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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
고대 로마의 정치가 겸 저술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동시대의 평가는 전체적으로 키케로에 대해 공정하지 않다.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키케로는 뛰어난 자질을 지닌 정치가이며 공공 관리였다. 매우 뛰어난 행정 능력이 있었으며, 모든 시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의 시대에서는 탁월한 웅변가였다. 정치가가 훌륭한 군인이기를 기대했던 사회에서 그는 출중한 민간인이었고, 이 때문에 그의 성공은 더 두드러진다. 그의 경력이 파멸로 끝났다는 사실과, 오랜 시기 동안 대사건에 방관자였다는 사실은, 재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원칙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다.”(안토니 에버릿)
무명 변호사에서 로마의 국부가 되기까지
키케로의 생애에 관해 비교적 잘 정리해 놓은 전기로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원제는 [비교 열전]인데, 그리스와 로마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유사점이 많은 사람들을 둘씩 짝지어 비교 서술했기 때문에 이런 제목이 붙었다)이 가장 먼저 손꼽힌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BC 106년에 로마 남부 아르피눔에서 태어났다. 아들과 같은 이름이었던 아버지 마르쿠스 툴리우스는 기사(에스퀘트) 계급(명문 귀족(파트리키)과 평민(플레브스) 사이에 해당하는 계급)의 사업가였고, 어머니 헬비아는 귀족 출신이었다.
라틴어에서 ‘키케르(cicer)’는 ‘병아리콩(이집트콩)’을 말하며, ‘키케로(Cicero)’라는 성(姓)은 코에 콩알 크기의 뾰루지가 달린 가문의 시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정계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친구들이 이름을 좀 더 근사하게 고치라고 조언하자, 키케로는 장차 자기 이름이 ‘스카우루스’나 ‘카툴루스’보다 더 유명해질 거라며 호언장담했다. 스카우르스는 “안짱다리”라는 뜻이고 카툴루스는 “강아지”라는 뜻이니, 그래도 키케로 정도면 비교적 준수한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이 글에서는 편의상 그의 이름을 ‘키케로’로 통일했다).
부유한 환경 덕분에 키케로는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워낙 명성을 날린 까닭에 심지어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학교로 구경하러 오기도 했다. BC 88년에 키케로는 그리스의 내란을 피해 로마로 온 아카데미아 학원의 수장이었던 철학자 필론을 만난다. 이듬해에 필론이 사망하기 때문에 둘의 만남은 짧게 끝났지만, 이때 접한 아카데미아 학파의 비판적인 사유 방식은 키케로의 평생에 걸쳐 사상적 기반이며 잣대가 되었다. 키케로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를 비롯해 당대에 유행하던 철학도 접했지만 어느 한쪽에 크게 경도되지는 않았다.
키케로의 생애는 로마의 역사에서도 공화정의 몰락과 제정의 탄생이 이루어진 중요한 시기에 걸쳐 있다. 학문적 재능뿐만 아니라 정치적 야심까지 있었던 그의 삶이 그리 순탄치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20대 때에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연이은 공포정치를 겪으며 온 로마가 몸살을 앓았다. 훗날 키케로가 공화정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한 원인도 이때의 경험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로마로 진출해 변호사가 된 키케로는 한 소송에서 술라의 해방노예가 저지른 범죄 사실을 증언했다가 이 유력자의 분노를 사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키케로는 잠시 로마를 벗어나 그리스로 여행을 떠난다. 아테네와 로도스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당대 최고의 철학자며 웅변가를 만나 학문을 전수받고 더욱 실력을 가다듬었기 때문에 사실상 유학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웅변 실력에 감탄한 어느 그리스인 스승이 “지금껏 우리 그리스가 자랑했던 학문과 웅변도 이제는 로마에 빼앗기게 되었다”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도 전한다. 로마로 돌아온 키케로는 뛰어난 언변을 지닌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고, 플루타르코스의 말마따나 “조금씩 명성을 얻게 된 것이 아니라, 한 번에 높이” 뛰어오르게 되었다.
키케로는 BC 75년에 재무관으로 선출되면서 처음 공직에 진출했다. 임지인 시칠리아에서 총독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정책으로 큰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로마로 돌아오자 자신의 업적 따위는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임을 깨닫고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즉 그때부터는 유력한 시민의 이름과 얼굴, 지인과 집 위치 등등의 주요 정보를 달달 외움으로써, 누구를 만나더라도 친근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최대한 대중 앞에 모습이며 활동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기 홍보에 열을 올렸다.
키케로는 BC 69년에 조영관, BC 67년에 법무관, BC 63년에는 드디어 집정관(콘술)에 당선되었다. 명문 귀족도 아니고, 금전이나 무력을 쓰지도 않은 까닭에 더욱 대단한 업적이었다. 출중한 능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정치 사정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일각에서는 키케로의 능력보다는 오히려 급진적인 개혁을 도모하는 또 다른 후보자 카틸리나의 대항마로서의 역할을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집정관 선거에서 떨어진 카틸리나는 무력 봉기를 획책했고,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키케로는 결국 음모자 가운데 5명을 즉결 처형하고 BC 62년에 카틸리나의 군대를 섬멸했다.
탄압과 망명, 내전을 겪고 은퇴 생활에 들어가기까지
카틸리나의 음모를 분쇄함으로써 키케로는 ‘국부(國父, Pater Patriae)’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하지만 이때의 일은 훗날 그의 경력에서 가장 큰 시련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로마에는 방종한 귀족 청년 클로디우스가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여신 제의에 몰래 들어갔다가 발각된 사건이 단연 화제였다. 그의 목적은 제의 장소인 집의 여주인과의 밀통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종교 범죄였기 때문에 결국 고발을 당했다. 그의 상대로 지목된 여성 폼페이아도 결국 이혼을 당했는데, “카이사르의 아내는 의혹조차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남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주장이었다.
재판에서 키케로가 불리한 증언을 했지만 클로디우스는 결국 무죄 방면되었고, 이때부터 둘 사이에 원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로마에서 가장 세력이 막강한 인물은 재산이 많은 크라수스와 무훈이 많은 폼페이우스였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떠오르는 별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에게 호감을 품고 그를 ‘공화정의 수호자’로 이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키케로의 진가를 일찌감치 눈치 챈 인물은 폼페이우스가 아니라 카이사르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카이사르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키케로는 끝까지 협조를 거부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비밀 협약에서 비롯된 삼두체제가 시작되면서 키케로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 유력자의 배후 조종으로 BC 58년에 호민관이 된 클로디우스는 카틸리나 사건에서 음모자를 처형한 키케로의 행위를 문제 삼아 그를 법정에 세우려 했다. 졸지에 키케로는 ‘국부’에서 ‘피의자’ 신분이 되었고, 카이사르며 폼페이우스까지 모조리 그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고립무원이 된 키케로는 궁리 끝에 로마에서 빠져나와 그리스의 테살로니카로 망명했다. 키케로가 로마를 떠난 직후, 클로디우스는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집을 불태웠다.
기고만장해진 클로디우스는 폼페이우스를 향해서도 공격을 일삼았고, 이에 분격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묵인과 원로원의 결의를 통해 클로디우스의 숙적 키케로를 로마로 다시 불러들였다. 16개월 만에 돌아온 키케로를 향해 로마 시민은 열광적인 찬사와 환영을 보냈다. BC 53년에 클로디우스가 피살되었고, 삼두정치의 기둥 가운데 하나인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서 전사했다. 키케로는 BC 51년에 실리시아(현재의 터키 남부)의 총독이 되어 카파도키아 지역을 안정시켰고, 이때에는 행정뿐만 아니라 군사 면에서도 혁혁한 업적을 세워서 실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키케로가 로마로 돌아온 직후부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대결이 본격화되었다. 키케로는 공화정의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보고 양쪽의 화해를 촉구했지만, BC 49년에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느 편에 가담해야 좋을지 정말 모르겠다.” 키케로는 고민했다 “폼페이우스는 명예롭고 떳떳한 이유로 싸우고 있고, 카이사르는 자기 자신과 민중을 구할 만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를 피해야 할지는 알겠지만, 누구를 편들어야 할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카이사르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키케로는 결국 폼페이우스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 측의 무력한 대처와 패배로 인해 지휘부에서 내분이 벌어지자, 키케로는 일행과 떨어져 있다가 카이사르와 대면했다. 카이사르는 관대하게도 키케로를 용서했으며 폼페이우스 편에 가담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내란이 종식되고 카이사르의 천하가 시작되자, 키케로는 정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칩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했다. 그 와중에 키케로는 아내와 이혼하고, 끔찍이 사랑했던 딸의 죽음을 겪으면서 심신이 피폐해졌다고 전한다.
카이사르의 암살과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그리고 키케로의 최후
BC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된다. 키케로는 암살 현장에서 원로원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았지만, 브루투스 일당의 음모에 애초부터 가담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카이사르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키케로는 이로써 로마가 다시 공화제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권력의 공백으로 인해 로마에서는 혼란이 거듭되었다. 키케로는 브루투스 쪽의 대의명분에 공감하고 종종 조언을 제공했으며, 카이사르의 부하였으며 이제 또 다른 막강한 권력자로 부상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공공연히 공격해 원한을 사게 되었다.
얼마 뒤, 키케로는 나폴리 인근에서 한 청년을 우연히 만난다. 훗날 그가 “아직 젊은이, 소년이라고 할 정도인 젊은이”라고 부른 이 청년이 바로 옥타비아누스, 즉 훗날의 아우구스투스였다. 일리리아에 머물던 옥타비아누스는 양부인 카이사르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로마로 가던 중이었다. 아직 입지가 불안했던 옥타비아누스는 서둘러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자신의 공식 호칭으로 삼는 한편, 키케로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조언과 도움을 요청했다. 키케로는 또 다른 카이사르를 경계하면서도, 의외로 이 청년의 역량을 과소평가했던 모양이다.
이미 60대였던 키케로는 명성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폼페이우스에서 카이사르에 이르는 여러 유력자가 하나하나 쓰러진 상황에서, 이제 유일한 원로 정치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본인의 영향력을 이용해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에 당선되도록 도와주었는데, 이는 역시나 개인적인 호의보다는 오히려 공화제로의 복귀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안토니우스를 견제하려는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이런 키케로의 바람을 저버리고 BC 43년에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와 함께 새로운 삼두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협정을 맺는다.
세 사람은 협정의 제물로 각자에게 중요한, 그러나 피차에게 부담스러운 사람을 하나씩 제거하기로 합의한다. 레피두스는 친동생을, 안토니우스는 외삼촌을,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를 제물로 바치기로 합의했다. 이 소식이 전해졌을 당시 키케로는 동생 퀸투스와 함께 투스쿨룸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해외로 피신하려는 계획을 채 성사시키기도 전에 나란히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병사들이 달려오는 것을 본 키케로는 가마에 탄 상태로 순순히 목을 내밀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칼을 맞고 사망하고 말았다.
복수심에 불타는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목과 오른손을 잘라 오라고 명령했고, 그 시신의 일부분을 공개적으로 전시해서 반대파에게 일종의 경고를 가했다. 이후의 역사는 익히 알려진 바대로다. BC 31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했고, BC 27년에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으면서 독재자가 되었으며, AD 2년에는 키케로에 이어 두 번째로 ‘국부’의 호칭을 받는다. 이로써 키케로가 열망했던 로마 공화정은 종말을 고하고 로마 제정이 시작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키케로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일화로 마무리한다.
“그 뒤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카이사르 2세[옥타비아누스]는 외손자를 보러 갔는데, 그 아이는 마침 키케로가 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기척이 나자 아이는 곧 그 책을 옷 속에 감추어 버렸다. 카이사르 2세는 그 책을 빼앗아 한참을 읽더니, 이렇게 말하면서 돌려주었다. ‘얘야! 이분은 뛰어난 연설가였고, 훌륭한 애국자였단다.’”
정치가, 웅변가, 철학자, 저술가로서의 키케로
플루타르코스의 표현에 따르면, 키케로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남을 시기하지 않고, 칭찬에 후했으며, 돈에 무관심했고, 어질고 너그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무엇보다도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종종 적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물론 단점도 있었으니,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빌리자면 “지나친 명예욕 때문에 현명한 판단을 흐리는 적도 적지 않았다.” 카틸리나의 음모를 분쇄하여 권력과 명예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도, 자신이 그 사건에서 한 역할을 너무 자랑해서 눈살을 찌푸린 사람이 많았다.
키케로의 정치적 업적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다. 공화정의 원칙에 충실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하던 체제를 수호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카이사르의 협조 요청을 거절하고, 우직하게 폼페이우스에게만 희망을 걸었던 키케로의 판단은 정치적 무능의 소산이라는 지적도 종종 나온다. 또한 키케로가 끝까지 옹호했던 공화정은 결국 원로원의 귀족정치일 뿐이고, 평민의 정치 참여나 권리 신장에는 반대하는 보수적 태도를 보였음을 고려해 보면, 결국 현상 유지에만 급급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리라.
키케로 하면 역시 웅변가로 더 유명하다. 당신은 변호사인데도 누군가를 구하기보다는 처벌받게 하는 일이 더 많았다고 누군가가 꼬집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내게는 웅변술보다는 진실이 더 많으니까요.”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키케로는 “재치 있고 날카로운 말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법정에 서서 변호를 하기에는 아주 적당했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서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해쳤으므로 잦은 원망을 듣기도 했다.” 빈정거리는 말 때문에 키케로는 종종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결국 그가 처참하게 죽은 까닭도 안토니우스를 향한 직설적인 공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웅변가보다는 철학자로 알려지기를 더 원했다. 자기 생애의 진짜 목표는 철학이며, 웅변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대중은 그를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뚜렷하고 독창적인 체계를 수립한 것까지는 아니어서 철학사에서는 의외로 비중이 크지 않다. 따라서 키케로의 철학 사상에 대해서는 절충주의자, 또는 회의주의자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반적으로는 스토아 철학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딱히 어떤 한 가지 입장을 신봉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저서로는 [수사학], [국가론], [법률론], [의무론], [최고선악론],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등이 유명하다. 당대 최고의 저술가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키케로는 자신이 그리스 철학 사상의 핵심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통속 저술가에 불과하다며 겸손을 드러냈다. 그렇게 보자면 그는 사상 최초이며 최고의 대중용 교양서 저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정치적 박해며 내란 등의 어려운 시기에 저술한 책이라는 점이 더욱 놀라움을 자아내는 키케로의 저서는 당대에는 물론이고 중세시대와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까지도 라틴어 문학의 전범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키케로는 또한 서한문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친구인 티투스 폼포니우스는 로마의 정치 분쟁을 피해 그리스에 머물며 부유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으며, 친구들 사이에서는 ‘아티쿠스(Atticus, 아티카인)’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BC 68년부터 키케로가 아티쿠스에게 써 보낸 수많은 편지 덕분에 우리는 당시의 상황과 키케로의 내면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고전학자 이디스 해밀턴은 오늘날 카이사르가 키케로보다 더욱 이상화되는 이유도 후자에 비해 전자의 내면에 관한 기록이 드물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키케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최종 평가를 내렸다.
“키케로는 결코 장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케로는 존경할 만한 덕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의 고결함을 완벽하게 지키면서 부정한 일에 가담하지 않는 덕성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과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서 결정적으로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올 때마다 전자를 선택했다. (‥‥) 키케로는 한때 자신의 사위에게 ‘고귀한 용기보다 더 절대적으로 더 매력적인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사랑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썼다. 그가 살았을 적에는 늘 그렇게 살지 못했다. 죽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키케로는 자신의 말을 실천했다.”
참고문헌: 키케로, [키케로의 의무론], 1989; [키케로의 최고선악론], 1999; [노년에 관하여 / 우정에 관하여], 2005; [수사학], 2006; [국가론], 2007; [법률론], 2007; 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 1999; 플루타르크, [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 2], 2000; 안토니 에버릿, [로마의 전설 키케로], 2003; 톰 홀랜드, [공화국의 몰락], 2004; 이디스 해밀턴, [고대 로마인의 생각과 힘], 2009.
글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