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을 표방한 의열단이 만들어졌던 곳이다. 김원봉 등은 1919년 11월 길림성 파호문 밖 반씨 집이었던 이곳에서 의열단을 창건했다. [사진가 권태균] |
의열단의 이념은 아나키즘이었지만 그 창립 배경에는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 항일투쟁 단체인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가 있었다. 1919년 2월 말 길림에서 여준·조소앙·김좌진 등은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이하 의군부)를 결성하는데, 의군부는
김원봉이 스물한 살의 나이로 의열단 의백(義伯·단장)으로 추대된 데는 군정사의 회계책임자였던 처삼촌 황상규(黃尙奎)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 의열단은 군정사의 물적 지원이 필요했고 군정사는 일제와 전면전을 벌이기 전까지 단기적 성과를 낼 직접 행동조직이 필요했다. 이런 양자의 필요성이 ‘천하의 정의의 일을 맹렬히 수행’할 의열단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군정사 대표로 임정 수립에 참여하러 상해로 갔던 조소앙은 이동녕·이시영 등과 1919년 4월 ‘급증하는 망명 청년들의 예기(銳氣)를 한 곳으로 응집’시킬 목적으로 상해 공동조계 내에 비밀리에 폭탄 제조 학습소 겸 권술(拳術)수련소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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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은 폭탄들을 우편국을 통해 안동현 중국세관에 있는 영국인 유스 포인 앞으로 발송했다. 안동현에서 이 폭탄을 인수받기로 한 곽재기(郭在驥)는 직접 국내로 잠입해 암살파괴계획을 주도할 인물이었다. 곽재기는 안동현에 가서 임정 외교차장 장건상(張建相)의 서한을 포인에게 보이고 무기가 든 소포를 찾았다. 안동현 원보상회의 이병철(李炳喆)이 의열단 연락기관이었는데, 그는 고량미 20가마니 속에 폭탄을 넣어 위장하고 경남 밀양의 미곡상 김병환(金<927C>煥)에게 보냈다.
2 대일항쟁기 때 부산경찰서 전경. 박재혁은 의열단원 곽재기 등을 체포한 부산경찰서를 응징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했다가 일제에 의해 사형당한다. |
그런데 경기도 경찰부가 밀정의 제보로 5월 8일께 밀양 김병환의 집을 급습해 폭탄 3개를 압수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의열단은 남은 13개의 폭탄으로 거사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거사 때 뿌릴 격문이 마련되지 못했고 일제가 비상 경계망을 펼치면서 폭탄의 서울 반입이 늦어졌다. 폭탄이 압수돼 긴장이 팽팽해진 상황에서 의열단은 1920년 6월 16일 서울 인사동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비밀 회합했는데 경기도경 김태석(金泰錫)이 일경을 이끌고 급습했다. 윤세주(尹世胄)·이성우·황상규·이낙준·김기득·김병환 등이 체포되고 전국 각지에서 검거 선풍이 일었는데, 김태석은 1919년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를 체포했던 그 친일 경찰이었다(운동의 시대⑥ 청년노인 강우규 의사).
곽재기가 부산 복성(福成)여관에서 체포된 것을 비롯해 부산에서도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 1년여에 걸친 살인적인 심문 끝에 1921년 6월 곽재기·이성우는 징역 8년, 황상규·윤세주·김기득·이낙준·신철휴 등은 징역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스물한 살 청년 윤세주는 검사의 구형에 “체포되지 않은 우리 동지들이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우리의 최후 목적을 도달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 1920년 8월 1일자 동아일보는 ‘직경 3촌(寸)의 대폭탄’이란 제목으로 “총독부를 파괴하려던 폭탄은 비상히 크고 최신식의 완전한 것”이라고 보도해 이것이 폭파되었을 경우를 상상하게 했다. 신한민보는 7년 후인 1928년 4월 5일자에 이성우의 석방 소식을 전하면서 “3·1 운동 이후 가장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했던 제1차 의열단, 즉 밀양폭탄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의열단 사건이 준 충격파는 컸다.
일제가 의열단원 대검거에 광분하던 1920년 9월 부산 출신의 의열단원 박재혁은 중국 고서(古書) 상인으로 위장해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부산으로 입국했다. 한 달 전 상해에서 박재혁은 김원봉과 곽재기 등 여러 명의 단원을 체포한 부산 경찰서를 타격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나선 길이었다. 박재혁은 배 위에서 김원봉에게 “허다한 수익은 기약할 수 있으나 그대 얼굴은 다시 보지 못하리라(可期許多收益/不可期再見君顔)”라는 편지를 쓰고 보내는 사람을 ‘와담(臥膽) 배(拜)’라고 적었다.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결행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마지막으로 적은 7언절구는 “열락선타지말고(熱落仙他地末古) 대마도로서간다(對馬島路徐看多)”라는 것인데, 자신의 이동 수단이 ‘연락선’이 아니며 ‘대마도’를 경유해 가는 것임을 보고한 것이다. 상해에서 헤어질 때 마지막임을 알았던 김원봉도 이 편지를 받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박재혁은 1920년 9월 14일 아침 중국 고서적상(古書籍商)으로 위장해 부산 경찰서장 면회를 청했다. 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가 나타나자 박재혁은 폭탄을 터뜨려 하시모토를 죽이고 자신도 큰 부상을 입었다. 박재혁은 제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지만 다시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박재혁은 ‘어찌 적의 손에 욕보기를 기다리겠는가’라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드디어 1921년 5월 10일 아사(餓死)했는데 일제는 폐병으로 병사했다고 달리 발표했다. 5월 14일 박재혁의 시신이 본가가 있는 부산으로 운구되었는데 부산 고관(古館)역에 도착했을 때 당시 신문은 “다수의 경관들이 출장해서 두려운 폭탄 범인의 시체까지 경계를 했다더라”고 전하고 있다.
과부의 몸으로 독자(獨子)를 키웠던 박재혁의 모친은 아들이 시신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정신을 잃었다. 12월 27일에는 밀양 출신의 의열단원 최수봉(崔壽鳳)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는데 불발이어서 인명은 살상되지 않았다. 부산 지방법원의 1심은 무기징역을 선고했으나 검사는 항소했고 대구 복심법원은 1921년 4월 사형을 선고했다. 의열단의 잇따른 공세에 겁먹은 일제는 인명살상이 없는 사건도 사형이란 야만적 수단으로 대응한 것인데, 최수봉은 그해 7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일제가 의열단에 가졌던 공포는 그만큼 큰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최수봉이 사형당한 지 두 달 후인 1921년 9월에는 드디어 총독부에 폭탄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