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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Qala-i-Jangi
미국의 아프간 전쟁 초기, 미국은 CIA와 그린베레를 투입하고 무기 항공지원으로 아프간 북부의 여러 군벌들을 연합세력 ‘북부동맹’으로 묶어 - 정권세력인 탈레반을 공격하며 남하시켰다. 이 사건은 그 와중에 일어난 것으로, 북부동맹에 잡힌 탈레반 포로 86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된 사건이며, 미국인 1명이 또한 전사했다.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전쟁 초기, 콰라-아이-잔지 전투는 ‘마즈라-아이-샤리프 전투’라고도 불린다. 이 전투는 2001년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벌어진 포로수용소 폭동이다. 당시는 미국의 협력 속에 북부동맹이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의 아프간 이슬람제국’을 붕괴시키는 과정이었다. 탈레반 정권은 911사건을 일으킨 알카에다 작전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고, 이 포로수용소는 북부동맹이 쿤디즈 전투에서 승리해 잡은 탈레반 포로들을 수용하던 곳이다.
미국과 그린베레의 도움을 받은 북부동맹은 도시 군디즈를 포위해 투항을 권고했고, 북부동맹은 (사실상 같은 지역사람인) 서로 잘 알고 있던 탈레반들과 협상을 통해서 투항하는 자들은 돌려보내거나 무기만 회수해 방면(석방)했는데, 풀어주지 않고 수용소로 보낸 수백 명은 사실상 외국인 탈레반 가담자들이었다. 이 Qala-i-Jangi 요새는 북부동맹의 임시본부였고, 이 수용소에서 미국 CIA officer 두 명이 알카에다와 관련 있는 사람을 가려내가 위해 심문하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탈레반 포로들이 유혈폭동을 일으켰고 북부동맹은 미국 영국 특수전부대와 항공폭격의 도움을 받아 6일 동안 이 폭동을 진압했다.
911 테러공격을 받은 미국은 즉각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했고, 그 중 첫 번째 표적이 아프간이다. 아프간은 소련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 지하드(성전) 출신 이슬람 무장병력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이슬람 원리주의인 탈레반 세력이 국가를 완전히 외부세계와 차단한 고립무원이었다.
타 이슬람 국가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도 아프간에로 들어가면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고, 알카에다의 지도자로 알려진 빈 라덴도 아프간에 오랫동안 은거했다. 하지만 탈레반 정권은 아프간 북부 산악지대의 군벌은 진압하지 못했고, 미국은 이들을 지원해 아프간을 ‘정상’국가로 전환해 알카에다 본거지와 지도자들을 색출하기로 전략을 세웠다. CIA가 먼저 북부로 들어가 대규모 군사자금을 뿌리고, 탈레반에 대항하는 이들을 북부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각 지역 북부동맹 무리에 미 육군 특전단 ODA를 하나씩 보내 공중폭격 등 전투력을 지원했다.
당시 북부동맹 모함마드 듀드 장군은 미군 특전단과 함께 타로간이란 도시로 11월 1일 진출했고, 도시를 포위한 상태에서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탈레반을 몰아냈다. 듀드 장군의 다음 목표는 쿤디즈. 그런데 타로간에 비해 쿤디즈의 저향은 강했다. 결국 듀드 장군은 도시를 포위한 상태로 참호를 파서 대기하며 미군 폭격으로 탈레반이 약해지기를 기다렸다. 11일 동안 미군이 폭격, 탈레반 탱크 12대와 트럭 50여대와 벙커 44개와 탄약집적소를 파괴했다.
북부동맹의 그린베레 팀
쿤디즈에는 탈레반과 알카에다 외국인 전사 수천 명, 파키스탄 정보국 요원과 군사고문관도 있었다. 북부동맹이 공격하자, 파키스탄은 군용기를 동원해 3일간 철수작전을 펼쳤다. 그 철수작전을 미국은 Airlift of Evil이라 불렀다.
결국 쿤디즈의 탈레반은 11월 23일 항복에 동의했는데, 이때 탈레반 포로들을 북부동맹이 비인도적으로 살해하는 것이 서방 언론에 노출되기도 했다. 감옥으로 이송되는 포로들도 도중에 상당수 죽었고, 이 사건은 다쉬트-아이-레이리 학살로 유명해진다. 컬럼니스트 테드 롤이 2002년 The Convoy of Death란 책을 쓰면서 이 학살이 알려졌고, 거기 미군도 연루된 것으로 나온다. 오바마와 영국정부는 이 대량학살을 정식으로 조사하게 된다. 이러한 서양문화와 동떨어진 패자에 대한 잔인한 태도가 콸라-아이-란지 폭동을 불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쿤디즈 포위전은 탈레반 1만 명, 북부동맹은 그린베레 고문관 12명을 포함한 3천 명이었다. 2천 명이 전사했고, 북부동맹은 탈레반 포로 3,500명을 잡았다. 파키스탄 항공기로 탈출한 사람은 5천 명으로 추산된다.
이 사건의 포로수용소인 샤리프 요새는 북부동맹이 쿤디즈 진격 직전인 11월 9일 점령하고 쿤디즈 공격의 거점으로 삼았다. 쿤디즈는 북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극렬 저항한 마지막 거점이 된다.
이 사건은 전투이면서 일종의 포로수용소 폭동이고, 탈레반 포로는 건물에서 투항한 86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되었으며 북부동맹도 상당수 전사했다. 미국은 CIA officer 쟈니 ‘Mike’ 스팬이 전사했는데, 이는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 최초 미국인 전사로 기록된다. 공교롭게도 이곳 탈레반 포로 중에는 미국 국적자 두 명이 있었다. 야서 에삼 함디와 존 워커 린드.
2001년 11월, 아프간 북부의 주요도시 쿤디즈(Kunduz)를 북부동맹이 포위했고, 이 북부동맹 세력의 지휘관은 영화 ‘12 Strong’에 나온 아브둘 라시드 도스텀(Dostum) 장군이다. 도스텀 장군은 우즈벡 종족 출신 이슬람 지도자로, 쿤디즈를 포위한 상태에서 탈레반 투항을 권고/거래해 도시 함락을 마무리 지었으나 수백 명의 ‘Al Ansar’, 다시 말해 외국인전사들은 풀어주지 않고 포로로 삼았다. 이들은 파키스탄과 중동의 아랍어권에서 자원한 병력이며, 도스텀 장군은 이들을 무장해제 시킨 후 트럭에 태워 100km 거리 마자르-아이-샤리프 성채로 압송했다. 도스텀 장군에게 쿤디즈 함락을 북부동맹의 큰 승리였으며, 다른 도시들의 탈환이 시작된 기념비적인 점령이기도 하다. 이들 외국인 탈레반을 제외한 나머지 현지 탈레반 수천 명은 쉬버간 감옥으로 이송했는데, 열악한 운송과 수감 중 많은 수가 사망했다.
미국은 이 외국인 탈레반 중에서 911 사건을 저지른 알카에다 국제조직 연관자를 찾으려 했다. 이 샤리프 외국인 탈레반 포로수용소는 19세기에 세워진 ‘전쟁 요새’란 뜻의 페르시아 단어로, 도스텀 장군은 이곳은 본부 및 탄약병기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수용소 폭동/전투는 미국에서 Battle of Qala-i-Jangi라고 부르는데, 현재 마자르-아이-샤리프(Mazar-i-Sharif)이며 보통 마자르라고 부른다. 여기서 쿤디즈로 가는 도로가 있고, 도로를 따라 계속 가면 수도 카불로 연결된다. 북쪽의 우즈베키스탄과는 55km 거리로 가까우며, 탈레반에 밀린 세력이 북부로 숨었다가 미국의 도움으로 쿤디즈 공격 전초기지를 점령한 셈이다. 이 도시는 이슬람과 헬레니즘 성당과 유적이 많아 탈레반 패퇴 이후 여행객이 상당히 몰려들게 된다.
2001년 11월 24일, 이 요새로 트럭을 타고 들어온 외국인 탈레반은 300~500명이다. 그런데 포로에 대한 몸수색이 완전지 않아서 일부 포로가 은밀하게 병기를 숨기고 있었다. 특히 포로 두 명이 수류탄을 가지고 있다가 자폭하면서 북부동맹 지휘관과 감시병을 죽였는데, 정확히 말해 이 수용소의 폭동/진압작건은 두 단계로 나뉜다.
폭동에도 북부동맹은 병력을 요새에 증원하지 않았고, 존 케리 의원의 의회제출용 보고서에 따르면, 탈레반이 이 포로들을 ‘트로이의 목마’처럼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의도로 보낸 건 아닌지 추정하고 있다. 이 요새 내의 엄청난 병기와 탄약을 취득할 목적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폭동 : 포로들이 도착한 다음 날인 11월 25일, 두 CIA officer 자니 ‘마이크’ 스팬과 데이브 타이슨이 도착해 포로심문을 시작했는데, 자니 스팬은 CIA 극비 특수활동사단(Special Activities Division) 소속이었고, 타이슨은 우즈벡 언어가 가능한 지역 전문가였다. 둘은 요새 중간의 마당에서 심문을 시작했다.
두 CIA 직원은 외관상 유럽인에 가까운 사람들을 끌어내 심문했는데, 그 중 하나가 미국시민권자인 존 워커 린드다. 백주에 마당에서 한 이 심문은 폭력적이거나 고문을 가한 것도 아니었고, 당시 도스텀 장군의 본부를 방문 중엔 독일 프랑스 방송사 카메라가 이를 촬영하고 있었다. 이 방송사 취재팀은 폭동이 시작되면서 이 안에 고립되어 모든 장면을 촬영하게 된다. 이 요새는 널따란 원형에 가까운 사각형으로, 그중 반은 북부동맹 본부 구역이고 나머지 반은 포로구역이 되어버렸다. 그 중간에 담장과 함께 무기탄약고가 있었다. 심문은 포로구역의 마당이었다.
두 중앙정보국 직원의 심문이 시작된 지 2시간이 지났을 때, 포로 몇 명이 갑자기 일어나 경계병들을 수류탄으로 공격했다. 순간 경계병과 중앙정보국 직원들은 숫자로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태였고, 수류탄을 가진 포로들은 투척이 아니라 달려가 자살공격을 감행했다. 수용소 폭동이 점화되었고 포로수용소는 압도적인 숫자의 탈레반에게 넘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CIA 직원 마이크 스팬이 북부동맹 경계병 몇 명과 함께 전사했다. 이때 북부동맹 병사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탈레반 포로들의 신속한 전투기술과 광신적인 공격이었다. 포로들은 요새 남쪽 구역 반을 점령했고, 이어, 중간에 있던 병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해 소총 기관총 RPG 박격포와 탄약을 손에 넣는다.
이 폭동의 발발에서 두 CIA 직원은 북부동맹 감시병들과 분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마이크 스팬이 실종된다. 타이슨은 AK-47을 사격하며 북쪽의 안전한 본부구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폭동 발발을 목격한 북부동맹 병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이크 스팬은 AK-47을 들고 싸우다 실탄이 떨어졌고, 이어 권총을 써내 사격하다 또한 실탄이 떨어졌으며, 이후 맨손격투를 벌이다 압도적인 숫자에 제압당한 것으로 그려진다. 다른 서양 기자의 목격은, 스팬이 북쪽 구역으로 탈출하다가 추격하는 탈레반 세 명을 권총으로 사살했고 이후 엄청난 숫자에게 압도당했다고도 증언한다.
촬영하고 있던 독일 텔레비전 취재반에 의하면, 두 CIA 직원은 외국인 탈레반들이 왜 여기 자원했는가 질문했는데, 포로들이 둘러싸 두 미국인에게 “그럼 너희들은 여기 왜 왔어?” 물었고, 이때 스팬이 “To kill you.” 대답했다 한다. 그 대답을 들은 한 포로가 스팬의 목을 잡았고, 그러자 스팬이 권총을 꺼내 그 포로를 사살했으며, 이를 보던 동료 데이브 타이슨도 권총을 뽑아 한 명을 사살하고, 이어 북부동맹 감시병의 AK-47을 낚아채 사격했다. 이 과정은 독일 취재팀에게 모두 촬영되었으며, 포로들이 단체로 달려들어 할퀴고 발로 차고 구타했다. 여러 증언이 있지만, 독일 취재팀은 스팬이 최소 일곱 명을 죽인 다음 군중에 가려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스팬은 맞아서 만신창이가 되어 죽었다.
마이크 스팬은 버지니아 CIA 본부 CIA Memorial Wall에 별 하나로 표기되어 있으며, 정보국의 훈장은 물론 미군 은성훈장도 수여받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앨러바마 129번 고속도로는 그를 기리며 Johnny Micheal Spann Highway로 명명되었다.
당시 혼란 속에 스팬이 실종되고, AK-47을 들고 탈출에 성공한 데이브 타이슨은 무전기가 수중에 없어 독일 취재팀의 위성전화를 빌려달라고 했다. 민간인은 군사활동에 가담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독일 ARD network 기자는 주저했다. 그러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는 생각에 결국 빌려준다. 당시 포로들이 병기고를 부수고 엄청난 병기들로 재무장하며 본부 구역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아프간에 아무런 미군기지가 없던 때로, ‘12 스트롱’ 같은 그린베레 ODA들도 우즈벡 기지에서 발진하고 있었다. 데이브 타이슨은 위성전화로 우즈베키스탄의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증원을 요청한다. 타이슨은 공중폭격까지 요청하지 않고 일단 증원만 요청했다. 이에 미 중부사령부가 즉각 응답해 신속반응군인 태스크 포스 대거(Dagger)를 출동시켰는데, 태스크포스 대거의 구성은 1. 델타포스 2. 그린베레 3. 영국 SBS M전대 8명이었다. 이들은 헬기로 날아와 북쪽구역에 랜딩해 도착했다. 이 대거의 주 병력은 미 육군 5특전단 3대대 본부중대와 미 공군 연락장교들이었고 CIA 특수작전사단 몇 명도 동참했으며, 수용소 구역을 진압하기 위해 북부동맹은 T-55 탱크 한 대를 앞세워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때 다른 서양 텔레비전 취재팀도 요새 근처에 도착해 이 머나먼 외지의 놀라운 전투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과 영국의 특수전부대 전투를 카메라에 담는 것은 당시 굉장한 레어 필름이었다.
오후 2시, 가장 먼저 도착한 미 육군 특전단 9인 혼성팀과 영국 SBS 6명과 미 네이비씰 exchange Operator... 합해서 16명이었고, 즉각 북부구역에서 수용소 구역으로 공격하는 북부동맹과 합세해 사격을 시작한다.
이날 오후 4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포로수용소 구역에 미군 전폭기 두 대를 불러 총 9회 폭격을 가했는데, 병기고를 털어 무장한 탈레반들의 저항은 실로 광신적이었다. 데이브 타이슨은 레이저 유도 500파운드 GBU-12 Pave Way II 폭탄을 병기고로 유도했으나, 빗겨나면서 포로와 싸우던 미군과 북부동맹 병사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혔다. 그렇지만 이 폭격으로 경계선에 고립되어 있던 타이슨과 독일 텔레비전 기자들은 미군 특수전 병력 4명에 의해 구출되었다.
다음날 북부동맹아 요새 북부 출구에 지휘소를 구축하고 탱크와 박격포 사격을 쏘기 시작했다. 2일차 오전 10시 경, 미국/영국 특수전부대는 세 팀으로 나눠 근접항공지원을 시작했다. CAS-1팀은 요새 안 북쪽에서 폭격을 유도했고, CAS-2팀은 요새 정문 근처에 위치, 그리고 즉각반응팀을 하나 더 만들어 그린베레 4명과 미 해군군의관 - 10산악사단 병사 10명으로 구성했다.
오전 11시, CAS-1에 있던 미 공군 특수작전통제사가 2천 파운트(957kg) GBU-31 JDAM 유도폭탄을 구령했다. 그런데 조종사가 좌표를 잘못 읽어 폭탄은 전투통제사가 있는 지점을 때렸고, 이 폭발로 적어도 4명이 사망했고, 일설에 의하면 1팀 북동쪽의 동맹군 탱크를 때리고 1팀(미 5, 영 2)이 모두 다쳤다고도 한다. 그날 밤 C-130H 스펙트러 건쉽 두 대가 나타나 무장 포로들을 향해 사격했다. 이 사격에 탄약저장고가 직격되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밤새 밤하늘이 불타올랐다.
27일 아침, 포로들 저항은 수그러들었고, 동맹군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조직적으로 공격했으나 포로들 반격을 받아 실패한다. 27일 해가 질 때 요새의 거의 모든 부분이 탈환되고 간헐적인 사격과 포로들의 수류탄 자살공격만 종종 일어났다. 이때 미군은 마이크 스팬의 시신을 회수했는데, 시신에 수류탄 부비트랩이 걸려 있었다. 이때 북부동맹 군인들이 시신을 조사하면서 금니를 뽑았고, 숨이 붙은 포로 두 명을 죽였다.
이 시점에 북부동맹군은 모든 포로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100명이 넘는 포로가 감옥으로 사용하던 핑크색 건물 지하로 퇴각해 버티고 있었다. 포로들은 확인사살을 하기 전에는 죽은 자인지 분간이 힘들었다. 동맹군은 그 건물 지하실을 향해 총을 쏘고 수류탄을 투척했고, 나중에는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은 저항을 그치지 않았다.
11월 28일, 도스텀 장군이 도착해 생존자들에게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그들이 거절하자 다음날 도스텀 장군은 지하실에 얼음물을 부으라고 지시했다. 오히려 이 전술이 통해서 12월 1일, 안에 있던 반죽음 상태의 포로들이 투항했다. 지하에서 타온 포로는 86명이었고 그중 몇 명은 부상이 도져 사망했다. 그 포로들 중에 (미국인) 존 워커 린드가 있었고, 포로 몇 명은 전투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중에는 잠입취재를 하던 서양인 기자 루트 하딩이 있었는데, 폭동 초기 투항하려고 했으나 아랍인들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미국시민 존 워커 린드는 은밀하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911 이전에 북부동맹과 싸우는 탈레반을 돕기 위해 아프간에 들어온 사람이다. 린드가 미국인임을 알아챈 것은 CNN 기자다. 미군은 린드를 나머지 포로들과 분리해 특전단 의무에게 치료를 시켰다. 린드는 나중에 미국으로 송환되어 적국에 협조한 혐의로 보석 없는 20년 형을 언도받았다.
존 워커 린드
2002년 초, 여기 포로 중 50명은 쿠바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새로 만들어진 캠프 엑스레이에 수감되었다. 사우디 21명, 예맨 9명, 파키스탄과 기타 국적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러시아 회교도 지역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공판도 없이 관타나모에 3년간 있었고, 다른 미국인이었던 야서 에삼 함디는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미 최고재판소에서 석방하는 대신 원래 태어난 곳인 사우디아라비아로 추방된다.
이 전투의 공으로, 그린베레 장교인 마크 E. 미첼 소령은 (최고훈장 바로 아래) 수훈십자훈장을 받았는데, 이는 베트남전쟁 이후 첫 수여였다. 영국군 SBS 팀과 같이 작전한 미 해군 의무병도 해군십자훈장을 받았다. 이 Navy Cross 역시 1989년 파나마 침공 이후 첫 수여였다.
특전단 마크 미첼 소령
Johnny "Mike" Spann은 아프간 침공 첫 미군 전사자가 되었고, 동료 데이브 타이슨을 탈출시키기 위한 엄호가 공로가 인정되어 사후 CIA Intelligence Star를 수여받았다. 이 훈장은 중앙정보국 안에서 군대 은성훈장과 비슷한 레벨이다. 국방성은 스팬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요새 안에 있었던 아프간 의사가 직접 본 바를 스팬의 가족에게 보냈다. [그때 마이크는 뛰어서 퇴각해야 했다. 그러나 마이크는 그 자리를 고수하면서 AK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싸웠고, 그 다음 권총을 뽑아 싸웠다. 마이크가 왜 그랬는가 하면, 마이크가 있던 바로 그 자리가 퇴각하는 아군을 엄호하고 적을 막기에 중요한 적소였고, 그로써 퇴각하는 다른 몇 명의 생명을 구했다.]
존 스팬은 1969년 생으로 대학에서 범죄학으로 학위를 땄고, 대학입학과 동시에 미 해병대 예비군으로 입대했다. 대학 졸업 후에 해병대장교로 임관해 포병장교가 되었다. 이후 6년간 근무하고 대위로 1999년 제대하면서 CIA에 입사했고, 이후 CIA 특수활동사단(SAD)에 들어갔다.
강력한 화력으로 대처한 다수 포로 사망과, 북부동맹군이 저지른 일은 제네바 협정에 어긋난다. 미군은 손이 뒤로 묶인 채 죽은 사망자를 꽤 많이 목격했다. 포로들 몸수색을 정확히 하지 않은 아프간 동맹군의 실수도 폭동의 원인 중 하나로, 도스텀 장군이 이 실수를 나중에 인정했다. 게다가 바로 그 요새는 폭동 20일 전까지 탈레반이 사용하던 기지였고 포로들은 구조를 잘 알았다. 도스텀은 포로들을 가까운 공항에 수용하려 했으나 미군이 보급기지로 사용했기에 계획을 변경했다. 또한 마당에서 포로들을 단체로 데려다놓고 심문한 것도 무리였다. 단독이나 소수를 불러 엄호 아래 했어야 했다. 심문자들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서 심문을 한 것이다.
기고 글의 모든 사진은 당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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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G의 후손 SAD
SOG라고 하면 본 잇빨중사 홈페이지를 많이 들락거리신 분들은 곧바로 베트남전쟁 MACV-SOG를 떠올릴 것이다. 소규모 정찰팀으로 전쟁의 제3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들어갔던 특수정찰팀에 관해서는, 본 카페보다 더 자세하게 수기까지 올린 곳은 없다. 아군이 전혀 없는 전선 넘어 타지에서 목숨을 걸고 특수정찰을 수행하고 사라져간 SOG. SOG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특수전부대는 현재 미국에 많다.
그러나 실제로 SOG라는 명칭은 살아 있다. 다만, 군대가 아니라 미 중앙정보국 CIA 안에 있다. 명칭만 SOG가 아닌가 할 수 있지만, 과거 베트남전 SOG에 버금, 혹은 그 이상의 활동을 함으로써 그들이 SOG의 직계후손이라고 말해도 손색없다. 그 SOG를 찾으려면 CIA 특수활동사단이라는 곳을 알아야 한다. CIA는 전통적인 정보기관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경제적인 특수목적 정보원들과 부서가 주류지만, 그 외에 실제적인 무력활동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특수활동사단이다.
CIA Special Activities Division
특수활동사단, 줄여서 SAD는 CIA의 비밀작전을 위해 만든 활동조직으로, 내부는 2개로 갈라진다.
1. SAD/SOG는 준-군사적인 전술작전
2. SAD/PAG는 비밀정치작전
CIA 특수활동사단이 극도의 비밀작전을 수행할 때는 대통령의 재가도 받는다.
(잇빨 주: 여기서 '준-군사'라는 의미는 민병대와 같은 단어를 쓰지만, 저강도 무력활동이라고 볼 수 없고, CIA가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는 단어다.)
다시 등장한 익숙한 명칭 SOG는 SAD의 일종의 국(局)으로, 극비 군사작전을 수행한다. SOG는 상상 그대로 CIA 내부 ‘특수작전단’이다. 여기에 소속된 사람들은 준군사작전장교나 특수기술장교로 불리며, 특정한 제복이나 군복은 없다. 특수작전단으로 선발된 사람들은 델타포스 데브그루 등 여러 특수전부대 출신들을 많이 선발한다.
SOG의 Officer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훈장은 수훈정보십자훈장과 Intelligence Star가 있으나, 수여는 대외에 공표되지 않고, 작전 중 사망하면 CIA 본부에 있는 Memorial Wall에 별(Star)로 새겨진다.
특수활동사단의 2번인 PAG가 우리가 상상하는 CIA다. 정치 심리 경제 사아버전 담당이고, 미국의 외교정책을 지원하는 작전을 수행한다. 흑색선전, 제3국 지도자 선정, 미디어 조종, 정치단체 조직, 광고에 참여하며, 잡지 책 라디오 텔레비전에도 관여하고, 미디어를 통해서 다른 지역에 미국의 의사를 전달하기도 한다. CIA 직원이면서 언론의 논평가 기자로 위장하기도 했다. PAG는 이탈리아 1948-1960년대 선거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득세를 막았고, 1953년 이란정부 전복에 관여했고, 1954년 과테말라 정부도 전복했다. 1957년 인도네시아 무장폭동에 관여했고, 1981년 폴란드에서 펀드로 개입해 세금 법안을 조종하기도 했다.
직접활동 부서인 1번 SAD가 알려진 것은 테러와의 전쟁이다. 2001년 가을부터 시작된 아프간에서의 알카에다 지도자 사냥으로, 미 육군 특전단과 같이 북부동맹 작전에 참여했다. 2003년에는 SOG가 이라크 침공 이전에 쿠르드족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켜 이라크 북부에서 이라크 정부군과 싸우게 했다. 이러한 작전에서 CIA/SAD가 많이 조력을 받는 곳이 미합중국 특수작전사령부과 연합특수작전사령부다.
선발과 훈련 : SAD/SOG의 officer는 수백 명으로 추측하는데, 미군 특수작전부대 경력자가 많고, 자세하게 말하면 연합특수작전사령부(JSOC) 경력자가 많다. CIA는 공개모집이 아닌 개인적인 접촉으로 선별한다. 이 두 종류 준군사작전장교와 특수기술장교들은 2~8인 팀으로 구성되고, 단독활동도 있다.
SAD 특수작전단은 네 개의 제대로 나뉘어 있다 : 항공, 해상, 지상, 기갑과 특수 프로그램. 이 ‘기갑’이란 용어는 다양한 운전/조종과 병기의 관리를 의미한다. 네 가지 제대 하나에만 머무는 건 아니며 필요에 따라 이동도 한다. 이런 제대는 소수 팀으로 고난이도 작전능력이 필요하기에, 처음부터 특수작전훈련을 받은 사람을 채용해 추가 교육을 하는 것이 편할 수밖에 없다.
SAD에 있는 직원들 상당수는 박사학위까지 있는 정통 분야가 있고,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명문대학과 각 사관학교 출신도 많다. SAD officer들은 버지니아에 있는 캠프 피어리에서 훈련을 받으며 보통 ‘농장’이라 불린다. ‘The Point’라 불리는 노스캐롤라이나 허트포드의 시설도 있다. 신입사원 훈련프로그램 18개월을 통과해야 officer로 채용된다.
아래는 대표적인 CIA 특수활동사단 작전이다.
티벳 : 1950년 10월 중국이 티벳을 침공하자, CIA 특수팀들을 열차로 투입해 티벳 저항군의 대 중국군 투쟁을 이끌었다. 티벳 저항군 게릴라들을 미국 록키산맥에서 훈련도 시켰다. CIA 특수작전장교들은 달라이 라마를 인도로 탈출시키는 책임도 맡았다. 중국군에 잡히 살해될 위험이 있었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국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티벳 반군을 훈련시켰다.
한국 : 다양한 활동을 했다. 영도에서 훈련시킨 한국인 게릴라 부대가 바로 CIA에서 지원한 부대다. (잇빨 주 : 한국 특수전사 명칭 Y-유격대). CIA Officer 네 명이 군사고문을 했다. 이들은 북으로 넘어가 습격 매복 포로구출 등을 수행했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전 MACV-SOG의 모델임과 동시에 CIA/SOD의 선례가 되었다. 나중에는 8군 소속 백호부대를 만들었고 인천상륙 선견작전도 수행했다.
쿠바 (1961) 피그만 침공 : CIA와 미군이 훈련시킨 쿠바인 침공부대를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목적으로 상륙시켰다. 이 부대는 4월 17일 쿠바 해안에 상륙해 19일까지 싸웠다. 이 상륙에서 CIA officer 두 명이 첫 상륙정에 올라 작전을 진행했고 쿠바군 전상은 2~5천 명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체 작전은 실패했다.
그 직후 CIA는 모사데크 이란 정권을 전복하는 데 성공했고, 54년에는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을 전복했다.
볼리비아 : 체 게바라 공산당 국가해방군이 난카후아 주 외딴 지역에서 친미정권에 대항해 봉기했는데, 국가해방군은 장비도 우수했고, 초기 볼리비아군은 거친 지형에서 진압이 힘들었다. CIA는 officer들을 투입해 진압을 도왔고 미 육군 특전단과 볼리비아 특전단을 투입해 진압하고 체 게바라를 생포했으나 1967년 10월 9일 감시하던 볼리비아 병사들이 사살해버렸다.
베트남 라오스 : 태평양전쟁 당시 OSS는 호치민을 만나 물자지원과 고문을 하면서 항일전을 지원했다. 포츠담 선언을 통해 베트남이 다시 프랑스 통치로 돌아가자 CIA는 프랑스를 돕기 시작했다. CIA Officer들은 라오스와 베트남의 산악족인 몽(Hmong)족을 훈련하고 무장시켰다. CIA 특수작전사단의 제대가 드러난 것은 남베트남 내 베트콩 색출작전인 피닉스 프로그램이다. 1968~1972년, 피닉스 프로그램은 베트콩 의심자 81,740명을 색출하고 26,369명을 죽였다(살해했다).
MACV-SOG 창설에도 CIA가 관여했다. 이런 연관성으로 MACV-SOG 작전대원 상당 수가 제대 후에 CIA에 입사했다. 그렇기에 MACV-SOG의 전설은 CIA SAD의 특수작전단으로 이어진다고 평하기도 한다.
1973년, SAD/SOG와 CIA 과학기술위원회는 미 해군함 글로마 익스플로러를 개장해 극비임무에 사용했다. Project Azorian로, 68년 4월 침몰한 소련 잠수함 K-129를 인양하는 임무였다. K-129는 회수하는 과정에서 기술결함으로 잠수함 동체 3/2 지점이 부러져 격리되었으나, SAD는 잠수함에서 핵어뢰 두 개와 승무원 시신 여섯 구를 회수하는 데 성공한다.
1970년대 미 해군 : 국가안보국과 SAD/SOG 합동으로 아이비 벨스 작전을 수행했는데, 소련의 수중 통신망 케이블에 도청장치를 장착하는 임무였다. CIA 내부회람이 일부 유출되었는데, 이 작전이 ‘엄청난 돈과 공을 들였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이라 표현되었다.
CIA는 항상 소련 군수장비 노획에 신경을 쏟았다. 중동 아프리카나 이스라엘군이 노획한 장비를 펜타곤으로 보내고 CIA도 분석에 참가한다. 펜타곤은 신형 소련 병기와 장비를 습득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조력이 필요했다. 소련 항구에서 나오는 선박을 추적해 노획하기에는 돈과 인력이 너무 들었고, CIA 자금이 들어가고 이런 장비들은 극비작전에 직접 사용하기도 했다. 쉴카 휴대용 대공미슬은 1980년대에 폴란드에서 300만 달러나 들여 구입한 다음, 아프간 반군에게 1천 기를 공여해 소련군 헬기와 수송기를 격추시켰다. 이후 미국은 스팅어 미슬을 직접 주기 시작했다.
소말리아 : 1992년 CIA officer 래리 프리맨이 소말리아 분쟁 최초 미국인 사망자가 되었다. 래리 프리민은 베트남전부터 다수 극비작전에 참여한 델타포스 오퍼레이터 출신이다. 프리맨은 소말리아 미군 상륙 전에 특수정찰을 자진해서 나섰고, 극도로 위험한 적대지역에 어떤 지원도 없이 단독으로 들어갔다가 사망했다. 프리맨은 사후 CIA Intelligence Star를 수여받았다. (래리 프래맨은 베트남에서 그린베레 프로젝트 델타 정찰대원이었다.)
2006년 6월,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이슬람연합이란 무리가 규합하면서 에티오피아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고, 에티오피아 정부군이 소말리아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보냈다. 이슬람연합은 병력을 철수하지 않으면 에티오피아에 선전포고하겠다고 경고하면서 자신들을 ‘지하드’라 칭했다. 그러자 타국 이슬람 전사들이 소말리아에 들어왔고, 미국은 소말리아가 알카에다 영향력에 들어갈까봐 경계한다. 2009년 알카에다가 소말리아에서 여러 해 훈련했다는 언론보도가 터진다.
이때 CIA officer들이 들어가 군벌에게 돈을 주고 알카에다 조직원들 살해를 사주했다. [뉴욕 타임즈 보도]. 이때 빈 라덴 다음 지휘권자인 아이만 알 자와히리가 모든 무슬림 전사들은 소말리아로 향하라고 메시지를 전파했다. 2007년 1월 미국은 공중폭격 1회를 가해 민병대 10명이 죽었고, 2009년 9월 14일, 알카에다 두목 중 하나인 알리 살레 나브한이 미 특수작전제대에 사살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AH-6 리틀버드 헬기 두 대가 지상의 차량 두 대에 사격을 가했고, 미 네이비씰이 나브한의 시신과 함께 다친 두 명을 체포해 후송했다. 2007년에도 연합특수전사령부와 CIA는 AC-130 건쉽으로 나브한을 사살하려 했었다. 나브한은 1998년 미 대사관 폭발의 주범으로 수배되어 있었다.
2010~2013년, CIA는 소말리아 정보국과 보안국을 설립시키고 EU와 UN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소말리아 정부군을 훈련시켰다. 테러리스트들의 근거지를 없애려는 정책. 이렇게 훈련받은 정부군은 모다기슈를 공격해 민간인 25명을 살해한 이슬람 무장세력을 거의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 기지에 드론 공격을 가한 알카에다 간부를 제거했고, 네이비씰이 미국시민 제시카 부캐넌 구출작전도 성공했다.
아프가니스탄 : 1980년대 소련 Vs. 아프간 전쟁 동안 CIA officer들은 무자히딘을 지원했다. 90년대에도 SAD 팀들은 빈 라덴을 생포 사살하기 위한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팀들은 여러 번 작전계획을 올렸으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사살명령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작전 성공률 때문이 아니라 오지에서 CIA 직원들이 사망할 위험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활동들은 2001년 미군의 아프간 침공과 이어진다.
2001년 9월 26일, 개리 슈로엔이 이끄는 CIA 특수활동사단 대원들이 미국의 선두로 아프간에 입성했다. 911 9일 뒤 아프간 북부에 연락팀이 들어갔고, 이들은 북부동맹과 의견이 맞아 그린베레 작전팀들을 유도한다. CIA는 북부동맹에게 현찰로 무기를 구매시키면서 미 특수전사령부 작전팀을 기다렸고, CIA-SAD와 육군 그린베레가 북부동맹과 함께 탈레반 공격에 나섰다.
2008년 뉴욕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당시 아프간 북쪽에 그린베레 350명, CIA officer 100명, 북부동맹 전사 15,000명이 있었고, 상대편 탈레반(당시 아프간 정부군)은 5만 명으로 추정했다.
CIA 팀 작전 중 하나. 팀이 어느 마을에 접근하면서 한 남자를 만났는데, 남자는 자신의 10대 여동생을 되찾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탈레반 두목이 자기 여동생을 아내로 삼아 납치했다는 것이다. 팀은 남자에게 소형 위치추적장치를 주어 탈레반 두목이 나타나면 신호를 켜라고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어느 날 비상신호가 들어왔고, 팀은 급습해 탈레반 두목을 체포하고 남자의 여동생을 구출해주었다. 가족과 남매의 눈물 어린 상봉이 있었다고 한다.
Tora Bora : 2001년 12월, SAD/SOG와 육군 델타포스가 험준한 아프간 협곡에서 빈 라덴을 추적하고 있었다. 이 task force는 빈 라덴이 탈출할 경로를 차단해달라고 상부에 요청했으나 거절되었다. 궁지에 몰린 빈 라덴이 최후의 방법으로 핵무기 테러를 감행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었다. 언론에 흘러나온 CIA 보고서 일부. [빈 라덴과 경호원들이 토라 보라에서 대놓고 걸어갔으며 그 누구도 일행에게 시비를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빈 라덴은 파키스탄의 종적이 불투명한 곳으로 사라졌다.]
2013년에는 CIA가 파키스탄 영토 내에 있던 탈레반 지도자 뮬라 나지르를 무인항공기 공격으로 죽였고, 나지르의 죽음으로 아프간 내 탈레반 세력이 크게 쇠퇴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에 들어서면서 아프간 비밀작전은 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2016년 10월 말, CIA SOG 상급지휘관 브라이언 호크와 네이트 델레메레가 아프간 작전 중 사망했다. 둘은 오랜 친구 사이로, 탈레반과의 전투에서 서로 의지하며 싸우다 죽었다. 둘은 알링턴 나란히 안장되었다.
예맨 : 2002년 11월 5일, CIA가 관할하는 프레데터가 예멘 오지에서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죽였다. SAD/SOG 팀들이 이들을 추격하다 공중폭격을 부른 것. 한 명은 알카에다 예맨 수장, 한 명은 2000년 미 구축함 콜에 폭탄공격을 가한 용의자였다. 총 7명이 폭사했는데, 그중에는 미국인 카말 더위쉬도 있었다.
2007년 SAD 지상제대에 배속되어 습격작전을 이끌던 더글라스 젬비엑 해병소령이 이라크에서 전사했다. 이때 무전기에서 [5명 부상. 1명 순교(martyred)]라 흘러나왔고, 소령이 부하들을 살리고 죽었다 한다. CIA는 소령에게 intelligence star를 수여했다. 2008년, 이라크 담당 SAD/SOG와 연합특수전사령부 연합으로 시리아에서 작전했다. CBS에 의하면 미군은 일요일에 갑자기 국경을 넘어 시리아 거점을 습격했고, 주요 알카에다 간부가 사살되었다. 2014년 9월에도 CIA는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지상전을 벌이다 목격되었다.
파키스탄 : 프레데터 무인기 정찰 도중, 탈레반을 훈련시키던 파키스탄 특전사 거점에 대한 폭격 허가가 떨어졌다. 타격은 알카에다 8명을 죽이면서 성공적이었다. 표적이 된 알카에다 조직원들은 2006년 비행기 폭탄테러와 2008년 53명이 사망한 이슬라마바드 마리오트 호텔 폭파사건 용의자였다. 특정인물 표적 타격은 계속 되었고, CIA는 프레데터 무인정찰기에 미슬을 장착해 파키스탄 영내 작전을 시작했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이러한 비밀작전과 무인기 공격이 비약적으로 증가해, 현재까지 무인기 공격 이후 2년 동안 미슬 약 80발을 쏘아 400명이 넘는 알카에다와 탈레반을 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더 늘어나, 2010년 7~12월 동안 프레데터가 총 535명의 용의자를 죽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네뷴의 창 작전 - 오사마 빈 라덴 제거작전.
2007년 3월 초, CIA Agent 로버트 레빈슨이 이란의 키쉬 섬에서 납치되었다. 2008년 부시 대통령은 아프간의 준군사조직을 이용해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국경을 건너 이란으로 들어가는 작전을 허가했다. 이 작전들은 테러와의 전쟁 최고순위 목표물이 이란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고, 반대편은 이란 혁명수비대였다.
CIA Memorial Wall : 미 중앙정보국 메모리얼 벽은 버지니아 CIA 본부 현관에 있다. 2012년 5월까지 103개 별이 대리석에 새겨 있었고, 모두 미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들이다. 2017년까지 총 125 star.
Intelligence Star는 미 중앙정보국 최고훈장으로, ‘무덤으로 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자발적인 용기로 걸출한 성과를 영웅적으로 이루었을 때’란 표현을 쓴다. CIA의 상위 훈장은 세 가지가 있는데, 이 Intelligence Star가 가장 높으며, 그 다음이 수훈정보십자상(DIC) 수훈정보상(DIM)이 있다. 이 훈장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CIA 특수작전단 소속이어다. 대표적으로 신원이 알려진 사람들을 열거한다.
2003년 10월 25일, CIA 특수작전 officer 크리스토퍼 뮬러와 윌리엄 칼슨이 아프간 쉴킨 지역에서 알카에다 두목을 습격하다 사망했다. 둘 다 CIA Star를 받았다. 뮬러는 네이비씰 출신이었고 칼슨은 그린베레/델타포스 출신이었다. 이 두 명은 같이 작전하던 현지 아프간 부대원들을 보호다가 전사했다.
그레이스톤 린치 : 1923-2008. 특수활동사단 Officer. 피그만 침공을 지휘. 첫 보트에서 맨 처음 쿠바 땅에 상륙해서 전투 최초 총을 쏘았고, 여러 차례 영웅적으로 2506여단 전투원을 구조했다. 린치는 노르망디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고, 벌지전투에서 싸웠으며, 한국전쟁 단장의 능선에서 싸웠고, 육군 특전단이 되어 라오스에 들어갔으며, 퍼플하트 3, 은성훈장 3, 동성훈장 1 경력이었다. 1960년 CIA에 입사해 1971년 은퇴했다.
펠릭스 이스마엘 로드리게즈 : 1941년 쿠바 태생으로 피그만 침공에 참여. CIA/SAD 팀을 이끌고 볼리비아에 들어가 체 게바라를 잡는데 성공, 베트남전쟁에서 MACV-SOG와 피닉스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니카라과 작전에도 성공적으로 활동했고, 이란-콘트라 사건에도 관여하며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왔다.
더글라스 세이무어 맥키어맨 : 1949년 중국에 들어가 마오쩌뚱이 중국 공산화 과정을 상세하게 정보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발각되자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탈출,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고용인 몇 명과 여러 달에 걸쳐 탈출을 감행해 성공했다. 중국군 추격을 받으며 산악을 통해 티벳으로 향하다 티벳 라샤 부근에서 총격전으로 사망했다. 그가 보고한 귀중한 내용 중에는 북한의 남한 침공도 있었고, 13일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맥키어맨은 한국전 발발 시 중공군의 참전을 예고하며 미국이 준비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안소니 알렉산더 포쉽니 : 1924-2003. Tony Poe로 알려진 officer. 베트남전 동안 라오스에 들어가 군대를 양성하고 전투를 이끌었다. 몽족 지휘관 중 하나로 라오스에서 북베트남군/라오스 공산당과 싸웠다. 전투기술과 승리로 라오스 몽족의 존경을 받았고, 죽은 적의 귀를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죽인 적의 숫자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귀를 담은 백을 비엔티안의 미 대사관에 보냈다. 적에 대한 심리전으로 목을 잘라 적 지역에 전시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 다쳤지만 자기 부하들과 있겠다고 후송을 거부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면서 전쟁을 다루는 미국정부에 환멸을 느꼈고, 1970년 CIA는 그를 라오스에서 빼 태국으로 배치했고, 1974년 퇴사했다. 여러 차례 그의 얘기가 언론에 흘러나왔고, 영화 지옥의 묵시록 커츠 대령 역할의 모델이기도 하다. 은퇴 후에도 자기가 훈련하고 이끈 라오스 몽족을 위한 대변자가 되었으며, 아직도 몽족 사이에서는 숭배를 받는 인물이다.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조지 베이컨 : 라오스에서 싸운 경력의 CIA 암호명 Kayak. 앙골라 내전에서 사망했다.
존 메리맨 : 망명 쿠바인들을 조종사 교관으로 가르쳐 콩고에서 활동하다 타고 있던 T-28이 폭동군에게 격추되어 1964년 중 사망했다.
하워드 필립스 하트 : 아시아 정책에 밝은 철학박사로 힌두어와 우르두 언어가 가능했다. 1965년 CIA에 픽업되어 2년간 버지니아 캠프 피어리에서 훈련받았는데, 역대 가장 총명한 교육생으로 불린다. 1978년 테헤란에서 활동하기 시작해 15년간 CIA를 위해 일했고, 왕정폭동이 일어나 현지에서 체포되었는데, 탈출하려다 실패해 처형당할 뻔했으나, 결국 코란을 받아들임으로써 형벌은 면했다.
윌리엄 프랜시스 버클리 : 1928-1985. 그린베레 장교였다가 CIA Officer가 되었고, 1985년 6월 레바논 이슬람 무장조직 헤즈볼라에 잡혔고, 이슬람 지하드는 윌리엄 버클리를 살해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베이루트 공항으로 가는 길에 쌕이 발견된 것이 마지막.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1991년 유해가 미국에 반환되었다. 알링턴 국립묘지 장례식에 CIA 국장이 참석하여 극단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정보를 수집했다고 치사했다.
프랜시스 개리 파워스 : 1929-1977. CIA 특수활동사단 officer이자 조종사. U-2 정찰기로 소련상공을 날다 격추되어 21개월 동안 소련에 수감, 베를린에서 (루돌프 아벨이라 불린) KGB 대령 빌리암 피셔와 맞교환되었다. 의회 청문회를 통해서 파워스가 매우 영웅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안토니오 J. 멘데즈 : 1980년 3월 백악관에서 카터 대통령, 중앙정보국장, 안토니오 멘데즈가 참석해 CIA Intelligence Star 수여식을 가졌다. 이란에서 벌였던 ‘Canadian caper’ 극비작전에 관한 포상이었다. 멘데즈는 CIA 기술작전 officer로, 제임스 본드 영화의 ‘Q’와 같은 인물이었다. 멘데즈의 가장 뛰어난 기술은 변장 탈출이었다. 1979년 이란 미 대사관의 미국인 52명 인질이 생겼을 때, 미 대사관 직원 6명이 탈출시켜 캐나다 외교관 집에 숨었고, 멘데즈는 가상 영화제작사 Studio Six(인질 6명)를 차렸다. 멘데즈는 캐나다 여권으로 영화제작자로 가장해 이란에 입국해, 6명의 위조여권을 만들어 탈출시켰다.
토마스 윌라드 레이 : 레이와 항법사는 피그만 침공 당시 사로잡혔다가 살해당했다. 레이는 당시 앨러바마 주방위군 조종사. 쿠바에 상륙한 부대에 실탄이 떨어져가고 있었고, 레이는 저속 Douglas B-26를 몰고 재보급에 참가했다가 쿠바 T-33 제트기에 격추되었고, 잡히자마자 쿠바 육군 오스카 페르난데즈 멜 소령이 곧바로 살해했다. 다음 해 시신을 인도 받은 미국은 시신에 들어 있던 권총 총알을 빼냈고, 현재 마이애미 박물관에 그 총알을 전시중이다.
래리 N. 프리맨 : 1992년 12월 소말리아에서 단독으로 미군 상륙을 위한 특수정찰을 수행하다 사망. 프리맨은 CIA 전 델타포스 오퍼레이터였고, 그 전에는 5특전단으로 베트남에 2년간 프로젝트 델타 장거리정찰부대로 참전했다. 베트남 외에도 수많은 극비작전을 수행했고, 델타포스 안에서는 닉네임 ‘SuperJew’로 불렸다.
그렉 보글 : 2001년 10월 9일, 아프간 북부동맹이 포위한 타린 코트 시에서 탈레반이 반격을 시도하자 경무장인 북부동맹이 후퇴했다. 이때 그렉 보글이 들어가 카르자이 장군을 만나고 그린베레 팀을 유도해 들였다. 11월 그렉은 근처 마을을 돌아다니며 탈레반과 싸울 병사를 모집했다. 11월 17일 대규모 전투가 작렬했고, 당시 모은 신병들이 방어점을 버리고 도주하자 그렉은 지휘권을 인수하고 “만약 죽어야한다면, 남자답게 죽자!” 소리쳤다. 그 전투의 와중에 그렉은 중앙정보국장 조지 터넷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로에 선 순간입니다. 지금 카르자르의 거점이 적에게 넘어가면 파슈툰족 저항군의 운명이 모두 끝납니다."
12월 5일, 그렉은 고문관으로 전투를 조력하고 있었는데, 이때 공중폭격 폭탄 한 발이 오폭으로 카이자르 진영에 떨어졌고, 그렉은 몸을 던져 카이자르의 목숨을 건졌고, 그렉은 사망했다. 이 당시 같이 들어갔던 조지 터넷은 아프간 작전에 110명의 CIA officer와 그린베레 316명, 연합특수전본부 병력이 참가했다고 회고했다.
Johnny Micheal Spann : 추후 내용. 영국 기자에게 "너 IRA냐?“ 농담을 했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기자가 폭동 촉발 장면을 증언했다. 탈레반 무리가 스팬을 둘러싸고 "Why are you here?" 묻자. 스팬이 "To kill you." 답했다.
스팬의 가족은 나중에 그 성채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때 스팬의 마지막 장면을 목격한 아프간 의사가 가족에게 마지막을 전했다. [마이크는 퇴각하거나 도주해야 했어요. 그러나 대신 자리를 지키며 싸우기 시작했고, 총알이 다 떨어질 때가지 AK를 쏘고, 그 다음에 권총을 뽑아 쐈습니다.]
Operation Hotel California : 2002년 특수활동사단 이라크 작전에서 여러 명이 Intelligence Star를 받았다. 2002년 이라크 침공 전 SAD 팀들이 앞서 들어갔고, 이어 육군 10특전단 들어가 이라크 북부 연락제대를 형성했다. 이 제대는 쿠르드족 페쉬메르가 무장단체를 지원해 이라크 북부의 알카에다 하부조직을 격파했고, 쿠르드족에게 악몽의 피해를 입힌 화학무기 공장을 파괴하고 수많은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했다. 이라크에 항공폭격을 부른 것은 이들이 처음이다. 그린베레와 함께 대전차미슬을 이용해 이라크군 기갑부대를 격파했고, 사람 후세인을 추적은 했으나 사살은 실패했다. 원래 미 4사단이 북부로 들어가기로 했으나 터키가 영토 통과를 거절했고, 이라크 북부는 특전단과 쿠르드족 페쉬메리가가 전부였다.
네이프 채프먼 : 미 육군 그린베레로 CIA 팀의 통신을 담당하다가 전사했고, 아프간에서 전사한 첫 미군 현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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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첫댓글 작전에 종사한 당사자들은 일반 보병이나 다른 이들이 모르는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지만 그들 역시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는 장기판의 말이지요.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고... 가장 핵심인 누군가는 과연 누구인지....
긴급지원을 온 특전단이 카메라를 발견하자 얼굴을 가리고 차에서 내리면서 취재팀과 언쟁을 벌인 내용.
특수전 부대원: 카메라 꺼요.(Turn the camera off)
취재팀: 당신들은 우리에게 촬영금지를 요구할 권한이 없소(You have no right, You have no authority) 여기는 미국땅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들이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없소.(You are not in the America)
특수전 부대원: 다시 말하겠소, 카메라를 꺼주시오.(Please turn the camera off)
몸을 피하고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달려오는 '데이브 타이슨'을 발견하고 CIA요원이라고 직감한 독일 취재팀이 제일 먼저 물어본 말
"미국인입니까?(Are you american?)"
"맞소(Yes)"
전화기를 빌려서 지원을 요청하는 데이브 타이슨의 목소리와 표정이 상당히 침착하고 가라앉은 상태로 흥분하지 않은 상태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더군요.(아마 저같았으면 목소리 톤부터 올라가고 말이 빨라졌을텐데...)
과거 특수전사에서도 여러번 나왔었던 내용이지만 각군 여러 부대 또는 특수부대의 정보,작전 담당대원의 근접 항공 지원 작전시 지휘부 , 조기경보기, 전선통제기 또는 폭격기 조종사와의 통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방석 화기 관제 장교가 없는 기종의 경우 전투 조종사가 항공기 조종과 정확한 공격 임무를 동시에 수행해야해서 통신이 원활하지 않거나 또는 임무량이 많거나 피아식별이 어려운 경우, work load를 소화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경우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