으로 믿는다는 것이다.54) 일반적으로 후천년설이 가지는 쟁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메시아의 ‘땅 위에서의’ 승리적 통치를 예언하는 구약성경 본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을 가리킨다는 후천년설의 주장에 대해서 전천년주의자들은 이 본문들이 재림 이후의 통치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천년주의자들은 우리의 최종 상태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고려한다면 구약 예언들은 과도기적인 지상왕국이 아니라 충분히 새 땅 위에서의 영광스러운 통치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55)
둘째, 일부 후천년주의자들이 대환난(마 24장)과 배교(살후 2장)를 과거에 이미 지나간 일로 취급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마태복음 24장의 감람산강화는 예루살렘 파괴와 세상 끝의 사건들을 모두 다루는 것이고, 특히 그리스도가 강조한 환난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마 24:21)을 엄청난 규모의 환난인데 과연 그런 환난이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언제 있었느냐는 것이다.56) 이에 대해서 후천년주의자들은, 마태복음 24장은 ‘성전이 언제 파괴될 것인가’하는 질문(마 24:1-2)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진 것이었고 따라서 마태복음 24장의 예언은 66-70년에 있었던 유대-로마 전쟁으로 다 끝났다고 말한다. 이 전쟁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 24:34)는 약속으로 마무리되는 것도 그들에게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일부 후천년주의자들은 마태복음 24장의 예언이 과거가 아닌 미래의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세상이 지속적으로 더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않지는 않다.57)
셋째, (계 20:1-6)은 후천년설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워필드와 뵈트너는 교회시대 동안 사탄이 결박되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고 있다는 무천년설의 해석을 수용하면서도 굳이 미래의 지상에서의 천년 황금기를 따로 상정하는데 그 근거가 미약하다. 마셀러스 킥이 지상의 성도들이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자들이라고 말한 주장은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계 20:4)”과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5절)”는 구절과 모순된다. 사탄의 결박이 아직 미래의 일이라는 셰퍼드 교수의 주장도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천년과 또 다른 기간으로서의 천년을 상정하는 것이므로 모순된다. 본문에 네 번 나오는 ‘천년’ 중 두 번이 “그 천년(ta cilia eth)”인 것은 이들이 동일한 기간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58)
넷째,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 그들이 재림 전에 천년이라는 평화와 번영의 시간을 기대했다는 건 모순된다.59)
다섯째, 경험적으로 보면 세계사는 결코 기독교의 일방적인 득세와 결박 수준의 사탄 세력의 극적인 약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와 악의 세력 간에는 언제나 긴장이 존재해 왔다. 재림 이전에 악이 ‘무시할 만한 비율로 줄어들’ 것이라는 후천년주의자들의 가정은 역사에 대한 지나치게 낭만적인 단순화에 불과하다.60) 이전 세기에는 기독교가 전진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다는 분명한 조짐이 있었고 따라서 당시의 복음주의자들이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졌던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 관점을 유지할 수는 없다.
이런 공격에 대해 후천년주의자들은 기독교가 20세기에 일련의 퇴보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세계 기독교화에 대한 낙관론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 근거는 첫째, 겨자씨의 지속적인 성장은 주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지 인간의 능력이나 세상의 현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의 퇴보로 보이는 현상들은 부분적인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며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기독교는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20세기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과 기근, 기아, 질병의 창궐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인류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인권과 평화와 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61) 수십 년 이내에 미전도종족의 전도는 완성될 것이며, 이슬람의 도전이 거세다고 하지만 기독교는 과거에 이방 종교의 영향력이 거대했던 ‘2/3세계’ 지역에서 분명히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62)
라. 무천년설 (amillennialism)의 주장과 쟁점
(1) 천년왕국과 관련된 종말의 사건들
무천년설63)은 문자적인 지상의 천년왕국을 부인하며 한 차례의 부활과 한 번의 재림을 주장한다. 따라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천년왕국설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계 20:1-6)에 나오는 ‘천년’과 여러 종말 사건들을 문자가 아닌 상징으로 이해한다. 천년 동안의 사탄의 결박에 대해서도 미래에 그런 문자적인 시간이 따로 온다고 믿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기간 동안 즉 현재 그 효력이 발생하고 있다고 본다. 천년왕국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지금 죽어있는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고 있는, 즉 현재 실현 중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임할 영광스러운 완전한 나라를 고대하면서도, 현재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말씀과 성령으로 친히 자기 백성을 이 땅에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 땅에 현존한다고 믿는다. 즉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 종말론을 모두 취한다.64)
‘시대의 표적’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계속 있어왔고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 강화될 것이며 인격적인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점점 심해지는 환난과 배교가 예상된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회심하는 일은 재림 전에 완성될 것으로 본다. 주님의 재림 시에 신자-불신자의 부활이 한 번에 일어날 것이며, 아직 살아있는 신자들의 몸은 변화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고, 죽었다가 부활한 신자와 살아있다가 영화롭게 된 신자들은 모두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 이 ‘휴거’ 사건이 있은 뒤 그리스도는 땅으로 강림하시고 최후의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그 후 신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복을, 불신자들은 영벌에 처해질 것이다.65)
부활사건에 있어서 전천년설이 성도의 부활과 불신자의 부활을 무려 천년의 시간간격을 두고 벌려놓은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이는 요한계시록 20장 이외의 본문에서 시간적으로 구별되는 두 개의 부활을 암시하는 본문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요 5:28-29)이나 바울의 언급(행 24:15)에서는 의인과 악인을 포함하는 미래의 한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말한다. 바울은 종말의 시간에 보상과 처벌이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고(살후 1:5-10) 종말에 대한 베드로의 글에도 천년의 시간은 언급되지 않는다(벧후 3:10).66)
(2) 주요 쟁점
첫째, 무천년설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문자적인 해석은 거의 취하지 않고 상징으로만 해석하는데 이는 성경을 영해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위험성은 요한계시록 20장뿐만 아니라 구약의 많은 예언들에도 적용된다. 이에 대해 무천년주의자들은 어차피 누구나 성경에서 문자로 취할 부분과 상징으로 취할 부분을 구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문자와 상징을 구분할 정당한 권위와 이유는 누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67)
둘째, 무천년설이 취하는 상징적 해석의 태도는 실재에 대한 이해나 믿음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도 지나치게 하나님의 통치 측면만 강조하다가 그 시간성, 장소성에 대해 상징성만 강조하면서 초자연적 세계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질 가능성이 있다. 장소 없는 통치가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소위 “천국기억상실증”은 비단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대한 경고만이 아니다. 무천년설의 상징적 해석 태도도 너무 지나치면 성경의 분명한 문자적인 의미마저 무시해버리게 될 위험성이 있다.68)
셋째, 무천년설의 내용이 주로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에 대한 논박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자기 주장이 없이 다른 주장들을 부정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일리 있는 지적이기는 하지만, 전쳔년설과 후천년설이 문자적 천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상징적 천년을 주장하는 무천년설로서는 앞의 두 주장을 논박하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사실이다.69)
마. 천년왕국론의 역사적 흐름
초기의 속사도 시대의 교부들이 어떤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레고리 보이드는 비록 교회의 휴거에 대한 이해가 불분명하기는 했지만 이들이 일반적으로 전천년설을 주장했다고 이해하며 여기에는 저스틴 마터,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락탄티우스(240~320) 등이 포함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1세기 사도들의 입장도 전천년설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해준다.70) 하지만 후천년주의자인 케네스 젠트리 주니어는 전천년설은 초대교회 내에서 매우 미약한 이론이었으며 오히려 후천년설이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260~340)나 심지어 오리게네스(185~254) 등 많은 초기 교부들의 주요한 이론이었다고 주장한다.71)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 속에는 두 개의 부활이나 두 번의 재림을 지지하는 표현이 없으므로 전천년설보다는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에 좀 더 가까운 것이라고 이해되기도 한다.72) 그리고 초대교회에도 무천년설은 존재했으며 특히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가장 간단한 종말 시나리오를 제공하는 무천년설이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 가장 일반적으로 주장된 입장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무천년설이라는 용어는 매우 최근인 1930년대 정도부터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73)
후천년설은 중세 시대에도 지속적 관심을 받았으나74) 종교개혁 이후 17~19세기 청교도들에 의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토마스 브라이트만(1562~1607)이 쓴 『계시 중의 계시』(A Revelation of the Revelation)는 아우구스티누스 천년왕국론의 영국적 해석으로도 평가되는 중요한 서적이었으며 그는 후천년설의 현대적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적인 후천년주의자들로는 사무엘 러더포드, 존 오웬, 필립 스패너, 웨슬리 형제들, 조나단 에드워즈 등이 거론되며, 존 칼빈도 초기 후천년주의자로 볼 수 있다고 케네스는 주장한다.75) 청교도들의 후천년설과는 달리 19~20세기의 “일반적인 후천년설”에선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을 포기하고 현재 교회시대가 곧 비문자적인 의미에서의 후천년 상태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여기엔 윌리엄 케리, B. 워필드, J. 메이첸, 존 머리, 로레인 뵈트너 등이 포함된다.76) 한편 1960년 이후로는 “신율”이 강조된 “기독교 재건주의(Christian Reconstructionism)”가 발흥하게 되고 특히 그 일종인 “신율적 후천년설(theocracy millennialism)”은 청교도들의 사회정치적 관심과 현대의 진보적 점진주의가 합쳐진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복음전파와 사회정의 모두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신율적 후천년주의자들이 심지어 기독교 판사들이 모세의 시민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선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77)
그런데 교회사의 초기를 제외하고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전천년주의는 무천년주의와 후천년주의의 인기를 뚫고 19세기 이후 다시 ‘재등장’한다. 실제로 미국 개신교 신학자들 중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각각 60% 이상과 20%에 이른다고 최근에 보고된 바 있다.78) 여기에 대한 설명으로 세대주의자 크레이그 블레이싱은 첫째, 서구 기독교 국가들이 곧 천년왕국이었다는 주장들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둘째, 성경 종말론 특히 요한계시록 20장에 대한 문자적 이해의 가능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79) 앞의 내용은 후천년설에 대한 반성이고 뒤의 내용은 무천년설에 대한 반성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블레이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문자적의미를 강조하게 된 것이 전쳔년설의 재발견을 위한 길을 열어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무천년주의자 로버트 스트림플은 이는 근거없는 말이라고 잘라 말한다. 루터나 칼빈은 전천년주의자들이 아니었고 특히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3권 25장 5절에서 “천년왕국론자들의 오류”에 대해 말하면서 그들의 논리는 너무 유치하고 반박의 필요성도 못 느낀다고 비판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세대주의자들같은 ‘문자주의자’가 아니었고 성경 본문 속에서 그 참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스트림플의 주장이다.80)
바. 천년왕국론의 근본적인 쟁점과 실천적 함의
천년왕국론 논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연원을 따지기는 어렵다. 다만 19세기의 다비 이후 20세기 중반 들어 세대주의와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면서 이 논쟁이 뜨거워졌던 것으로 추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어쨌든 각 천년왕국론들은 좁히기 힘든 여러 쟁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쟁점들을 정리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계 20:1-6)에 대한 해석학적 문제이다. 여기에는 ‘천년’을 문자로 볼 것인지 상징으로 볼 것인지, ‘ezhsan’을 죽은 자의 부활로 볼 것인지 영적인 거듭남으로 볼 것인지, 천년왕국을 지상의 왕국으로 볼 것인지 천상의 통치로 볼 것인지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전체구조를 ‘반복’으로 볼 것인지 ‘순서’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 같은 것들이 있다.81)일반적으로 무천년주의자들은 ‘반복’의 입장인데 대표적인 예는 윌리엄 헨드릭슨이 제안한 점진적 평행법(progressive parallelism)이다. 이는 요한계시록이 서로 평행관계에 있는 일곱 단락으로 이루어지며 각 단락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묘사하면서 조금씩 종말론적 진전을 보인다는 주장으로 후크마 등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82) 하지만 블레이싱 등의 전천년주의자들은 전체를 하나의 통합된 순서로 이해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19장이 미래에 일어날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한 것이라면 당연히 20장은 재림 이후의 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해석의 대표주자는 반 우닉(W. C. van Unnik)으로 그는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 1:19)는 구절을 근거로 요한계시록을 과거(1:9-16), 현재(2-3장), 미래(4-22장)의 연대기적인 책으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후반부에도 현재와 미래의 사건들이 뒤섞여있음이 사실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는 반론이 제기된다.83)
둘째,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문제이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상정하는 천년왕국은 사실상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지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들에겐 하나님 앞에서 육적 이스라엘이 주연이고 영적 이스라엘은 조연에 불과하다. 역사적 전천년설도 그리스도의 재림 때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구별되는 그룹을 형성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후천년과 무천년설에도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회개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강조되고 있지는 않다. 특히 고전적인 청교도 후천년주의자들에 비해 근래의 일반적인 후천년주의자들은 아예 유대인들의 회개를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에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단서들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만큼, 앞으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과 관련되어 비(非) 세대주의적 접근을 통한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각 천년왕국론들의 주석학적 논의도 중요하지만 복음주의 진영에서 더 실제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각 주장들이 담고 있는 역사관과 그에 연결된 실천적 함의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후천년설은 낙관주의, 전천년설은 비관주의 그리고 무천년설은 현실주의로 귀결된다.
첫째, 후천년설은 교회가 계속 확장되며 세상은 점점 기독교화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확장의 주된 도구로 쓰임 받을 것이므로 각 성도들과 교회들은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에서 제공하지 못하는 방식의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즉 개인전도에만 드려지지 않고 19세기 후천년주의자들처럼 사회구조변혁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여기에는 인종차별, 남성우월주의, 기아와 무주택 문제 등 모든 형태의 사회구조적 문제들이 포함된다. 선교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후천년설은 전천년설에 비해 나름의 장점을 가진다. 즉 전천년설은 불신자들에 대한 복음전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선에서 ‘만족’하고 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어차피 성도들만 휴거되고 불신자들은 뒤에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살전 4:17)에 대한 극단적인 이기적 해석이다. 따라서 개인전도나 사회전도의 측면 모두에서 후천년설적인 종말론이 좀 더 복음적이고 실천적인 함의를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84)
실제로 현대의 기독교 사회참여 같은 이슈들은 청교도들과 같이 후천년설에 깊이 경도된 교단들에 의해 많이 촉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후천년설은 또한 우리가 승리적 교회(church triumphant)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 더욱 열심히 전투적 교회(church militant)로 살아야 함을 일깨워준다. 아울러 우리의 확신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역사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우주적 전투에서 결국 승리를 얻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85)
둘째, 전천년주의자들은 오늘날의 시대상황이 점점 기독교의 이상에서 멀어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슬람의 교세는 세계 주요 종교들 중에 가장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고 미국을 비롯해 기독교 문화가 꽃피웠던 많은 서방국가들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어가고 다원주의가 새로운 복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이런 풍조는 현재 우리가 천년왕국에 살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후천년주의자들에게는 특히 불리한 것이다. ‘고삐 풀린’ 후천년설의 낙관주의는 맹목적인 유토피아 사상으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협동한다고는 하지만 역사를 만들어가고 결정해가는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다는 착각을 가져올 위험성도 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이에 강한 제동을 걸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세계 질서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 간에 근본적인 불연속성과 상호대립성이 있음을 강조한다.86)
따라서 전천년주의자들에게는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마지막 때에 한 명이라도 더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한다는 믿음이 있었고, 한국에 온 1세대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전도도 이들 대부분이 스코필드-무디의 영향을 받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87)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올수록 세상은 점점 어두워가고 악이 세력을 넓혀갈 것이라는 전천년설의 사상은 전천년설이 재발견되고 힘을 얻어가던 20세기 복음주의권이 개인전도에는 열심을 내었지만 사회를 변혁하는 데는 무관심했던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는 지적도 있다.88)
셋째, 무천년설은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의 입장들이 지닌 정신에는 동의하면서도 결국 둘 다 거부하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 결과는 현실주의적 세계관이다. 방종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는 후천년설의 낙관주의나 절망과 포기로 이어질 수도 있는 전천년설의 비관주의를 모두 배격한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속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주어지지만 동시에 인간의 협력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따라서 무천년설 하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서 지상의 왕국으로 도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언제나 현실적인 기대 속에 머물러 있게 된다.89) 하지만 문자주의에 치중한 전천년설와 문자와 상징을 모두 취한 후천년설에 비해 묵시록의 예언들을 상징으로만 이해하는 무천년설은 자칫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성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결 론
종말론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세부 주제들에 대한 충분한 신학적 결론이 내려져 있지 않으며 여러 해석학적 시각에 따라 각 종말론적 사건들이 시간 순서에 따라 단선적으로 배열된 수준에 머물러 있다.90) 그것은 그만큼 종말의 사건들에 대해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많은 학자들, 예를 들어 G. E. 래드와 같은 학자는 왜 자신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래드는 천년왕국 이론에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들이 있고 신학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들 위에 복음주의적 신학(evangelical theology)을 정립해야만 한다는 당위적 차원에서 자신이 전천년주의자라고 밝히는 것이라고 말한다.91) 래드는 신약주석학자로서 자신의 주석학적인 결론이 전천년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말을 살아가는 신학자가 성경의 ‘충분한’ 주석을 바탕으로 래드처럼 천년왕국론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꼭 분명히 밝혀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모호한 부분은 모호한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반드시 비겁한 신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년왕국론이 지금 당장 교회나 신학계의 중요한 이슈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는 신학적인 최종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첫째, 시한부 종말론을 비롯한 많은 비성경적인 종말론이 일으켰던 부정적인 여파로 인해 종말의 사건들을 논하는 일 자체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고
둘째, 더 이상 거리를 좁힐 수 없는 교리 싸움 때문에 각 진영에서 서로 지쳐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자신들의 교단이나 자라온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자기 주장에서 거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서로에 대해 비성경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 열린 마음으로 성경 해석학에 노력을 기울이고 상대의 말에 더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조잡하고 오류가 많다는 지적을 들어왔던 세대주의 진영에서 보이는 종말론적 변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대주의 신학은, 현재의 교회 시대(세대)를 이전 세대와 천년왕국 세대 사이에 ‘삽입’된 것으로 보았던 고전적(classical) 세대주의에서 1950년대부터 시작된 수정(revised) 세대주의를 거쳐 1980년대 이후엔 교회 시대가 그 앞뒤 시대의 ‘vital link’ 역할을 한다고 보는 점진적(progressive) 세대주의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열린 입장을 취하며 변모하고 있다.92) 마지막의 점진적 세대주의는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에 의해 비세대주의(non-dispensationalism)라는 오명을 들을 정도로 많이 진보한 신학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해석학적 괴리가 파격적으로 더 이상 좁아질 것이라고 예상되지는 않는다. 사실, 나중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같은 최후 종말사건들이 실행될 때, 그 때 우리가 어떤 천년왕국론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나 하나님의 역사에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종말에 대한 우리의 준비자세에 있어서도 각 주장이 유의미한 차이를 가져온다고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격렬하게 논쟁을 벌일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그 중에 무엇이 맞았는지를 나중에 확인해보면 될 일이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현재로서는 각 천년왕국론의 해석학적 문제보다는 그 실천적 함의에 더 무게를 둘 것을 제안한다. 즉 신학체계로서의 ‘종말론’보다는 삶으로서의 ‘종말신앙’이 더 중요하다 할 것이다. 종말신앙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결국 복음전파와 사회적 책임의 구현에 있다.
구체적으로는,
교회 내에서는 전천년주의자처럼 살고
교회 밖에서는 후천년주의자처럼 살며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굳이 표현해야하는 상황에서는 무천년주의자처럼 행동할 것을 제안한다.
즉 교회에서는 세상에 희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믿음으로 간절히 주의 재림을 사모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위해 기도하고, 사회에서는 성령을 의뢰하면서 최선을 다해 개인구원과 사회변혁을 위해 힘쓰되 어떤 상황에서도 낙관적인 희망을 잃지 않으며, 신학적인 입장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육체의 부활, 최종 심판과 그 후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지옥형벌을 믿는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종말 시간표’에 대해서는 상징의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고 무천년설적인 표현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신학자라면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해석학적 혼돈 속에서 21세기 복음주의자들에게 수용 가능한 천년왕국론을 신학적으로 정립하고 제시하는 것은 대단히 지난한 작업이지만 계속 도전해야 한다. 그것은 니버의 표현대로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93)”에 속한 일일 지라도 종말을 사는 그리고 살게 도와줘야 하는 신학자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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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종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18. 「포스트모던 사상과 복음주의 신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8.
<미주>
1) 복음주의의 정의 문제는 ‘깨기 어려운 호두’에 비교될 정도로 복잡하다. 본 소논문에서는 한상화 교수가 주장한 당위적 또는 신학적 의미의 정의에 입각해서 개혁주의적 입장과 경건주의적 입장을 모두 포괄하면서 성경의 증거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본질을 수호하고 천명하는 기독교인들을 복음주의 진영으로 보았다. 한상화, 「포스트모던 사상과 복음주의 신학」(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8), 231-258.
2) 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종말론」, 이용중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7.
3)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가 모두 1세기에 성취되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들을 실현론자(preterist)라고 부른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육체 재림과 죽은 자들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고 성경의 묵시적 이미지들을 너무 과장하고 확대해석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Gregory A. Boyd, Paul R. Eddy, 「복음주의 신학 논쟁」, 박찬호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580-584.
4) Ibid., 478-479.
5) 정홍열, “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17권 (2000): 158.
6)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계 20:1-6)
7) “천년”이라는 말은 5절의 괄호 친 본문에 한 번 더 나오고, 7절에도 천년이 끝난 뒤에 사탄이 풀려난다는 말씀 속에 한 번 더 언급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20장에는 모두 6번의 “천년”이 언급된다고 볼 수 있다.
8) 그럼에도 대표적인 전천년주의자인 G. E. 래드는 ‘천년’이 엄격하게 1,000년은 아닐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G. E. Ladd,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 (Grand Rapids: Eerdmans, 1972), 262-263.
9) Gregory A. Boyd, 480-481.
10) G. E. Ladd, 35-38.
11) Ibid., 38-39.
12) 환난과 환란의 일반적인 용법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환난(患難)'은 [환ː난]으로 발음하며, 근심과 재난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환란(患亂)'은 [활ː란]으로 발음하며, 근심과 재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http://krdic.naver.com/rescript_detail.nhn?seq=2355, 2015년 10월 7일 검색. 개역개정성경은 tribulation, trouble, suffering, distress, affliction 등에 대해 ‘환난’으로만 번역하고 있으며 환란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13) Gregory A. Boyd, 584-589.
14) Anthony A. Hoekema, 255-256.
15) 역사적 전천년설은 세대주의가 광범위하게 대중화되는 가운데 G. E. 래드를 비롯하여 20세기 중반에 자신들을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이며 고전적인 세대주의와 구별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Kenneth L. Gentry Jr. et al, 「천년왕국이란 무엇인가」, 박승민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266.
16) Ibid., 258.
17) Gregory A. Boyd, 486-487.
18) 실제로 무천년설에선 ‘에제산’이 죽었던 영혼의 거듭남의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래드와 같은 전천년주의자들은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육체가 아닌 영혼의 생명과 관련되어 사용된 적절한 예가 없다고 주장한다.
19) Anthony A. Hoekema, 258-259.
20) Ibid., 259-260.
21) Ibid., 260-261.
22) Ibid., 261-262.
23) New Scofield Bible, p.3 n. 3.
24) 김동완, “세대주의 신학의 새로운 동향”, 「목회와신학」 1995년 2월호.
25) E. Schuyler English, A Companion to the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72), 97.
26) John F. Walvoord, The Millennial Kingdom (Findlay, Ohio: Dunham, 1958), 231.
27) 전통적(traditional) 세대주의라는 용어는 매우 혼란스럽다. 김동완은 고전적 세대주의의 동의어로 사용했고, 김성주는 고전적 세대주의와 수정 세대주의를 한꺼번에 이르는 말로 사용했으며, Wiipedia 에선 수정 세대주의의 동의어로 사용했다. 김동완, “세대주의 신학의 새로운 동향”; 김성주,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 「진리와 학문의 세계」 제24권 (2011): 85; https://en.wikipedia.org/wiki/Dispensationalist_theology #Traditional_dispensationalism, 2018년 11월 24일 검색.
28) 대부분의 세대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장을 교회의 시작으로 여기는 Acts 2 dispensationalist들이다. 그런데 교회의 시작을 사도행전 중간 즉 사도행전 9장이나 13장으로 보면서 물세례를 거부하는 소위 Mid-Acts dispensationalist들을 Hyper-dispensationalism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교회의 시작을 바울로부터 기원을 따진다는 점에서 자신들을 Pauline dispensationalism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더 극단적인 세대주의는 사도행전 28장의 바울의 선언(행 28:28)을 교회의 시작으로 보는 소위 Acts 28 dispensationalist들로 이런 신학을 Ultra-dispensationalism이라고 부르며 이들은 물세례와 성찬을 모두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며 거부한다. 두 극단적인 세대주의는 4복음서는 물론 각각 사도행전의 중간 또는 마지막 장 이전에 쓰여진 바울 서신들도 모두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을 위해 쓰여진 성경으로 이해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Dispensationalist_ theology#Traditional_dispensationalism, 2018년 11월 24일 검색.
29) 김동완, “세대주의 신학의 새로운 동향”
30) 하지만 예수님은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신 것이다. 김성주,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 83-84.
31) 하지만 수정 세대주의자인 찰스 라이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고 교회시대가 끝나야 임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철저히 미래적인 사건으로 이해한다. 김성주,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 82.
32) 김동완, “세대주의 신학의 새로운 동향”
33) 김성주,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 84-85.
34) 수정 세대주의와 점진적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회원 중첩(membership overlap)” 현상이 있음을 시인한다. 여기에는 바울, 베드로, 요한 등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포함된다. https://en. wikipedia.org/wiki/Dispensationalist_theology #Traditional_dispensationalism, 2018년 11월 24일 검색.
35) 김동완, “세대주의 신학의 새로운 동향”
36) 세대주의자들은 대환난 시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준비시키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세대주의자들은 ‘환난 전 휴거’ 즉 도둑처럼 임하는 갑작스런 재림을 믿는다. Dwight Pentecost, 「세대주의 종말론」, 임병일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276.
37) 세대주의자들은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단 9:24-27) 중 69이레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 성취되었고 마지막 70번째 이레가 재림 때 성취될 것으로 예상한다.
38) (계 7:3-8)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의 인침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한다.
39) Anthony A. Hoekema, 267-268.
40) Ibid., 268-270.
41) 후크마는 세대주의가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류성, 그리스도의 문자적 재림 그리고 모든 시대에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주장을 하는 것에는 높은 평가를 보내고 있다. Ibid., 271.
42) Ibid., 274-281.
43) Ibid., 281-286.
44) Ibid., 286-294.
45) Ibid., 294-297.
46) 김추성, 「요한계시록 새롭게 읽기 -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서울: 이레서원, 2015), 24-27.
47) Anthony A. Hoekema, 248-249.
48) Gregory A. Boyd, 487.
49) J. Marcellus Kik, Revelation Twenty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5), 33-37, 54-55, Anthony A. Hoekema, 249-250에서 재인용.
50) Norman Shepherd, “The Resurrections of Revelation 20,” in The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XXXVII, 1 (Fall, 1974), 34-43.
51) Loraine Boettner, The Millennium (Grand Rapids: Baker, 1958), 14, Anthony A. Hoekema, 249에서 재인용.
52) Anthony A. Hoekema, 250-251.
53) Gregory A. 489-491.
54) Anthony A. Hoekema, 247-248. 후크마의 이러한 견해로 보아 그가 취하는 후천년설의 전형적인 주장들이 주로 현대의 후천년주의 주장들인 것을 알 수 있다.
55) Ibid., 251-252.
56) Ibid., 252.
57) Gregory A. 497-498.
58) Anthony A. Hoekema, 252-4. 요한계시록 20장 1-7절까지 나오는 여섯 번의 “천년”의 원어를 보면, 2,4,6절은 “천년(a thousand years, auton cilia eth)”, 3,5,7절은 “그 천년(the thousand years, ta cilia eth)”이다. 따라서 7절에 나오는 사탄의 놓임은 “그 천년” 즉 6절에 나오는 천년왕국의 천년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59) Gregory A. Boyd, 503.
60) Anthony A. Hoekema, 254.
61) Gregory A. Boyd, 495-496.
62) 이전에 사용하던 ‘제3세계’라는 말이 지닌 차별적인 요소 때문에 지금은 세계 인구와 영토의 2/3를 차지하는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2/3세계’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고 있다. Gregory A. Boyd, 496.
63) 무천년설이라는 용어는 자칫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말하는 ‘천년’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실현된 천년왕국설(realized millennialism)로 대체해서 부르는 것이 좋다는 주장도 있다. Jay E. Adams, The Time is at Hand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70), 7-11, Anthony A. Hoekema, 246에서 재인용.
64) Anthony A. Hoekema, 245-247.
65) Ibid., 247.
66) Gregory A. Boyd, 499-501.
67) Ibid., 505.
68) 김추성, 「요한계시록 새롭게 읽기 -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서울: 이레서원, 2015), 60-67.
69) Gregory A. Boyd, 505-506.
70) Ibid., 484-485. 그런데 같은 책 p.485에서 “불행하게도 (초기 속사도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전천년설적인 견해를 어리석게도 물질적인 방향으로 밀고 나가서 천년왕국설이라 불리는 것을 만들어 내었다(Unfortunately, some pushed this premillennial perspective in a crassly materialistic direction, creating a version that came to be called chiliasm.)”고 했는데 이는 부정확한 기술로 생각된다. 헬라어 chilia는 숫자 1,000을 의미하며 따라서 chiliasm은 millennialism 또는 millenarianism 과 같이 천년기설, 천년왕국설, 천년지복설 등의 뜻을 가진다. 어원적으로 분석해보면 millennialism은 ‘천’을 뜻하는 라틴어 miile와 ‘년’을 뜻하는 라틴어 annus가 합쳐진 millennium에서 온 말이고 millenarianism은 ‘천을 포함하는 or 천 단위’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millenarius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millenarianism은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millennialism은 기독교적인 특별한 형태의 millenarianism (a specific type of Christian millenarianism)으로 보기도 하고 이 경우 chiliasm과 동의어로 보기도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 Millenarianism, 2015년 10월 1일 검색. 따라서 본문은 chiliasm을 특별한 형태의 (전)천년왕국설인 것처럼 오해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71) Kenneth L. Gentry Jr. et al, 17-20. 케네스는 무천년설의 중요한 시조로 평가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미숙하나마 후천년설을 가르쳤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미숙한 후천년설’이 아니라 무천년설로 보는 것이 좀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72) Ibid., 17-18.
73) Ibid., 115.
74) 예를 들어 피오레의 요아킴(1145~1202)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Ibid., 20.
75) Ibid, 20-21.
76) 하지만 상식과는 다르게 자유주의적 후천년설은 존재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정의상, 후천년설은 천년 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자유주의자들이 종말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을 믿을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Ibid., 63.
77) Ibid., 22-25.
78) 이한수, “박형룡과 이광복의 역사적 전천년주의 종말론 신학에 대한 비교 연구”, 「총신대논총」, 제33권 (2014): 30의 3번 각주.
79) Kenneth L. Gentry Jr. et al, 252.
80) Ibid., 332.
81) 정홍열은 (계 20:1-10)에서 1-3절과 4-10절이 동일한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서술한 동일내용의 반복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전자는 하나님의 사자(천사)가 본 관점에서 그리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또한 “천년왕국”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기독론적 표현”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천년왕국을 상징적으로만 이해할 경우 “그(천년) 후에” 사탄이 잠시 풀려난다는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후에”라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가 아닌 단순한 연결사의 의미로만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영원히(천년이라는 상징적인 문자로 표기된) 이루어지는 것과 대비되어 사탄의 활동이 잠간에 불과한 것이라는 함의를 내포한다. 그리고 이런 해석의 근거로, (계 19:11-21)에만 “그리고”라는 단어가 35번이 등장하는데 이를 모두 시간적 순서로만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하고 반문한다. 정홍열, 「요한계시록과 함께 하는 말씀묵상」 (양평: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출판부, 2018), 216-220.
82) William Hendriksen, More than Conquerors, 2nd ed. (Grand Rapids: Baker, 1940), 22-64, 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종말론」, 이용중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309에서 재인용.
83) 김추성, 「요한계시록 새롭게 읽기 -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서울: 이레서원, 2015), 54-55.
84) Gregory A. Boyd, 493-494.
85) Stanley J. Grenz, 「조직신학: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 신옥수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870-871.
86) Stanley J. Grenz, 871.
87) 서보명, “미국의 묵시록 8. 미국의 세대주의 신학”, 「제3시대」 제94권 (2016):6-7.
88) Gregory A. Boyd, 488-489.
89) Stanley J. Grenz, 871-872.
90) 이런 불편한 현실은 종말론 전체를 관통하는 해석학적 원리의 부재 또는 그 미숙성에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종말론적 완성행동(eschaton)의 빛으로 각 종말론적 사건들(eschata)을 해석해야 한다. 모든 종말론적 사건들의 해석학적 원리의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없이 신약성경의 종말론적 사건들이 기술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정홍열, “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 159, 179.
91) G. E. Ladd, “Historic Premillennialism,” in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 ed. Robert G. Clouse, 40.
92) Kenneth L. Gentry Jr. et al, 260-285.
93) Reinhold Niebuhr, An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 Living Age edition (New York: Meridian, 1956), 97-123,
이수근 목사 /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