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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SPONSORED SECRET NAVAL RAIDS
히스토리넷
미 중앙정보국(CIA)는 한국전쟁 동안 다양한 활동을 했고, 그중에는 적진을 넘어가는 해상작전도 있다. 부산항에서 연결되는 섬 영도를 그 근거지로 했고, 거기서 잘 훈련된 한국인 게릴라를 양성했다.
그 필수적인 훈련과 특수작전에 CIA는 네 대원을 파견했고 :
1. 더치 크레이머 소령
2. 톰 커티스 중위
3. 조지 애치슨 중위
4. 조 파그넬라 상사
네 명 모두 CIA의 일선 활동부대인 한국-연합고문단(Joint Advisory Commission) 소속으로 알파벳 앞 글자를 따서 JACK이라 불렀고, 본부는 부산의 남부해안 작은 마을 동래에 있었다.
‘잭’의 첫 지휘관은 알버트 핸니 육군 대령이었고, 이 해상 게릴라부대를 성공적으로 완성한 사람은 그다음 지휘관인 벤자민 밴더부트 대령, 밴더부트는 2차대전에서 82공수사단을 참전했던 사람이다. ‘잭’은 단지 해상만이 아니다. 한국전쟁 해상, 공중, 지상 특수작전의 계획과 지원을 미군의 간섭 없이 단독으로 맡았는데, 특수작전 외에 간첩을 침투/퇴출시키는 임무도 수행했다. 작전은 해안 목표물 기습 폭파와 미 극동공군의 구출에도 임무가 있어, 잭은 극동공군 추락 승무원 탈출 프로그램(Far East Air Force’s Escape & Evasion Program)에 포함된다.
잭 프로젝트의 암호명은 ‘꽃이 피다(개화. Blossom)였고, 개화가 암호명이 된 이유는, 침투시키는 특공대원들을 통해서 북한에 남아 있는 반공세력을 규합해 민주주의의 꽃을 피운다는 의미였는데, 이 개념은 남한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북한을 점령하고 장악하는 뿌리를 마련하는 데도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Most of those political infiltrators did not survive.
고문관 1인 더치 크레이머 해병 소령은 2차대전 동안 중국과 태평양의 전장을 누빈 거구의 군인으로, 2차대전 중에 국민당군 게릴라 양성을 감독하는 제3단의 지휘관으로 일본군을 습격 매복하는 작전을 이끌었었다.
마찬가지로 체구가 큰 2번 고문관 톰 커티스 중위는 강인한 해병 참전자로, 해병대에 15년 근무하면서 OSS 소속으로 대서양함대의 비밀 정찰단으로 작전했며 중국과 그리스에서 사보타주 게릴라로 활동했다. 은성훈장과 동성훈장 수여자다.
3번인 조지 애치슨 중위는 UDT-3 소속 장교로, 유디티 10인 팀으로 일본에 근무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건너왔다. 애치슨은 제1특수작전단 상륙제대를 이끌며 8월 5일, 이 작전은 고속 구축함 수송선 디아첸코를 모선으로 북한 해안에 들어가 고무보트로 침투하다 적 사격이 너무 거세서 상륙하지 못하고 취소되어 복귀했었다.
4번인 조셉 파그넬라 상사는 체격 근력이 상당한 사람으로, 한국전쟁에서만 전투강하 2회를 기록한 사람이며, 187공수연대전투단에서 전투하다 필요에 의해 영도로 호출되었다. 파그넬라는 밴더부트 대령을 처음 만난 때를 회고로 남겼다. 파그넬라와 다른 부사관들이 합류하여 대령에게 보고했는데, 대령 “드디어 (필요한) 부사관들을 손에 넣었어!” 말했다고 한다.
크레이머 소령이 영도 작전의 책임자였다. 같이 한국인 대원들을 통솔한 것은 한철민 소령으로, 한소령이 북한에 악감정이 있는 북한 피난민과 남한 사람을 물색하여 몇백 명을 선발했고, 비밀작전을 위한 훈련에 동참했다.
애치슨 중위-크레이머 소령-파르넬라 상사-한철민 소령이 훈련시킨 대원 40명으로 찰설한 것이 특수임무단(Special Mission Group. SMG)이다. 특수임무단의 목표는 북한 해안의 철도와 교량을 폭파하고 해상 선박에 대한 공격, 포로 획득이었다.
애치슨 중위가 선임교관으로 파그넬라 상사 조력을 받아 특수임무단을 훈련시켰고, 여기에 참가한 한국 측의 한국군 장교는 오백(Mr. O Pak)이란 사람으로, 전력이 강변 해적(river pirate)라고 알려졌다. 파그넬라 상사 묘사에 의하면 오백은 수염을 기른 위풍당당한 중년으로, 가벼운 몸이었으나 검도 마스터이자 전적이 있는 복서 출신으로 훈련 동안 파그넬라 상사와 함께 대원들에게 무술훈련을 시켰다.
유디티 장교인 애치슨 중위는 고무보트로 상륙 습격하는 기술, 수영과 폭파도 가르쳤다. 파그넬라 상사는 총기 교관으로 M-1 소총부터 50구경 기관총, 57mm 무반동총을 가르쳤다. 외에, 수류탄, 각종 지뢰와 부비트랩, 즉각반응 사격을 교육했다.
파그넬라 상사는 25미터 영점사격장과 250야드 사격장을 만들었고, 영도의 바위 지대에 낙하산훈련을 위한 훈련장을 만들었다. 공수교육장은 공수 자격이 있는 미군 25명이 모여서 조력해 구성했다.
고문관 톰 커티스 중위는 권총사격 숙련자로 사격훈련과 별개로 권총사격 규교육을 만들어서 45구경 권총을 가르쳤고, 총이 없을 수도 있는 게릴라전을 대비한 비무장 전투훈련도 교육했다.
이 모든 훈련 프로그램을 크레이머 소령과 한소령이 감독하며 전체 훈련을 이끌었는데, 이 두 명이 따로 하는 교육시간으로는 소련과 중공의 병기들과 응급처치, 독도법, 정찰과 매복, 박격포와 소부대 작전을 가르쳤다.
이 특수임무단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 플랫폼은 구축함 형 수송선이나 APD(고속 수송선)이었다. 북한 해안에 빠르게 다가갔다 나오기 위함 고속 구축함/수송선 외에 11m 길이 앞이 열리는 상륙정(LCPR) 네 정이 있었는데, 이 소형 상륙정은 태평양전쟁 동안 해병 정찰대와 유디티가 사용하며 성릉이 검증된 함정이다. 고속 수송선도 네 척 :
- Diachenko 구축함 구송선
- Horace A. Bass (APD-124)
- Wantuck (APD-125)
- Begor (APD-127)
51년부터 52년까지 사용했는데, 완턱과 베거는 원래 CIA가 침투용으로 사용하던 배다.
[잇빨 주 : 이 글은 영도유격대의 해상제대 위주로 쓰였고, 실제 해상제대는 전체 약 1천 명 유격대에서 소대~중대 규모였고, Y유격대는 공중침투 제대가 가장 많았다. 영도 유격대가 해체될 때 해상제대만 – 어쩌면 침투 유격대원 퇴출작전을 위해? - 완전히 해체하지 않고 한동안 운영하다 국군 정보부나 켈로부대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생존한 사람이 해상제대가 대부분이며, 이 분들은 자신들을 대한민국 유디티 시초로 간주하기도 한다. 북한이 6.25 당시 해군 전력이 없는 대신 해안선 경계는 철통 같이 유지해서 접안 작전이 힘들었다.]
특수임무단 팀의 침투에서 퇴출까지 표준 작전절차는 2차대전 동안 수년 간 실제 작전 경험을 토대로 했다 :
[침투]
- 야간에 고속 수송선이 해안에서 몇 킬로미터 거리에 조용히 서고
- LCPR, 가끔은 LCVP(보다 큰 노르망디 형)을 진수하고
- 이 상륙정은 밧줄로 고무보트들을 끈다
- 해안 500m에서 견인 로프를 풀고 고무보트가 노를 저어
- 해안 250m에서 고무보트 정지
정찰병이 수영으로 먼저 출발한다
안전이 확보되면 적외선 등을 점멸하고
게릴라들은 노를 저어 상륙하여 임무를 수행한다
[퇴출]
고무보트를 타고 정해진 시간에 pickup point로 도달
견인 밧줄을 상륙전에 걸고 수송선으로 복귀한다
상륙 해안의 지시는 레이더 방향-지시각과 무전기를 사용한다. 고무보트 중 지휘 보트에는 작은 반사장치가 있었고, 고속 수송선에는 레이더가 장착되어 수송선의 전투정보센터에서 (상륙정에서 해안까지) 방위각을 지속적으로 측정하며 무전기로 중계해 상륙을 진행한다. 이 침투 진행에서 작전이 중단된 때가 상당히 많았다. 이 침투 루틴의 문제보다는 해안 상황 때문에 취소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고속수송선의 장교와 수병들은 적 수상에 오래 머물러야 하므로 극심한 스트레스와 긴장 때문에 힘들었고, 빠질 때까지 거의 취침하지 못했다.
1952년 3월 19일, 수송선 완턱이 영도에서 특수임무단 게릴라들과 고무보트/장비를 싣고 출발했는데, 이 해상침투팀의 지휘관은 교관이었던 오백이었고, 통역관으로 천도현이 탔고(미군은 천도현을 존 천 크레이머라고 불렀다), 애치슨 중위와 파그넬라 상사도 같이 탑승했다.
이런 38도선 이북의 해안 작전은 애치슨 중위가 항공정찰 사진과 지도를 대조하며 침투 지점을 골랐고, 크레이머 소령/파그넬라 상사와 토의하여 접안점을 정했다. 또한 공격 목표물도 항공사진과 지도로 분석했다. 임무는 보급 차량 대열/열차 매복하고 파괴하는데, 운전병은 살려서 적재물이 무엇인가 확인했다.
3월 19일 작전은 두 팀으로, 미 해군 유디티 애치슨 중위가 한 팀, 오백이 한 팀을 맡았고, 한 팀의 무장 병기는 : BAR 자동화기 1정, M-1 소총과 카빈 소총, 45구경 기관단총으로 무장했다.
수영 정찰병으로 3인이 한 팀이 되어 안전을 확보했고, 오백과 천도현과 파그넬라는 무반동총 팀을 운영한다. 나머지 대원들은 공격제대와 목표의 남과 북을 감시하는 도로 차단조였다. 이날 작전을 위해 예행연습을 실시했고, 예행훈련이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모두가 만족했고, 이번 작전이 성공적일 거라고 예상했다.
(영도가 아닌 38선 아래 어느 지점에서) 바다에서 빛이 사라지자 완턱이 북으로 항로를 들었고, 파그넬라 상사는 무반동총의 시험 사격을 요청한다. 수송선 함장 존 트로는 고물에서 한다는 조건으로 허가했고, 무반동총 팀의 대원들이 어깨에 견착해서 성공적으로 사격하며 병기에 믿음직한 인상을 받았다.
밤 8시, 수송함 내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다가 고요한 가운데 수송함의 수병들은 전투위치로 자리를 잡고, 고무보트들을 내려서 상륙정에 로프로 연결하고 출발, 상륙정들은 목표 해안 500m 정해진 지점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날은 해안선에서 500m까지만 접근했다 복귀하는 리허설이었다. 최종 리허설은 성공적으로 조용히 수행되어 끝난다.
3월 21일, 진짜 작전이 시작된다. 컴컴한 가운데 밤 8시 45분 수병들에게 전투위치! 가 발령하고, 당시 정지한 완턱은 북한 해안에서 4km 거리.
25분 동안 고무보트들이 내려져 모든 LCPRs 견인 밧줄을 고리로 걸고, 클레이머 소령/오백/파그넬라/천도현이 command boat에 탔으며, 애치슨 중위는 PR-2, 문제가 생겼을 시에 사용한 예비(지원) 보트에 타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길 경우 이 지원 보트는 북한군 순찰선이 나타날 경우 본대가 퇴각할 때까지 주의를 끌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한국, 동해의 밤. 특수임무단 대원들을 태운 상륙정 엔진이 으러렁거리를 내며 수평선에 하얀 연기를 내기 시작했다.
아무 일 없이 침투 포인트에 도착해 상륙정이 해안 300m에 정지하자, 고무보트들이 나가다 다시 정지하고, 수영 정찰병인 [성씨] 한(Han) 대원의 신호를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고 지휘보트의 크레이머 소령 눈에 목표 지역 근처에서 희미한 등 깜빡임이 보였고, 그 신호 내용은 [모든 것이 안전함]이었다. 더치 크레이머 소령이 “Good luck, Sarge. Pag.” 파그넬라-오백-천도현과 무반동총 팀은 침투 고무보트로 갈아탄다.
파그넬라 상사. “보트들은 다이아몬드 대형으로 천천히 해안으로 이동했습니다. 우리 속도는 보조를 맞춰 젓는 노의 속도입니다. 오백, 나, 천도현은 선도 보트에 납작 엎드려서 방향을 지시했죠.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리면서 드디어 해안이 눈에 직접 보입니다. 결국 버트가 해안에 닿고 우린 손쉽게 모래를 밟았고, 재빨리 대원과 장비를 내린 다음 - 보트는 다시 바다 쪽으로 돌립니다.
정찰 선도제대가 절벽이 있는 곳에서 우리를 내륙의 해안 도로 쪽으로 이끕니다. 절벽 위쪽에 서자, 유(Mr. Yu)가 북쪽 도로 차단팀과 4개 매복팀을 이끌고 길에서 서쪽 고지대로 빠르게 사라집니다. 도로 남쪽 차단팀도 57mm 무반동총을 들고 가장 핵심적인 섹터에 자리를 잡습니다. 모든 제대가 자리를 잡은 것은 30분 걸렸습니다.
한(Han), 정찰병, 공격팀장인 부사관 윤볼요(Sergeant Yuan Bol Yo)가 남쪽 도로차단점에서 돌아와 - 도로에 그 어떤 차량 통행의 자국 같은 게 없다고 오백에게 보고했다. 난 천도현을 통해서 오백에게 물었죠.
‘남쪽과 북쪽의 도로 차단점 위치는 빠르게 가서 얼마나 걸리지?’
‘도로를 가다가 커브 하나만 돌면 됩니다.’ 답이 왔습니다.
오백이 날 잡고 도로차단점들 너머까지 정찰하러 가자고 말했어요. 우리 네 명은 남쪽 차단점 대원 둘을 데리고 남쪽으로 한 100m 조심스레 가니, 1마일 거리에 마을이 보여요. 정말로 도로에 자국이 없었죠. 우린 다시 남쪽 차단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백, 천도현, 윤볼요와 나는 다시 북쪽 차단점으로 갔지요. 거기서 팀장 유(Mr. Yu)에게 도로가 꺾이는 너무까지 정찰하고 오겠다고 했지요. 유는 같이 가겠다고 자동화기 사수 한 명을 불렀는데, 그때 천도윤이 속삭여요.
‘Sergeant Pag, this is very dangerous.’
그래서 내가 그랬죠.
‘Yes, but we must check this road.’
우린 정말 조심스럽게 걸었고, 50미터 100미터 150미터까지 샅샅이 살폈습니다. 없어요. 아무 차량 바퀴 자국이 없고, 심지어 수레 자국도 없어요. 유 팀장 자리로 돌아오니 오백이 30분만 더 기다려보자고 해요. 결국은 시간이 흘러 해안의 남쪽 차단점으로 돌아왔죠. 조용히 퇴각했어요. 한 팀씩 해안으로 가는 팀을 엄호하면서 나왔고, 첫 해안 정찰조가 마지막 엄호조를 하고, 전체 인원 장비 다 싣고 나서 엄호조가 보트에 올랐습니다. 그리곤 나왔죠.
침투와 각 팀들 배치도 정말 완벽했는데, 그날밤 북한군은 코빼기도 안 보였습니다. 결국 모선으로 돌아왔는데, 좌절한 특수임무단 대원들을 보고 크레이머 소령이 그래요. ‘페그, 항상 다 이길 수는 없어.’”
임무는 이틀 동안 거기서 작전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파고가 높아지고 바다가 거칠어지면서 취소되었다.
다음 작전은 3월 24일,
이번 임무는 철도 폭파였다. 날씨도 맑고 파도도 순조로웠는데, 완턱은 밤 9시 상륙정을 발진시킨다. 해안에서 400m, 보트들이 멈춰서 수영 정찰병의 신호를 기다린다.
40분 뒤에 수영 정찰병 ‘한’은 다시 지휘보트로 수영해 돌아왔고, 해안에 파도가 거의 2m로 치며 파고가 접안하기에 너무 높다고 보고한다. 그래서 철수할 준비를 하는데 대원들의 실망감이 상당히 컸다.
그런데 그때 어느 대원이 해안에서 불빛들을 봤고, 북쪽 600m 거리 해안선 벙커 위치에서 나는 빛이었다. 그러자 파그넬라 상사는 그 벙커에 57mm 무반동총 두 발을 사격하고 싶다고 크레이머 소령에게 물었고, 당시 해안에서 무반동총과 거리는 딱 1km 정도. 소령은 “Go ahead.” 허가했다.
파그넬라 상사는 자신이 선호하는 병기를 들고 (고무보트 혹은 상륙정) 뱃머리로 갔다. 무반동총은 1번 사수인 한국 대원 ‘조’가 어깨에 견착하고, 파그넬라 상사가 직접 탄을 장전하고는 사수 머리를 툭툭 쳤다.
1탄은 약간 하향으로 떨어졌고, 2탄은 목표에 적중했는데, 3탄을 쐈을 때는 2차 폭발이 일어났다. 그러자 파그넬라 상사는 무반동총을 직접 잡고 고폭탄 세 발을 더 쐈다. 벙커는 적중해 폭발했고, 대원들이 즐거워하며 수송함이 선수를 돌렸다.
수송함으로 돌아왔을 때, 해군 고참 부사관이 파그넬레를 찾아갔다.
“Sergeant Pag, 비록 홈런은 아니더라도, 오늘밤 야구는 한 것 같습니다!”
원턱과 같은 특수임무단 모선 Horace A. Bass도 작전에 성공적으로 동참했는데, 호라스 배스는 CIA가 이전부터 사용하던 비밀 선박이었다. 1952년 4월 20일, 호라스 배스는 급한 명령을 받고 부산 외항에 도착한다. 아무 말을 못 들은 함장 레프티 라브라카스는 보트장교 마힌 중위를 상륙시키며 전화번호를 주고 부두의 특정 전화 부스로 가서 연락해보라 한다. 그 번호는 ‘잭’이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임무가 영도였다.
바로 임무 브리핑을 받기 시작했고, 브리핑에는 크레이머 소령과 함께 애치슨과 파그넬라가 왔다. 임무는 전에 하던 것과 같았는데, 특별사항이 부가로 있었다. [북한의 수송 노무자 포로와 해당 신분증을 획득하라.]
CIA는 북한이 신분증 스탬프와 종이 색깔을 주기적으로 바꾸는 걸 알고 있었다. 남한에서 훈련해 북으로 침투할 간첩들을 위해서 정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영도 특수임무단이 작전하는 곳은 한반도의 38선 이북 동해안이었는데, 이 한국 동해안의 북쪽 끝은 만주와 닿아 있고, 밑으로 부산까지 이어지는데, 포항에서 시작해 동해안을 따라 한반도 끝까지 험준한 산악을 따라 철도가 깔려 있었다. 지형이 울퉁불퉁해서 이 동해안 철도는 철도 교량과 터널들이 있다. 또한 동해안은 백사장이 짧은 해안이라서 철도가 해안선에 거의 붙어 있고, 간간히 작은 어촌들이 전부다. 동해안은 큰 항구가 매우 적고, 항구 부근은 경계가 위험한 목표였다. 게다가 동해안 항구들의 조류는 역류가 있어서 침투 퇴출에 더욱 위험했다.
배스 호로 배를 바꾼 작전대는 주문진에서 최종 리허설을 했고, 오백, 애치슨, 파그넬라와 특수임무단 게릴라들은 배스 호 안에서 생활했다. 그러던 4월 21일 밤에 북으로, Target No. 1으로 향한다.
함장 라브라카스는 배를 몰아 북한 해안에서 6.5km에 도달한다. 바다는 침착했고 파고도 안정적이었다. 밤 10시 30분, 보트들이 발진한다. 당시 특수임무단 작전장교는 애치슨 중위였고, 중위가 진수와 작전 시작 명령을 내렸다. 애치슨 중위 본인은 PR-3호 지휘 보트에 탔고 (잇빨 주 : 지휘 보트는 상륙정으로 보임) 고무보트 8척이 작전에 나서 끌기 시작한다. 지휘보트에는 배스호의 보트장교인 마힌 중위도 탔다.
지휘보트 바닥에는 습격작전에 쓸 폭약이 적재되었고 폭약은 : Mark-133 120파운드, Mark-1350 80파운드를 실었는데, 폭파 대상은 터널, 교량, 철로였다.
상륙정에서 로프가 해체되자 오백의 부하들은 200m 거리 해안까지 노를 저어 접근하고는 수영 정찰병들을 내보내고 신호가 올 때까지 대기한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소총 기관총, 수류탄 폭음이 들렸고, 퇴각의 징후였다. 총성을 들은 애치슨은 주저하지 않았다. PR-4호에게 뒤를 따르라고 명령하고 해안으로 질주해 150m 거리에 이르렀고, 상륙정의 30구경 기관총 사수들은 엄호사격을 시작한다.
결국 애치슨 중위는 PR-4호에게 고무보트들을 견인해 모선으로 돌아가라 했고, 본인은 위태로운 수영 정찰병을 회수하려 노력한다. 적 사격이 배를 때리기 시작했고, 이때 애치슨 중위 바로 옆에 서있던 통역관 천도현이 총알 한 발을 맞아 즉사한다.
해변 30m에서 애치슨은 두 정찰병을 발견했는데, 수영 정찰병 1명은 사망 1명은 부상이었고, 한 명을 실종되었다.
애치슨은 대원들을 기다릴 것인가 배에 탄 사람들 목숨이 중요한가 갈등했고, 조금 더 정찰병을 찾다가 결국 포기하고 배스호로 복귀한다.
배에 올라 인원을 점검하니 게릴라 대원 3명 사망했는데, 사망자 중 두 명은 고무보트가 전복하면서 익사했다. 회수한 수영 정찰병도 중상이라 위험했고, 그 정찰병은 가까운 순양함 맨체스터에 인계했다. 실종되었던 정찰병 1명은 다음날 생존한 채로 발견된다. 천도현의 시신은 남으로 와서 매장되었다. 파그넬라 상사와 배스호 수병 몇 명이 그 장례식에 참석했다.
1952년 5월 첫 주 동안 배스호는 북한의 목표를 향해 특수임무단 게릴라들을 계속 상륙시켰고, 그 직후에 파고가 높아지면서 더는 임무가 불가능했다.
4월 30일, 바다가 잔잔한 가운데 특수임무단은 Mission No. 1 근처에 상륙했고, 해안에 아무 저항 없이 새벽 2시 상륙하고 나서, 남쪽으로 향하는 열차를 발견하는데, 엔진기관차는 맨 뒤에 달려 있었다. 무반동총 팀이 발포를 시작했고, 최소 한 발이 적중한 것이 보였으며, 완전히 파괴하려 대기하고 있는데 기관사가 열차를 정지하고 후진했다.
폭파팀은 운이 더 좋았고, 한 교량에 폭약 120파운드를 설치하고 철로들에 80파운드를 설치했다. 폭파에 성공한 대원들은 북한 민간인 세 명을 잡아 배스호로 복귀한다.
다음날 임무, 오백은 상륙지점에서 대원 반을 북동쪽으로, 반은 남서쪽 목표 교량으로 이끈다. 두 팀 모두 남쪽에서 올라오는 열차 소리를 들었고, 곧 터널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 직후, 북서쪽 교량으로 갔던 분대는 북한군 5인 정찰대를 만나 항복하라 소리쳤다. 북한군들은 몸을 던져 엄폐물을 찾았고, 교량팀은 자동소총과 기관총, 57mm 무반동총을 쐈고, 해안의 상륙정도 폭파팀의 폭약 설치를 엄호하기 위해 30기관총을 사격한다.
모두 해안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했고, 애치슨 중위는 교량을 완벽히 파괴했다는 보고를 듣고 작전이 완벽한 성공임을 알았다.
이후는 부산에서 좀 긴 휴식과 전술 토의가 있었고, 5월에 다시 임무로 돌아온다. 그러던 그 당시, 해군 Task Force 95의 지휘관이 해군소장 조지 다이어였는데, CIA가 운영하는 비정규전 활동을 전혀 몰랐다. 그러면서 상부에 상세한 북한 정보를 요구했다.
그러자 애치슨 중위가 다이어 제독 앞에서 북한 정보와 영도유격대가 하는 활동을 브리핑했고, 제독은 태스크포스 95의 정보장교와 7함대 정보장교를 연결해 만나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미 해군 극동사령관 터너 조이 제독까지 만나게 된다. 그러나 효과가 반대로, 애치슨 중위의 브리핑을 들은 조이 제독은 계획된 대북작전을 연기시킨다.
1952년 6월 23일, 특수임무단은 Mission No. 3에 대한 마지막 절차에 들어갔고, Number 2는 기상이 안 좋아서 취소되었고, No. 1은 포로 세 명을 잡는데 성공했다.
23일 밤 10시, 배스호는 타켓 해안에 도착했다. 당시 시계를 100m 정도로 좋지 않았다. 해안의 포대들에 유엔군 함포 지원포격을 퍼부었고, 특수임무단 게릴라들은 발각되지 않고 자정에 상륙했다.
오백은 도로 차단침 두 개를 전개하고, 하달받은 임무대로 나머지 대원들을 데리고 마을을 수색한다. 두 시간 후에 해안으로 돌아왔는데, 대원들은 포로 10명과 무수히 많은 서류들을 노획했다. 바다로 출발하기 전에 물가에 있던 대형 정크선을 BAR 자동소총과 수류탄으로 파괴했다. 대원들이 모두 복귀했을 때, 배스호는 갑판의 5인치 포로 배들이 정박한 곳과 해안의 레이더로 작동하는 해안 포상들을 31발 포격했다.
다음날 밤, 오백의 게릴라들은 가장 성공적인 마지막 습격을 수행한다. 작전 도중 어마어마한 식량, 탄약, 피복, 레코프판과 지도를 발견했고, 삼판선에 타고 있던 북한군도 잡고 하여 포로 총 11명을 배스호로 데리고 와 심문한다. 팀이 퇴각 도중, 다시 발견한 삼판선을 사격으로 파괴했다.
50년도 지났지만, 조지 애치슨과 조 파그넬라는 특수임무단에 대한 공으로 그 어떤 상도 훈장도 못 받았다.
작전 시기가 비교적 짧았고, 임무와 작전을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으며, 가끔은 그 과정에서 누가 죽기도 했다.
이러한 CIA가 만들고 활동시킨 모델이 다시 부활한 것이, 베트남 전쟁의 MACV-SOG 형태다. 이 역시 CIA의 정보 필요성에 따라 기획하고 발동되었다.
크레이머 소령, 애치슨 중위, 파그넬라 상사는 1952년 동안 영도에서 계속 활동했으나, 그 당시 세 명은 현역에서 민간인으로 신분이 전환되었던 상태라서 훈장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민간인 신분으로 맡은 임시 임무다. 그들도 CIA가 수소문해서 급하게 찾아내 특수임무단을 훈련시켰다.
애치슨과 파그넬라는 영도유격대 공중침투 작전에도 관여했고, 부산 동쪽의 K-9 비행장에서 북으로 가는 재보급 수송기에 직접 탑승해 육상제대에게 보급품을 전달하기도 했다. 특수임무단이 사용한 비행기는 더글라스 C-47과 커티스 C-46.
나중에 CIA 임무를 수행한 공으로 크레이머는 해군십자훈장, 애치슨은 은성훈장을 받았다. 파그넬라 상사가 받은 것은 특수임무단 동료들의 존경심 뿐이며, 프로 부사관으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한, 직분에 충실한 군인으로 그 시절을 보냈다.
이 글은 존 B. 드와이어가 2002년 쓸 글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
[끝]
잇빨 주 : 대단한 기고 글이 아니지만 이것을 올린 이유는, 영도유격대 혹은 Y-유격대가 미국 측 기록에 분명히 남아 있는 CIA 양성 비정규전 부대이며, 풍문이나 어설픈 부대가 아니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켈로부대나 정보사령부처럼 쉬이 복귀할 수 없는 너무 먼 북한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도유격대 생존 대원들 다수가 이 해상제대 - 해상유격대.
대략 1,000~1,500명이 영도 유격대에서 훈련받았고, 최소 800명이 낙하산으로 북으로 들어가 대부분 생사가 묘현해졌다. 켈로부대가 더 많았지만 문제는 영도유격대는 돌아올 방법이 없다는 것. 육상으로 복귀하려면 1차대전 참호전 수준의 전선을 돌파해 탈출해야 했다. 영도유격대의 발동 시점이 현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고착되어 양쪽 방어선이 강력해질 즈음이다. 이들은 침투조가 아니라 전투 제대였다.
공중침투대를 C-47 수송기로 치면 800명이 80대~100대 점프 사이로 보면 될 것 같다. 영도유격대가 이룬 상당한 대다수 전과는 낙하산으로 침투, 산악에 은거하면서 타격작전을 수행한 올빼미, 백호, 황룡, 청룡대다. 한번 침투에 2~3대씩 가면 30회 정도, 이걸 구역이 상당히 떨어진 육상 4개 제대로 치면 각 7~8회 정도? 항공 투하 보급 수송기는 모르겠다.
소설 [천국의 공룡]에는 좀 빠져 있지만, 이 글의 내용대로 북한에 남아 있는 반공 청년들을 규합해 지리산 같은 반공게릴라 부대로 확장하는 개념이 있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소소하지만, 당시 북한에는 공산당을 피해 숨어 있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고, 소문을 듣고 그들 은거지를 영도유격대원들이 찾아가 도운 일도 있고, 읍내 하나 정도를 북한군으로부터 점령해 잠시 해방시켰던 기록도 있다.
그래도 육상대 중 남으로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 기록을 내가 군대에서 읽을 수 있었다. 영도유격대가 100% 이북사람은 아니었다. 남한 출신은 명령이 없어도 제대가 붕괴했을 때 남으로 탈출하려 했을 것이다.
이 영도유격대의 공훈이 크게 알려지지 않고 사람들 관심도 없는 이유는, 대표적인 공을 세운 공중침투 제대의 생존자, 즉, 상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 모두 죽거나 실종되고 무전기 교신이 끊기면서 사라졌다. 시대는 달라도 소설 함경도의 별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북한에 체포되어 총살 당하거나 반혁명분자로 평생을 핍박 받으며 산 분들도 있을 것이다.
휴전회담에서 김일성 요구조건 중 하나가 영도유격대 침투를 즉각 중단하라 였고, 영도유격대가 해체될 때 해상대 50명 이하로 남아서 다른 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당시 켈로부대 해상대가 동해안 38선 부근에서 목선과 발동선을 이용해 이북 해안에 대한 타격/정찰 특공부대로 활동했는데, 그에 비해 영도유격대 해상대가 실시한 작전은 회수가 많지 않으나 미군의 선진 해상침투기술을 사용했다. 그 전술은 현재도 많이 다르지 않다.
농담 삼아 말하면, 이러한 중급 규모 비밀 상륙작전보다 서너 명이 잠수로 침투하는 북한 정찰국 침투는 훨씬 쉽다. 사람이 많으면 힘든 거다. 부여 간첩 김동식에 따르면 – 강화도로 남파 침투했을 때, 뻘부터 허리 펴고 그냥 걸어갔다고 한다.
예전에 해안경계사단에 훈련으로 UDU가 날짜를 통보하고 침투하는 대침투훈련을 했는데, 보통은 초병들이 눈치도 못 챈 가운데 전등 점멸로 침투 끝났다고 알려주는 식으로, 소대장 시절 이 훈련을 경험한 사람이 우리 중대장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뭐가 안 나타나서 매복을 철수할까 하는데 바로 10m 앞에서 장발의 UDU가 ‘아저씨들 뚫렸어!’ 전등 깜빡였단다.
본인도 군시절 그 흉내 비슷한 걸 했는데, 야음에 해변 다가서는데 파도 철썩이는 소음이 그렇게 반갑더라는. 독수리훈련 철조망에 있는 침묵의 초소보다는 훨씬 쉬웠다. 해상침투는 약간의 도박성. 대신, 걸리면 몽땅 골로 간다. 가장 비참한 건 익사.
당시 북한군은 신원 미상의 선박을 레이더로 잡았을 것이지만, 공격할 전투함도 전투기도 없었다. 기어나오면 어마어마한 유엔군 해군들에게 바로 박살이 난다. 여기 나오는 고속 수송함들이 낮에는 공해상으로 빠졌을 것이고, 북한 해안포 사정거리 바깥에선 유엔군 전함들이 맘 놓고 다니면서 해안을 포격했다.
첫댓글 글만 보아도 오금이 저립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일에 우리나라 사람들이라 더 그런듯 합니다.
엄청난 분들 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잇빨중사님 궁금한 점이 있는데 휴전협정이 발효 된 후 이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비정규전 부대들은 모두 퇴출에 성공했나요?
서해에서 활동하던 동키나 동해에서 활동하던 Y부대 수기를 여러개 읽어 봤는데 갑작스러운 종전에 당황해하며 이미 북파된 대원들을 걱정하는 대목이 공통적으로 적혀있었습니다.
설마 문피아에 연재하시는 '검은백조'처럼 일방적으로 통신을 차단하고 버려진건 아니겠죠?
버려진 건 아닐 겁니다. 다만 데려올 방법이 없었죠. 영도 해상유격대가 일부 해상으로 구출작전을 시도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같은데, 힘들죠. 그리고 무전기는 비정규전 부대에 지속적으로 계속 보급해야 하는 물품입니다. 무전기 하나로 못 버텨요.
또한, [천국의 공룡] 후반부에 묘사가 될 것인데, 제대가 겨울 산악에서 도저히 버틸 수 없어서, [해산] 했다가 봄에 모이기로 한 제대가 있었습니다. 그게 제가 군에서 읽은 겁니다. 애국가 부르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게릴라전은 추위와 허기의 총체입니다. 당시 상황은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휴전 시점에 비정규전 군인을 떠나서, 국군 포로들도 북한 공산당이 온갖 사기 수법을 동원해서 국군 포로들이 못 내려가게 막았어요. 이 부분을 알아보시면 정말 억울하게 남아서 평생 고통 받은 분들 많습니다. 귀환 (노인) 국군 포로 증언 찾아보면 서명하고 남으로 갈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남은 포로들 엄청 많습니다.
영도유격대는 잡혀도 영도유격대라고 못 밝혔을 겁니다. 총살이라고 봐야죠. 김일성이 한반도 북동부에서 골머리를 앓은 부대입니다.
@잇빨중사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결국 이북에 남겨진 대원들은 '함경도의 별'에서 통신과 공중보급이 끊긴 제대들이 중과부적으로 소멸되는 과정하고 비슷한 말로를 겪었겠군요...
한국전쟁 종전후 포로교환 과정에서 귀환한 국군포로 숫자가 유엔군 숫자보다 약간 많고 우리가 송환한 인민군보다 훨씬 적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북측이 농간을 부린것이었네요 ㅠ ㅜ
2차 한국전쟁이 일어나도 북한군이 제네바 협정에 따라서 후방에서 포획한 특전사 같은 적지종심작전부대원들을 제대로 포로 대우해줄지 의문이 갑니다.
@아라비카 1. 한 노인 탈북 국군 포로 "우린 휴전인지도 몰랐어. 심지어 휴전이 뭔지도 몰랐지. 백주 대낮에 보초들이 삥 둘러 총뿌리를 겨누고, 운동장에 선을 그어 놓고, 저쪽이 남반부로 가는 쪽이다! 넘어가고 싶으면 가 봐!... 사람들이 부들부들 떨어. 누가 넘어가겠냐고. 그래도 우린 양반이야. 그런 절차 통보 없이 남은 사람 많어."
2. 함경도에 별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고 자폭하죠? 특전사라고 폼 잡는 거 아닙니다. 현실이 그래요. 일반 잡범도 보안서와 교화소에서 끔찍한 강간 구타 고문을 받는 나라에서 끝이 어떻겠어요. 전 자폭입니다. 폭약 이빠이. 건드리면 너희도 죽는다는 겁이라도 줘야 전우들이 안전하죠. 옛날 군대시절 농담으로 다 - 잡히느니 수류탄 깐다 그랬어요. 미담 우화가 아니라 현실이에요. 머리 나쁘면 포로 되어 고문 살해 루틴 90%로 봐요. 탈북 했다가 중국 공안에 잡혀서 재북송되는 북한 사람들 중에 콘크리트에 머리 박고 강물에 투신하는 사람들 얘기 들어보셨죠? 더러운 나라에 들어간 게릴라도 더러워지는 법입니다.
@잇빨중사 재작년에 태풍수해복구 자원봉사 갔다가 같이 일하던 11여단 팀에서 근무하는 학군 후배하고 얘기를 나누어 봤는데
, 퇴출작계가 실질적으로 북진해온 아군과 연결작전 하는것 외에는 전무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황금박쥐에 할당된 섹터가 평안도 어디쯤 이라고 들었는데 인민군 1개 군단에다 경보 저격 여단이 득시글한 그 곳에서 아군이 청천강 넘어올 때까지 지역대 아니 대대에서 얼마나 생환할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SAS 수기 '브라보 투 제로'처럼 작계 수행 후 전선을 향해 도보 탈출하거나 전투물자가 소진되면 통신,암호기재나 화기를 파기한 뒤 투항해서 종전될 때까지 심문만 잘 버티면 살아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잇빨중사님 말씀을 되새겨보니 생포되어도 제네바 협정에 따라 포로 대우 받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설악단이나 목장에서 화선 넘어서 공작 보낼때 아카보는 안 들고 가도 청산가리 앰플이나 자폭용 수류탄을 지참하고 갔다는 수기를 군 복무시절 읽어봤는데 이제야 어떤 심정으로 그랬는지 이해가 갑니다.
동종의 고속수송선이 93년도에도 진해 교육함으로 있었습니다. 구명보트를 제외하고는 외형이 거의 유사합니다. 함수에는 3인치, 함미에는 40mm 보포스포, 양현에는 단정이 2개 달려 있었습니다. 주기적으로 훈련병들 진해에서 한산도까지 운송하고 단정 내려서 한산도에 접안했었습니다. 당시에는 너무 오래된 함선이기도 하고 협수로가 많아 고속수송선이라기는 민망한 수준으로 운항했습니다. 그래도 거의 50년 다되어가는 배를 보면서 미제가 튼튼하구나 생각 많이 했습니다.
제가 군에 있던 80년대에는 해상훈련 때 침투를 위해 타거나, 제주도 가기 위해 목포 기지에 가거나 여타 작전으로 인천의 기지에 갔었는데, 정말 미국 배 즐비했지요. 근 40년 된 LST에 상륙정까지. 우린 알아보죠. 그 회색 페인트 도장을 아무리 발라도 (열심히 발라도) 6.25 때 받은 배들로 버티고 있구나, 하고.
90년대에도 당시 기함은 1944년 미제 구축함(기어링급)이었습니다. 국산 호위함, 초계함과 비교하자면 미제는 강철의 느낌, 국산은 알루미늄 캔의 느낌이었습니다. LST, LSM, ,목재의 기뢰부설함 모두 미제였습니다.
훈련 나가서 미제 구축함이 꿋꿋하게 큰 파도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흔들리는 국산 초계함에서 바라볼때면 마치 든든한 큰 형님 바라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의 한국이 필리핀, 콜롬비아등에 국산 초계함을 공여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낌니다.
당시의 국산 호위함, 초계함은 과장해서 중세의 전열함 수준의 무장이었습니다. 함은 작은데 함포는 이태리제 76MM 함포, 40MM쌍포, 단포, 30MM쌍포, 20MM벌컨, 폭뢰, 어뢰, 하푼미사일, 엑조세 미사일, 심지어 충각공격도 고려했는지 선체 하부는 철, 상부는 알미늄이었습니다. 게다가 디젤엔진에 추가하여 가스터빈도 달고 있어서 고속 항해시에는 고속정에 버금가는 속도였습니다. 무장제거시 38노트까지 나곤 했습니다. 덩치는 작은데 구축함, 전함, 미사일함, 고속정, 어뢰정, 구잠함의 기능을 집약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훈련 수준도 엄청나서 항공기 타켓을 76MM포로 맞추기도 했습니다.
이런 글을 읽게 되다니 놀랍습니다. 저의 큰아버지께서 625 당시 저 부대에 계셨다고 생각됩니다. 625 이전 조부모님은 영도에 터를 잡고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큰아버지는 당시 경남고를 막 졸업하셨는데 실종 되셨다가 종전 3년 후에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부친께서 듣기로는, 비행기를 타고 북한으로 침투하셨고 같이 간 인원은 80명 정도였다고 하셨습니다. 침투해서는 그룹별로 나누어서 작전을 하다가 퇴출할때는 동해안에서 잠수함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가 귀환했다고 들었습니다. 부친이 공직에 계시면서 뒤에 군적을 확인해 보셨는데 복무기록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개월 전에 제가 미국 어학연수를 다녀와서 인사드리러 갔는데 갑자기 영어로 "I was in Oklahoma in 1952"라고 하셔서 깜짝 놀라 무슨 말씀이신지 여쭤보니 입을 굳게 닫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뒤에 부친께 그런 말씀 들었다고 하니 부친께서도 북한 다녀온 건 아는데 미국에서 훈련 받으신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북한에 다녀온 이야기도 말씀하지 않으시다 부친께서 자꾸 캐물으니 저 정도 말씀하신거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트라우마나 아니면 세뇌를 당하신듯 들어오고 나간 정도만 말씀해 주셨고 임무 내용이나 그런건 절대 말씀 안해 주셨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침투때 80명이 들어가서 나올때는 몇 명 없었다는 말씀이 기억나고, 집으로 돌아오실때 공군 대위 군복을 입고 오셨다고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나네요. 잇빨중사님 덕에 좋은 글 읽고 생각이 나서 댓글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이승철 산 증인이시네요. 큰아버님의 경우는 무전기/무선통신이 살아 있던 제대 같습니다.
저도 1985년도에 대대 교범실에서 읽고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도유격대 영화가 제작에 들어갔다가 좌초되어 미뤄진 것으로 아는데, 제발 부탁으로 사실적인 영화가 만들어지길 간곡히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도 영도/부산의 경남 젊은이들도 사정 상 꽤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징집연령 아래 분들이 많으셨을 것이고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