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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유럽 태평양 OSS : 피에르 오티즈
by 로라 랜시
1944년 봄의 어느 밤, 이야기가 오간다.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나치 점령하 프랑스 리용의 탁자에 앉아 있고,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의 말에 짜증이 늘기 시작한다.
말하는 사람은 독일군 장교, 독일 장교는 근처 병영이 습격을 받아 병력과 시설이 당했다는 사실에 울분을 토한다. 그러나 독일군 장교는 대화 상대가 군복은 입지 않았지만, 미 해병대 장교란 사실을 모른다.
독일 장교는 기회가 있었을 때 미국인을 어떻게 했는지 충격적인 사실을 말하고, 자신의 병력을 총동원해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다 으깨버릴 거라고 악담을 퍼붓는다. 특히나 연합군, 미국 해병대,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다 작살 내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키 큰 남자는 일어서 사려 깊게 행동하며 바를 빠져나간다. 몇 분 뒤 남자는 긴 레인코트를 입고 돌아왔다. 독일군을 위해 추가로 술을 주문한 남자는 갑자기 코트를 연다. 그 속에 미 해병대 대위 군복과 함께 45구경 권총이 드러난다.
충격으로 침묵이 흐르고, 독일 장교는 미군의 명령에 따라 루즈벨트를 위해 건배하고, 미 해병대를 위해 건배할 수밖에 없었다. 해병 남자는 커다랗게 씨익 웃고는, 문을 열고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피에르 오티즈는
전형적인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사람이다.
‘I wanted to live a man’s life’
피에르 울리엔 오티즈는 1913년 뉴욕에서 태어났고, 전설적인 해병이 되었으며, 미 전략사무국(OSS) 대원이 되었다. 아버지는 프랑스/스페인 혈통에 어머니는 스위스 태생이었는데, 부모는 오티츠가 젊었을 때 아버지가 프랑스로 가면서 헤어졌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프랑스를 여행하다 스위스의 그르노블(Grenoble) 대학교에 입학했다. 오티즈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동등한 수준으로 할 줄 알았다.
공부하던 오티즈는 1932년 학업에 지루함을 느껴 자퇴하고 25세로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한다. 아버지는 거기서 나오게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절차를 끝낸 오티즈는 알제리로 갔다.
알제리의 외인부대 신병훈련소에서 여기가 정신적인 집이라고 생각한다. 오티즈의 신병훈련 동기들은 전 유럽에서 모여 국제적이었다. 당시 프랑스 외인부대는 식민지 모로코의 불만을 억압하느라 신병훈련도 거기서 했다. 그런 곳이 모로코, 튜니지, 인도차이나에 있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훈련을 받았고, 그때 영국 기자가 이 젊은 외인부대 훈련병을 봤다. [기품 있게 보이는 젊은 미국인은 마치 장교처럼, 세상의 어디 군인보다도 자부심이 상당해 보였다.] 기자는 왜 여기 와서 이런 힘든 훈련을 받냐고 물었다.
“아마, 세상 어디보다 힘든 곳일 겁니다. 이게 싫지 않아요. 나는 남자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내가 파리의 나이트클럽과 칵테일바에서 흐느적거려야겠어요?”
외인부대에 있는 동안 오티즈는 아랍어를 익혔고, 선천적인 전사처럼 성장했다. 이후 낙하산훈련을 받았고, 모로코에서 전투를 경험하면서 꾸준히 진급했다.
상병이 되었을 때, 오티즈는 외인부대에서 가장 어린 부사관이었다. 또한 장갑차량 전대를 위관장교처럼 지휘했다. 전투로 많은 훈장을 받았고, 프랑스 전투십자훈장도 받았다. 상관은 장교 임관을 권했지만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기 싫어 거절했다.
오티즈는 1937년 외인부대를 제대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어머니와 재회하고 새로운 도전을 찾는다. 농장에서 일하고, 할라우드 기술자로도 일했고, 1939년 독일이 2차대전을 일으키자 캐나다로 가서 프랑스 가는 배를 탄다. 그 배는 독일 유보트 공격을 받아 침몰했고, 프랑스 구축함에 구출되어 39년 10월 외인부대에 병사로 재입대한다.
알제리에서 또 훈련을 받은 오티즈는 배를 타고 다시 프랑스로 간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오티즈는 전장임관으로 소위가 되었다가 곧 중위로 진급한다.
몇 주만에 부대는 독일군에게 와해되었고, 오티즈는 여러 번 다치고 포로로 잡혀 수용소로 간다. 1941년 10월, 몸이 부분적으로 회복하자 탈출하고, 파리의 아버지 아파트에 도착한다. 거기서 몇 주간 회복하고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갔고, 리스본에서 미국 가는 배를 탄다.
오티즈는 유럽으로 돌아가 나치와 싸우고 싶었으나, 당시 미국은 2치대전에 중립국 상태라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배가 뉴욕 항에 입항할 때 또 다른 일이 벌어진다.
그날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이었다.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들은 오티즈는 모국 미국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미군 입대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첫째, 오티즈의 건강이다. 전투에서 다치고 포로수용소와 탈출 과정에서 몸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았다. 그래서 샌디에고 어머니에게 가서 몸을 추스르기로 한다.
두 번째는 어떻게 해야 최선의 복무인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오티즈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군 정보부는 유럽전선을 목격한 오티즈를 워싱턴으로 불러 면담했다. 만남 후에 정보장교를 제안한다. 그렇게 미 육군항공 정보장교 임관을 위한 서류작업을 하다 오티즈는 문득 생각한다.
면담 동안 알제리 훈련소를 방문했던 미 해병대 장교가 생각난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정보장교보다 전투 해병대원이 낫다고 생각한다. 1942년 초, 오티즈는 캘리포니아에서 동부로 가로질러 6월 22일, 미 해병대에 입대, 훈장도 많이 받았던 프랑스 외인부대원은 미 해병대에 입대한다.
오티즈는 패리스 아일랜드 신병훈련소로 가서 미군 DI를 만난다. 오티즈의 세 번째 신병훈련이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오티즈는 잘 알고 있었다. 몇 주가 지나, 패리스 아일랜드 기지 사령관은 ‘매우 유별난 신병’에 관해 알게 됐고, 워싱턴의 미 해병대 사령관은 패리스 아일랜드 지휘관에게 오티즈에게 해병장교 임관을 권하라고 지시한다.
훈련소 수료와 동시에 오티즈는 해병 소위로 임관해 훈련장교가 된다. 곧 낙하산훈련을 명령받아 수료했고, 이것도 두 번째 공수교육이었다. 상관의 질문에 오티즈 소위는 답했다.
“외인부대 방식이 있고 해병대 방식이 있지만, 저는 점프하는 데 아무 상관 없습니다.”
11월에 오티즈는 상관으로부터 색다른 제안을 받는다. 북아프리카로 가서 능력을 증명해보는 것이 어떻냐는 것. 당시 미군/영국군이 북아프리아케 상륙한 상태였고, 해병대에서 임시 전출로 전략사무국(OSS) 임무를 권한 것이다. 오티즈가 승낙하자, 해병대는 오티즈를 대위로 진급시키고 미 해군 배속을 발령한다. 오티즈는 미국-영국-지브롤털-알제리-카사블랑카, 마지막으로 모로코에 도착한다.
프랑스 영향권에서 2주 동안 아랍어를 익히며 유용한 정보 취득 임무를 수행한다. 오티즈는 외인부대 알제리 근무 시 아랍어를 어느 정도 배웠고, 이곳에서 여러 나라 각 계급 지휘관을 만나도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기초 아랍어 때문에 정보 임무가 누구보다 수월했다.
OSS 작전관이 된 오티즈는 자유프랑스군까지 합해 막히는 곳이 없었다. 중요한 점은 독일과 싸우는 것. 정보장교임에도 오티즈는 튜니지 전선에서 전투임무에 자원해 실제 작전을 했다. 이때 배속으로 작전한 부대가 모 부대인 프랑스 외인부대와 미군 1보병사단이고, 2월 19~24일 동안 유명한 캐서린 협곡 전투에도 참가했다.
3월 초, 오티즈는 다시 영국 특수작전단(SOE) 정찰/사보타주팀으로 파견되어 튜니지에서 작전한다.
3월 17일, 영국군 경기갑부대에서 1인 야간정찰을 하다 독일군 정찰대와 만나 교전하다 오른손에 총을 맞는다. 연합군 야전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쉰 오티즈는 더 이상 지원임무를 하기 싫어졌다. 오티즈는 근처 영국 비행장의 작전장교에게 도움을 청한다.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알제리를 가서 오티즈의 상관 에디 대령을 만났고, 내키지 않았지만 귀국을 명령 받는다. 오티즈는 미 해병대 본진인 태평양을 생각했다.
오티즈는 워싱턴 해병대사령부를 찾아가 (주 : 아마도 태평양) 보직을 찾으면서, OSS 사무국장인 윌리엄 도노반에게 제출할 보고서를 쓴다. 도노반은 오티즈의 군사복무 기록이 인상 깊었고, 개인적으로 불러 완전히 극비임무로 전환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한다.
오티즈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몰랐다. 도노반의 말은 프랑스로 침투하란 임무였다.
노르망디 침공이 준비되고 있었고, OSS는 프랑스 땅의 정찰과 사보타주 임무를 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 임무의 협력부대로 프랑스 레지스탕스, 영국의 특수작전단도 관여했다. 미국 OSS와 영국 SOE는 스코틀랜드에 따로 모여서 이 작전을 준비한다.
전형적인 정찰/사보타주 팀은
OSS 장교 1,
SOE 장교 1,
프랑스인 무전병 1명이 기본이었다.
세 명은 낙하산으로 프랑스에 침투해 지역 레지스탕스와 연결해서 독일군을 괴롭히는 것. 이 3인 팀을 스코틀랜드 지명을 따서 예드버그(Jedburgh)팀으로 불렀다.
1943년 5월, OSS 국장 도노반은 오티즈 소속을 특수작전단으로 변경하고, 오티즈를 영국으로 보냈고, 거기서 만난 예드버그 팀은 – 영국군 대령 택와이트, 프랑스 무전병 따밀 모니에르. 첫 예드버그팀이 된다.
팀은 추가훈련을 받고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남부 론 알프스(Rhône-Alpes) 지역에 낙하산으로 뛰어내린다. 6개월간의 예드버그 프로그램의 시작이고, 정식 작전명은 Operation Union I.
셋은 즉각 지역 레지스탕스와 만났고, 이후 5개월 동안 분산된 레지스탕스를 조직된 전투부대로 만들고, 레지스탕스 가족들을 금전적으로 돕고, 필요한 병기와 물자를 낙하산 투하로 받는다.
오티즈와 특수작전 대원들은 민간인 복장에 위조 증명서를 휴대하고 민간에 스며들어 작전했다. 이 시기에 오티즈는 독일어까지 토박이처럼 유창하게 구사했다. 오티즈는 정보를 모으고 보고했는데, 키가 185cm에 영화배우철머 잘생긴 오티즈는 프랑스 사회에 금방 녹아들었고, 패선 디자이너로 신분을 속여 활동하며 겨울 스포츠도 즐겼다.
(주 : 특이한 것 같지만, 태어나 성장하면서 이중 언어로 말을 습득한 사람은 제3 제4 언어 적응에 무척 빠르다고 합니다. 한가지 생각이나 단어를 두 언어로 기억하는 습관. 한 언어로 성장한 사람보다는 잘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예드버그팀은 레지스탕스 전투의 핵심이었고, 기회만 오면 독일군을 공격했다. 오티즈는 외인부대와 미국 특수작전으로 많은 훈장을 받았지만, 이 레지스탕스 전사로써 각별하게 영감을 가지고 열정적이었다.
오티즈는 철도 파괴, 독일군 수송부에서 차량 절도, 독일군 정찰대 매복 등 대담하게 작전했다. 독일 군복을 입고 교도소에 들어가 독일군 장교로 행세하며 영국 승무원 여러 명을 빼내기도 했다.
오티즈는 익살스런 성격으로 연기해서 독일군의 주목을 피했다. 1호 예드버그팀 세 명은 일대 작전에 영향력이 컸고, 트리오는 안전 가옥을 이동하며 활동했다.
그러나 활동기간이 너무 길었고, 결국 꼬리가 밟혀 독일군과 비시 정부 모두 높은 현상금을 걸고 오티즈를 추적한다. 위기가 닥치자 임무를 종료하고 런던으로 복귀하는데 성공한다. 무전병 모리에르는 프랑스에 남았는데, 불행히도 둘이 떠난 직후 죽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오티즈는 2차대전 경력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소령으로 진급했고, 프랑스 작전 공으로 해군십자훈장을 받았다.
오티즈는 곧 Operation Union II 준비로 들어간다.
1. 오티즈 소령
2. 자유프랑스군 장교
3. 해병 5인
4. 오티즈와 똑같이 프랑스 외인부대에 근무했던 육군 대위,
이렇게 8명은 프랑스 지역 알프스산인 Col des Saisies에 낙하산으로 침투한다. 험난한 사부아 산악로, 이탈리아 국경과 가까운 프랑스령 알프스로, 레지스탕스의 온상이기도 했다.
여기서 OSS와 레지스탕스 연합으로, 노르망디에서 내륙으로 진격하는 연합군을 방해하는 독일군을 괴롭히는 전투작전을 수행한다.
(Col des Saisies : 스위스/이탈리아/프랑스가 접경한 프랑스령 알프스. 지명(지역)이 아니라 산악으로 보면 되는 프랑스의 산 고개, 알프스 산길.)
작전계획은 잘 짜였고, 1944년 8월 1일 항공기 75대가 집단으로 비행하는 가운데 – 팀은 B-17 폭격기에서 점프 최저고도 120m 상공에서 뛰어내린다. 불행히도 해병 한 명의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사망했고, 한 명은 여러 군데 다쳐서 치료를 위해 영국으로 보낸다.
오티즈와 팀원들은 접선지점에서 협조를 받을 레지스탕스를 기다렸는데, 팀은 독일군이 집념을 가지고 따라온다는 걸 깨달았다.
8월 16일, 오티즈와 동료들이 한 마을을 지나는데, 독일군 무장 수송대열과 만났고, 팀원들은 마을 뒤쪽으로 흩어져 잡히지 않으려고 길을 찾았다. 그러나 독일군은 빠르게 모든 퇴출로를 차단했다. 대원들은 코너에 몰렸고, 이때, 잘못하면 마을 사람들이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오티즈와 두 해병은 항복했다 : 독일군은 곧 네 명을 들러싼다.
이후 일주일 동안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다시 독일로 압송되고, 독일 북해 항구 브레멘에서 가까운 연합군 해군 전용 포로수용소로 들어간다. 거기서 1945년 4월 29일 영국군 기갑사단이 수용소를 해방할 때까지 있었다.
몇 주간 작전결과 보고와 자료를 취합해, 오티즈는 두 번째 해군십자훈장을 받는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온 오티즈는 다시 태평양전선으로 갈 준비를 했고, 오티즈와 Union II 팀 멤버 세 명은 중국으로 작전을 받아 떠나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이 8월 15일 항복하면서 계획은 취소된다.
(사진) 오티즈는 전쟁 후에 할리우드에서 경력을 쌓았고, 존 웨인 영화 여러 편에 기술 고증을 했다. 1950년 기병대 역할로 오티즈가 출연한 영화 ‘리오 그란데’ 포스터. 동그란 원이 오티즈다.
피에르 오티즈는 1946년 현역은 그만두었지만 1955년까지 해병대 에비군으로 남아 있다가 대령으로 제대했다. 오티즈는 유럽전선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해병이 되었고, 유럽전선의 가장 성공적인 OSS 작전관이기도 했다.
그 뒤로는 할라우드에서 조연배우와 기술 고증을 즐겼으며, 루머로는 오티즈가 CIA에 고용되어 극비임무를 계속했다는 말도 있었다.
오티즈의 마지막 여생은 애리조나에서 지내다 1988년 암으로 사망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있었던 장례식에는 미군과 프랑스군 영국군 장군들이 참석했고, 전설의 군인에 대한 마지막 예를 다했다.
[끝]
첫댓글 와우..
진짜 남자의 삶을 살다 갔군요.
전설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