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9월 책 꾸러미 <깨물수록 색다른 맛이 나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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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책꾸러미
깨물수록 색다른 맛이 나는 시집
이수용 목록위원회 시·생활글 팀장
시·글모음 목록팀에서 평가를 위해 돌려가면서 시집들을 읽는데, 분명 읽었다고 내 손으로 쓴 이름이 있는데도 시간이 지나면 ‘내가 저 시집을 읽었던가?’ 가물가물 할 때가 있다. 모든 시집은 여러 편 낭독한 후에 평가를 시작하는데,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듣다보면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시들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아, 맞아! 저 시 생각나.”
이렇게 기억에 남아 있는 시들은 일단 좋은 점수를 받는다. 무언가 기억할 만한 것이 시 속에 있었다는 것이니까. 어린이도서연구회 목록에 추천되려면 여러 면에서 고려하는 평가 기준들이 있지만, 목록위원들끼리 웃으면서 정의한 추천 목록의 번외 기준은 ‘내 돈 주고 사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시집’이다. 또, 도서관목록으로 추천하는 시집은 ‘후원으로 운영하는 책돌이도서관에 둘 만한 시집’이다. 작은 돈이라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작은 도서관의 넓지 않은 서가에 둘 책이니 도서관 추천 도서를 정할 때도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평가 된 시집들 중 이번 책꾸러미는 ‘깨물수록 색다른 맛이 나는 어린이·청소년 시집’을 모아봤다. 책을 읽다보면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기운을 북돋아 주는 책들이 있다. 이런 시집들은 반복해서 읽어도 ‘이런 것도 있었던가?’ 하며 새로운 재미를 자꾸자꾸 발견하게 된다.
내 돈 주고 사서 선물하고 싶은 시집 몇 권을 모아 보았다.
《오줌이 온다》
김개미 시|박정섭 그림|토토북
김개미 시인은 개미다. 개미나 벌레가 하고 싶은 말을 사람의 말로 이야기 한다. 김개미는 아이다. 어른의 얼굴을 하고 아이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콕 찝어 대신 말해준다. 김개미는 어른이다. 항상 작은 것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귀가 큰 어른이다.
2013년에 첫 동시집 《어이없는 놈》이 나온 후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동시집이 한 권 씩 나왔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동시집이 나오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나올수록 더 좋아진다는 것이 더 놀랍다. 다음에 나오는 시집은 얼마나 좋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티나가 나무 뒤에서 오줌을 눈다 / 누가 오면 알려 달란다 // 발로 바닥을 긁고 있는데 / 내 앞으로 오줌이 온다 // … / 나 이제 티나랑 사귀게 되나? / 세상아, 이대로 멈춰라”
아이가 되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런 감성, 김개미 시인만의 특권이다.
어느 시 하나 버릴 것 없이 다 좋아서 꼭꼭 씹을 때마다 다른 맛을 준다. 무엇보다도 자기 마음을 잘 표현하기 어려운 저학년 아이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똥시집》
박정섭 글, 그림|사계절
“새 옷을 샀어 // 주름 하나 없는 / 깨끗한 옷인데 // 한 번 입고 / 구석에 휙 던져 놨더니 // 쭈글쭈글 / 할아버지 됐네 // 탁 탁 털어 보고 / 애써 달래 보아도 // 안 펴진다 / 안 펴져 // 죄송합니다 / 어르신”
<급노화> 시 전문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똥이 되어 나오듯, 박정섭 작가가 보고 느낀 일상들이 시로, 그림으로, 노래로 나온 ‘똥시집’이다. QR코드를 찍으면 직접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까지 들을 수 있다. 평소에 이렇게 노는구나 싶다. 게다가 보통 시 한 편에 그림 하나로 편집되는 다른 시집들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구성한 책이라 <노총각 아저씨>라는 시는 무려 8장에 걸쳐져 있다. 연의 구분도 내 마음대로 구성한 독특한 시집이다. 동시집의 새로운 한 장르를 만들어 낸 듯하다. 그런 면에서 박정섭 시인은 새로운 ‘동시길’을 개척한 동시계의 아이돌이라 할 만하다.
작가를 통과해서 나온 시들은 나풀나풀 가볍기만 할 것 같은데,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림을 즐기고 노래도 부르며 놀다가 어느 순간 진중한 생각을 하게 하는 시들이 들큼한 똥처럼 푸짐하게 담겨있다.
《착한 마녀의 일기》
송현섭 시|소윤경 그림|문학동네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오는 이 시집의 키워드 중 하나는 ‘공포’이다. 방학에 와 보니 지난번 키우던 토끼는 ○○○○다며 “이 녀석들도 겨울이면 두 배로 클거다. 하하하” 웃으시는 외할아버지 이야기는 분명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받는 느낌은 ‘공포’다. 그동안 동시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소재와, 사실적인 느낌들이 공포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일수도 있다. 올빼미가 사냥을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피 묻은 부리를 쓱쓱 닦으며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영상으로 보는 듯 사실적이라 읽는 순간 시에 쏙 빨려들어가서는 나도 모르게 뒤통수가 서늘해진다. 능청스러울 만큼 깔끔한 말투 때문에 책을 덮고 나면 그제서야 으스스한 기분이 들면서 공포영화를 보고 난 듯 가슴 한 쪽이 시원해지는 거다. 그러나 이 책을 ‘공포’라는 단어로 묶어두기에는 새로운 시각으로 본 세상이 너무도 재미나서 이 책이 가진 백가지 재미 중 한 가지일 뿐이라고 해두자. 이제까지 동시들에서는 맛보기 힘들었던 새로움을 잔뜩 장착한 시에 소윤경의 그림까지 더해서 가히 ‘걸작’이라 칭할만한 시집이다.
《탐정동아리 사건일지》
김현서 시|창비교육
공부로 압박하는 엄마와 나의 꿈을 인정해주지 않는 아빠 사이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중3이 되었는데, 웬걸 학교생활도 만만치가 않다. 시험 스트레스는 갈수록 높아지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답답한 이때 빅 사건이 하나 터진다. 규진이 태블릿PC가 없어진 것이다. 범인을 찾아 하나씩 단서를 맞춰가는 아이들을 따라 나도 같이 범인을 추적하며 읽게 되는데…. 누가 진짜 범인인지 궁금해하는 사이, 나는 분명 시집을 읽고 있는데,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 건 아닌지 착각을 할 정도다. 이렇게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시집이 있었던가? 결국 범인을 우리 손으로 잡기는 했지만 학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덜컹덜컹 굴러간다. 나의 사춘기는 계속 진행형이고, 부모님도 학교도 부조리한 환경까지 바뀐 것은 하나도 없지만, 우리 속을 알아주는 시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청소년들이 이 책을 만나면 기쁠 것 같다. ‘나’ 명섭이 뿐 아니라 혁수, 진철이와 진철이, 규진이, 복학생 형 이야기까지 하나씩 퍼즐 맞추듯이 엮어 나가다보면 ‘우리들’의 이야기가 잘 짜여진 소설 같은 재미를 준다.
《눈만 봐도 다 알아》
박찬세 시|창비교육
“나도 정말 졸리지만 잘 수가 없다 / 왜냐하면 오늘은 선생님한테 중요한 날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공부는 못해도 의리는 있는 놈들이다” <공개수업> 시 중에서 찬세는 수업시간에 잠만 자서 선생님이 수업료 말고 숙박료를 가져오라는 공고 학생이다. 그의 시에는 공구통, 발광 다이오드, 납땜, 당구장, PC방 이야기가 날것으로 들어있다.
시 몇 편만 읽어도 너무도 솔직하고, 고난을 유머로 극복하는 찬세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다. 보통 청소년시를 쓴다고 하면 청소년을 의식하지 않고 쓰기가 어려운데… 이건 그냥 청소년 자신이다. 어느 시집들보다 좀 놀아본(?) 청소년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열아홉 살 이후 마음이 늙지 않아 고생하고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딱 와 닿는다. 여자 친구 상옥이와의 밀고 당기는 달달한 이야기에 읽는 내 표정도 달콤해지기도 하지만 막막하게 앞이 보이지 않는 힘든 학교를 결국 자퇴하게 된다. 자퇴와 복학을 경험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철이 들려고 하는데, 철들기가 그리 쉬운가. 마지막 시의 마지막 구절의 “내 꿈은 그냥그냥 고양이다”라고 하는 아이의 말투는 사뭇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흔들려보지 않은 아이가 어떻게 흔들리는 아이들 마음을 알겠는가. 그렇게 흔들렸던 시인도 이렇게 반듯하게 잘 살고 있다는 삶의 희망을 청소년들에게 몸소 보여 주는 시집이다.
오늘 묶어 본 다섯 권의 시집은 시인이 화자 자신이 되어 쓴 시들이다. 어른이 쓴 어린이, 청소년 시라는 벽이 느껴지지 않아 마음껏 자유로워진다. 그런 시들은 독자에게도 날개를 달아주어 날아갈 수 있게 한다. 저학년 아이의 마음속으로, 시 똥을 싸는 작가 속으로, 시로 공포를 느껴보는 경험을, 탐정이 되어 범인을 찾아보고, 좀 놀아본 고등학생 찬세와 같이 과거든 현재든 어디든 날아갈 수 있다. 현실은 땅에 발이 붙어서 날아갈 수 없다면, 책이 달아주는 날개로 마음껏 날아보는 것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