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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중국의 越州(월주)에서 건국하였다
東扶餘,南扶餘,前百濟,北扶餘
(동부여,남부여,전백제,북부여)의 새로운
해설(삼국유사)
東夫餘
(동부여)
북부여왕 解夫婁(해부루)의 宰相(재상)인 阿蘭弗(아란불:석가모니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에 한사람)의 꿈에 天帝
(하늘님)이 강림하시여 하시는 말씀이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설립하고자 하니 너희들은 이곳을 피하라
(동명성제는 장차 국가가 크게 부흥할 징조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東海(동해)의 해변가에 迦葉原(가섭원)이라는 地名(지명)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 王都(왕도)를 설립하기에 적당
합니다 라고 阿蘭弗(아란불)이 왕에게 권고하기에 왕은 도읍을 옮겨 국호를 東夫餘(동부여)라 하였던
것이다
夫婁(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자 하루는 山川祭(산천제)를 올려 後嗣(후사)를 구하고자 말을 타고 鯤淵(곤연)
이라는 곳을 지나가는데 큰 바위돌이 상대를 처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기에 왕은 괴이하게 생각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그 큰돌을 옮기게 하였더니 금빛 개구리
모형을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시며 이는 하늘님이 나에게 내려 주신 자손이라 하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이름을
金蛙(금와)라
하고 長成(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夫婁(부루)가 돌아가시자 金蛙(금와)가 왕위을 계승하고 다음 차례로 큰 아들
帶素(대소)가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地皇(지황) 3년(서기 22년) 壬午(임오)에 고구려의 왕 無恤(무휼:太武神王(태무신왕)이 그 나라를 토벌하여 帶素(대소)
를 죽임으로서 나라는 없어졌다
南扶餘 前百濟 北扶餘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삼국유사)
扶餘郡(부여군)은 전에
백제의 왕도이며 혹 所夫里郡(소부리군)이라 칭하였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백제의 聖王(성왕) 26년 戊午(무오) 봄에 도읍을 泗 (사비)에
옮기고 국호를 南扶餘(남부여)라
하였다 注解(주해)에서 그 地名(지명)을 所夫里(소부리)는 泗비(사비)라 하였는데 지금은 古省律(고성진)이라
한다
所夫里(소부리)는 扶餘(부여)의 다른 이름이라 생각되며 또 量田帳籍(량전장적)을 살펴보면 所夫里郡(소부리군)이라
하였다
田丁柱貼(전정주첩)에서 오늘날의 말로 扶餘郡(부여군)이라 하여 다시 上古(상고)의 옛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백제왕의 성은
扶氏(부씨)인 고로 扶餘(부여)라 칭하였고 혹은 餘州(여주) 라고도 호칭하였다 餘州郡(여주군)의 서쪽
資福寺(자복사)에서 百高座(백고좌)를 행할때 帳簿(장부)상에 刺繡(자수)를 놓은 것이 있었는데 그 繡(수)를 놓은
글에서 <統和十五年丁酉五月日餘州功德大寺(통화15년정유5월일여주공덕대사>라는 繡(수)를 놓은 帳簿(장부)가
있었다
또 예날
河南(하남)의 林州(임주)에 刺史(자사)를 두었을 그당시에 圖籍(지적도) 내에 餘州(여주)란 두 글자가 있었
는데 지금은 佳林郡(가림군)이라 하고
餘州(여주)를 扶餘郡(부여군)이라 한다
백제지리지와 後漢書(후한서)에서 말하기를 三韓(삼한)은 무릇 78국이 있었는데 백제는 그중에
一國(일국)이라 하였다
北史(북사)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東極(동극)은 신라였으며 서남쪽은 큰 바다가 한계였으며 북쪽은 漢江(한강)이
흐르고 그
郡(군)을 扶餘城(부여성)이라 하였다
또 固麻城(고마성)이라 하였고 그외에도 사방에 五城(5성)이 있다 하였다
註說:한민족은
三韓(3한)이라 하면 곧 마한,진한,변한만 삼한으로 인식하고있다 그러나 三韓(삼한)이란 나라의 국명
이란 사실을 재 인식하여야 한다
삼한은
무릇 78국이라 하지
않았는가,,,,,,
<通典云百濟南接新羅北距高麗西限大海舊唐書云百濟扶餘之別種東北新羅書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北高麗其王所居
有東西兩城新唐書云百濟西界越州南倭皆踰海北>
通典(통전)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남쪽은 신라와 접해있고 북쪽은 고구려가 있으며 서쪽은 큰바다가 국경의 한계다
하였고 舊唐書(구당서)에서 이르기를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며 동북쪽은 신라가 있고 바다 건너 越州(월주)까지 이고
남쪽은 바다 건너 倭國(왜국)까지 였으며 북쪽은 고구려가 있었는데 國王(국왕)은 동서의 兩城(양성)에 계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新唐書(신당서)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西界(서계)는 越州(월주)이고 남쪽의 倭國(왜국)과 海北(해북)을 모두다 깨우쳐
주었다 라고 하였다.
註解:중국의 越州(월주)와 남쪽은 바다 건너 倭國(왜국)까지 백제의 영토라 명확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엉터리 번역
으로 인하여 모든 한국민은 눈이 멀어 오역된 사실을 볼수가 없다.
<고려사 본기>에서 이르기를 백제의
시조는 溫祚(온조)이고 그의 父(아버지)는 鄒牟王(추모왕)이고 혹 朱蒙(주몽)
이라 하였다
북부여에서 피난하여 卒本(졸본)의
扶餘州(부여주)에 도착하니 그 나라 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고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둘째딸을 妻(처)로 맞이 하도록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扶餘州
(부여주)의 왕이 죽자 朱蒙(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여 後嗣(후사)를 이을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沸流(비류)
이고 次男(차남)은 溫祚(온조) 였다
주해:한계레여! 보라 졸본은 부여주라 기록되어 있지않은가 어찌하여 부여가 충청도의
공주란 말인가?
扶餘州(부여주)는 吳越(오월)이 있는 지역이 된다.
그후 태자가 용납하지 않을까 두려워 드디어 烏干(오간)과 馬黎(마려)등 10명의 신하들과 南行(남행)을
하니 백성
들이 많이 따라 왔다 드디어 漢山(한산)의 負兒岳(부아악)에 올라 바라보았더니 거주 할만한 지형이였으나 沸流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고자 하였다
註解;太子(태자)는 고주몽의 장자 <유리명제>를 뜻함
10명의 신하들이 간하기를 오직 이
河南(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帶水(대수)와 漢水(한수)가 흐르고 동쪽은 높은
산이 의거하고 남쪽은 연못이 있어 농사 짓기에 옥답이 되겠으며 서쪽은 큰 바다가 막아 주고 있으니 이곳이야 말로
天險地利(천험지리)로서 도읍의 지세로는 참으로 얻기 어려운 곳입니다 라고
하였다
역시 沸流(비류)는 옳은 말도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彌鄒忽(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溫祚(온조)는
河南(하남)의 慰禮城(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명의 신하들이 날개처럼 보좌한다 하여 국호를 十濟(열제)라
하였다 이때는 漢(한)나라의 成帝(성제)
鴻佳(홍가) 3년(기원전 18년)이였다
註解:눈멀은 어느 사학자가 미추홀을 지금의 인천 부근이라하고 하남위례성은 한강의 북쪽에있다
그러나 하남위례성은 廣州(광주)의 古邑(고읍)이라 하였다.
沸流(비류)가 거주한 <미추홀>은 토질이 습기가 많고 짠곳이라 수개월
동안 안전한 거주지를 얻지 못하다 慰禮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인민들이 태평 안락하게 생활하는것을 보고는 한없이 후회하다 죽었지만
그의 백성들은 慰禮城(위례성)에 모두다 귀의 하였다
그 후에 백성들이 돌아 왔을때 기뻐하고 즐거워 하였다고 하여 국호를 改名(개명)하여 백제라
하였다.
그 世系(세계)는 고구려와 같은 종족으로 扶餘(부여)에서 출발하였음으로 解氏(해씨)라 하였다
그후에 聖王(성왕)은
도읍을 泗 (사비)에 옮긴 곳이 지금의 扶餘郡(부여군)인 것이다
(彌鄒忽(미추홀)은 仁州(인주)이고 慰禮(위례)는 지금의
稷山(직산임)
古典(고전)을 살펴보면 동명성왕의 셋째아들을 溫祚(온조)라 하였고 前漢鴻佳(전한홍가) 3년 癸酉(계유)에
卒本扶餘(졸본부여)에서 慰禮城(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설립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14년 丙辰(병진)에 도읍을 漢山(한산:지금의
廣州(광주)에 옮긴 역년은 389년까지 있었고 13세의 近肖古王(근초고왕)
咸安(함안) 원년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쟁취하고 도읍을 北漢城(북한성:지금의 楊州(양주)에 옮기고는 歷年(역년)은
105년까지였고 二十二世(22세)의 文周王(문주왕)이 즉위한 元徽(원미) 3년 乙卯(을묘)에 도읍을 熊川(웅주:지금의
公州(공주)에 옮겨 歷年(역년) 63년까지 였고 二十六世(26세)의 聖王(성왕)은 도읍을 所夫里(소부리)에 옮기고
국호를 南扶餘(남부여)라 하였던 것이다
三十一世(31세)의 義慈王(의자왕)까지 歷年(역년)은 120년에
이르러 唐(당)의 顯慶(현경) 5년이며 義慈王(의자왕)
재위 20년째 신라의 金庾信(김유신)과 蘇定方(소정방)이 토벌시켜
평정되었다
백제국이 멸망하기 전에는 五部(5부)로 나누어 37군과 二百城(200성) 7십6만호를 통치하였으나 唐(당)이 그 지역을
나누어 熊津(웅진) 馬韓(마한) 東明(동명) 金蓮(금련) 德安(덕안) 등의 五都督府(5도독부)를 설치하고 그곳의 추장을
都督府刺史(도독부자사)로 삼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그 지역을 신라가 모두다 병합시켜 熊州(웅주) 全州(전주) 武州
(무주)의 3주를 설치하고 모두 郡縣(군현)을
두었다
또 虎암寺(호암사)라는 절에 바위가 있었는데 政事(정사)를 의논하는 바위로 장래 국가의 宰相(재상)에 당선될 자의
3,4명의 이름을 函封(함봉)하여 두고 바위 위에서 잠시 취하여 이름위에 宰相(재상)이 된자는 印章(인장)을 찍은
흔적이 있었음으로 바위 이름이
되었다
또 泗 (사비)의 강변에 한바위가 있었는데 蘇定方(소정방)이 항상 이 바위 위에 앉아서 낚시를 하던 중에 龍(용)이
나와 바위에서 龍(용)이 꿇어앉은 흔적이 있다 하여 이름을 龍岩(용암)이라 하였다 또 그 郡(군)중에 日山(일산)
吳山(오산) 浮山(부산)이라는 세 산이 있었는데 국가의 전성시대는 각국의 神人(신인)들이 그 산위에 날아와 安居
(안거)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서로 왕래하며 끊어지지
않았다
또 사비의 절벽에 한바위가 있었는데 십여명이 겨우 앉을수 있는 돌이 지만 백제왕은 王興寺(왕흥사)로 행차하여
禮佛(예불)하고져 하면 먼저 이 돌을 바라보고 佛(부처)님처럼 숭배하면 그돌은 스스로 따뜻하여 졌다.
그로 인하여 이름을 <온돌
바위>라 하였다
또 사비에는 하천으로 흐르는 물과 산에서 물이 떨어지는 낭떨어지는 양쪽으로 흘러 마치 병풍에 그림을 그린것과
같이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백제왕>은 매일 이곳에서 주연을 베풀어 노래하고 춤을 추며 즐거워 하였다 하여 지금은
大王浦(대왕포)라
칭한다 註解:백제의 온조왕은 神人(신인) 聖子(성자)이다
또 시조 溫祚(온조)는 동명왕의 셋째 아들로서 신체가 장대하고 성질이 넓어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友愛(우애)
하였고 善(선)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 하였다 또 多婁王(다루왕)의 성품은 관후한 德望(덕망)과 위세를
갖추고 있었다
또 沙沸王(사비왕 일명 沙伊王(사이왕)이라 하였는데 왕이 돌아가시자 仇首(구수)가 後嗣(후사)의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政事(정사)를 맡을수 없으므로 즉위를 폐하고 古爾王(고이왕)이 즉위하였다 하고 혹은 至樂初(지락초)
2년 己未(기미)에
沙沸王(사비왕)이 돌아가시자 古爾王(고이왕)이 옹립되었다 하였다
註解:그 시대의 백제지역은 아래와 같다.
회계산을 중심으로
吳越(오,월)이 있는 지역이며 곧 상해,남경,소주,항주,복주,정주,무한,남창의 지역이며 이 지역에
동명,덕안등과 신라산이 있다.
百濟 本紀 第一
<백제 본기 제 1 삼국사기의 새로운 해설>
백제의 시조는 溫祚王(온조왕)이며 그의 父(부)는 鄒牟王(추모왕)이다 혹은 이르기를 고주몽은 북부여에서 피난하여
卒本(졸본) 扶餘(부여)에 도착 하였더니 扶餘王(부여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다.
高朱蒙(고주몽)을 보자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고 그의 둘째딸을 妻(처)로 맞이하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扶餘王(부여왕)이 죽자 朱蒙(주몽)이 왕위를 계승하고 後嗣(후사)를 이을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 장자는 沸流(비류)이고 차남은
溫祚(온조)였다
(혹은 朱蒙(주몽)이 졸본에 도착했을때 越國(월국)의 郡主(군주) 딸을 맞이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 라고도 하였다)
註解:
越國(월국)이 곧 扶餘(부여)이다
朱蒙(주몽)이 北扶餘(북부여)에 있었을때 前妻(전처)의 소생인 아들이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자 沸流(비류)와 溫祚
(온조)는 태자가 용납하지 아니할까 두려워 드디어 烏干(오간)과 馬藜(마려)등 十臣下(열신하)와 南行(남행)을 하니
백성들도
많이 따라 왔다
이윽고 漢山(한산)의 負兒嶽(부아악)에 등정하여 바라 보았더니 거주할만한 땅이였다
沸流(비류)는 해변에 거주
하고자 하였으나 열신하 들이 諫(간)하기를 오직 이 河南(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帶水
(대수)와 漢水(한수)가 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악이 점거하고 있으며 남쪽은 연못이 있어 沃畓(옥답)이 되고
서쪽은 큰바다가 막혀있으니 이곳의 地勢(지세)야 말로 天險地利(천험지리)이며 참으로 얻기 어려운 도읍지 입니다
라고 하였으나 역시 沸流(비류)는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나누어 彌鄒忽(미추홀)에 거주하고 溫祚(온조)는 河南
(하남)의 慰禮城(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명의 신하들이 날개처럼 보좌한다 하여 국호를 十濟(열제)라 하였다
이때는 前漢(전한) 成帝(성제) 鴻嘉(홍가)
3년이였다
註解:중국에 있는 河南(하남)의 지역이 백제의 첫 도읍지가 명확하지 않은가?
그의 世系(세계)는 고구려와 같은
동족이며 扶餘(부여)에서 나왔음으로 扶餘(부여)의 氏族(씨족)이 된다 (一云(일운)
시조 沸流王(비류왕)의 父(부)는 優台(우태)라고 하였다 北扶餘王(북부여왕) 解扶婁(해부루)의 庶孫(서손)이고 어머니
召西奴(소서노)는 졸본사람 延陀勃(연타발)의 딸이라
하였다
優台(우태)가 귀의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沸流(비류)이고 차남은 溫祚(온조)라 하였다 優台(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寡婦(과부)로 살았다
후에 朱蒙(주몽)을 扶餘(부여)에서 용납 할수 없다 하여 前漢(전한) 建昭(건소) 2년 봄 2월에 분주히
南行(남행)하여
卒本(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召西奴(소서노)를 王妃(왕비)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其於開基創業頗有內助故朱蒙寵接之特厚待沸流等如己子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儒留來立之爲太子以至嗣位焉於
是沸流謂弟溫祚曰始大王避扶餘之難逃歸至此我母氏傾家財助成邦業其勤勞多矣及大王厭世國家屬於儒流吾等徒在此
鬱鬱如우贅不如奉母氏南遊卜地別立國都>
그녀는
나라를 개국하는 기반에 內助(내조)를 잘하였고 나라의 창업에 공로가 매우 많았음으로 朱蒙(주몽)은 특별히
厚待(후대)하여 총예를 받았으며 沸流(비류)등의 아들은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을때 마침내 朱蒙(주몽)이
北扶餘(북부여)에 있었을때 前妻(전처)의 소생이며 禮氏(예씨)의 아들인 儒留(유류)가 돌아와 태자로 옹립하여 後嗣
(후사)를 계승하는 왕위를 받게 되었다
이에 沸流(비류)는 아우 溫祚(온조)에게
말하기를 대왕은 扶餘(부여)에서 피난하여 이곳에 왔을때 우리 어머니는
집안의 재물을 팔아 국가 창업에 그토록 많은 근로를 하였음에도 급기야 대왕은 세상 살이는 덧없다 하시며 나라
마져 儒流(유류)에게 속하게 하시고는 항상 울적 울적 하시며 우리들을 사마귀의 혹처럼 생각 하시니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봉양하도록 하자 하면서 남쪽으로 유람하며 좋은 吉地(길지)를 선택하여 별도로 國都(국도)를 세우
기로
하였다
註解:<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들 <라후라>를 낳은후 출가하실때 하신 말씀과 흡사한 내용이
된다
遂與弟率黨類渡浿帶二水至彌鄒忽居之北史及書皆云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
以女妻之遂爲東夷强國未知孰是)
드디어
형제는 같은 뜻을 가진 徒黨(도당)을 거느리고 浿水(패수)와 帶水(대수)의 두강을 건너 彌鄒忽(미추홀)에
거주지를 정하여 살았다 北史(북사)와
모든 사서에서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명성왕이 돌아 가신후에 仇台(구태)는 聖王(성왕)님의 가르침인 仁信(인신)을 신봉하여
敦篤(돈독)한 信者(신자)
가 되었다
처음 백제국을 설립할때 帶方(대방)의 지역에서 정한고로 漢(한)의 遼東(요동) 태수
公孫度(공손도)의 딸을 妻(처)로
맞이 함으로서 드디어 東夷(동이)는 强國(강국)이 되었다 하였는데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수
없다)
상기의 <백제본기>를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는 한반도에 존재 하지 않았음이 명확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
하였으니 한반도를 포함한 중국 대륙이 명학하지 않은가 더이상 무슨 자료가 필요하겠는가
列傳 崔致遠(열전 최치원)
<삼국사기>
故其文集有上大師侍中狀云伏聞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高麗百濟全盛
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薺魯
옛
上大師侍中狀云伏聞(상대사시중상복문)이 있었는데 그 문집에서 이르기를 東海(동해) 밖에 三國(삼국)이 있었다
그 나라의 이름은 馬韓(마한) 卞韓(변한) 辰韓(진한)이며 마한은 곧 고구려이고 변한은 곧 백제이고 진한은 곧 신라
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는 강병 백만명으로
남침하여 吳(오),越(월),撓(요),幽州(유주),燕(연),薺(제),魯(노)나라가
다 포함되어
있었다
韓겨레여!
<삼국사기>의 기록이 잘못된 번역인가 살펴보아라.
<신라 본기 제4>
삼국사기에서
.<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歷皆稱某王不言居西干等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曰左漢中國史書也猶存梵語穀於兎匈
奴語撑犁孤塗等今記新羅事其存方言亦宜矣>
신라
말기의 名儒生(명유생) <최치원>은 제왕의 歷年代(역년대)를 만들면서 모든 왕을 다 某王(모왕)이라 칭하고
<거서간>등은 말하지 않은 것은 어찌보면 그의 선조가 비열한 野蠻族(야만족)으로 이미 모든 사서에서 <날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호칭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漢中國史書(한중국사서)의 春秋左氏(춘추좌씨)에서 말하기를 <현토>의 穀間(곡간)에서
梵語(범어)로된 匈奴語
(흉노어)와 <탱리고도어> 등이 발견된 것이있었는데 신라의 記事(기사)가 있었고 지금의 그 나라 方言(방언)과 역시
같다
註解:梵語(범어:석존이 지은글)는 西域(서역)의 언어이며 西域(서역)을 匈奴(흉노) 또는 胡族(호족)이라 불렀다
<탱리고도어>는 몽고어로서 임금을 汗(칸,한)이라 하였다
신라에서 호칭한 <거서간> 또는
<거슬감>의 이름은 현재 몽고에서 전설적인 天王(천왕)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나뭇꾼과 선녀>와 三神思想(삼신사상)이 전래하고 있다
곧 고대 西域(서역)과 몽고는 고대 한국의 선조님이 제도하신 나라인 것이다
즉 신라의 시조 赫居世(혁거세)님이 계신 곳이
몽고 밑에 있는 金城(금성:王舍城(왕사성:신라)에 많이 계셨던 것이다
金城(금성)아래가 곧 西域(천축국)이며 西域(서역)은 印度(인도)가
아니다
그 시대의 인도는 三韓(삼한)의 一國(일국)으로서 南海(남해)라 불렀으며 慶州(경주)에 있는 金城(금성)은 신라의
도읍이
아니다
西域(서역)이란 중국에서 보아 서방 지역으로 중앙아시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이란과 파키스탄과 인도까지 포함하며
燉煌(돈황)의 서쪽과 동파키스탄의 여러 나라를 말한다
동파키스탄이란 서쪽의 파밀 高原(고원)과 남은 昆崙山脈(곤륜산맥) 북쪽은 天山山脈(천산산맥)에 둘러싸인 타림
盆地(분지)를 말하는데 중앙에 타구라마칸 砂漠(사막)이 있음으로 西域諸國(서역제국)은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고
동서로 길게 분포해 있었다
<불교사전 참조>
백제 본기 제 6 의자왕 <삼국사기의 새로운 해설>
義慈王(의자왕)은 武王(무왕)의 元子(원자)이며 영웅 호걸로서 용맹하고 대담한 결단력을 갖고 있었다 武王(무왕)
재위 33년에 태자로 책봉 되었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 스러워 그 시대는 海東(해동)의
曾子(증자)라 불렀다
武王(무왕)이 돌아 가시자 태자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唐(당) 태종은 祠部郎中(사부낭중) 鄭文表(정문표)를
파견하여 柱國帶方郡王百濟王(주국대방군왕백제왕)으로
冊名(책명)하였다
가을 8월에 사신을 唐(당)에 파견하여 감사의 표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쳤다
2년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조공을 하고 2월에 왕은 州郡(주군)을 巡行(순행)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조사하여 死刑囚(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하여 석방하셨다 가을 7월에 義慈王(의자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려
신라를 침략하여 彌 城(미후성)등
40여의 城(성)에서 항복을 받았다
8월에 장군 允充(윤충)을 파견하여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大耶城(대야성)을 공격하여
城主(성주) 品釋
(품석)이 妻子(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 하였다
允充(윤충)이 모두다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王都(왕도)에 전달하고 남녀
1,000여명을 생포하여 나라 서쪽의
州(주)와 縣(현)에 나누어 살도록 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그 城(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은
允充(윤충)의 功(공)을 賞(상)으로 말 20필과 곡식 1,000석을 주었다 3년 봄 정월에 사신을 唐(당)에 파견하여
조공을 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은 고구려와 和親(화친)하고 모략하여 신라의 黨項城(당항성)을 쟁취하고 入朝(입조)하는 길을 막고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함으로 신라왕은 德曼(덕만)이를 사신으로 唐(당)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듣고는 공격을 그만 두었다
4년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니 태종은 司農丞相里(사농승상리) 玄奬(현장)을 파견하여 양국
에게 諭示(유시)를 알리니 왕은 表書(표서)를 받고는 사죄하였다
왕자 隆(융)을 태자로 세우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가을 9월에 신라의 장군 김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七城(7성)을 탈취
하였다 5년 여름 5월에 왕은 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정복하려고 신라의 군사를 징발한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七城(7성)을 습격하여 다시
쟁취하니 신라는 장군 김유신을 파견하여 침략해 왔다
7년 겨울 10월에 장군 義直(의직)이 步騎兵(보기병) 3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茂山城(무산성)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甘勿(감물) 桐岑(동잠) 두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장군 김유신이 친히 사졸을 격려하며 결사적
으로 싸워 크게 부수니 義直(의직)은 한필의 말로 돌아갔다
8년 봄 3월에 義直(의직)은 신라의 서쪽 변두리 腰車(요거)등
10성을 습격하여 쟁취하였다 여름 4월에 玉門谷
(옥문곡)에 進軍(진군)하였더니 신라의 장군 金庾信(김유신)은 이들을 맞아 다시 싸워
대패시켰다
9년 가을 8월에 왕은 佐相(좌상) 殷相(은상)을 파견하여 정예병 7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石吐城(석토성)등
七城
(일곱성)을 공격하여 쟁취하였다
신라의 장군 김유신 陳春(진춘) 天存(천존) 竹旨(죽지) 등을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여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道薩城(도살성) 아래에 주둔시키고 다시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大敗(대패) 하였다
겨울 11월에 우뢰가 있었고 얼음이 얼지
않았다
11년에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조공을 하였더니 그 사신이 돌아 가는 편에 璽書(새서)를 내려 왕에게 諭示(유시)
하여 말하기를 海東(해동)의 삼국은 터전을 개척한지 오래 되어 아울러 국경의 지형도 나란이 있어 마치 개
잇발과 같이 근대 이래로 嫌惡(혐오)하여 間隙(간극)이 벌어져 전쟁을 서로 일으켜 조금도 편한 세월이 없으며
삼한의 백성들 목숨은 도마 위에 식칼로 치는 것과 같고 창을 쌓아 함부로 분풀이 하는 일을 아침 저녁으로 일삼고
있으니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니 보기에 매우 민망 스럽도다
지난해 고구려 신라
등의 사신이 아울러 입조 하였을때 짐은 명하여 이로 부터 원한을 풀고 다시 친목을 돈독히
하라 하였는데 신라의 사신 김법민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잇발처럼 서로 의지하여 마침내 무기를
들고 大城(대성)을 침략하여 겹겹이 鎭地(진지)를 구축하여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어 국토는 날로 줄어 들어 국력
마져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원컨데 백제에게 조서를 내리시여 침탈해간 城(성)을 돌려 주도록 하십시요
만약
조서대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곧 군사를 일으켜 빼앗을 것이나 다만 옛땅만 찾는다면 곧 서로 화친을 청할
것입니다 함으로 짐은 그 말이 이미 순함으로 허락지 않을수가 없었오 옛날 齊(제)나라 桓公(환공)은 여러 나라의
제후로서 오히려 망한 나라를 존속 시켰는데 하물며 짐은 만국의
종주로서 위태로운 번국을 어찌 구홀하지 않겠는가
왕은 아울러 신라의 城(성)은 마땅히 그 본국으로 반환하면 신라에서는 잡아간
포로또한 본국의 왕에게 돌려 보낼
것이요 그러한 후에는 우환이 될만한 근심을 풀어 버리고 창을 감추어 싸움을 그친다면 백성은 편안히 쉴수 있어
소원을 얻고 三國(삼국)은 전쟁의 수고가 없을 것이요 대저 피가 변정에 흐르고 시체만 국경에 쌓이니 농경지는
황폐되고 아울러 베짜는
士女(사녀)도 없으니 어찌 같은 동족이 해를 같이 하며 살아 간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만약에 왕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진격을
중지하지 않는 다면 짐은 法敏(법민)의 소청에 의하여 임의대로 그가
왕과 더불어 싸움을 결단하도록 할것이오
또한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에서
서로 구홀하지도 못하게 할것이오
고구려도 만약에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곧 契丹(걸안)과 여러 번국에게 명하여 遼水(요수)를 건너가
抄掠(초략)할
것이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좋은 복을 구하는 양책을 圖謀(도모)하고 怠慢(태만)함이 없이 후회가
없도록
하시요
12년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조공 하였다
13년 봄에는 가뭄이 크게 들어 백성들이 많이 굶주렸다 가을 8월에
왕은 倭國(왜국)과 통하여 友好(우호)하였다
15년 봄 2월에 태자가 거처하는 궁전을 수리하면서 극히 사치스럽게 장식하여 왕궁 남쪽에
望海亭(망해정)을 세웠다
여름 5월에 北岳山(북악산) 烏含寺(오함사)에 붉은 까마귀가 들어와 울면서 佛寺(불사)를 돌다가 수일후에
죽었다
7월 가을에 馬川城(마천성)을 重修(중수) 하였다 8월에 왕은 고구려와 靺鞨(말갈)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여 30여
성을 파괴하니 신라왕 김춘추는 사신을 唐(당)에 파견하여 進表(진표)에서 칭하기를 백제는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 나라의 북쪽 국경을 침범하여 30여성이
함락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16년 봄 3월에 왕은 궁녀들과 함께 음탕한 향락에 빠져들어 飮酒(음주)를 그칠 줄을 모르니 佐平(좌평)
成忠(성충:
淨忠(정충)은 극진히 諫言(간언) 하다가 왕의 진노로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로 인하여 감히 말하는 자도
없었다
成忠(성충)은 옥중에서 죽었는데 임종에 이르러 글을 올려 上書(상서)하기를 충성스러운 신하는 죽어도 임금을 잊지
못한다 하였으니 원컨데 한 말씀을 드리고 죽겠읍니다 신이 항상 관찰하여 보면 변하는 시대는 반듯이 軍事革命
(군사혁명)이 있었습니다
무릇
장병을 사용할때는 반듯이 그 지형을 세심히 선택하고 朝廷(조정)은 敵(적)들의 上流(상류)를 살펴본 연후에
보존할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異國(이국)의 군사가 쳐들어 온다면 陸路(육로)는 沈峴(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시고 水軍(수군)은
지
伐浦(지벌포)의 해안에 들어오지 못하게하여 그 險路(험로)는 방어 할수있어야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나 왕은 살펴보지도
않았다
17년 봄 정월에 왕은 庶子(서자)와 41명을 등용하여 佐平(좌평)으로 삼고 각각 食邑(식읍)을 주었다 여름 4월에
가뭄이
크게 들어 땅이 붉게 물들었다
19년 봄 2월에 여우 무리들이 궁중에 들어 왔고 여우 한마리는 上佐平(상좌평)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여름
4월에
태자궁에서 암 닭이 작은 참새와 교미를 하였다
將帥(장수)를 파견하여 신라의 獨山(독산)과 棟岑(동잠) 두 성을
공격하였다
5월에 王都(왕도)의 서남쪽인 泗 河(사비하)에서 큰 물고기가 밖으로 나와 죽어 있었는데 길이가 三丈(삼장)이나
되었고
가을 8월에 여자의 시체가 生草津(생초진)에 떠 올랐는데 길이가 18척이나 되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홰나무에서 사람의 곡소리와
같이 울고 밤에는 궁의 남쪽에서 귀신의 울음 소리도 들려 왔다
註說(주설):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왜곡된 국사교육과 삼국사기등의 그릇된
번역으로 인하여 역사관이 오염되어
있기때문에 삼국사기등에서 이미 역사적 진실이 밝혀져있으나 그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로 본문의
번역은 시중에 있는 삼국사기의 번역과는 다소 다름을 알림니다.
백제본기 제 6 義慈王(의자왕)을 이어서
20년 봄 2월에 王都(왕도)의 우물물이 핏빛같이 붉고 西海(서해)의 바닷가에는 고기가 나와 죽어 있었는데 백성
들이 먹을수 없을 정도로 泗 河(사비하)의 물이 피빛 같이 붉었다 여름 4월에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로 모여
들었고 王都(왕도)의 저자 거리에서 사람들이 이유 없이 놀라 달아나고 마치 뒤에서 잡으려는 자가 쫓아 오는것
같아 놀라서 넘어져 죽은 사람이 백여명이나 되었고 잃어버린 재물도 수없이 많았다
5월에 폭풍우가 쏟아지고 天王(천왕)과 道讓(도양)
두 절의 塔(탑)에서 벼락이 떨어 졌고 또 白石寺(백석사)의 절
에도 벼락이 떨어지고 검은 구름과 같은 龍(용)이 동서의 공중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6월에 王興寺(왕흥사)의 많은 승려가 모두다 보았는데 마치 돛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 오는것 같았고
들에서 노는 사슴과 같이 생긴 개 한마리가 서쪽에서 泗 河(사비하) 언덕에 이르러 王宮(왕궁)을 향햐여 짖다가
어디로 갔는지 없었고 王都(왕도)의 개들도 무리를 지어 路上(로상)에서 혹은 짖고 혹은 울다가 잠시 후에는 곧
흩어지고 귀신 하나는 궁중에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하며 크게 외치다
곧 땅으로 들어갔다
왕은 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 보게 하였더니 깊이가 석자쯤 되어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등에 글이
씌여있기를 백제는 月輪(월륜)과 같고 신라는 月新(월신)과 같다 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月輪(월륜)과 같다 함은
가득 찼다는 뜻이니 달이 가득차면 기우는 것이요 月新
(월신)은 새로운 달이니 가득차지 않았다는 뜻이니 가득차지 않으면 점차 가득 차게 된다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니
왕은 震怒(진노)하며 그 자를 죽여 버렸다
누구가 말하기를 月輪(월륜)은 盛(성)하다는 뜻이고 月新(월신)은
微弱(미약)하다는 뜻이니 생각하여 보면 우리
나라는 번성하고 신라는 차차 미약해 질것입니다
라고 대답하니 왕은 기뻐하였다
당의 고종은
좌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좌위장군 劉伯英(유백영)은 우무위장군에
馮士貴(풍사귀)는 좌효위장군에 龐孝公(방효공)을 임명하여 군사 13만명을 통솔케하여 정복하려 왔고 겸하여
신라왕 金春秋(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그 나라 군사에게 파견하여
合勢(합세)하였다
蘇定方(소정방)은 군사를 통솔하여 城山(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에 있는 德物島(덕물도)에 이르니
신라왕은
장군 金庾信(김유신)을 파견하여 精銳兵(정예병) 5만명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왕이 듣고는 君臣(군신)회의에서 전투에 대한 守備(수비)를
물으니 佐平(좌평) 義直(의직)이 進言(진언)하기를
唐兵(당병)은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으니 물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이라 마땅히 처음 배를 타고 육지에 내리면
피곤하여 士氣(사기)가 평안하지 못할때 습격하면 뜻을 이룰수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大國(대국)의 원조를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경멸하는 마음이 있음으로 만약에 唐(당)의 사람들이
전투를 잘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면 반듯이 疑懼心(의구심)이 들어 정예병이라 할지라도 감히 진격할수 없을 것입
니다. 고로 唐(당)의 사람들과 먼져 결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達率(달솔)과
常永(상영)등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唐兵(당병)은 멀리서 왔기 때문에 속전하려고 할것
이니 그들의 예봉을 어찌 당하겠습니까
신라
사람들은 전에도 우리 군사들에게 자주 패전하였기 때문에 지금 우리 군사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唐兵(당병)들의 길을 막아 그들의 군사가 힘이 빠질때를 기다리고 먼져
일부의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습격하여 그 銳氣(예기)를 꺾은 뒤에 편이를 기다려 合戰(합전)을 하면 전국의
군사로 나라를 보전할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왕은 오히려 예측할수가 없어 어느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때 佐平(좌평) 興首(흥수)가 죄를 지어 古馬彌知(고마미지)의 縣(현)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사람을 파견하여
묻기를 사태가 급박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興首(흥수)가 대답하기를 唐兵(당병)은 이미 수효가
많고 군율도 엄하여 밝으며 하물며 신라와 앞뒤에서 共謀(공모)하여 싸울 것임으로 만약에 平原(평원)의 넓은 廣野
(광야)에서 對陣(대진)을 한다면 승패를 알수없을
것입니다
白江(지벌포)나 炭峴(탄현:침현)은 우리 나라의 要塞地(요새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으로서 한 사람이 單槍(단창)으로
만명을 감당할수 있는 용맹한 군사로서 수비를 잘하여 唐兵(당병)들이 白江(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사람들도 炭峴(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城門(성문)을 닫고 겹겹이 굳게 守備(수비)를하면서 그들의
軍糧(군량)이 다 하면 사졸들은 지칠것이니 그때를 기다려 분발하여
습격한다면 반듯이 파괴시킬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大臣(대신)들은 믿지를 않고 말하기를 興首(흥수)는 오래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의 말대로 할수 없습니다 만약에 唐兵(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 오려면 沿岸(연안)
의 흐르는 물때문에 方舟(방주:배)는 들어 올수 없을 것이며 신라의 군사들도 炭峴(탄현)에 올라 오려면 좁은 길을
경유해야 함으로 말과 여러 줄을 세워 들어 올수는 없을 것이니 마땅히 이때는 縱列(종열)이니 군사로 습격한다면
비유하자면 새장에 닭이나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니
왕은 그렇겠군 라고 하였다
또 듣기를 羅唐軍(나당군)은 이미 白江(백강)과 炭峴(탄현)을 통과하였다 함으로 伯(계백) 장군을
파견하여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黃山(황산)으로 진격하여 신라의 군사와 함께 네번 전투하여 다 승리하였으나 병력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마침내는 패배하여 계백 장군도 전사하였다
이에 병력을 합하여 熊津口(웅진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강가에 장병을 주둔시켰으나 소정방은
왼쪽의 산을 타고
布陣(포진)하여 우리 군과 전투를 하였으나 大敗(대패)를 하니 王師(왕사)는 배를 연결하여 潮流(조류)를 타고
進軍(진군)하면서 북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蘇定方(소정방)은 步騎兵(보기병)을 거느리고 都城(도성)으로 직행하여
30리쯤의 거리에서 停止(정지) 함으로 우리 군사들이 모두다 항거하였으나 또 大敗(대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명
이나 되었다
唐兵(당병)들은 승세를 타고 城(성)을
肉薄(육박)하니 왕은 벗어 날수 없음을 알고 한탄하며 말하기를 충성스러운
신하의 말을 듣지 않고 이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하고서 드디어 태자 孝(효)와 함께 북쪽의 변두리로 도망하였으나
소정방이 그 城(성)을 포위하니 왕은 둘째 아들 泰(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중을 통솔하며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文思(문사)가 왕의 아들 隆(융)에게 말하기를 왕이 태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시니 叔父(숙부)가 마음대로 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唐(당)의 군사가 물러간다면 우리들은 안전할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드디어 좌우를 거느리고 밧줄에 메달려
城(성)에서
내려오니 백성들도 모두 뒤를 따라 나오니 泰(태)는 중지 시킬수 없었다
소정방은 군사로 하여금 성곽에 올라 당의 깃발을 세우게 하니
泰(태)는 사태가 긴박함을 알고 城門(성문)을 열고
항복을 청하였다
소정방은 왕과 太子孝(태자효)와 왕자 泰(태) 隆(융) 演(연)
大臣(대신)과 將士(장사) 88명과 백성 12,807명을
唐(당)의 서울로 이송하였다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0,000호가 있었다
이에 熊津(웅진) 馬韓(마한) 東明(동명) 金漣(금련) 德安(덕안)에 五 都督部(5 도독부)를 설치하여 각기
州縣(주현)
을 두어 통솔하도록 하고 渠長(거장)을 뽑아 都督(도독) 刺史(자사) 縣令(현령)이 다스리게 하고 郎將(낭장) 劉仁願
(유인원)에게 명하여 都城(도성)을 지키게하고 또 좌위낭장 王文度(왕문도)를 熊津都督(웅진도독)으로 삼아 남은
군중을 위안하며 보살피게 하였다
소정방은
포로를 高宗(고종)에게 보이니 책망하고는 용서하였다
왕이 병들어 죽으니 金紫光祿大夫衛尉卿(금자광록대부위위경)의 관직을 내리고
舊臣(구신)에게도 부임을 허락
하였다 장례에 詔書(조서)를 내려 孫皓(손호) 陳叔寶(진숙보)의 묘지 곁에 葬地(장지)로 정하고 아울러 碑石(비석)을
세웠다 隆(융)에게는 司稼卿(사가경)의 벼슬을 授與(수여)하였다
상기의
孫皓(손호)는 孫權(손권)의 손자로서 吳(오)나라 최후의 임금이며 포악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곧 손호는 백제 의자왕의 숙부가
된다
吳(오)나라는 중국 삼국시대의 한 나라 이름이며 孫權(손권)은 江南(강남)에 나라를 세웠으며 도읍은 建業(건업:南京)이며
孫皓(손호:서기 222 --280년)는 晉(진)나라 司馬炎(사마염)에게 멸망하였다
따라서 <백제 의자왕>의 묘는 吳(오)나라에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진실을 그 누가 부정하는가,,,,
<백제본기 제 6 義慈王(의자왕)을 이어서>
王文道(왕문도)는 바다를 건너다 죽었음으로 劉仁軌(유인궤)에게 그의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武王(무왕)의 宗子(조카) 福信(복신)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승려 道琛(도침)과 함께 周留城(주류성)에서
雄據
(웅거)하다 배반하고는 옛 왕자 夫餘豊(부여풍)을 맞아 들려 일찍이 倭國(왜국)에 불모로 갔던자이다
西北部(서북부)에서 호응한
군중들을 거느리고 都城(도성)으로 들어가 劉仁願(유인원)을 포위함으로 당은 詔書
(조서)를 내려 劉仁軌(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로 기용하여 王文道(왕문도)가 거느린 군중과 신라의 군사를
일으켜 劉仁願(유인원)을 구원하도록 하니 유인궤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가
보다 라고 하였다
唐歷(당역) 및 廟諱(묘휘)를 청하여 떠나면서 말하기를 나는 東夷(동이)를 평정하고
大唐(대당)의 正朔(정삭)을
해외에 公表(공표)하고자 한다 라고 하였다
劉仁軌(유인궤)는 防禦軍(방어군)을 정돈하여 전투에 임하기 전에
福信(복신)등에 대한 대책을 양쪽으로 세웠다
熊津江(웅진강) 입구에서 항거하는 것과 인궤는 신라의 군사와 합격함으로 우리 군사는
후퇴하여 城柵(성책)으로
들어오는데 강물이 가로막히고 다리가 좁아 물에 떨어져 익사하거나 전투하다 죽은 자가 1만여명이나 되었다 福信
(복신)등은 都城(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任存城(임존성)을 지켰는데 신라의 사람들도 양식이 다 되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때는
龍朔(용삭) 원년 3월에 道沈(도침)은 자칭 영거장군(영거장군)이라 칭하고 福信(복신)은 자칭 霜岑將軍(상잠
장군)이라 하며 군중들을 집결시켜 그 세력은 날로 확장되자 사람을시켜 유인궤에게 말하기를 듣자니 大唐(대당)이
신라와 함께 약속하기를 백제에 대해서는 老少(노소)를 묻지 않고 모두 죽인후에 나라를 신라에 준다고 하였다니
죽을 지라도 싸우다 죽어야지 어찌 망하여 항복하고 죽겠는가 따라서 굳게 단결하여 지키자 라고
하였다
유인궤는 禍福(화복)에 대한 글을 지어 使者(사자)를 파견하여 諭示(유시)를 하여 陳謝(진사)를 받아 오도록 하였
더니 道琛(도침)등은 병력이 많음을 믿고 교만하며 유인궤의 使者(사자)를 館(관) 밖에 두고 傲慢(오만)하여 使者
(사자)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小官(소관)이고 나는 한 나라의 大將(대장)이니 함께 참여 할수없다 하며 答書(답서)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왔다
유인궤는 병력이
적음을 확인하고 유인원과 합군하기로 하고 사졸을 휴식시키고 표를 올려 신라와 합하여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신라왕 金春秋(김춘추)는
詔書(조서)를 받고는 그의 장수 金欽(김흠)에게 군사를 통솔하여 유인궤등을 구원하도록
하였으나 옛 泗 城(사비성)에 이르러 福信(복신)에게 습격을 받아 패한 적이 있는 金欽(김흠)은 葛嶺道(갈령도)
에서 도망한 뒤부터 신라는 감히 다시는 진격하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福信(복신)은 道琛(도침)을 죽이고 그 군중을 합병하였으나 豊(풍)은 능히 방어하지 못하고 祭祀
(제사)만 주관할 뿐이였다
복신등은
유인원등이 구원없이 성에 홀로 외로이 있음을 보고 使者(사자)를 파견하여 위로하기를 大史(대사)등은
어느때 서쪽으로 돌아갈 것인지 알려 주면 전송을 하겠오 龍朔(용삭) 2년 7월에 劉仁願(유인원)과 劉仁軌(유인궤)
등은 福信(복신)의 잔당을 熊津(웅진)의 동쪽에서 크게 파괴하고 支羅城(지라성)및 尹城(윤성) 大山城(대산성)
大山沙井(대산사정)등에 城柵(성책)을 빼앗아 죽이고 흭득한 것도 매우 많았으며 군중을 나누어 장병으로 지키게
하였다
복신등이 있는 眞峴城(진현성)은 가에 강이 있고 또 산이 높고 지세가 험하여 장병들이 수비하기 좋은
要衝地
(요충지)였다 유인궤는 밤을 이용하여 신라의 군사를 독려하여 성위에 널판지로 성첩을 세우고 날이 밝자 城(성)안
으로 들어가 800명을 목베어 죽이고 군량의 輸送路(수송로)를 개통시켰다 유인원은 군사를 증가하여 줄것을 청하니
당은 詔書(조서)를 내려 淄州(치주) 靑州(청주) 萊州(래주) 海州(해주)의 장병 7천명을 징발하여 좌우위장군 孫仁師
(손인사)를 파견하여 군중들을 통솔하도록 하고 바다를 건너 유인원에게 군중을
증익시켜 주었다
이때 복신은 오로지 권력에 전념하여 이미 夫餘豊(부여풍)과 서로 시기함이 쉴틈이 없었기에 복신은 질병을 핑게
삼아 窟室(굴실)에 누워서 질병에 방문하여 줄것을 요청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가 夫餘豊(부여풍)이 오면 잡아 죽이
기로
하였다
夫餘豊(부여풍)은 이와 같은 사실을 미리 알고 친하게 믿는 將帥(장수)와 엄습하여 福信(복신)을 죽이고 使者(사자)
를 고구려와 왜국에 파견하여 군사를 구걸하려 하였으나 唐兵(당병)들이 항거하고 孫仁師(손인사)를 中路(중로)
에서 만나 격파하고 유인원의 무리와
드디어 합세하여 士氣(사기)는 크게 떨쳤다
이에 모든 장군들은 앞으로의 진군 할곳을 의론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加林城(가림성)은
水陸(수륙)의 요충지이니
먼져 습격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으나 劉仁軌(유인궤)는 말하기를 병법에 實(실)한 곳은 피하고 虛(허)한 곳을
공격하라 하였으니 加林城(가림성)은 지세가 험하고 견고히 지키고 있으니 공격을 한다면 병사들이 부상자가 많을
것 같고 지키고 있자니 날자가 많이 걸릴것 같으며 周留城(주류성)은 백제의 巢穴(소혈)로서 군중들이 모여 있으니
만약에 이긴다면 여러 城(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註說:국사의 周留城(주류성):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任存城(임존성):大興(대흥)으로 되어있으나 중국의 하남성,
호북,호남성에 있다
상세한 지도는 추후에 넣겠음
이에 손인사 유인원 및 신라왕 金法敏(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려 進軍(진군)하고 別帥(별수)
杜爽(두상)과 夫餘隆
(부여융)은 水軍(수군)과 軍糧(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熊津江(웅진강)에서 白江(백강)으로 가서 陸軍(육군)을
만나 함께 周留城(주류성)을 향하여 달려 갔는데 白江(백강) 입구에서 倭人(왜인)을 만나 네번을 전투하여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00척을 불사르니
燃燒(연소)하며 灼熱(작열)하는 불꽃은 天海(바다)에 뜬 배를 밝게비췄다
왕 夫餘豊(부여풍)은 피신하여 脫走(탈주)하였는데 있는
곳을 알수 없었으나 혹 고구려에서 분주히 돌아 다닌다고
하였으며 그의 寶劍(보검)만 획득 하였다
왕자 夫餘忠(부여충) 夫餘勝(부여승)과
忠志(충지)등은 그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倭人(왜인)과 함께 항복하였으나
遲受信(지수신)만 홀로 任存城(임존성)에 雄據(웅거)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黑齒常之(흑치상지)는 나라가
망하여 흩어진 사람을 불러 모았는데 열흘 사이에 돌아온 자가 3만명이나 되었다
소정방은 군사를
파견하여 공격 하였으나 黑齒常之(흑치상지)의 抗拒戰(항거전)으로 敗走(패주)하고 다시 200여
성을 쟁취하여 蘇定方(소정방)도 이기지
못했다
黑齒常之(흑치상지)는 別部將(별부장)이 되어 沙咤相如(사타상여)와 함께 天險(천험) 地勢(지세)로 웅거하며 福信
(복신)을 응원하였으나 끝내 모두 항복을 하니 유인궤는 그들의 赤愷心(적개심)을 보고 거짓없는 마음으로 쟁취한
任存城(임존성)을 스스로 지키게 하는 것이 효과가 좋을것 같아 곧 무기와 軍糧(군량)을 주었다 손인사가 말하기를
野心(야심)은 믿기 어려운 것을 만약에 救濟(구제)하여 갑옷과 오곡 물자를 준다면 적들에게 편의만 제공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劉仁軌(유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常如(상여)와 常之(상지)를 보니 충성스러워
圖謀(도모)한 것이고 그 충성으로
인하여 圖謀(도모)하는 것은 큰 功(공)을 세운 것이니 이 기회에 숭상 받아야 할 것이니 어찌 두사람을
의심하겠는가
그 城(성)이 빼앗기니 遲受信(지수신)은 妻子(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남어지 잔당들은 모두다 평정
시키고 仁師(인사)등은 떨치며 돌아가니 唐帝(당제)는 詔書(조서)를 내려 劉仁軌(유인궤)를 머물러 있게하고 장병을
통솔하여 지키게 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兵火(병화)로 남은 집들은 불에 타고 屍體(시체)는 빳빳하게 굳어 있거나
썩은 시체로 초목은 욱어져있었다
유인궤는 비로소
骸骨(해골)을 땅에 묻도록 명하고 촌장을 모아 인구 조사를 하여 호적에 올리고 官署長(관서장)은
도로를 개통시키고 교량도 세우고 제방둑도 보수를 시켜 기울어진 둑을 복구하고 농사일과 뽕나무를 가꾸어 누예
치는 일을 일과로 삼아 가난한 사람에게는 장사를 하도록 하고 늙어 외로운 사람을 위하여 養老院(양로원)과
孤兒院(고아원)을 세웠다
唐(당)은 社稷(사직)의 宗廟諱(종묘휘:역대 제왕의 이름자를 새긴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천자의 명으로
正朔(정삭)을 반포하니 백성들은 안정되어 모두가 기뻐하였다 그곳에 帝(제)는 夫餘隆(부여융)을 熊津都督(웅진도독)
으로 삼아
평민을 귀국시키고 신라와 옛 감정을 풀게하려고 환국한 사람도 초청하였다
麟德(인덕) 2년에 신라왕과 함께 熊津城(웅진성)에 모여
백마를 죽여 盟誓(맹서)를 하였는데 유인궤는 맹서문의
글을 지어 金書鐵契(금서철계)라 하여 신라의 宗廟(종묘)에도 소장해 두었고 맹서문은 新羅紀(신라기)의 내용 중에
나타나 있다
유인원 등이 還國(환국) 하니 隆(융)은 군중이 흩어질까바 두려워하다 역시 唐의 서울로
돌아갔다
儀鳳中以隆爲熊津都督帶方郡王遣歸國安輯餘衆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時新羅强隆不敢入舊國寄理高句麗死
(매우 중요한
문장이다)
儀鳳(의봉:서기 67-8년)중에 隆(융)을 熊津都督(웅진도독) 帶方郡王(대방군왕)으로 삼아 귀국시켰으며 남어지
군중은
輯安(집안)에 살게하였다
이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新城(신성)에 옮기고 통치하도록 하였다 이 시대에 신라는 强國(강국)으로서
隆(융)은 감히 옛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서 寄居(기거)하며 살다가
죽었다
註說:儀鳳中以隆爲熊津都督帶方郡王遣歸國安輯餘衆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時新羅强隆不敢入舊國寄理高
句麗死(본문에서 安輯(안집)은 輯安(집안)이라 사료된다 상기의 웅진과 대방군의 지역은 어디에 있는가 백제본기
제 6 의자왕편만 탐구하여도 오늘날의 국사는 왜곡되어 있음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武后(무후)는 또 그의 손자 敬(경)에게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그 땅은 이미 신라와 渤海(발해)와 靺鞨(말갈)이
소유하여 나누어졌기 때문에 國系(국계)는 드디어 끊어지고 말았다
論說(논설) 하자면 新羅古事(신라고사)에서 이르기를 하늘에서
金櫃(금궤)를 타고 내려왔기 때문에 姓(성)을
金氏(김씨)라 하였다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수가 없으나 臣(김부식)은 국사를
編修(편수)하면서 傳(전)하고 싶으나 그 책이 舊辭典(구사전)
이라 落張(낙장)되어 얻을수 없었다
그리고 또 듣기를 신라 사람들은
자칭 小昊金天氏(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 하였다
<신라의 國子博士(국자박사) 薛因宣(설인선)이 지은 金庾信(김유신)의 碑銘(비명)과
朴居勿(박거물)이 짓고
姚克一(요극일)의 글로된 三郞寺(삼랑사) 碑文(비문)에 보인다> 고구려 또한 高辛氏(고신씨)의 후손임으로 姓(성)을
高氏(고씨)라 하였다
<晋書(진서)에 記載(기재)되어 보인다>
高辛王(고신왕)은 바로 帝 (제곡)이며 제곡은 인간 세상에서 최초의
君王(군왕)이 된 사람이다
즉 황제의 神政(신정)시대에 최초로 君王(군왕)이 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을 준(峻) 또는 高辛(고신)이라
하고 사람들은 高辛王(고신왕)이라 불렀다.
高辛王(고신왕)의 막내 아들이 곧 중국의 유명한 堯(요) 임금이 되느니라
堯(요)
임금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중화민족은 어느나라 민족의 후예인가?
중화민족은 동이겨레의
후예이니라.........
따라서 중국의 고대역사는 한민족의 고대역사이니라.......
古史(고사)에서 말하기를 백제는 고구려와 동족으로 扶餘(부여)에서 나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秦漢(진한)이
兵亂(병란)이 있었을때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 海東(해동)으로 달아났다 라고 하였다
즉 삼국의 선조님은
고대 聖人(성인)의 後裔(후예)로서 어찌하여 그토록 나라를 길게 보존하고 오래도록 享有(향유)
하였을까?
百濟(백제)는 말엽에
이르러 도에 맞지 않는 행동을 많이 하였고 또 대대로 新羅(신라)와 원수가 된것은 고구려와
연대하여 親和(친화)하고 앞질러 침략하여 그로 인하여 기회 타기가 편리하여 신라의 중요한 城(성)을 쟁취하고
활당하여 鎭靜(진정)을 그치지 않았다 소위 어질은 사람과 친하고 이웃과 의좋은 사이가 아니 였다 국가도 善隣
(선린) 友好(우호)하는 것이 나라를 보존하는 보배인 것이다
이에 唐(당)의 天子(천자)는 재차 詔書(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평정하였음에도 나라가 멸망한 것은 陽(양:대국)에
陰(음:소국)은 복종하여야 함에도 違背(위배) 하여 大國(대국)에 죄를 얻었으니 멸망한 것은 역시 당연하다 하겠다.
끝
아래의 지도는 올바른 지도가 아니다
그러나 선현히 탐구한 지도이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남제서>권 58의 <백제전>에는 북위의 군대와 백제와의 전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엔
동성왕
(백제24대왕,479~501) 10년에 북위가 파병하고 침벌해 왔으나 백제에 의해 패퇴되었다.」고 하였으며,자치통감】
에서도 영명
6년(488)에 북위의 군대가 백제를 쳤으나 패퇴되었다」라고 하였다.
종래엔 이 기록들을 한반도의 백제와 중국 산서성 대동에 도읍한
북위국과 전쟁기사로 오인하여 착각해 온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이는 반도사관에 따른 해독 때문이다. 여기의 백제는 반도의 백제가 아니라 대륙의 백제인
것이다. 당시 동성왕은 산동반도의 백제 서경인 불기(거발성)에 도읍하여, 가까운 곳은 공격하고 먼 곳은 화친한
다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당시 북위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양자강 북쪽에 위치한 왕조로서 양자강 이남의 남조인 송·제·양·진 등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에 북위와의 무력충돌이 불가피했으며 멀리서 화친관계에 있는 남제의 왕에게 동성왕의 인사명령의
내용을 국서로서 통고한
것이【남제서】<백제전>의 내용인 것이다.
<역사지도에서 인용하였으니 참조바랍니다>
( http://column.daum.net/looktr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