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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 연구는 sola gratia 님이 올리신 '독서모임회'에서 진행되었던 '주제토론' 시간에 나누었던 내용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여주신 성경을 통하여 내세의 신비로움에 접근할 수 있고 믿어 알 수 있지만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갱신' 이든 '재창조' 이든 이는 기독교의 상위 교리가 아니므로 다른 지체의 인격을 손상시키면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범위 내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건설적이며 덕을 세우는 나눔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연구
갱신인가 재창조인가?
요한계시록 21장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Καὶ εἶδον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ὁ γὰρ πρῶτος οὐρανὸς καὶ ἡ πρώτη γῆ ἀπῆλθαν, καὶ ἡ θάλασσα οὐκ ἔστιν ἔτι.
요한계시록 21장 1-8에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the new heaven and new earth) 및 새 예루살렘(the new Jerusalem)의 환상을 본다. 그와 동시에 처음 하늘과 땅과 바다는 사라져 다시 볼 수 없게 된다. 이는 현 우주와 역사의 종결이요 일면으로는 영원 천국 역사의 개시이기도한 이중성을 가진 대종말 사건의 절정 중의 절정이다.
‘새로운’ - kainvos vs nevos
‘새’ 에 해당하는 헬라어에는 네오스와 카이노스가 있다. 네오스는 현재의 순간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가지며, 과거나 미래와 비교하여 지금이란 의미를 가진다. 네오스는 또한 기원적인 의미해서 ‘젊은’ 세대를 의미한다. 카이노스는 질이나 형태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없었던 것, 신기한 것, 특별한 것, 상식적이 아닌 것, 듣지도 않았던 것 등을 말한다. 예를 들면 연필은 일반적인 필기도구이다. ‘새로운 (네오스) 필기도구’ 라고 하면 공장에서 최근에 만든 연필을 의미하지만 ‘새로운 (카이노스) 필기도구’ 는 연필이 아닌 다른 필기도구 예를 들면, 볼펜 혹은 사인펜등을 칭한다.
신약에서 네오스는 종말론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다. 네오스는 구원의 완성이란 관점에서가 아니라 현재에 나타난 구원에 실체와 관련되었다. 예를 들면, 현재의 기독교인들의 믿음과 생활을 위한 새로운 표준이 되는, 이전에 없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네오스에 해당한다. 네오스는 새 반죽 (고전 5:7) 새 포도주 (마 9:17; 막 2:22) 등에서 사용이 되었다. 새 사람 (골 3:10) 과 새 계명 (히 12:24) 에서는 네오스는 새 시대에 속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이 두 구절에서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카이노스 개념도 포함하고 있다. 딛 2:4 에서 네오스는 ‘젊은’ 여이란 의미로 사용이 되었다.
신약에서 카이노스는 구원의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전적으로 변화된 기적적인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카이노스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완성적인 의미를 가진다. 새 계명 (요 13:34); 새 사람 (엡 2:15);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아라, 새 것이 되었다 (고후 5:17),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 벧후 3:13); 새 예루살렘 (계 3:12; 21:2); 하나님의 나라에서 마시는 새 포도주 (막 14:25); 새 이름 (계 2:17; 3:12); 새 노래 (계 5:9; 14:3); 보아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 (계 21:5) 등에서 사용된 것이 카이노스이다.
구약 성경에 예언된 새 하늘과 새 땅
이사야 65장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
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66장
22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3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
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선지자 이사야는 새롭고(사65:17), 기쁘고(19절), 안전하고(20-23절), 평화롭고(24-25절), 무한하고, 우주적이고, 그리고 예배적인(사66:23) 장래의 삶을 미리 보았다(사65:17). 이런 주제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요한계시록 21,22장에 인용되어 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
마태복음 19:27에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묻고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9장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
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새로움, 만물의 회복으로 특징되는 세상을 예언하신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서 사용하시는 단어는 여기에서와 디도서 3:5에서만 나오는데, 그것은 인간의 ‘중생’(regeneration)에 대한 말씀이다. 이 새로운 세상의 특징은 그리스도 아래서 신자가 주권을 행사하는 것인데(마19:28),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것이다(창1:26). 그것은 또한 풍성함, 풍성한 교제,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묘사되어 있는데(마19:29), 여기에는 삶의 양(영원히 계속되는 것)과 삶의 질(하나님을 아는 것을 포함하는 삶) 둘 다 포함되어 있다(요17:3).
바울이 소망했던 새 하늘과 새 땅
바울 또한 새 창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로마서 8장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
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사도 바울은 신자와 피조물 모두의 구속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구속을 받고 큰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며 우리의 몸이 완전히 멸해져서 재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몸을 일으키사 몸과 영혼을 하나 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멸해지지 않고 회복될 것처럼 하나님의 피조무도 마찬가지다. 피조물도 열심히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기를 원한다”(롬8:21). 이것은 멸해지거나 재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크게 갱신되는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은 베드로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베드로가 기대했던 새 하늘과 새 땅
베드로후서 3장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
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
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
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
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는 현재의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 사이의 차이를 역설하고 있다. 그의 말씀 때문에 어떤 이들은 현재의 우주가 소멸되고 완전히 새로운 우주가 창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말씀들은 현존하는 우주의 파괴와 그것의 재창조를 가르치는가? 그러나 그럴 경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된다.
1.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로마서 8:20-21의 바울의 말과 요한계시록 22:3의 요한의 말은 모순이 된다. 바울과 요한은 둘 다 저주가 제거될 것을 말하고 있지 하나님의 세계가 소멸되고 재창조될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2. 앞의 구절에서 베드로는 다음처럼 말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벧후3:6)
여기에서 “멸망하였으되”라는 말은 세상이 문자적으로 멸망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물로 불신자들을 심판하심으로써 세상을 깨끗케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와 비슷하게 베드로가 하늘과 땅에 대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녹아진다”고 했을 때, 그 결과로 세상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그 위에서 행해진 일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눈 부신 빛 아래 “모두 드러나게 될 것이다(벧후3:7,10)는 말이다. 불에 탄다는 말은 소멸된다는 뜻을 수반하지 않고 노아의 시대에서처럼 지구가 크게 깨끗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다음과 같이 말한 게일 하이데(Gale Heide)가 옳다.
“깨끗하게 하는 물이 한 때 세상을 덮었던 것처럼 불이 다시 한번 모든 불의한 것들을 드러내고 멸할 것이다.”
3. 베드로는 지구와 불신자의 운명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7)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멸망”이란 말씀은 그들이 소멸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인간 생활에서 상당히 가치 있는 것들을 모두 잃어버릴 것에 대한 상징적인 언어다. 또한 그들이 영원하고도 의식할 수 있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란 의미이다(마25:41,46; 살후1:5-9; 계20:10-15).
4. 이 모든 것은 베드로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묘사하는 것과 일치한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베드로의 관심은 지구의 소멸보다는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죄인들로부터 피조물을 깨끗하게 하는데 있다. 하이데거는 다음처럼 영리하게 말했다.
“그(베드로)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할 때, 그것은 새로운 물리적 물질이나 새로운 창조의 요소들을 가진 장소가 아니고 ‘의가 거하는 장소’이다.”
따라서 베드로에게 있어서 새 창조에 대한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우주에 온통 넘쳐흐르는 완전함 이었다. 왜냐하면 구속의 힘은 죄의 손상만큼이나 멀리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에게 보인 새 하늘과 새 땅
앞의 구절들은 모두 이 마지막 구절들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21장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
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21:1은 20:11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하는데, 20:11은 “땅과 하늘”이 놀라운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20:11의 말씀을 6:15-16의 말씀과 나란히 놓고 보면 이것이 창조의 파괴를 암시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6장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요한계시록 20장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6:15-16에서는 죄인들이 “어린 양의 진노”로부터 자신들을 숨기려하는 것이 묘사되어 이다. 그리고 20:11에서는 창조된 질서 전체가 인간의 죄에 의해서 더럽혀져 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면전에서 피하는 것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의 말씀은 어떤가? 하늘과 땅과 바다 또한 요한의 환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주의를 준다.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이 바다를 태평양, 인도양, 지중해 혹은 다른 바다와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몇 장 앞에 있는 요한 계시록 13장으로 돌아와 요한계시록에 있는 바다에 대한 상징적 표현을 발견해야 한다.”
데니스 존슨(Dennis Johnson)도 그와 의견을 같이 한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바다’는 처음 땅을 휩쓸었던 혼돈과 반역이 나오는 영역을 상징한다....요한은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와 용의 마귀적 힘을 받아서 성도들과 전쟁을 하는 것을 보았다(계13:1). 천국에 있는 바다는 유리처럼 조용하고 깨끗하다(계15:2). 그러나 짐승을 낳는 바다는 쉬지 않고 위협하는 반역으로 요동친다. 새로운 세상에 그것이 부재한다는 것은 새 집의 평화와 청결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5에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새로 만드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신다.
재창조가 아니라 갱신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ema)는 우리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하나님의 구속 활동에 있어서 그분은 그가 손으로 행하신 일들을 파괴하시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죄로부터 깨끗케 하여 완전하게 만드신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분이 만드신 목적에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가 있다....이 원리가 의미하는 바 우리가 고대하는 새로운 세상은 현재의 지구와 완전히 다르지는 않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를 갱신하여 영화롭게 한 것일게다.”
헤르만 바빙크의 견해
구약의 예언은 자연 전체의 특별한 변화를 기대하지만 현재 세계의 멸망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주의 날 후에 시작될 변화를 매우 강한 표현으로 묘사할지라도(시102:26; 사34:4, 51:6, 16, 65:17, 66:22) 세상의 실체가 멸망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다. 제일 먼저 여기서 주어진 묘사는 너무나도 풍성한 이미지로 그려지기에 온 세상을 문자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 축소’ 시킬 수 없다. 더 나아가, 그 자체로 이미 실체의 완전 소멸을 전혀 말하지 않는 천지가 ‘없어지는 것’(시102:26)은 천지가 옷같이 낡고, 의복같이 변하며, 잎이 떨어지고, 연기같이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로써 설명된다(시102:26; 사34:4, 51:6).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사용된 ‘창조하다’arb 라는 단어는 언제나 무無로부터 산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옛 것으로부터 새로운 어떤 것을 산출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킨다(사41:20, 43:7, 54:16, 57:19). 따라서 이 단어는 또한 ‘심는 것’, ‘기초를 놓는 것’, ‘만드는 것’(사51:16, 66:22)과 번갈아 사용되고, 여호와는 이사야 51장 16절에서 자신의 말을 이스라엘의 입에 두고 자기 손의 그늘로 그들을 덮음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동일한 방식으로 천지가 없어질 것이며(마5:18, 24:35; 벧후3:10; 요일2:17; 계2:11), 멸망할 것이며, 옷과 같이 낡아지고(히1:11), 풀어지고(벧후3:11),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벧후3:10), 변할 것이라고(히1:12) 선포한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그 어떤 것도 실체의 소멸을 암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물들이 나뉘어 발생한 옛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고(벧후3:6), 현재의 세상 역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더 이상 물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불로써 멸망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세상의 멸망은 과거 세상의 홍수 멸망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소멸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불에 태우고 깨끗하게 하고, 정화시키지만,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따라서 바울은 이 세상의 형적이 지나간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고전7:31). 사실상 오로지 그런 세상의 갱신만이 성경이 가르치는 구속과 일치한다. 결국 구속이란 두 번째,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기존의 것을 재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이 죄로 인해 썩어 오염된 동일한 인류, 동일한 세상, 동일한 하늘과 땅을 구속하고 새롭게 하는데 있다. 종말에 세상도 역시 물리적 창조가 아니라 영적 갱신인 중생이 일어날 것이다(마19:28).
적용
하나님 나라는 먼저 영적인 의미로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지고, 이 나라의 유익들은 용서, 평화, 의, 영생과 같이 모두 내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미래의 복의 본질 역시 이와 일치하여 보다 더 영적으로 이해되었는데, 특히 바울과 요한에 의해 항상 주와 함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요12:26, 14:3, 17:24; 고후5:8; 빌1:23; 살전4:17, 5:10; 요일3:2).
하지만 이로써 이 복이 하늘 안에 갇힌 것은 아니다. 이것이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은 원리적으로 이미 신약 성경이 말씀의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가르치고 있으며, 종말에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을 기대하고, 그 후에 곧바로 모든 사람들, 특히 신자들의 육체적 부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서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은 유심론을 붕괴시킨다. 왜냐하면 만일, 오리게네스처럼, 유심론이 자신의 원칙을 충실하게 따른다면, 심판의 날 후에는 창조되지 않은 하늘에 다름 아닌 영들만 남아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가르친다. 성경에 의하면, 세상은 하늘과 땅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으며, 이것과 일치하여 하나님 나라도 감추어진 영적 측면과 가시적인 외적 측면을 지닌다. 예수가 첫 번째 왔던 것은 이 하나님 나라를 영적인 의미에서 세우고자 했던 반면, 그 나라에 대한 가시적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종말에 다시 올 것이다. 개혁은 내부에서 외부로 진행된다. 사람들의 거듭남은 창조의 거듭남 가운데 완성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또한 땅 위에 가시적으로 확대될 때 비로소 완전하게 실현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요한이 본 환상의 내용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다른 방식으로는 우리의 의식에 투사할 수 없기 때문에 개념들을 이미지들로 해석하여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이 이미지들을 강과 생명나무가 있는 낙원(계21:6, 22:1-2), 대문과 거리가 있는 지상의 예루살렘(계21:12), 하나님 자신이 거하는 지성소가 있는 성전(계21:3,22), 그 모든 금과 보석의 보물을 지닌 자연의 왕국 전체(계21:11, 18-21)로부터 이끌어 내고 있다. 하지만 그 개념들이 이런 방식으로 이미지들로 해석된다고 할지라도, 그 개념들은 망상이나 조작된 것들이 아니라 내세의 실재들을 현세의 것들로 묘사한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계 안에 있는 참된 모든 것, 고귀한 모든 것, 의로운 모든 것, 정결한 모든 것, 사랑스런 모든 것, 만족할 만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미래의 도성에 함께 집결되어, 갱신되고, 재창조되어 그 최상의 영광으로 들어 올려진다.
이 하나님의 도성의 실체는 이 피조계 안에 현존하고 있다. 애벌레가 나비로 발전하듯이, 석탄이 다이아몬드로 바뀌듯이,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다른 밀알을 산출하듯이, 봄에 자연 만물이 소생하여 축제의 옷을 입듯이, 타락한 아담의 족속으로부터 교회가 형성되듯이, 죽어 땅에 장사 지낸 바 된 몸으로부터 부활의 몸이 일어나듯이, 언젠가 그리스도의 재창조의 권능으로 불로 정화된 이 세상의 요소들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 역시 나타나 영원한 영광 가운데 비치고 ‘썩어짐의 종 노릇’에서 영원히 해방될 것이다.
따라서 복된 자들이 누리는 것은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또한 물질적인 또는 육체적인 속성을 누린다. 이방 민족들과 천년설주의자들이 물질적인 속성을 미래적인 복의 주요 요소로 삼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것을 금욕주의적 방식으로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철저하게 복에서 제외시키는 것도 편파적이다. 성경은 지속적으로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하늘과 땅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기에, 거룩한 영광, 미덕과 행복, 도덕적 세계 질서와 자연적 세계 질서 역시 결국 조화롭게 연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천국은 어떤 모습입니까? 큰 틀로 아담 범죄로 인한 형벌이 모두 소멸이겠죠. 대표적으로 죄성, 육신 죽음 소멸입니다. 애통하는 일이 없다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애통하는 일이 없게 될까요? 재림 예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모아 병든 자들을 초림 때처럼 치유하실까요? 현재의 산, 강, 바다, 아파트, 자동차 등등이 있는 물질세계에 변화가 있을까요?
천국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통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런 답변 말고 말입니다.
현재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방식입니다. 먹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합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살기 위해서 먹고, 먹기 위해서 삽니다. 먹어야만 한다는 삶의 큰 기본 시스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천국은 어떠할까요? 마찬가지로 먹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먹어야 살지만 오병이어처럼 식량을 노동없이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 먹어야만 산다는 것 때문에 노동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아이스티 이전 것이 기억되지 않는다 합니다. 이전 것이라면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겠죠. 다친 상처가 치유되지만, 다쳤을 때의 아픈 느낌은 인식됩니다. 그러한 모든 이전 것들이 모두 잊혀진다 합니다.
궁금점이 있는데, 재림 때에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십니다. 창세기 아담 범죄 이전과 재림 때가 동일한 세상이라면, 아담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은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생명나무가 예수님이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