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는 독립선언서가 온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판사가 묻자
"잘된 것도 있고 잘 안된 것도 있으나 나는 독립청원을 할 의사가 없었고 그선언을 한 것도 내 의사가 아니므로 3월 1일에 오지 않았다."라고 답을 하고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쓰러지는 어린학생과 노인을 뒤로 하고 종로경찰서에 자수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청오 정춘수'가 판사의 질문에 답한 내용의 일부이다.
정춘수 스스로 민족대표로서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후 감리교 목사를 하고 있을 때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을 때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난 정춘수는 종교인의 양심마저 버리고 친일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이때 발표한 성명서의 내용이다
아등(我等)은 일즉이 민족자결주의의 단체인 동지회의 연장으로서 흥업구락부를 조직, 활동하다가 지나사변 이래의 급격한 변환에 감하여 종래의 포회(抱회)한 바 주의 주장의 오류를 인정하고, 참다운 황국 일본의 국민인 신념하에 흥업구락부를 해산당함에 아등의 거취와 동향과를 밝힘과 동시에 아등의 포지한 이상과 주장과를 자에 피력하려 하는 바이다"로 시작하여, 일제에 철저히 전향·협력할 것을 밝히고, "아등은 그 활동 자금으로서 금일까지 저축한 금 2400원을 서대문경찰서에 의뢰하야 국방비의 일조로서 근(謹)히 헌납하고자 한다" (매일신보, 1938. 9. 4).
당시 쌀 한가마니의 값이 대략 25~30원이었다.
정춘수의 친일활동은 종교인으로서 지켜야할 기본 양심도 버리고 자'경성기독교연합회'에 부위원장, '일선감리교특별위원회' 위원, "기독교 조선감리회는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고 일본정신을 함양한다"는 감리교 혁신안 발표, '시국대응 신도대회', '총진회' 회장',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신도와 함께 부여신궁공사 참가, '국민총력 기독교 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회'를 열고 교회의 철문, 철책 등을 헌납하도록 하는 '종교보국 5개항' 발표, 일본의 교단규칙에 따라 교단을 재조직하고, 일장기를 두르고 남산 신사에 참배하는등 종교 황민화를 주장하였다. 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여일 구속되었고, 교내 재건파가 "감리교회 배신(背信).배족(背族) 교역자 행장기"를 통해 친일 종교인의 숙청을 추진하자 정춘수는 천주교의 대표적인 친일파로서 '스스로 신사참배를 정기적으로' 한 노기남을 찾아가 천주교로 개종하며 개종의 심정을 묻자 친일 활동을 뉘우치지 않고 합리화를 위해 변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안팎으로 강력한 비판을 받게 되자, 더 이상 감리교에 머물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직을 사임하고 또 한 번 변신을 하였다. 1949년 10월 어느 날 서울 명동성당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천주교로 개종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49년 11월 22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실의 진부를 확인하려고 김유순 감독이 보낸 사람들과의 면담에서 "50년이나 정든 교회를 일조 일석에 떠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다.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말하려면 자연 과거지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1 운동 때 33인의 하나로 나라를 위하여 싸우겠다는 나의 정신은 오늘까지 변치 않았다. 그러나 세태의 변함을 따라 전쟁이 점점 심해짐으로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척했고, 아홉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한 교회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세인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나의 밑에서 나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를 친일파라고 교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해서 나를 중상하며 전부터 말해 오던 숙청을 하려 하니 나는 숙청을 당하기 전에 먼저 내가 자가 숙청을 한 것이다.…… 하여튼 내가 50년이나 인도한 교회가 나에게 불만하다. 가령 예배 보는 것도 엄숙을 많이 주장했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개신교를 무식한 구교인들이 열교라고 하는데 참말 교파의 갈래가 너무 많아 열교이다. 그러니 감리교회에서 떠난다고 장로교회나 성결교회로 갈 수 없고 결국 천주교회에 들어가 평신도의 자격으로 남은 여생을 조용히 지내려 한다…… 정춘수는 감리교회와 아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다.(대한감리회보,1949. 12. 25)
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였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 협력하는 척'하였고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서 진정하고 공개적인 참회의 고백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길에 올라 충북 청원군 강외면 궁평리 족손(族孫) 정인환의 집에 머물다가 1951년 10월 27일 피난지에서 79세로 생을 마감했다(천주교회보, 1952. 12. 23)
- 주요 참고문헌 -
[대한감리회보], 1949
[매일신보]
1938년 5월 흥업구락부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9월 관계자들과 '전향성명서'를 발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나 친일활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들은 전향성명서 에서 '우리들은 일찍이 민족자결주의의 단체인 동지회의 연장으로서 흥업구락부를 조직, 활동하여 오던 바, 지나사변 이래의 급격한 변화에 감하여 종래 포회한 바 주의 주장의 오류를 인정하고 참다운 황국 일본의 국민인 신념하에 흥업구락부를 해산함에 당하여 우리들의 거취와 동향과를 밝힘과 동시에 우리들의 포지한 이상과 주장과를 자에 피력하려 하는 바이다' 운운하면서 전향을 선언한 것이다.
정춘수는 1938년 5월 일제의 사주로 창립된 정성기독교연합회의 부회 장에 선임되고 이듬해 10월 조선감리교회를 일본 메서디스트교회에 종 속시키기 위한 일선 감리교 특별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1939년 9윌 일제의 비호를 받아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고, 1941년 국민총력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의 주최로 시국대응 신도대회를 열어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해 10월 신도 대표 50여 명을 이끌고 부여신궁조영에 근로 봉사한 것을 비롯, 교회의 철문, 철책을 국방 헌납토록 하는 등 온갖 친일활동에 앞장 섰다. 특히 '교회 종도 헌납하여 성전 완수에 협력'할 것을 강요하는 설교와 연설을 하고 다녔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9월 서울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 이란 간판을 내걸고 교육자들을 동원하여 황도문화를 설교하고, 이들을 남산의 조선 신궁으로 끌고 가 선사에 참배하게 하는 등 망동을 자행하다가 해 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류되기도 했다.
다음은 [동양지광] 1942년 1월호의 좌담회에서 행한 정춘수의 [응징의 이유 세 개] 전문이다. 그는 당시 조선감리교 총감독이었다.
차제에 우리 적성국가 미·영에 대해서 철저적으로 응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 이유로서 저는 다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첫째 그들은 스스로 기독교 국가로 자칭하면서 하느님께 선택받은 인종이라 해서 뽐내고 있지만 종래의 수법으로 보면 교인으로서 교리를 위배하며, 기독교 정신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응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둘째 그들은 우리들 도의(道義)를 다하는 국가의 입장을 전혀 무시하고 우리 제국(帝國)을 모멸하고 있숩니다. 이런 국가의 적성(敵性)에 대해서, 국민으로서 응징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 셋째 그들은 인도상 전인류의 적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적으로서, 인류의 적으로서 응징을 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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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요 참고문헌 -
: [대한감리회보], 1949
: [매일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