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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시대-마산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2007.02.04 17:52
태윤아배(kimgija) : 카페 매니저
http://cafe.naver.com/toho/13
3·15마산의거를 계기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진 직후였다. 1960년 5월 30일자 마산일보(현 경남신문) 4면에는 홍중조 전 경남도민일보 논설위원(58)이 쓴 ‘사회참여의 정당성-예술가는 본연의 자세로’라는 장문의 글이 실려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래 광고란의 오른쪽 귀퉁이에는 ‘공고’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6·25사변 당시 보도연맹 관계자로서 행방불명된 자의 행방과 그의 진상을 알고 관계당국에 진정코져 하오니 유가족께옵서는 좌기에 의하여 연락하여 주시옵기 자이경망하나이다. /임시 연락사무소 : 마산시 중앙동 1가 1의 1번지(마산자유노조 사무실 내)
/신고기간 : 자 단기 4293년 5월 25일, 지 단기 4293년 5월 31일
/필히 인장을 지참하시옵기 바랍니다.
/단기 4293년 5월 25일 노현섭(盧玄燮) 근고(謹告-삼가 아룀)”
최초의 학살사건 기록
이것이 바로 마산 역사상 최대비극이었던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최초의 흔적이다. 학살이 있은 지 10년만의 일이요, 지금으로부터 약 45년 전의 일이다.
해방 후 마산지역 노동운동의 신화 같은 인물이었던 노현섭씨는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 직후부터 바로 이 일에 착수했다. 그는 당시 혼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시내를 누볐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국회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다. 거창·함양·산청을 비롯한 전국의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에 관한 긴급결의안이 상정된 것이다. 그때가 5월 18일·22일·23일이었다. 이에 따라 국회는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 최천(崔天)·조일제(趙一載)·박상길(朴相吉) 등 3명의 의원을 5월 31일부터 6월 10일까지 11일간 경남일대에 보내 진상조사에 나서게 된다. 이 조사반이 밝힌 내용을 보면 마산에서 188명의 양민이 학살된 것으로 돼 있다.(제35회 국회 임시회 속기록 제45호 부록)
그러나 이 조사기록은 “현지 신고에 의한 것”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고, “사건을 조사하는 기간과 인원이 극히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지방의 조장행정기관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특히 경찰기관은 4·26혁명(이승만이 물러난 날짜) 이후 완전히 인사교류가 되어 협조조차 얻지 못했다”며 한계를 털어놓고 있다. 또한 “피해자 측도 9년에서 10년 전의 일이므로 유족 및 당시의 생존자인 소수만이 그 사실을 증언할 뿐이므로 전체적인 피해의 명확한 수적 파악에 이르지 못하였음은 심히 유감지사이며, 사건의 전모와 피해에 대한 전체적이며 정확한 실정과 숫자를 파악하기에는 상당한 시일과 인원이 요할 것으로 사료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진상보고서는 결론에서 “지금까지도 계속하여 각 지방에서 본 조사위원회에 보고되어 오는 피해수는 증가일로에 있다”고 밝혀 완전한 조사가 되지 못했음을 자인하고 있다.
아쉬웠던 국회 진상조사
이로 미루어 볼 때 마산의 188명이라는 기록은 앞서 인용한 노현섭씨의 광고에 따라 단 일주일동안 자발적으로 접수된 인원에 불과하다는 추측을 낳게 한다. 특히 요즘처럼 신문의 독자가 많지 않을 때인데다, 특히 양민학살 희생자들의 유가족이 대부분 아녀자들이었다는 점도 광고를 접하지 못한 유가족의 숫자가 훨씬 많음을 짐작케 한다. 또 마산 시가지가 아닌 창원 등 외곽 농촌지역 유가족들은 아예 이런 소식을 접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국회 진상조사특위는 정부에 다음과 같은 건의안을 제출했다.
①정부는 조사단에서 조사한 지역뿐 아니라 이 사건조사를 위한 군·경·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여 양민의 생명과 재산상 손해를 끼친 악질적 관계자 및 피해자와 피해상황을 조속한 시일 내에 조사할 것.
②양민의 생명과 재산상 피해를 끼친 악질적 관련자의 엄중한 처단과 피해자에 대한 피해제도를 설정하기 위하여 기존법률에 의한 일사부재리 원칙이나 시효의 저촉규정에 관계없이 특별법으로 가칭 ‘양민학살사건 처리 특별조치법’의 제정을 촉구한다.
그러나 국회의 이같은 노력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듬해 5·16군사쿠데타와 함께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진상규명을 외치던 노현섭씨는 오히려 반혁명사범으로 몰려 구속된다. 박정희 독재는 그를 꼬박 10년간 감옥에 붙잡아 놓았다.
독재도 무너졌건만
그런 박정희도 79년 부마민주항쟁을 계기로 김재규의 총에 맞아 쓰러졌고, 87년 6월항쟁에 이어 세 번째 민간정부가 들어섰지만 45년전 노현섭씨가 소리높여 외치던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노현섭씨는 수형생활의 후유증을 앓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55년 전 우리의 국군과 경찰에 의해 남편과 아버지·어머니를 잃은 유족들은 아직도 숨을 죽인 채 죄인처럼 살고 있다. 이들의 자녀는 연좌제에 의해 20년간 취직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고통을 겪었다.
이들의 통한은 누가 풀어줄 것인가.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난 탓으로만 돌리고 말 것인가. 반세기 전의 오래된 일이라고 외면해버릴 것인가.
일제강점기 ‘위안부’로 동원됐던 우리 할머니들에 대해서도 한국정부가 나서 보상금을 대신 지급하고 매달 생활안정자금을 대 주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에 강제징병됐던 피해자들도 유족회를 만들어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의 나라 군인도 아닌 우리의 군인과 경찰이 자행한 이 미증유의 비극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끄러우니 그냥 덮어버리자 할 것인가. 이거야 말로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보도연맹 결성 배경
이승만의 좌익 컴플렉스는 지독했다. 46년 10월봉기와 47년 2·7투쟁, 48년 제주 4·3봉기를 유혈진압하고 단독정부 수립에 성공한 이승만은 그해 10월 여순사건을 다시 무력진압한 후 더욱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좌익소탕작전에 나서게 된다. 특히 그는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상쇄하기 위해 정치적 반대세력을 무조건 좌익으로 몰아 처단하기에 이른다. 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49년 한해동안 무려 11만8621명을 이 법에 의해 체포하거나 처형했고(‘6·25살상’다시본다, 권영진, <역사비평>90년 봄호), 49년 10월에는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어 전국에서 30만 명을 여기에 가입시킨다.
보도연맹 결성목적은 전향한 좌익세력을 통제·회유하는 것이었으며, 활동목표는 대한민국정부의 절대지지, 북한괴뢰정권 절대반대와 타도, 공산주의사상 배격·분쇄 등의 강령으로 요약된다. 강령에 따라 보도연맹 참가자들은 전향의 진실성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좌익분자들을 색출하여 밀고하고 자수를 권유하는 등 반공활동을 하기도 했다.
또 49년 11월부터는 미국의 협조를 얻어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이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도 무수한 사람들이 빨갱이 협조자·동조자라는 이름으로 희생됐다. 이승만 정권의 이 같은 노력으로 한국전쟁 이전까지 한국의 좌익조직은 거의 와해됐다.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와 국군은 사흘만에 서울을 버리고 후퇴하면서 한강철교를 폭파함으로써 순진하게 정부 발표를 믿은 서울시민들을 고립시킨다.
왜 얼마나 죽였나
7월 14일 맥아더에게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한 후 이승만 정부가 취한 행동은 경찰과 CIC(특무대)를 중심으로 후방에서 정치적 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치적 공세는 전쟁 전부터 계속해온 좌익과 반대세력에 대한 억압의 연장이었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희생이 초래됐다.(권영진의 글)
이에 따라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이 서울을 제외한 남한전역에서 벌어진 보도연맹원 집단학살이다. 서울은 사흘 만에 점령당했기 때문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몇 명이 죽었고 몇 명이 살았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다만 전국의 보도연맹원이 30만명에 달했고, 그중 미처 학살이 이뤄지지 않았던 서울이 1만9800여명이었다고 하는 기록(동아일보 50년 5월 5일자)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
왜 죽였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이승만 정권은 전향한 좌익이라 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는 인식에 따라 이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이들 보도연맹원이 적군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자로 나선 것도 집단학살의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시작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7·8월을 거쳐 9월 하순 집단학살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됐다.
7월 21일 경북 문경군 호계면 별암리의 경우 주평 앞산에서 약 200여명이 콩볶는 듯한 총소리와 함께 죽어갔다. 문경군 영순면 포내마을 뒤 야산에서도 300여명이 역시 이렇게 죽었다.(해방후 최대의 양민참극 보도연맹사건, <월간 말> 88년 12월호)
마산 학살사건의 증언
마산은 경북 문경보다 훨씬 많은 1681명이 희생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마산이라는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이 집단으로 희생된 사건이다.
마산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50년 7월 15일 일제히 소집령이 떨어지면서 시작됐다. 이 소집날짜는 당시 생존자 및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과 60년 4·19혁명 직후의 언론보도 기록이 모두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거의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홍중조씨(전 경남도민일보 논설실장·재야사학가)가 보관해 온 60년 6월초 <대구일보> 보도는 이렇게 유가족들의 주장을 전하고 있다.
“[마산지사] 인접 거창·함양·산청 등 경남일대의 양민학살사건이 보도됨과 아울러 이곳 마산에서도 6·25 당시 1,500여명을 수장(水葬) 내지 총살한 사실이 백일하에 폭로되고 있다. 현재 유가족들은 당시의 학살자들을 찾아내어 규탄해 달하는 요구를 내건 ‘데모’까지 할 기세를 보이고 있는데, 유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83년(단기=서기 50년) 7월 15일 군(CIC·HID)과 경찰에서는 시민극장에서 시국강연회가 있다고 보도연맹 가입자를 포함한 양민들을 집합시켜 삽과 괭이 등을 들려 도로보수공사를 하러 간다는 구실로 추럭(트럭)에 실어서는 창원군 북면 뒷산과 진해 앞바다에서 각각 수장과 총살을 감행했다 한다.(하략)”
남편 이용순씨(당시 25세)를 보도연맹사건으로 잃은 황점순씨(80·마산시 합포구 진전면 곡안리)도 이날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음력 6월 초하루(양력 7월 15일)였다. 점심 때가 좀 지났는데 지서 앞으로 보도연맹원들을 불렀다. 남편은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마산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다시 바다로 끌려 나가 수장당했다고 한다.”
황 할머니는 그날 이후 5~6년간 남편을 기다렸다고 한다. 풀잎에 스치는 바람소리만 나도 남편이 오는 걸로 생각, 문밖을 서성거렸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후 할머니는 마산형무소까지 함께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사람이 전해준 날짜(음력 7월 10일=양력 8월 23일)에 남편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남편은 아무 것도 모르고 죽었어. 빨갱이 심부름도 안했고 삐라도 안돌렸는데 억지로 가입하라고 해서 순진하게 시키는 대로 했다가 그런 일을 당한거야.”
할머니는 그때 남편을 잃은 데 이어 두 살 바기 아들까지 미군의 무차별 총격에 의해 잃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 후 50년 세월을 자식 하나 없이 혼자 살아오고 있다.
황 할머니가 사는 곡안리에는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형무소까지 끌려갔다가 살아나온 사람도 아직 생존해 있다. 김영상씨(78)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김 할아버지는 당시 진전면 지서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한 시점부터 형무소 생활까지 비교적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유일한 생존자 김씨의 증언
김영상씨(85·마산시 합포구 진전면 곡안리)는 지난 50년 7월 보도연맹원으로 소집돼 동네 사람 15~17명과 함께 마산형무소까지 끌려갔으나 부인 변정이씨(76)와 가족·친지의 온갖 노력에 의해 학살을 면했던 사람이다.
물론 김씨 말고도 일제 때 면장을 지냈던 김면장 등 5명이 풀려났지만 지금은 김씨만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곡안마을의 보도연맹 피학살자 미망인들은 김면장이 일러준 날짜에 맞춰 제사를 지낸다.
“그 사람들을 보면 항시 죄스런 마음이 들어. 나는 살아났으니까…. 죽지 못한게 미안하지.”
김씨가 진전지서의 보도연맹원 소집에 응한 것은 50년 7월 15일 오후 1시쯤. 김씨는 이날 아침부터 오서리 다리 밑에서 순경의 지휘에 따라 소방대 방위훈련을 받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점심시간이 되자 순경은 청년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소방대 청년들을 해산시킨 것을 안 지서장은 노발대발했다. 당장 다시 소집하라는 것이었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보도연맹원들을 모두 붙잡아 마산형무소로 보내기로 돼 있었던 것이다. 진전지서의 강모·박모 등 순경들은 다시 각 마을마다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다.
진전면에서만 70여명의 청년이 지서 앞에 모였다. 여름이라 대부분 땀에 절은 삼베바지 차림이었다. 대충 모일 사람이 다 모인 것으로 판단되자 갑자기 경찰관들이 총을 들고 이들을 포위했다. 그리곤 화물트럭에 이들을 모두 태웠다.
“뭔가 평소완 다른 분위기였어. 직감적으로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몇 달 전 학교에 사람들을 불러놓고 “죄가 있거나 지서에 잡혀간 적이 있는 사람은 손들어라”고 했을 때 순진하게 손을 들었던 게 화근이었다. 모든 죄를 삭감해 줄 테니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것이었다. 그땐 그냥 좋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형이 아우에게 가입을 권유한 경우도 있었다. 해방 후 건국운동을 하면서 삐라 한번 붙여보지 않은 청년이 없었던 터라 동네 청년들은 모두 가입대상이 됐다.
트럭에 실린 김씨는 그길로 마산형무소에 수감됐다. 형무소는 마산·창녕·함안 등지에서 잡혀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감방은 들어갈 데가 없어 앞마당에서 며칠을 보냈다. 땡볕이든 비가 오든 상관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함께 들어온 사람들이 무더기로 감옥을 빠져나갔다. 김씨가 있던 감방에는 15명 중 2명만 남았다. 나가는 사람들은 “이제 살았다”면서 즐거워했다. 아무래도 숫자가 많은 편에 섞이는게 유리할 것 같았다. 김씨는 간수에게 “내 이름은 왜 안 부르느냐”며 소리를 쳤다. 간수는 원인 모를 웃음을 짓고는 그를 남겨두고 문을 잠궜다.
그러나 그때 나간 사람들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다. 마산 앞바다에 수장됐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모두 억울한 죽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농촌사람들을 잡아다가 이승만이가 다 죽인 것이다.
창포동 해안의 목격자 윤씨의 증언
윤모씨(99년 증언 당시 69세·이후 사망·마산시 합포구 창포동)는 당시 스무살이었다. 당시 그는 철도경찰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전쟁이 나고 한달쯤 됐을까. 아침 출근길에 만난 친구가 “오늘 시민극장에 모여 띠 메고 군대간다”고 말했다. 그게 보도연맹원 소집이었다. 국제극장(현 강남극장)에도 소집을 했다. 그때 끌려가 죽은 친구들만 해도 12명이다. 군에 입대해 전사한 친구가 8명이었는데 그보다 많은 숫자가 아군과 경찰에 의해 죽은 것이다.
처음 소집 후 20여일이 지난 어느 날 점심 무렵이었다. 밥을 먹으러 창포동 집에 왔다가 병원을 향해 나서는데 갑자기 GMC트럭이 줄줄이 해안가로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동양주류 건물 벽에 피난민들이 죽 기댄 채 누워 있었는데 헌병들이 이들을 일으켜 쫓아버렸다.
트럭이 열 몇대는 족히 돼 보였다. 트럭에서 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쓴 사람들이 내리는데 모두 손을 뒤로 묶었고, 앞 뒤 사람의 허리에도 로프가 묶여 있었다. 옷은 모두 파란 죄수복을 입었던 것 같았다. 그때 옛 유원회사 앞 뱃머리에 미제 상륙함(LST) 두척이 왔다. 1개 연대병력이 탈 정도로 큰 배였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곧장 LST에 옮겨 탔다. 나중에 들으니 괭이바다에서 총살 수장당했다고 했다. 괭이바다까지 끌려갔다가 천우신조로 살아나온 선배가 있어서 그 내용은 잘 안다. 철도병원에서 만난 사람인데 이(李)씨였고 수영선수였다. 윤씨도 그에게 수영을 배웠다. 50년대 말 부산에서 윤씨가 대학에 다니던 중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군인들은 오랏줄을 묶은 채 사람들을 발로 차서 바다에 처넣은 후 무차별 총질을 했다고 한다. 물위로 머리를 내미는 사람은 집중사격을 받았다. 그때 운 좋게도 그의 손을 묶은 오랏줄에 총알이 명중했다. 물속에서 허리에 묶인 줄을 풀고 LST 밑으로 숨어들어 키를 잡았다. LST는 그 후로도 한참동안 바다 위를 빙빙 돌면서 총질을 했는데, 상황이 끝난 후 군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헤엄쳐 설진리 해안에 닿았다. 그리곤 밤새도록 걸어서 진동의 집에 도착했고, 다시 잡히지 않기 위해 부산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그는 윤씨보다 일곱 살이 많았는데, 평생 빨갱이 취급을 두려워하며 살다 작년에 부산에서 숨졌다.
윤씨는 이 증언을 하면서도 한사코 “아직은 밝힐 시기가 안됐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당시 극우단체와 경찰 관계자들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신문사가 어떤 변고를 당할지 모른다며 걱정했다. 그러나 영문도 모른 채 젊은 남편을 잃고 평생을 수절하며 살아온 미망인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오히려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을 빼앗기고도 평생을 죄인처럼 살아온 그들 미망인마저 죽고 나면 누가 그 원혼을 풀어줄 것인가.
제삿날이라도 알 수 있다면
30대 남자 한 명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창녕군 계성면이 고향인 우모씨(33)는 “경남도민일보에 보도연맹 학살사건이 연재중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며 “우리 할아버지도 그때 트럭에 실려 마산으로 끌려간 후 실종됐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 돌아가셨는지 제삿날이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울먹였다.
며칠 후 이번에는 기자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가 끌려가던 당시의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반색을 하며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느냐”고 반문해왔다. 그가 말하는 ‘좋은 소식’이란 언제·어디서·무슨 이유로 학살을 당했어야 했는지에 대한 답변이었다. 속 시원히 대답을 못해주는 게 못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수많은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트럭에 실려 끌려가던 할아버지는 논에서 일하고 있는 큰아버지를 발견하고 “나, 마산 갔다 올께”하고 소리쳤다. 그것이 생전에 남긴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대문을 잠그지 않았고, 방문까지 열어놓은 채 주무셨다고 한다.
열 두 살 때 부친을 잃은 우씨의 아버지도 지금까지 왜 그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군인과 경찰에게 무참히 학살을 당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아버지가 알고 있는 사람만 해도 당시 같은 마을에서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가 실종된 사람이 10여명에 이른다. 이들의 후손은 모두 사망일을 몰라 9월 9일 제사를 지낸다.
우씨는 당시 마산 앞 괭이바다에서 보도연맹원들이 수장당하던 정황을 듣고는 목이 메여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곤 이런 부탁을 남겼다.
“혹시 지금이라도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진다면 꼭 좀 알려주세요. 저는 물론 아버지도 적극 참여하실 겁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할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는 게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니까요.”
“우리 신랑 소식 갖고 왔어?”
“면에서 나왔다고? 우리 신랑 소식 갖고 왔어?”
마산시 합포구 진동면에 있는 노인복지시설 애양원에서 만난 심서운 할머니(77)는 기자를 보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낯선 사람만 오면 그렇게 물어요. 헤어진 지 50년이 다됐는데도 할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은가 봐요.”
애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6년 전 면사무소 직원이 데리고 왔는데, 그때만 해도 시체 같은 몰골이었죠. 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예요.”
“그때 세 살 먹은 딸이 병에 걸려 죽기 직전이었어. 남편이 보도연맹 훈련받으러 간다고 하길래 ‘아이가 아프니까 가지 말라’고 했지. 그랬더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걱정하지 말라는 거야. 그러면서 ‘내가 죽더라도 늙어서 진동에 가면 먹여주고 재워주고 할 텐데 뭐가 걱정이냐’고 하데? 그 사람 말대로 지금 먹여주고 재워주는 진동에 와있지 뭐야. 여기 양로원이 생길 줄 어떻게 알았는지….”
심서운 할머니의 남편 이수천씨(당시 28세)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무식한 농사꾼이었다. 해방 후 혼란기에 좌익활동가들이 마을에 와서 밥을 달라고 하여 딱 한번 그들의 본거지에 져다준 것뿐이었다고 한다.
그 일로 남편은 수없이 지서에 불러 다녔다. 그러던 중 전쟁이 터지자 진전면 지서 앞으로 불러 모으더니 이튿날 마산으로 끌려갔다는 소문을 들었다.(할머니는 지금도 면(面)사무소와 지서를 곧잘 혼동했다.) 남편이 지서에 붙들려 있던 날 밤 앓던 아이가 끝내 죽고 말았다. 지서에서 그 소식을 들은 남편이 “나도 죽을 텐데 애도 죽었는가배…”하며 꺼억꺼억 울더라는 소식을 누군가 전해줬다. 할머니는 형무소에서 살아나온 사람으로부터 유월 열이렛날(양력 50년 7월 31일)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날에 맞춰 제사를 지냈다. 죽은 곳은 마산에서 부산 구포 가는 길에 있는 어느 산골짜기라고 했다.
“여기(양로원) 있어도 그 사람 생각밖에 안나. 원통한 걸 말로 다하겠나. 하루는 어떤 남자가 왔는데 그 사람과 하도 닮아서 나이를 물어봤지.”
그러던 할머니는 이제 시력까지 상실했다. 그리고 저승에서 남편을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다.
“사진이라도 한 장 있었더라면”
마산시 합포구 진전면 곡안리 이귀순 할머니(80)도 남편 황치원씨(당시 22세)를 보도연맹 사건으로 잃었다. 50년 7월 15일 동네사람 15명과 함께 훈련 받으러 간다고 집을 나선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나갈 때 그랬어. ‘들녁에 메어 놓은 소도 데리러 와야 하니 어서 갔다 올께’하고 말이야. 그런데 지금까지 안돌아와.” 할머니의 눈에는 하얀 이슬이 맺혔다.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어. 군대도 안가고 좋다고 해서 가입했는데 왜 죽였는지 몰라.”
결혼한 지 3년만의 일이었다. 마산 앞바다에서 수장을 당했다고 했다. 그 후 할머니는 지금까지 딸 둘을 키우며 혼자 농사를 일구고 살아왔다.
“나중에 들으니 빨갱이어서 죽였다고 하데? 빨갱이 아니었어. 초등학교밖에 안나온 농사꾼이 빨갱이가 뭔지나 알았겠어?”
목소리를 높이는 할머니에게 지금 바라는 게 뭐냐고 물었다.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였는지나 속 시원히 알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사진이라도 한 장 있었으면 좋을 텐데. 난리통에 불에 다 타버렸어.”
이들 할머니의 남편이 수장된 괭이바다와 가까운 해안에는 당시 수많은 익사체가 부패한 상태로 떠올랐는데 모두 손이 꽁꽁 묶인 채였다고 한다. 그때 살이 올라 큰 대구가 특히 많이 잡혔는데 모두들 이를 ‘사람고기’라 불렀다고 한다.
그때의 괭이바다는 지금 어떤 흔적이 남아있을까.
학살의 흔적을 찾아
50년 7월 15일 마산과 창원·함안·창녕 등지에서 160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을 마산형무소로 잡아넣은 우리 군인과 경찰은 약 1주일에서 보름에 걸쳐 분류작업을 벌인 후 연맹원들을 어디론가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군인과 경찰의 가족이 빠졌다. 각종 ‘빽’을 동원하거나 돈으로 구워삶은 사람들도 학살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나머지는 영문도 모른 채 GMC 트럭에 실려 갔다. 군경은 이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앞 뒤 사람의 허리를 나일론 줄로 묶었고 양손도 결박했다. 얼굴에는 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쒸웠다. 마산 창포동 해안가로 끌려간 이들은 다시 LST(상륙함)에 실렸다.
LST는 엔진소리를 최대한 줄인 채 한참을 나아갔다. 약 한 시간이 지났을까. 속도가 서서히 줄어드는 듯 싶더니 공포에 질린 연맹원들을 뱃전에 세운 후 소총 개머리판과 군화발로 바다 속에 처넣기 시작했다.
‘타 타 타 탕’하는 총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맹원들을 모두 바닷물에 밀어넣은 군경은 LST를 서서히 선회하며 물 위로 고개를 내미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조준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푸른 바닷물이 핏빛으로 변해갔다.
이것이 지금까지 취재를 통해 나타난 마산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의 윤곽이다. 물론 일부는 진해와 창원 북면·진전면 봉암리 등의 산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제시 장목면과 마산시 구산면 사이의 ‘괭이바다’에서 이런 식으로 집단수장 당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그때의 괭이바다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5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어떤 흔적이라도 남아있지는 않을까.
해안에 떠밀려온 시체들
구산면 옥계리에서 가장 먼저 만난 한 할머니는 “그해 여름 거제로 피란을 갔다가 돌아오니 나일론줄에 묶인 시체가 해변 곳곳에 떠밀려 와 있었다”고 말했다.
안녕마을의 최모씨(여·84)도 “우리동네와 옥계리 사이에 일본사람 어장막이 있던 큰골이라는 해안에 시체가 수없이 떠내려왔다”면서 “당시 동네사람들이 그 자리에 시체들을 대충 한자리에 묻었다”고 말했다. 최씨는 “시체를 묻을 때 순경들도 왔었는데, ‘귀신 나온다’며 조총을 쏘기도 했다”고 기억을 살려냈다.
같은 마을 노모씨(76)도 “거제도에 피란갔을 때도 지세포 앞 섬에 보도연맹원 시체를 본 적이 있었다”면서 “거기서 본 시체에는 발에 무쇠가 달려 있었던 것 같은데 큰골에 떠내려 온 시체에는 그런 게 없었다”고 말했다.
옥계리 이모씨(51)는 “약 10년전 그곳 어장막에서 홍합양식하는 일을 도왔는데, 그때 땅위로 노출된 유골을 수없이 봤다”면서 “노인들로부터 파도에 떠밀려온 보도연맹원들의 유골이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후 방파제를 쌓으면서 포크레인으로 흙을 들이붓는 바람에 골짜기의 유골이 다시 묻혀버렸지만 지금도 파보면 유골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난포마을 선창에서 벼를 말리고 있던 조모씨(여·84)는 “그때 우리 마을에도 보도연맹 시체가 떠내려 왔다”면서 “그중 장가도 안간 듯한 젊은 청년 한명을 사람들이 마을 뒤 허이산 아래에 묻어줬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도 그 무덤 옆을 지날 때마다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면서 “그런데 이제 와서 왜 그런 걸 묻느냐”고 되물었다.
“불쌍하게 죽었으니 왜 그렇게 사람들이 죽었는지 이유라도 규명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하니 “어이구. 그래. 그래야지. 참 잘하네”라고 맞장구를 쳤다.
피학살자의 무덤
심리에서 만난 어민 정모씨(88)는 당시 군에 입대하지 않은 대신 피란민들을 실어 나르는 문관으로 일했다.
“지금 심리 어촌계 냉동창고 옆 해안에 아홉구의 시체가 한꺼번에 묶인 채로 떠내려 왔어. 아마 경인년 음력 7월 초순쯤(양력 8월 14~20일)이었을거야.”
시체의 나이는 20~30대였고 허리와 팔은 나일론줄에 묶여있었다. 마을사람들이 시체가 발견된 바로 그 뒷산에 매장하려 했으나 정씨가 반대했다. 동네 안에 묻는다는 게 꺼림칙하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마을사람 30여명이 동원돼 시체를 맞은편 해안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범바위 밑에 시체를 눕혀놓고 그대로 흙을 덮었다.
“시체를 묶은 로프는 손가락 굵기정도 됐는데, 나일론이어서 지금까지 안 썩었을 거야.”
“그들의 시체가 보도연맹원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나요?”
“왜 몰라? 내 사촌종형도 보도연맹으로 거기서 죽었는데. 노현섭이와 어울려 다니다가 그렇게 됐어.”
60년 4·19혁명 직후 보도연맹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전국피학살자유족회장까지 했던 노현섭씨의 이름이 할아버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노씨 역시 보도연맹원으로 소집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사람이다.
정씨는 “산너머 원전에도 수없이 시체가 떠내려왔다”면서 “거기 떠내려온 시체는 서너 명씩 묶여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9명의 보도연맹원을 묻은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곳으로 갔다. 심리에서 원전으로 가는 도로 위에 위치한 피학살자의 무덤은 봉분도 없이 땅이 푹 꺼진 상태였다. 손으로 흙을 걷어내면 금방이라도 유골이 보일 것 같았다. 그는 “그들을 묻을 때 나도 함께 있었는데, 대충 흙을 덮는 식으로 묻었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 이렇게 땅이 꺼졌다”고 말했다.
역시 시체가 줄줄이 떠내려 왔다는 원전마을은 학살현장인 괭이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학살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수백여 명의 낚시꾼과 관광객이 바다를 향해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9명의 보도연맹원이 떠내려 왔다는 심리 해안과 역시 수많은 유골이 묻힌 옥계리 큰골에도 온통 낚시꾼이 들끓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의 참혹했던 역사를 알고나 있을까.
“그때 괭이바다에는 살찐 대구가 많이 잡혔는데 어민들은 한동안 대구를 안먹었어. 사람고기를 먹어서 그렇게 살이 찐 걸로 생각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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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산창원 역사공부카페 - 김주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