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주의 운동과 교회 부흥/ 로이드 존스/ 최정권
베빙턴에 의하면, 19세기 웨일스 부흥 운동은 1905년에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일어난 오순절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부흥은 아주사거리에서 일어났고,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 수 있었다.” 미국의 오순절교회는 은사주의 운동을 통해 광범위하게 성장해 나갔다. 그것은 영국 교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영국 교회가 쇠퇴하였기에 부흥을 일으킬 만한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가 생각할 때 영국 교회는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은사주의를 자연스럽게 목회 현장에 도입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주의는 영국 교회의 수적 감소 현장을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지만 올바른 해결책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은사주의는 언제나 감정주의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또한, 은사주의는 성령의 역사를 인간이 주도적으로 나타나게 할 수 있다는 교만함을 드러낸다.
1960년대에는 이미 런던을 포함한 영국 전역에 은사주의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로이드 존스는 은사주의 운동이 건전한 교리를 부정하는 체험 위주의 신앙으로 될 수 있다는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운동의 가르침은 성령 세례를 제외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간혹 자신들의 표준으로 삼기도 해지만, 대체로 성령 세례를 내세운다. 이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결국, 그것은 교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키지 않으면 아예 교리 없이 지낼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를 체험하는 일이다.”
로이드 존스는 은사주의 운동에서 연주하는 곡의 위험성까지 언급한다. 그 위험성은 인간이 성령의 역사를 조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관은 분명하다. 그는 부흥이란 인간의 노력이나 계획에 의해 시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특히 주도적인 성령의 역사에 따라 일어난다고 이해한다. 그는 『권위』라는 책에서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가 약동하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고 설명한다.
“성령의 권위가 우리에게 실제로 영향을 미칠 때 비로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사실이 되며 능력 있게 움직이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성령의 권위와 능력 아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성경과 주님에 대한 믿는 모든 것이 우리 사역에 적용될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은사주의 운동으로 인한 일시적인 부흥 운동 모습과 참된 부흥이 사라진 모습에 대한 이유로 올바른 신학의 퇴조, 신학교의 질 저하, 그리고 당대 부흥 운동을 주도한 목회자의 책임을 거론했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당시 미국 교회의 부흥 운동을 계획한 설교자 찰스 피니(1792-1875)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역설한다.
로이드 존스에게 부흥은 성령, 그 자체의 역사이며 반드시 성령은 설교자를 사용하신다는 뚜렷한 신학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목회 현장인 웨스트민스터교회에서 나타난 부흥도 성령께서 설교를 통해 일으키신 역사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웨스트민스터교회에 부흥의 증거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갖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로 찾아왔다. 회중 가운에는 의료계에서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었고, 의회 의원들도 회중석에 앉아 설교를 들었다. 또한, 전 세계에서 온 많은 학생이 예배에 참석했다. 왕실 직원들도 왔다. 참석자들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단지 숫자와 관계가 없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회심했다. 학생들은 사역과 선교지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 이외의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다.”
로이드 존스가 생각하는 부흥이란 관점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예배이다. 왜냐하면, 로이 존스가 생각하는 부흥은 예배 가운데 성령께서 설교를 통해 운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예배에서의 설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논한다.
“교회 예배와 관련해 우리가 다시금 붙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예배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예배 때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사람은 강단에 서지 말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한다. 목회의 낭만은 상황을 예측할 수도 있고 통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할 때는 그렇지 않다. 갑자기 예측하지 못한 요소가 끼어든다. 즉,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나 집단이 맛볼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러운 경험이다.”
- 최정권, 『로이드 존스의 설교신학』, PP 9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