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의 4대 최악의 전투
[산하의 전사] 글에서 발췌
① 용인 싸움(1592년 6월 5일)-임진왜란
② 쌍령전투(1637년 1월 3일)-병자호란
③ 칠천량해전(1597년 8월 27일)-임진왜란
④ 현리전투(1951년 5월 16일)-6.25전쟁
1. 최대의 참패. 용인 싸움(1592년 6월 5일)
1997년 1월 수원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색다른 유물이 발견됐어. 조선 중기의 화포였지. 화포 안에는 포탄이 장착돼 있었어. 즉 ‘실전 배치’돼서 전투태세를 갖춘 화포라는 뜻이야. 그런데 이게 왜 버려져서 흙에 묻혔다가 수백 년 뒤에야 다시 햇볕을 받게 됐을까. 그 안의 포탄은 누구를 겨냥했던 것이었고 왜 쏘아지지도 못한 채 땅 속에서 녹슬어야 했을까.
1592년 6월 5일 그곳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 역사상 최대의 참패가 벌어졌다고 해 두자. 조선 세조때 양성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우리는 중국과 싸우면 열 번 싸워 일곱 번 이기고 여진족과 싸우면 다섯 번 이기고 다섯 번 진다. 일본과 싸우면 열 번 싸워 세 번밖에 못 이긴다.”
고 말이야. 즉 자고로 중국은 만만했고 여진도 해 볼만 했지만 이놈의 일본인들한테는 꽤 골탕을 먹었던 것 같아. 단병접전, 이른바 직접적으로 칼을 맞대기 시작하면 일본군, 아니 하다못해 왜구들을 제압할 군대는 동아시아에서 그렇게 흔치 않았지.
임진왜란이 터지고 일본군은 경부축선을 따라서 그야말로 바람같이 북상했어. 부산에 상륙한지 20일도 안돼서, 그것도 전투를 치르면서 서울을 함락시켰으니 그야말로 네가 좋아하는 산책이라도 하듯 흥얼거리며 국토를 가로지른 셈이야. 조선 사람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을 거야. 마치 태풍이 지나가듯 일본군은 조선을 휩쓸었고 그 일파가 지나간 뒤에야 고개를 기웃거리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라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일본군은 한양을 목표로 줄달음쳤기 때문에 충청도 반쪽과 전라도 전역은 일본군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어. 문제는 당시 조선은 북방을 제외하면 군대라고 이름할 집단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했다는 거. 전라 감사 이광은 문신이었어. 그는 전쟁이 터지자 전라도 병력을 끌어모아 무조건 서울로 길을 잡았는데 공주에서 임금이 피난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나 어떡해”를 부르며 전주로 돌아와 버려. 전라도 사람들 보기에 영 ‘앗싸리’하지 못한 행동이었지.
전설에 따르면 이때 전라도 태인 출신의 무장 백광언 같은 사람들은 칼을 뽑아들고 전라 감사 이광을 윽박질렀다고 해.
“이런 느자구없는 감사또 같으니라고. 죽고 싶어 환장했는개벼잉. 상감이 피난을 갔으면 당신도 피난가겄다 이것이여?”
이광은 또 동원령을 내린다. 이때는 해남 땅끝마을부터 전라도 첫고을 여산까지 수십 개 고을로부터 수만 명의 장정들이 몰려들게 돼. 워낙 물산 풍부한 땅이라 군수물자도 풍부해서 군대의 행진은 수십 리에 이르고 그 군수품을 실은 수레들도 그만했다고 하지. 그런데 이게 군대의 행군으로 보였느냐. 유성룡은 그 이동을 ‘양떼’에 비유했어. 즉 전쟁을 할 줄도, 생각도 별로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이었던 거야. 충청도 병력도 합류했고 도망쳐 온 경상감사도 함류해서 5만의 대군을 형성하게 돼. 좀 거짓말 보태서 10만 대군으로 부르기도 했지.
말이 5만 명이지 조선 건국 이래 그 정도의 군대(?)가 집결한 예는 없었어. 사람의 머리수라는 건 없던 용기도 내게 만든다. 아마 그때 조선군들도 그랬을 거야.
“와 징허게 많다. ”
“인자 왜놈들만 밟아뿌면 되능거 아이가.”
“끝이 안보이누먼유.”
백성들도 이 장관에 감격하여 함께 걷기도 하고 환호하기도 하고 마구 뒤섞였다가 널부러졌다가...... 하지만 한때 감사에게 칼을 들이댔다는 백광언은 불안해하고 있었어.
“이것들이 군대여 군상이여. 감사또 병력을 좀 나눕시다. 그러면 최소한 만판 깨지지는 않을 것잉게.”
그러나 문관 이광에게 이 말은 제대로 먹히지 않았어.
“아니 우리는 머리수가 희망인데 왜 군대를 나눠?”
전략도 없고 전술도 세우지 않은 ‘어떻게 되겠지’의 머릿수 군단은 그렇게 수원까지 이르렀어. 그 인근에서 조선군은 처음으로 일본군과 마주친다. 수십 명 규모의 정찰대 또는 경비병 수준의 일본군들이었지.
수십 명 일본군이 아무리 용감해도 5만 대군 앞에서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지. 이광은 모처럼 호기롭게 외친다.
“저놈들을 모두 목을 쳐라.”
백광언은 쓸데없는 싸움 말자고 설득하지만 이광은 화를 낸다. 속으로 그랬겠지.
‘이놈아 내 앞에서 칼 들고 설칠 때는 언제고 싸울 때 되니까 꽁무니빼냐?’
결국 백광언은 돌격해 들어가서 일본군 10여 명을 죽인다. 하지만 그게 승리의 다였어. 수백 명의 선봉대는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일본군의 구원군 일부가 백광언 등의 배후를 치면서 몰살당하고 말아. 백광언도 이때 스물 두 명의 일본군을 홀로 죽인 뒤 쓰러졌다고 하지.
그래도 조선군은 5만 명이었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광은 북상했고 오늘날 광교산 근처, 그러니까 아까 말한 화포가 발굴된 그 근처까지 이동했지. 온 들판이 다 조선군이었어. 거기서 야영을 하고 해가 뜨자 수만 명의 장정들은 나무를 해 오고 솥에 물을 붓기 시작해. 밥은 먹고 다녀야지. 그런데 이 모습을 일본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 였어. 그는 불과 1천 6백 명 정도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지. 그는 수만 명이 어울려서 밥 짓는 장관을 보더니 재미있는 명령을 내린다.
“조선군들은 우리 복장에 익숙지 못하다. 가면을 쓴 우리 기병 몇 명을 돌격시켜라.”
뿔도 길다랗게 달린 투구에 요상하게 다른 갑옷을 챙겨 입은 기병 몇 명이 백마를 달려 조선 진영을 향했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이 백마 탄 괴물에 밥 지어 먹던 조선 ‘군대’는 큰 혼란에 빠진다. 저게 사람이냐 귀신이냐. 5명은 마음대로 5만 명 사이를 휘저었고 이를 본 와키자카는 콧노래를 부르며 휘하 전 병력에게 돌격을 소리쳐. 우리가 열 번 싸워 세 번 겨우 이긴다는 일본군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내려갔는데 거짓말처럼 5만 대군은 ‘산이 무너지듯’ 결딴이 나고 말아.
일본군도 그 기록에서 조선군을 ‘섬멸’한 게 아니라 조선군을 ‘궤주’시켰다, 즉 쫓아 버렸다고 표현한 것처럼 제대로 된 전투는 없었어. 정신을 조금만 차리면 5만 대군이 1천 6백명을 폭 싸서 녹여 버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병력을 유지시키며 후퇴한 몇 몇 장수들 (권율,황진 등) 외에는 장수들이 앞장서서 투구 팽개치고 무기 버리고 도망을 가 버려.
와키자카는 정말 장관을 보았을 거야. 눈앞에 펼쳐져 있던 사람의 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모세의 기적’이 연출된 거 아니겠어. 5만 대군이 먹던 쌀과 무기와 옷과 전쟁 도구들은 몽땅 일본군의 소유가 됐고 주체를 못한 일본군은 그 모두를 태워 버리고 낄낄대며 돌아선다.
용인전투 이후 일본군 사이에는 조선의 장수들은 겁쟁이들이라는 신념이 깊숙하게 스며들었고, 이 전투를 지휘했던 김수, 이광, 윤선각등은 민중의 놀림감이 되었으며, 이광과 윤선각은 파직되었다. 용인 전투가 보여주는 모습은 아마도 준비가 안 된 인물과 부대가 전장에 나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게 우리 역사상 최악의 패전 중 하나라 할 용인전투가 된다. 그때 버려진 화포, 여차하면 불을 당길 준비를 완료하고 있던 화포는 포병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후 땅에 묻혀 수백 년 뒤의 포크레인 삽질이 그에 닿기까지 잠자게 된 거고.
2. 병자호란 최악의 쌍령전투(1637년 1월 3일)
쌍령전투라는 거 들어 봤냐? 아마 못 들어 봤을 거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해도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으니 알 턱이 없을 거야. 1637년 음력 1월 3일 벌어진 우리나라 전쟁 역사상 최악에 가까운 참패다. 워낙 전쟁이 많았고 이기고 지는 일이 흔했던 우리 역사지만 쌍령 전투만큼 참담하게 진 전투도 드물어. 쌍령전투는 전멸에 가까워. 그런데 그들은 적군에 의해 죽은 게 아니야. 무슨 얘기냐고? 들어봐.
[쌍령전투] 1637년 1월 3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일대. 동원령에 따라 차출된 4만명의 조선군이 후금(청나라) 기병 300명과 마주친다. 조선군에는 다수의 조총부대 포함되어 있었고....133:1 누가 보아도 이기는 이 전투는 조선군이 또 다시 패한다 .용인전투와 마찬가지로 이 전투병들은 조총병 빼곤 군사훈련이라고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노비와 양민들 ㅡ싸울 맘도 없었다. 기회만 보다가 도망 갈 궁리만 하던 조선군이 경사진 곳에서 서로 도망치려다가 한 곳으로 몰리는 바람에 대부분이 아군에 깔리고 밟혀 죽었다. 지휘관(경상좌병사 허완)도 같이 압사 당한다.
병자호란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조정은 팔도에 영을 내려 근왕병을 이끌고 집결하도록 하지. 근왕병이래야 농민들에게 창이나 활 들려 준 엉성한 부대였지만 어쨌건 팔도 감사와 병마절도사들은 부랴부랴 관내의 장정들을 긁어모아 임금이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향해 행군했어.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병력이라면 역시 땅 넓고 인구도 많았던 경상도 병력이었지.
경상도는 병영만 좌병영, 우병영 두 곳이 있었고 기록마다 많이 엇갈리긴 해도 최고 4만(연려실기술 기록), 못해도 2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걸로 추정돼. 전사한 지휘관들을 봐도 경주 출신에 백의종군한 무관 손종로, 남해안 의 창원부사 백선남, 안동 출신 선약해 등등 다양한 지역이 망라돼 있으니 거의 경상도 전 지역에서 총출동한 것 같아.
그들은 입에 단내 나는 강행군을 거쳐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를 거쳐 경기도에 진입한다. 경상 좌병사는 허완, 우병사는 민영. 머리수는 그런대로 채웠으니 나름의 자신감도 있었겠지. 그런데 이 시기도 그렇지만 요즘도 쪽수는 전쟁의 기본이지 전부가 아니야. 임진왜란 이래 조선군 장수들이 가장 취약한 부분 중 하나는 정보전이었어. 척후병만 제대로 내보냈어도 범하지 않을 실수를 무시로 한 건 그 대표적인 예지. 여기서도 그랬어. 경상도군은 척후 한 번 내보내지 않고 쌍령에 이른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는 이미 조선군의 근왕병이 사방에서 몰려온다는 것을 알았고 대책을 세워 두고 있었지. 남한산성을 포위한 10만 청군 가운데 일부가 쌍령으로 남하한다. 그런데 경상좌병사 허완은 다음과 같은 인물이었어.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 사람들을 보면 질질 짜기부터 했다.”(연려실기술)
그는 부대 배치를 이상하게 해. 진 외곽에 훈련이 덜 된 조총부대를 배치하고 그 다음에 정예 사수를, 그리고 창검으로 돌격해서 싸우는 살수 부대를 맨 후방에 배치한 거야. 이건 허완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심사였다고 봐야 할 것 같아. 이에 까무라치게 놀란 부하 장수들이 항의하자 허완은 이렇게 대답한다.
“안 돼. 정예 사수들이 얼마 없지 않나.”
그럼 맨 앞의 초보 사수들은 뭐 화살받이 칼받이란 말인가.
쌍령 앞을 흐르는 개천을 해자 삼아 목책을 둘렀는데 문제는 청나라 군대가 낮은 곳으로 돌격해 들어오지 않고 산등성이를 타고 남하해서 고지대로부터 짓쳐들어왔다는 거.
상식적으로 낮은 곳 목책은 신경 써서 높게 쳤겠지만, 높은 지역의 목책은 허술했겠지? 북한산성 성벽이 그렇듯 말이야. 청나라군은 조선군의 허를 찔러서 고지대에서 조선군을 내리몰았어. 많은 수도 아니었어. 수백 명의 기병이었고 그 중에도 수십 명이 앞으로 나선 것이었지만 전방의 초보 사수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총을 난사해서 적에게 제대로 된 피해도 주지 못한 채 화약이 떨어져 버리고 말아. 애초에 화약 아낀다고 열 발 정도 쏠 화약만 지급을 했었거든.
몇몇 용감한 사람들이 앞에 나가서 활을 쏘며 독전했지만 이미 총알 사라진 쇠막대기의 무용함을 아는 군중은 격하게 흔들리지. 그들의 머리 위로 청나라군의 돌격이 시작된다. 경상좌병사 휘하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기록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최악의 모습은 이랬어.
조선군은 높은 데서부터 밀고 내려오는 청나라군에 쫓기면서 서로가 서로를 밟아 죽이게 돼. 목책을 넘어야 살 길이 보였으니 일시에 낮은 지대의 목책으로 몰렸고 그 중 힘없는 자들은 넘어지고 힘있는 자들은 그걸 짓밟고 목책에 매달렸지.
낮은 쪽 목책은 당연히 높게 지어져 있었고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기어올랐어. 그런데 막상 올라서고 보니 목책 바깥쪽은 또 까마득했어. 하지만 뒤돌아설 수도 없었던 게 꾸역꾸역 뒷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올라오고 있었거든. 에라 내사 모르겠다. 병사들은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리지만 태반이 추락사하고 말아. 목책에 오르다가 밟혀 죽고 목책에서 뛰어내려 머리 깨지고 허리 부러져 죽은 시신들이 목책 안팎에 산처럼 쌓이고서야 살아남은 병사들이 그들을 디딤돌 삼고 계단 삼아 목책 넘어 도망갈 수 있었다니 참사도 이만하면 세계사적 참사야.
“골짜기가 구릉이 되도록 시체가 쌓였다.”는 기록이고 보면......
청나라군도 내리 몰다가 내리몰다가 기가 막혀 웃었을 것 같다.
“까오리팡즈들 뭐냐......깔깔깔.”
가장 볼썽사나운 건 경상좌병사 허완도 도망가다가 밟혀 죽었어. 어떻게 이런 인간이 병마절도사까지 됐을까. 이유는 인조반정 때문이었어. 별 볼일 없던 사람이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줄을 잡아 반짝 출세를 했던 거지.
그 뒤를 이어 경상우병사 민영의 진영에게로 청군이 달려들었어. 민영의 부대는 그래도 허완의 부대보다는 나아서 정예 포수들이 일제 사격을 가해 청나라 군대를 움찔하게 했는데 여기서도 화약을 아낀다고 정예 포수들에게 딱 두 냥씩(열 발 정도 쏠 수 있는)만 지급한 게 문제였지. 처처에서
“화약 도고! 돌아삐겠다.”
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수령들이 나서서 다시 화약을 분배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그 화약 더미에 불꽃이 튀고 폭발을 일으켜 수십 명이 몰살하고 화약도 날아가고 말아. 그리고는 또 다시 시작된 도망과 압사의 연속. 경상도 해안가부터 태백산맥 줄기까지 경상도 방방골골에서 박박 긁어온 수만 명은 증발하고 말았어.
척후병 하나 제대로 내보내지 않음으로써 적의 위치와 상황을 파악하는데 실패한 정보력의 부재.
훈련 안 된 군중을 머리 수 하나만 믿고 정예병 앞에 들이미는 우매함.
그나마 있는 전력을 ‘지도부’ 사수를 위해 써 버리는 비겁한 아둔함,
지휘관 스스로 통제력을 상실하고 도망치다가 밟혀 죽는 참담함.
그리고 청나라 군이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수를 스스로 밟아 죽인 조선 병사들의 얼굴에 가득했던 비루함.
이 쌍령전투와 함께 조선의 치욕적인 전투 기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인 용인전투의 주인공은 무능한 지휘관과 그런 무능한 지휘관을 경멸하는 부하들, 그리고 마지못해 전쟁터로 끌려나온 병사들이다. 이런 군대의 구성으로는 어떤 전쟁을 치른다고 해도 승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 같은 일이다.
3. 칠천량해전(1597년 8월 27일)에서 배울 것
전쟁은 소강이었다. 영남 해안지대에 웅크린 왜군은 임진년의 기세는 꺾인지 오래였지만 고슴도치같이 가시를 세우고 있었고, 명나라 군대는 전쟁에 넌더리를 내서 싸움을 피해 다녔다. 복수심이야 하늘을 뒤덮고도 다섯 자가 남았지만 복수심보다 더 무섭고 흉악한 배고픔에 직면해 있던 조선은 말로는 피의 응징을 떠들었지만 혼자서 일본군을 어째 볼 능력은 없었고, 그나마 작전지휘권은 명나라 장수들이 쥐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으되 1593년의 진주성 함락 이후에 큰 전투는 없었고, 불안한 평온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와 일본의 관백을 동시에 속이려던 심유경의 사기극이 폭로되면서 전쟁의 구름은 다시 동북아시아를 뒤덮기 시작한다.
심유경과 함께 일본에 갔던 황신은 장계를 통해 재침이 이뤄질 것이고 그 목표는 전라도라는 것까지 고했다. 전쟁 초에 일본군이 이루지 못한 수륙병진을 완벽하게 벌여 보겠다는 구상이라는 것이다. 그 긴박한 상황에 조선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실로 관운장의 청룡도 같고, 조자룡의 장창같은 존재가 있었다. 바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었다.
임진년 전국을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 냈고, 그 뒤로도 천하의 풍신수길이 "만나면 도망쳐라."는 굴욕적인 명령을 내리게 만들었던 무적함대가 며칠 뱃길이면 부산 앞바다가 눈에 보일 한산도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도 수군은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옥돌로 만든 바둑알도 아이 손에 들어가면 알까기 알이 되는 법이다. 전쟁이 일어날 낌새가 보였을 때 조정 대신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수군은 이기는 게 당연한 존재였다.
뛰어난 식견과 진중한 성격으로 이름 높았던 한음 이덕형의 말을 들어 보자.
"수전이 상책이고, 그 다음이 산성을 지키는 것이니 수군으로 하여금 그 오는 길을 막게 하소서."
말은 쉬웠다. 180여 척의 대함대를 보유한 조선 수군이 거제도를 돌아 부산 앞바다에서 버틴다면 왜군이 날개가 돋지 않고서야 어찌 조선 땅을 밟을 것이며, 싸우면 당연히 이기는 조선 수군의 공격에 고기밥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서울에 앉아서 평생 창 한 번 쥐어 본 적 없는 선비들의 열변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거기다가 자기들끼리 사이가 견원지간인 일본군 장수들 가운데 하나가 슬쩍
"어 웬수같은 가등청정이가 모월 모일 서생포로 간는데 우.... 조선 수군도 없고.... 우..... 이순신도 없고....."
하는 식의 귀띔을 전하자 조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그 귀띔이 일종의 반간계였는지, 진실로 가등청정을 죽이려고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왕자들까지 사로잡고 두만강까지 올라가 설쳤던 멧돼지같은 장수 가등청정을 잡을 수 있다는데, 그것도 싸우면 무조건 이기는 수군이 조금만 움직이면 되는데, 가만히 있는 것은 출세에 지장이 있었다.
"부산포를 칠 수는 없겠는가. 안되면 봉쇄라도 안되겠는가."
조정의 공론은 들끓었고, 다급해진 권율은 한산도로 말을 달렸다. 하지만 이순신은 신중했다. 소금 굽고, 고철 줍고, 피난민들에게 쌀 거둬 가며 마련한 그야말로 살덩이같은 함대다. 아무리 이쪽하고 짝짜꿍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군이 드글거리는 부산 앞바다에서 "수군을 정비하여 기다리다가 바다에서 공격하여 가등청정을 죽이"라는 일본군의 속삭임을 듣고 움직인다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이순신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가등청정은 서생포에 상륙해 버렸다. 그리고 참으로 운 나쁘게도 이순신의 보고가 허위로 판명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부하의 허위 보고를 그대로 조정에 올려 버린 이순신의 실수였다.
난리가 났다. 가스통은 없는 시대였으니 망정이지 가스통을 머리에 이고 허리에 매고 가랑이에 끼고 시위할 기세로 타도 이순신의 기치가 휘날렸다. 그 선봉에는 평생 배라고는 피난갈 때 임진강을 건널 때 처음 타 보았음직한 선조가 섰다.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우리나라는 끝났다."
공화국이라면 해임되고 끝나겠지만 왕국에서 이런 말 듣고 살아남을 군인은 드물다.
"지금 가등청정의 목을 베어와도 용서할 수 없다."
그렇게 삼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엄정할 수가 없었다.
칠천의 하나로 천대받던 수병들이 얼마나 노를 저어야 부산 앞바다에 이를 수 있는지, 그들이 먹을 물은 어디서 구할 것인지, 짐승 같은 수고로움으로 이순신과 남해안 백성들이 길러온 함대가 자칫 무슨 꼴을 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선조의 뇌리에 근접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열 받는 것이다. 조금만 움직이면 가등청정의 목을 굴리며 놀 수 있는데 그걸 안한 것이다. 박성 같은 사람은 "당장 참형에 처하라."고 기염을 토했다. 가등청정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가장 열렬히 피를 토했던 것은 전라병사 원균이었다.
"가벼운 배로 삼삼오오 영도 앞바다에서 시위하고, 2백척 배로 대해에서 위엄을 보이면 가등청정은 돌아갈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 용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제가 쉽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전 바다를 지켜봐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감히 침묵을 지키지 못하여 아뢰는 것입니다."
이건 대놓고 이순신을 헐뜯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순신을 잡는 사람에게 명분을 주는 말이었다.
수사(水使)였던 인간이 된다는데 왜 다른 수사는 못한다고 발을 빼는가 말이다. 이런 겁쟁이, 군인도 아닌 군인, 군인이 전쟁이 두려워서야 무엇을 하겠는가, 내가 날뛰어도 네가 말려야지, 내가 날뛰는데 네가 신중한 게 될 일이냐. 등등과 유사한 말 말 말이 조선 조정을 수놓았고, 마침내 이순신은 죽어도 아쉬울 것이 없는 죄인으로 끌려와 매타작을 받게 된다.
그 후임자는 원균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 그는 역시 호전적인 장수였다. 통제사 임명장에 인주도 마르기 전에 그는 일본군 머리 수십 개를 도성에 실어 보냈다. 그런데 이 머리들의 임자는 조선군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거제도에 나무하러 왔던 왜군병사들이었다.
"도대체 땔감 장만하러 온 배를 잡아서 뭘 하겠다고 조선은 왜 이러는 건가. 댓가를 치러 주겠다."
항의하러 온 일본군 장수의 전갈이었다. 뭔가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었다.
정유재란이 가시화할 무렵 도원수 권율은 원균이 했던 말과 똑같은 전략 구상을 보고한다.
"거제도의 옥포 등에 진주하여 부산과 대마도 뱃길을 감시하고 차단하며, 영도 앞바다에 연속부절로 출몰토록 하면 적의 형세는 머리와 꼬리가 잘린 형국이 될 것입니다."
멋진 말이었다. 까짓거 사람이 죽더라도 3일만 버티면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먼 훗날의 손 흰 글쟁이의 포스에 비견되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이왕 시작하는 전쟁, 우리가 기세를 제압하면 될 것이고 수군은 가서 노 저으며 뱃놀이만 하면 일본군은 어마 무서워 대마도에서 발 묶일 것이고, 차제에 식량까지 끊으면 부산에 아장아장거리는 일본군들을 굶겨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일을 하라고 임명한 장군이 원균이었다. 하지만 원균은 그것이 자기 뿐 아닌 조선 함대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권율은 추상같이 독촉해 대는 가운데 원균은 엉뚱한 소리를 한다.
"30만 정병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공격,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글로야 백만 대군인들 못 지어낼까만, 바로 한 해 전에 거제도 공격 작전을 세우면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탈탈 모은 결과가 2만이 갓 넘었던 나라에서 30만 대군은 보온병으로 포탄 만드는 소리였다.
원균도 하기 싫었던 것이다. 이 원균의 심경은 족히 짐작이 간다. 가등청정이 건너올 시간까지 전해 주는 마당에 신중을 기하겠다고 한산도에서 자빠져 잤던 이순신에게 분통을 터뜨린 것이 자신이었다. 왜 저걸 보고만 있느냐고 주먹이 깨지도록 땅을 치고, "감히 침묵을 지키지 못해" 아뢰며 "쉽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는 척 보면 압니다."라고 부르짖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유식한 말로 Anything But 이순신으로. 이순신이 하는 꼬라지는 도통 성에 차지 않았던 그가 아니었던가. 일본군은 속속 상륙하는데 자기가 한 말은 있고, 권율은 자기가 광분하여 보낸 상소를 꺼내 보이며 너 왜 한 입으로 두 말하냐고 따지고, 못 먹어도 고 했다가는 떼죽음이 보였다. 원균은 저돌적인 사람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때 불타 없어진 경복궁 벙커 대신 임시 벙커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선조가 준엄한 소리를 한다. "나라에는 법이 있고, 사사로이 나도 널 용서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권율은 세상에 통제사를 불러서 곤장을 친다. 싸우러 나갈래? 나한테 죽을래? 여기서 원균이 정말로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오류를 소리 높여 고백하고 부산으로 항진하는 것은 사지임을, 승리하더라도 상처뿐일 수 있음을 간언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균은 그래서 원균이었다. 그는 용기를 다른 쪽으로 발휘했다. 더 이상은 못 참는다는 막가파의 용기. 그리고 혹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용기. 또 그리고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용기.
1597년(선조 30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주력 판옥선과 협선, 포작선까지 400척이 넘는 대함대가 부산으로 항진했다. 이순신이 출전한 최대 함대 규모가 부산포 해전 때의 160척이었으니 그에 비해 무려 2.5배에 가까운 막강 함대가 총동원된 것이다. 조선 수군의 전부였고, 조선의 전부였다. 피땀 흘려 쌓아 올린 조선군의 비장의 무기였다. 장관이었다. 일본군 같은 거 그 함대의 노 젓는 물살에 다 쓸려 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옥포에서도 안골포에서도 적정을 만나지 못한 원균의 함대는 힘은 힘대로 쓰고 적은 하나도 잡지 못한 채 기진맥진해서 칠천량 바다로 물러났고, 거기서 재앙 같은 전멸을 당한다. 임진년 이후 뼈를 깎고 살을 갈고 수천 명의 목숨을 바쳐 가며 세운 함대는 하룻밤의 불쏘시개로 탕진된 후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늙고 살이 쪄서 빨리 뛰지 못한 원균"은 "웃통을 벗고 칼을 짚은 채" 소나무 아래에 우뚝 앉아 있다가 "왜놈 6ㅡ7 명이 칼을 휘두르며 그 앞으로 다가서는 것"을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 이야기는 단지 입으로 전쟁을 하는 무리들, 전쟁의 결과에는 관심이 있되 과정에는 깡그리 관심이 없는 종자들, 그리고 그들의 등에 떠밀린 미욱한 군인들이 어떤 참화를 낳았는지를 한 번 되짚어 보자는 것일 뿐이다.
명분은 언제나 넘쳐났다. 선조는 누가 화평 운운하느냐면서 화평 주장하는 자의 목을 벤 뒤에 나에게 알리라고 어탁을 쳤다. 군부의 원수, 백성의 적을 어찌 살려 보낼 수 있겠느냐면서 기염을 토하는 강경파들은 대개 전장의 장수들이 아니었다. 칼집이라도 잡아 본 자들이 아니었고, 먼발치에서라도 왜군을 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이 군대에 나설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으로 하는 발길질에 엉덩이가 차여 가며 전장에 나섰다가 그야말로 떼죽음을 당한 이들의 원혼은 우리 역사에 한없이 많다. 은하수의 별처럼 지천이다.
※ 칠천량 해전
1597년 8월 16일(음력 7월 4일) 100척이 훨씬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수군을 총동원한 원균은 부산 인근에서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고 적을 추격하다가 12척의 판옥선을 표류하게 해 잃어버리고, 9일에는 오히려 적의 반격을 받아 역시 많은 전선을 잃게 된다. 실록에서는 이 때 아군이 활 한 번 제대로 쏘지 못 한 채 패했다고 하면서 아군의 대응을 문제 삼았다.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내리는데 이 때 적의 기습을 받았고, 원균은 400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한다.
거제도 서쪽의 작은 섬 칠천도 남쪽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야습을 당한 이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계속 퇴각한다. 원균은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않은 채 기록에 의하면 선상에서 폭음을 하였다고도 한다. 견내량 혹은 춘원포에서 삼도수군을 상륙하게 한 뒤 반격하지도 않은 채 도주했다.
지휘를 무시한 채 퇴각한 배들은 진해, 한산도 방면으로 향했고, 또한 선전관 김식의 초기 보고에 의해 전사했다고 알려진 수군 장수들 다수가 체찰사 이원익의 조사 결과 살아있음이 확인돼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칠천량 해전에서 판옥선을 잃었다 해서 장수와 수졸들이 전멸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고성 지역 춘원포까지 후퇴하여 통제사 원균과 중군장 순천부사 우치적은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선 12척을 이끌고 도망을 친다. 원균은 도망치다가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일본군들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한다. 이때 김완은 진해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전사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휘하의 판옥선을 이끌고 도주해 한산도에 있는 군수물품을 전부 불태우고 도망을 쳤다.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조선 수군은 거북선(귀선) 3척을 포함하여 배설이 이끌고 도주한 12척의 판옥선을 제외한 판옥선들은 전부 침몰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붕괴됨으로써 남해의 재해권이 넘어가 실질적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초기에 조선 수군을 공격한 일본군 병력이 단 두 척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포로가 되었던 정기수 역시 소수 병력이 기습했는데 수군이 적이 많은 줄 알고 도주했다고 진술하였다.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 역시 왜인들의 말을 빌어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 수군 함대에 왜선 한 척이 접근해 조총 한 발을 쏘자 조선 수군 함대가 놀라 도망치다가 스스로 무너졌다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