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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무관학교생으로 부정부패를 척결하려다 사형선고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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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 군사부장을 맡아, 군사훈련에 주력하여 청산리 대첩의 원동력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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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부를 조직하여 외교부 위원장으로 일하며 성동사관학교에서 사관 양성에 진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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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독립운동가들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민족 유일당 운동은 조직방법론의 차이와 사상의 대립으로 실패하였으나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 되고 만주사변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새로운 활기를 띠게 되자 선생은 또 다시 좌우익 연합 전선을 추구하였으며, 그 결과 1932년 10월 12일 상해에서 한독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혁명당 등의 대표가 회합을 갖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은 강력한 통일정당을 조직할 필요성을 느끼고 1935년 7월 남경에서 민족 대동단결체로서 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하였으나, 투쟁방법론의 차이로 민족진영 즉 상해 한독당 계열의 인사와 신한독립당 계열인 선생과 홍진 등은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에 따라 정당의 이합집산이 성하고 실질적인 대일항전은 쇠약해지는 가운데 임시정부는 매우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국독립당 대표로 임시정부 외곽연합단체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 한편 동삼성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생은 1930년대 초반에는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1931년 12월 24일 제2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윤기섭․조완구․조소앙 등과 같이 임시의정원의원(경기도 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으며 1933년 2월 재선되었다가 동년 12월 25일 사임하였다. 1934년 1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었으나 약 1개월 뒤인 2월에 사임하고 말았으며 1935년 10월 임시정부 군무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을 겸임하였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던 1937년에는 주석 이동녕을 도와 군사정책을 강화해 갔으며 이동녕․이시영․김구․차리석․엄항섭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임시정부의 외곽 연합단체인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1938년 군사학 편찬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지청천․유동열․김학규 등과 함께 군사학을 편수 번역하였다. 1939년 10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중선되고 동월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동년 11월 임시정부군사 특파 단장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한국 광복군 설립의 기초를 착실히 닦았다. 그러한 가운데서 1939년 임시정부 기강 시대에는 독립운동 3개년 계획을 세우고 조직, 군사, 외교, 선전, 재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방략을 수립하였으며 선생은 군사관계를 담당하여 군사특파원으로 섬서성의 서안에 파견되어 공작임무를 수행하고 중국의 화북, 만주 방면에서 선전 초모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겨왔을 당시 선생은 민족진영의 정당인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을 통합하여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창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때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군무부장직을 수행하면서 당시 임시정부의 최우선 과제인 광복군 창설에 주력하여 1940년 9월 17일 마침내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1941년 대원수부의 막료로 군무부장에 선임되고 이어 최고 원수부의 판공처장(辦公處長)에 임명되었다.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임정의 숙원인 광복군을 창설하다 1942년 10월 25일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으며 중국측이 광복군의 발목을 묶는 9개 행동준승 폐기에 전력하여 이를 폐지하는데 기여 하였다.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임명되었던 선생은 1943년 2월 헌법개정에 의하여 다시 국무위원에 선임되어 대일전(對日戰)을 지도하였다. 1945년 5월 8일에는 임시의정원 제4과(군무교통) 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하던 중 8․15광복을 맞이 하였다. 동년 12월 임정요인들과 같이 환국,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1948년 10월 7일 서거,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공식 카페 이달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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