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군웅 할거 시대 왜여왕 일여 개화천황 群雄 割據 時代 倭女王 壹與 開化天皇
1. 사반대왕의 외손자 수정천황 沙伴大王 外孫子 綏靖天皇
[記]神沼河耳命 /[紀]神渟名川耳天皇
247년 왜여왕 히미코 사후에 칠삭동이 신무천황이 즉위했지만, 구수대왕 아들들인 의덕천황과 효소천황과 효안천황 등이 군웅할거 식으로 서로 쟁패하여 혼란하니 효소천황의 손녀 일여를 왜여왕으로 세워서 평화를 되찾았다. |
247년 히미코 여왕 사후의 혼란은 [위지왜인전]에 간략히 기록되어있다.
다시 남왕을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불복하여 다시 서로 죽였다.
신무천황은 257년에 죽었는데 반란으로 전사하였을 가능성도 높다.
다시 여왕을 세우니 비미호의 일가인 일여로서 13세에 왕이 되었고 나라가 평온해졌다.
[위지왜인전] 更立男王 國中不服,更相誅殺,當時殺千餘人 復立卑彌呼宗女壹與,年十三為王,國中遂定
제
2세 천황으로 기록된 수정천황綏靖天皇(243~292)은
이스케요리의 아들이다.
누나가와미神沼河耳命라는 이름은 이즈모出雲 동북의 누나가와沼河에서 유래되었다.
그의 이름으로 보아서 그는 대화大和로부터 이즈모出雲 동북의 누나가와沼河로 쫓겨가서 죽은 것이 된다.
신무천황의 서장자庶長子인 타기시미미當藝志美美命가 신무천황 생전에 국정을 맡아하였는데,
신무천황이 죽자 스스로 천황이 되어, 이스케요리를 후비로 삼으려다가 이스케요리의 아들 수정천황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수정천황이 다음 대의 천황이 되었는데 그는 50세로 292년에 죽었다.
(주)
고대에 흉노, 몽고, 선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은 모두 북방족의 순수 혈통 보전을 위하여
근친결혼이 장려되었고 더불어서 후왕이 즉위하면 전왕의 후비들까지도 후왕이 다시 후비로서 취하는
관습이 있었다.
민가의 형사취수兄死取嫂와 비슷한 것이다.
중국에서 수양제는 문제의 후비 때문에 문제를 죽였고, 고구려 호동왕자는 부왕 생전에 부왕의 후비를
넘보다가 죽임을 당했고, 산상왕은 형수를 자신의 왕후로 세웠다.
당고종은 부왕의 후비를 황후로 세웠는데, 바로 측천무후測天武后로서 그녀가 허수아비 황제인 고종을
대신하여 고구려, 백제와 심지어 당나라까지 3국을 멸망시켰다.
2. 초고대왕의 손자 안녕천황 肖古大王 孫子 安寧天皇
[記]師木津日子玉手見命 /[紀]磯城津彦玉手看天皇
구수대왕의 귀국후에 대화에는 초고대왕의 막내아들인 대년신이 왕으로 있다가, 그의 아들이 물려받아 안녕천황이 되었는데, 신무천황에게 항복하였다. |
제
3세 천황으로 기록된 안녕천황安寧天皇(222~270)은
시키즈히코타마데미師木津日子玉手見命이라고도
하는데 270년에 죽었다.
신무천황에게 항복한 니기하야히邇藝速日命를 안녕천황으로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니기하야히는 현재 天照國照彦天火明櫛甕玉饒速日尊으로서 여러 신사에서 모셔진다.
안녕천황의 치소治所였던 카타시호片監의 우키아나궁浮穴宮은 신무천황이 도읍한 가다이片居로서,
신무천황이 이 가다이를 이와레伊波禮라고 고쳤다.
니기하야히는 쿠시다마니기하야히櫛玉饒速日命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오호토신大年神의 아들
오호쿠니미타마신大國御魂神과 같은 인물이다.
오호쿠니미타마大國御魂神의 쿠니國를 쿠시로 읽으면 쿠시타마櫛玉가 된다.
오호토신大年神은 초고대왕과, 오호야마쯔미大山津綿神(=대마도의 왕)의 딸인 오호찌히메大市比賣의
아들이다.
쿠니미타마大國御魂神는 오호토신大年神과, 이쿠스비神活須毗의 딸인 이노히메伊怒比賣의 아들이다.
니기하야히櫛玉饒速日命는 초고대왕, 즉 스사노오의 아들 대년신이라고도 일부에서 주장되어 왔지만,
우가미宇迦美神(海神)의 형이므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주)
한편 안녕천황의 아들로 기록된 의덕천황懿德天皇은 본래 구수대왕의 아들이므로 역시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쿠시다마니기하야히櫛玉饒速日命를 신무천황의 아들인 수정천황 뒤에 왜곡하여
끼워넣은 것이다.
결론은 신무천황에게 항복한 쿠시다마니기하야히櫛玉饒速日命가 안녕천황安寧天皇(222~270)이다.
쿠시다마의 우리 발음인 즐옥櫛玉으로 유추하면 우리말로 줄다마다.
즉, 줄로 이은 구슬이다. 실제는 구슬이라 불렀을 것이다.
3. 구수대왕의 아들 의덕천황 仇首大王 王子 懿德天皇
[記]大倭日子鉏友命 /[紀]大日本彦耜友天皇
244년 구수대왕의 아들 의덕천황은 부왕인 구수대왕의 뒤를 이어서 대화의 대국성의 왕이었으나, 신무천황에게 패배하여 전사하였고 현재 카무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
제
4세 천황으로 기록된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鉏友命은
구수대왕의 아들이다.
부여 의려왕이 연대가 명확한 7대 효령천황이므로 그로부터 역산하여 의덕천황을 밝힌다.
의덕천황의 동생인 시키쯔히고師木津日子命(198~248)의 아들 와찌즈미和知都美命(235~288)가
부여계 효령천황(262~316)의 후비가 된 야마토아례히메倭國阿禮比賣命 자매를 낳았다.
아례히倭國阿禮比賣命(266~314)와 하에이로네蝿伊呂杼命(271~318) 자매의 출생 연대를 효령천황에
맞추면, 각각 266년과 271년에 태어난 것이 되고, 그들의 조부인 시키쯔히고師木津日子命는 198년생이
된다.
따라서 시키쯔히고의 형인 의덕천황,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大倭日子鉏友命(180~244)는 180년생이 된다.
의덕천황은 구수대왕과, 초고대왕의 딸인 타키리히메多紀理毗賣命의 아들인 아지스키타카히코네
阿遲鉏高日子根와 동일인이다.
아지스타카히코네는 아메노와카히고天若日子의 죽음에 문상갔던 아지시타카히코네阿遲志貴高日子根과
같고 죽은 아메노와카시키의 아내였던 타카히메高比貴命의 친오빠이다.
아지스키타카히코네阿遲鉏高日子根는 카모대신迦毛大神이라고도 한다.
그의 신사는 고압신사高鴨神社라고 하는데, 정식 이름은 다카카무아찌스키야히코네高鴨阿治須岐詫彦
根命神社이다. 이 신사는 아지스키타카히코네阿遲鉏高日子根와 그의 여동생 시타데루히메下照姬와
그 남편 아메노와카히고天若彦 삼신을 주신으로 모신다.
(주) [고사기]에서 신무천황의 대화大和 정벌 때에 대화의 강력한 저항 세력인 시키師木의 형제兄弟가
저항하였는데, 244년에 그중 형인 에시키兄師木를 전사시키고 동생인 오코시키弟師木의 항복을 받아
승리한다.
따라서 이때 시키형제師木兄弟가 바로 의덕천황 형제다.
형 에시키가 죽고 뒤이어서 안녕천황이 된 니기하야히邇藝速日命의 항복으로 전쟁이 멈추었다.
의덕천황은 그렇게 전사한 것이다.
(주) 의덕천황의 이름은 스키토모(耜友, 鉏友)라고 하였다.
사耜는 쟁기의 날이고 조鉏는 호미, 또는 괭이날인데 우리말 “칼”의 고어인 “갈”을 의미한다.
즉 “갈다”라는 우리말의 동사와 관련하여 쟁기耜나 괭이, 호미鉏가 어간語幹인 갈을 위하여 선택되고,
칼의 어미語尾를 살리기 위해 우友를 추가하여 당시 카루왕(耜友, 鉏友)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카루는 우리말 칼의 연음이었으며 이를 이두吏讀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가 도읍한 지명 이름도 역시 카루, 가루輕라고 하였다.
칼왕, 즉 카루왕은 이름 자체로 위력적이므로 한자어로 의덕왕懿德王이라고 고쳐진
것이다.
4. 구수대왕의 아들 사반대왕,효소천황,사대주신 仇首大王 王子 沙伴大王,孝昭天皇,事代主神
[記]御眞津日子詞惠志泥 /[紀]観松彦香殖稲天皇
구수대왕의 아들 사반대왕은 귀국하여 백제대왕이 되었다가 다시 일본으로 가서 효소천황이 되었다. 그의 두 아들은 효안천황과 효원천황이며 그중 효원천황의 딸이 왜여왕으로 등극한 일여다. |
제
5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소천황孝昭天皇(202~268)은
미마쯔히코카에시네御眞津日子詞惠志泥命이라고
하는데 효소천황의 능은 하압신사下鴨神社에 붙어있다.
하압신사下鴨神社는 야쯔미와야에코토시로누시신사鴨都味波八重事代主命神社라고도 한다.
즉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를 모시는 곳이다.
코토시로누시를 모시는 여러 압신사鴨神社를 고려하면 코토시로누시도 역시 압신鴨神이다.
이를 카모대신鴨神이라고도 읽는다.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는 구수대왕, 즉 대국주신大國主神과, 칸야타데히메神屋盾比賣命의 아들이며
효소천황孝昭天皇(202~268)이다.
사대주신事代主神이 이즈모出雲에 살다가 대화大和를 거쳐 백제로 돌아가서 238년(삼국유사)에
사반대왕沙伴大王이 되었다가 백제 고이대왕古爾大王에게 밀려나서 다시 일본으로 왔다.
대화大和 동쪽 미시마三嶋의 세야타타라勢夜陀多羅比賣를 통하여 이스케요리伊須須岐比賣命(219~273)
를 낳았는데, 훗날 신무천황의 황후가 되었다.
이스케요리히메의 비문이 효소천황릉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효소천황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스케요리히메의 부친이라는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효소천황이었던 것을 확정할 수 있다.
효소천황은 신무천황 황후인 딸 이스케요리히메를 믿고 다시 돌아와서 갈성葛城의 와키카미궁掖上宮에
살았다.
(주)
효소천황의 이름은 카에-시네(詞惠志泥, 香殖稻)라고 한다.
“카에”는 우리말 “껴”에 해당하는데 그의 궁성 이름은 와키가미掖上宮이고
와키掖의 동사動詞가 “끼다.(옆에)”이다.
그러면 우리식으로 “껴시네”가 되는데 사실은 “끼다”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켜시네”, 즉 “혀시네”가 원어原語로서, 불을 “밝히다照昭”의 우리말 고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우리말로는 “혀시네”왕이고 한자로는 조소왕照昭王이 된다.
조소왕이 한자어로 개작되어 효소왕孝昭王이 된 것이다.
그가 묻힌 곳은 “밝다산博多山”이다. 따라서 그의 우리말 이름은 “밝혀시네”왕이이다.
이는 신라왕 박혁거세와 비슷한데 부여어로 고려된다.
박혁거세가 부여에서 왔다는 주장이 [한단고기]에 실려있다.
부여의 영역이었던 내몽고 서요하의 천산 지역에서는 지금도 남자 무당은 박博이라고 하며,
여자무당을 이도칸伊都干이라 부르는데 굿을 하여 구사치병駒邪治病한다.
(주)
[위지왜인전]에서 일본 소국의 관직에 히노모리卑奴母離가 있다.
히노모리卑奴母離는 한자어漢字語로 백두白頭다.
백두白頭라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백우白牛의 쇠머리牛首之名라고 [규원사화揆園史話/단군기檀君紀/
구례舊禮] 중에 나와있다.
이 백두白頭를 천산天山의 신단수神檀樹에 걸어놓고 요나라 황제가 직접 천제天際를 지냈는데 이는
[요사遼史/예기禮記]에도 기록되어 있다.
(주)
[위지왜인전]에서 여러 소국 왕의 칭호는 히꾸卑狗인데 이는 천황의 경칭인 일자日子의 발음
히꼬彦와 같은 발음이다.
소국의 부왕은 히노모리卑奴母離라고 했다.
[단군세기/가륵기]에서 소시모리 素尸毛犁는 소머리 즉 우수牛首이다. 즉 모리毛犁는 우리말 머리首다.
모리母離, 모지牟遲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히노모리는 우리말로 흰머리이니 백수白首이다.
4세기까지 고구려왕을 우리말로 백수百殊라고 불렀었고, 이후로 현재까지 남자 무당을 박수博首라고
불러왔다.
일본에서 박博을 “히로”라고도 읽으니 박수博首가 히노모리卑奴母離로 된 것이다.
후에 일본에서는 히노모리卑奴母離의 모리로 표현되던 머리 수首를 지킬 수守로 바꾸어서 지방왕을
국수國守라고도 하였다.
(주)
사대주신(202~268)의 아들 효원천황을 사본왕沙本王(228~273)이라 했고,
그 여동생을 사하지히메沙波遲比賣(249~272)라고 했는데,
사하지히메가 가야계 수인천황과 결혼하여 가야에 갔다가 파혼하고 돌아와서, 사대주신의 도성稻城으로
돌아왔다. 그후 수인천황의 부하에 의해서 272년에 도성稻城이 불타고 사하지히메가 죽는다.
효소천황孝昭天皇의 이름이 도천황(觀松彦香殖-稻天皇)이니 그의 성이 도성稻城이었다.
5. 사반대왕의 왕자 대물주신 효안천황과 저묘 沙伴大王 王子 大物主神 孝安天皇, 箸墓
[記]大倭帶日子國押人命 /[紀]日本足彦國押人天皇
왜여왕 일여의 사후에 일여의 숙부인 효안천황이 일본을 다스 렸다. 그러나 그는 숭신천황이 된 부여왕 의려의 침략을 당하여, 288년에 일본 왕권을 빼앗기고 삼륜산에 들어가 대물주신이 되어 숨어살았다. 효안천황의 후비가 된 야마토모모소는 백성들이 추앙하여 그녀가 죽자 저묘를 백성들이 만들어 주었다. |
제
6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안천황孝安天皇(222~298)은
오오야마토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도
大倭帶日子國押人命라고 했는데 무로室의 아기쯔시마궁秋津嶋宮에 있었다.
효안천황은 사반대왕인 효소천황의 아들이며 아메노오시타라시히코天押帶日子命(220~258)의 동생이다.
[고사기]의 저자 야스마로安萬侶는 대帶를 타라시多羅斯로 읽으라고 했다.
[일본서기]는 대帶를 족足으로 바꾸었는데 역시 같은 뜻이고 다리시는 우리말 다리에 명사형 어미 이를
붙인 것에 해당한다.
실제로 경행천황은 오호타라시大足라고 했는데 그의 키는 1장2촌, 정강이는 4척1촌이라고 했다.
한편 [고사기/숭신천황기]에서 숭신천황에게 일본이 굴복 당한 후, 숭신천황이 허가하여,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미와산신三輪山神-222~298)를 제사 모시게 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등장한다.
[일본서기]에서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의 아들 오다다네코大田田根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타타니多多泥, 田田根가 바로 타라시帶 즉, 多羅斯와 관련된다.
신무천황비(219~273)의 이름이 후토타타라-이스케요리富登多多良伊須須枝比賣라고 했고,
신무천황비의 어머니도 세야다타라勢夜陀多良라고 했는데 타타라는 크다는 뜻이다.
타타라가 타라시의 어원으로 보인다.
효안천황이 바로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이다.
그의 궁宮이 있던 곳의 지명이 무로室인 것이 물物의 연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는 오오모노누시大物主神인 효안천황 오오야마토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도
大倭帶日子國押人命의 아들인 것이다.
283년 개화천황(244~283)의 사후에 효소천황의 아들이자 개화천황의 숙부인 효안천황(222~298)이
즉위하였는데, 중국 요녕성遼寧省 요서遼西에 있던 부여夫餘에서 285년 이후에 일본으로 새로 도래한
의려왕依慮王, 즉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의 침략을 받았다.
효안천황은 미와산三輪山의 전설에 의하면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이라고 하였고,
이때 미와산의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235~318)와 대물주신이 만나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태어났다.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의 아버지는 스에쯔미미陶津耳로서 세야다타라勢夜陀多良의 아버지와 같다.
즉 이쿠타마요리히메活玉依媛는 신무천황비 이스케요리(219~273)에게 나이어린 이모가 되며
세야다타라의 동생이다. 세야다타라는 언니로서 사대주신 효소천황과 결혼하였고
기십년 뒤에 그 동생 이쿠타마요리히메는 효소천황의 아들인 대물주신 효안천황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오사카大阪의 대형고분인 저묘箸墓의 주인이 되었던 야마토모모소히메夜麻登母母曾毗賣命(235~318)는
기록 연대로 보아서 숭신천황이 서거한 318년에 서거한 것이 타당한데, 84세를 누렸으니 235년생이 된다.
그녀가 대물주신의 처였다고 하니, 효안천황(222~298)의 부인이었고, 결국 삼륜산 이쿠타마요리히메
活玉依姬(235~318)가 야마토모모소히메인 것이다.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氣余理比賣(219~273)를 신무천황이 취할 때에 7명의 소녀를 세워놓고 선을 보았다.
이때 이스케요리히메가 당시 신궁의 7신녀 중에서 대표 여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이스케요리히메가 황비가 된 후에 그 신궁에는 나이어린 야마토모모소히메(235~318)가 여제사장을
이어받았을 것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부여인 의려왕, 즉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의 침공으로 효안천황은 야마토모모소와 함께
미와산三輪山으로 피신하였고,
구수대왕의 아들인 의덕천황 동생 시키즈히코의 손녀인 야마토아례히倭國阿禮比賣命(266~314)가 새로
여제사장이 되어서 침략자인 효령천황의 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효령천황은 전왕 효안천황의 황후인 오시카히메(235~288)를 죽였을 것이고,
후비인 야마토모모소(235~318)도 동시에 죽이려고 하였으나 야마토모모소는 살아남았다.
그림 13) 야마토모모소의 전방후원고분 저묘
효령천황의 아들 의라왕依羅王 숭신천황崇神天皇(277~318)은 민심을 수습하려고 효안천황의 아들을
찾아서 대물주신을 제사지내도록 하고, 효안천황의 부인인 야마토모모소히메도 신궁에 살도록 하였는데
318년에 84세로 죽었다.
숭신천황 때에 그녀가 죽자 백성들이 몰래몰래 돌을 쌓아 만들었고, 그래서 귀신이 만들었다고 했으며,
젖가락으로 찔렸었기 때문에 저묘箸墓라고 불러왔는데 대형 전방후원 고분이다.
효령천황의 비가 된 여제사장 야마토아례히倭國阿禮比賣命(266~314)는 구수대왕의 아들인 시키쯔히고
師木津日子命(198~248)의 아들 와찌즈미和知都美命(235~288)의 딸이라고 했다.
그런데 야마토모모소夜麻登登母母曾毗賣命(235~318)는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라던 효안천황의 처妻였고,
[고사기] 등의 왜곡된 기록처럼 자기보다 어린 야마토아례히(266~314)의 딸이 될 수는 없다.
여제사장女祭祀長을 재왕齋王이라고도 하는데, 왜여왕의 통치권을 빼앗고 단지 제사권만을 남긴 것이
재왕齋王으로 고려된다.
256년부터 통치한 왜여왕 일여(244~283), 즉 개화천황의 사후에, 283년부터 재왕은 야마토모모소
夜麻登登母母曾毗賣命(235~318)가 되었다가 효령천황에게 제거되고
대신 288년부터 야마토아례히倭國阿禮比賣命(266~314)가 재왕이 되었고
314년 뒤에는 야마토히메倭比賣命(277~366)로 재왕이 이어진 것으로 고려된다.
야마토아례히倭國阿禮比賣命의 부친은, 의덕천황의 동생인 시키즈히코師木津日子命(198~248)의 아들
와치츠미和知都美(235~288)인데, 와치츠미의 부인이자 야마토아례히 모친은 기록이 따로 없는 형편
이지만 왜여왕 일여, 즉 개화천황일 것으로 고려된다.
개화천황 일여의 남편으로 추정된 히코쿠니오케즈日子國意祁都가 와니신丸邇臣(=和爾)의 선조인데
와찌쯔미和知都美(235~288)와 동일인물이 된다.
야마토히메倭比賣命(277~366)은 가야의 선견先見 왕자인 수인천황垂仁天皇(240~310)과
히바스히메氷羽州比賣命(252~293)의 딸이었다.
(주)
효안천황의 이름은 오시히도押人였는데, “오시”는 도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 오시다와 관련된다.
히도人는 히飛와 도鳥로 각각 나누어 발음하면 우리말로 비조飛鳥로 추정된다.
백제 왕가로서 일본에 뿌리내린 비조鼻祖라고도 할 수 있다.
백제계인 오시히토, 즉 왜비조倭鼻祖왕으로부터 뒷날 꽃피운 아스까문화飛鳥文化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을 알 수가 있다.
(주) 한편 그의 궁성은 가쓰라기葛城의 무로室의 아기쓰시마秋津島궁이었다.
아기쓰시마秋津都는 일본 열도의 형상을 의미하는 “꼬리를 문 잠자리의 섬”라는 것으로서 아기쓰蜻蛉
(잠자리)라고도 한다.
비조飛鳥는 비충(飛蟲; 나르는 것)과 의미가 상통하여, 비충으로부터 아기쓰蜻蛉, 잠자리 섬이 유래된다.
6. 사반대왕의 아들 사본왕 효원천황 沙伴大王 王子 沙本王 孝元天皇
[記]大倭根子日子國玖流命 /[紀]大日本根子彦國牽天皇
사반대왕의 아들 효원천황은 신무천황을 피하여 가야에 갔다가 거등왕의 딸과 결혼하고 돌아온다. 효원천황의 여동생은 거등왕의 아들 천일창과 결혼하였는데 가야로부터 일본에 도망쳐왔고 이를 쫓아 일본에 온 천일창에 의해서 효원천황 남매가 죽는다. |
제
8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원천황孝元天皇(228~273)의
이름은 쿠루玖琉이며
그의 궁성 이름은
사까이하라堺原 궁이다.
한자漢字식 이름 견牽을 썼고, 견牽(끌 견)의 우리말 훈인 “끌”을 연음하여 읽은 것이다.
즉 끌로부터 꾸루가 도출되어 꾸루왕이 된 것이다.
계堺는 사까이라고 읽으니 사천沙川, 사가와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는 사반대왕, 사대주신, 효소천황의 아들 사본왕沙本王이며 그 여동생은 사하지히메沙波遲比賣
(249~272)로서 가야 땅에 아메노히호코天日槍인 수인천황垂仁天皇(240~310)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와서 효소천황궁에서 자살하였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실린 천일창天日槍(아메노히호코)의 신화에는 신라에서 소를 끌고[牽] 가는
사람을 협박하여, 천일창이 아리따운 여자 아카루히메阿加流比賣(=赤玉女)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여자가 일본으로 돌아가니 일본에 따라와서 찾게 된다.
즉, 수인천황-천일창은 국견천황에게서 아카루히메赤玉女를 얻은 것이다.
이 아카루히메가 곧 효원천황의 동생 사하지히메沙波遲比賣(249~272)다.
효원천황은 화가 난 수인천황에 의해 이즈모出雲로 쫓겨갔다가 사하지히메가 죽은 다음해에 죽은 것이다.
사본왕 효원천황(228~273)은 우쯔시코內色許命의 여동생(실제는 윗누이다.) 우쯔시코메內色許賣命
(223~266)와 결혼하고, 개화천황開化天皇을 낳았는데 개화천황은 왜여왕 일여壹與(244~283)다.
[일본서기/수인천황기]에서 아메노히호코天日槍는 스스로 우시끼아리시끼간기于斯岐阿利叱干岐라고
하였는데 이를 [효원천황기]에서는 우쯔시코內色許命라고 적은 것이다.
한편 천일창과 우쯔시코메內色許賣命(223~266)는 가야 거등왕巨登王의 왕자와 공주이고 이 가야공주
우쯔시코메와 효원천황 사본왕의 딸이 일여壹與다.
김해의
김수로왕 신전인 숭선전崇善殿에서
나온 [김씨왕세계]에 의하면 “선견先見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신녀神女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났기 때문에 거등왕居登王(재위 199~259)이 강에 있는 돌섬의 바위에
올라가 선견왕자를 부르는 그림을 새겼다.
이 때문에 속전俗傳하기를 초선대招仙臺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효원천황은 가야에 사절로 가서, 혹은 신무천황을 피하여 가야에 망명가서, 거등왕의 딸인
우쯔시코메內色許賣命와 결혼하여 일본으로 데려오고, 훗날에는 가야의 선견왕자(240~310)에게
여동생 사하지히메沙波遲比賣를 주어서 이중의 국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250년대 초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여동생이 가야의 선견왕자와 결별하여 일본으로 돌아오니, 선견왕자가 일본으로 이 여동생,
즉 신녀를 쫓아왔는데 바로 아메노히호코天日槍인 수인천황垂仁天皇이 그 가야국 선견왕자다.
효원천황은 또 수인천황인 우쯔시코內色許命의 딸인 이카가시코메伊迦賀色許賣命(251~306)와도 결혼
하였다.
효원천황과 이카가시코메의 아들인 히코후쯔오시노마코토比古布都押之信命(268~314)의 아들이
우마시우찌노숙녜 미사내숙녜味師內宿禰(295~318)고 그의 아들이 장수한 것으로 알려진 경행천황,
성무천황, 인덕천황의 신하 타케우찌노숙녜建內宿禰(316~431)다.
효원천황이 아오타마靑玉의 딸인 하니야스히메波迩夜須毘賣命(226~279)과 결혼하여 타케하니야스
建波迩夜須毘古(248~287)를 낳았다.
그는 부여에서 온 의려왕인 효령천황과 맞서다가 287년에 죽었다.
[고사기]에서는 숭신천황에게 반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연대가 효령천황이다.
효원천황은
실제로 천황의 위치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나, 그의 딸 일여가 일찌감치 왜여왕이
되었으므로 천황으로 추증된 것이다. 그의 능은 왜여왕 일여에 의해 세워진 전방후원 고분이다.
7. 사반대왕의 손녀 개화천황, 왜여왕 일여 沙伴大王 孫女 開化天皇, 倭女王 壹與
[記]若倭根子日子大毘毘命 /[紀]稚日本根子彦大日日
사반대왕, 효소천황의 아들 사본왕 효원천황의 딸 일여가 왜국 여왕으로 즉위하여 왕권 다툼을 종식하였다. 일여의 후손이 훗날 신공황후가 된다. |
제
9세 천황으로 기록된 개화천황開化天皇(244~283)
와카야토네코히코오호히히若倭根子日子大毘毘命
천황은 256년 신무천황이 죽은 뒤에, 13살에 왜여왕으로 즉위한 히미코의 친척 일여다.
[위지왜인전] 卑彌呼宗女 壹與
이름은 오히히大毘毘 또는 오히히大日日라고 했는데, 바로 일여壹與를 풀어쓴 것이다.
개화開化의 화化를 꽃 화花로 보면 현대 일본 발음이 하나壹, 즉 우리말로는 일壹의 훈訓이다.
따라서 본래는 개화開花가 맞는데, 왜곡하여 남자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일여의 궁성은 가스가春日(=箇須鵝)의 이사가하궁(伊耶河, 率川宮, 伊社箇波)이었다.
이사하伊耶河도 하나壹를 의미하는 이쓰가하壹河가 본래말이다.
오히히大毘毘命 천황은 히미코의 종녀宗女라고 하였는데 가야국 거등왕의 공주인 우쯔시코메內色許賣命의
딸이다. 히미코 여왕, 즉 세오녀가 신라 땅인 포항에서 건너갔지만 본래 출신은 가야였던 것이다.
개화천황은 오케쯔히메意祁津比賣命(250~296)과 결혼하여 히코이마스日子坐王命(274~338)를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여왕 일여가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을 것이니, 오
케쯔히메의 오빠라는 히코쿠니오케즈日子國意祁都와 결혼하여 히코이마스日子坐王命를 낳았을 것이다.
히코이마스는 이모인 오케쯔히메袁祁津比賣命(284~326)와 결혼하여
야마시로노오호쯔쯔키노마와카大筒木眞若王命(311~350)를 낳았다고 전한다.
그가 오키나가노숙녜息長宿彌命(321~384)를 낳았고, 오키나카노숙녜는 신공황후가 된 오키나가타리시
히메息長帶比賣命(336~390)을 낳았다. 신공황후의 출생 연대는 뒤에서 336년으로 밝혀진다.
(주)
개화천황은 효원천황의 부인이었던 이카가시코메伊迦賀色許賣命(251~306)와도 결혼하였다는데,
이 역시도 사실이 아니고 대신에 부여에서 도래한 효령천황이 이카가시코메와 결혼하였을 것이다.
그녀는 우쯔시코오內色許男의 딸이면서 효원천황의 후비였는데,
273년 효원천황이 죽은 후 과부가 된 그녀를 효령천황이 도일하여 후비로 삼은 것이 된다.
8. 가야국 선견왕자 수인천황 伽倻國 先見王子 垂仁天皇
[記]伊久米伊理毘古伊佐知命 /[紀]活目入彦五十狹茅
가야 거등왕의 아들 선견왕자는 사반대왕의 딸인 아카루히메와 가야에서 결혼하였는데 아카루히메가 도망하자 일본에 쫓아와서 천일창, 아메히노호코天日槍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에서 큐슈 이도국에 영지를 받아 이도국왕이 되었다가 효고현의 타지마국으로 옮겨서 타지마국왕이 되었고 백제계 효안천황이 부여계 효령천황에게 밀려 물러나자 그 스스로 경도에서 수인천황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부여계 숭신천황에게 밀려나서 대마도의 임나왕으로 물러났다. |
수인천황의
딸 왜히메倭比賣命(277~366)와
후타지노이리히메명布多遲能伊理毗賣命(297~363)의
나이를 보면, 11세 천황인 수인천황(240~310)은 7세 천황인 부여계 효령천황 등의 도래 훨씬 전인
250년대말에 이미 일본에 진출하였다.
따라서 수인천황이 10세 천황인 숭신천황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조작이다.
천일창, 수인천황은 본래 대가야意富加羅(=大伽倻)에서 온 왕자로서, 가야국 2대왕 거등왕居登王
(재위 199~259)의 아들 선견왕자先見王子다.
김해의 김수로왕 신전인 숭선전崇善殿에서 나온 [김씨왕세계]에 의하면 “선견先見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신녀神女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났기 때문에 거등왕이 강에 있는 돌섬의 바위에 올라가 선견왕자를
부르는 그림을 새겼다. 이 때문에 속전俗傳하기를 초선대招仙臺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인천황垂仁天皇의 이름은 이쿠메(伊久米, 活目)-이리入히코-이사찌伊佐知, 또는 이사-가모
五十狹-茅(日矛= 일창一槍)이다.
수인垂仁은 선先의 연음으로 고려되며, 이사치의 사치는 선先의 현재 일본발음 “사기”와 관련된다.
신무천황 때에 대마도에는 가야식 관직으로 해사치海佐知가 있었는데 불합존不合尊이라고도 했으며
대마도주對馬島主였다.
그는 본래 대가야의 왕자 쯔누가아라사도都怒我阿羅斯等,
다른말로 우사기아리질지간지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고 말했고,
또는 신라왕자 천일창, 아메노히호코天日槍이라고도 불렀다.
우사기아리질지간지于斯岐阿利叱智干岐는 그가 큐슈九州의 이도국伊都國을 통치할 때 가야의 관직명
이고, 쯔누가아라사도都怒我阿羅斯等는 그가 후쿠이현福井縣 쯔누가시敦賀市에 상륙했을 때의 가야
관직명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마도를 다스릴 때 가야 관직명이 간지干岐보다 아래급인 이사치伊佐知일 것이다.
그의 시호인 이쿠미伊久米, 이사치伊佐知에서 이伊는 크다는 뜻의 접두어이고
구미久米가 금金씨 성姓을 의미한다. 잇금, 이사금도 관련될 수 있다.
선견왕자가 신무천황에게 밀려서 가야로 피난 온 효원천황의 동생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가 파혼하고 돌아가니 그녀를 쫓아서 일본까지 찾아왔던 것인데 그 신녀 아카루히메阿加流比賣
가 바로 효안천황의 딸이며 효원천황의 동생인 사하지히메沙波遲比賣(249~272)인 것이다.
사하지히메가 불타죽은 성은 도성稻城이다.
효소천황孝昭天皇의 이름이 [일본서기]에는 도천황(觀松彦香殖-稻天皇)이라고 했다.
수인천황에 의해 불타버린 도성稻城이 사하지히메의 부왕인 효소천황의 성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신사가 난파와 큐슈 등등 여러 곳에 남아있으니 제사장이었다.
왜여왕 일여壹與(=개화천황開化天皇)는 고모부이자 외삼촌인 선견왕자 천일창이 가야에서 건너오니
큐슈에 살도록 허가하였다.
그가 일본에 와서 처음 살던 곳은 큐슈의 서북부 이쯔국伊都國이었고 그리하여 천일창을 이쯔국伊都國의
시조라고 한다.
그런데 도망간 사하치히메는 백제계의 중심인 오사카에 살고 있었고,
천일창이 오사카로 들어가는 길은 개화천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천일창은 북쪽 해안으로 돌아서 쯔누가시敦賀市에 상륙했다가 오사카大阪에 장수를 보내어 사하치히메가
살던 도성稻城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후 효고현兵庫縣의 타지마국但馬國을 점령하여 천일창은 타지마국의 시조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궁은 타지마국但馬國의 출석신사出石神社였다.
수인천황은 이웃한 단파국丹波國의 다섯 여인을 들여 비로 삼았고 그중 히바스히메氷羽州比賣(252~293)
를 황후로 세워서 왜히메명倭比賣命(277~366)을 낳았는데
왜히메명은 훗날 신녀가 되어 근초고대왕, 즉 일본무존日本武尊을 도왔다.
또 수인천황은 오토카리하타토베弟苅羽田刀辨命(272~314)와도 결혼하여,
근초고대왕의 부인이 된 후타지노이리히메명布多遲能伊理毗賣命(297~363)을 낳았다.
287년 부여의 효령천황이 도일하여, 오사카의 효안천황이 패배하고 미와산에 들어가 대물주신이 되었을
때에, 그가 오사카의 북쪽인 경도京都에 들어가서 스스로 천황天皇이라고 칭하였을 것으로 고려된다.
이사伊佐, 우스于斯는 구슬珍珠을 의미하고, 그의 궁성은 주성궁珠城宮이었는데 그의 주성궁은 경도
부京都府 구세군久世郡 구미산정久御山町에 주성신사珠城神社로 남아있다.
구세군이 구슬군이고, 구미산정은 그가 김해에서 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300년에 숭신천황이 들어와서 그를 경도 주성궁에서 대마도로 쫓아내고 대마도왕으로 살게 하면서,
대마도를 임나任那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호가 이사치伊佐知로 격이 낮아진 것이다.
그림 14) 거등왕이 선견왕자, 천일창을 기다렸다는 김해 초선대
7장. 부여국 의려왕 효령천황과 의라왕 숭신천황 夫餘國 依慮王 孝靈天皇과 依羅王 崇神天皇
1. 부여국 의려왕 효령천황 夫餘國 依慮王 孝靈天皇
[記]大倭根子日子賊斗邇命 /[紀]大日本根子彦太瓊天皇
랴오허강 서쪽 대릉하 북동쪽에 살던 부여국인들이 선비족의 전연국 모용외에게 망하여 부여국 의려왕이 부여국을 아들 의라왕에게 물려주고, 의려왕 자신은 대릉하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와서 효령천황이 되었다. |
제 7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은 부여에서 온 의려왕依慮王이다.
285년에 일본에 도래하여 316년에 55세로 죽었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桓檀古記大震國本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주定州(발해 정주定州 = 심양시瀋陽市 북쪽 신대자新臺子 의로懿路)는 (부여왕) 의려국 도읍이었다.
선비족 모용외에게 패하여 도읍이 위태하니 의려왕 생각에 백성들이 있으니 어디간들 성공하지 못하랴?
아들 부라扶羅를 불러 도읍을 맡기고 백랑산白浪山(백랑수였던 대릉하의 산)을 넘어 바다를 건너가서
왜인들을 정벌하고 왕이 되었다.
혹은, 의려왕이 선비에게 패하여 바다로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들은 북옥저北沃沮(북옥저가 요하의 발해국 정주 위치다. 의라왕의 천도 전에는 대릉하에 있었다.)로
도망했는데 이듬해 아들 의라가 부여왕이 되었다.
다시 모용외에게 침략당해 백성들이 끌려가니(북경의 노예시장에서 포로가 된 부여인들이 팔렸다.)
의라왕이 수천명을 데리고 바다 건너 왜인들을 정벌하고 왕이 되었다.
定州依慮國所都...依羅 率衆數千 越海 遂定倭人 爲王
이 의려왕과 의라왕의 이야기는 [진서/부여전晉書夫餘傳]에 기록이 있다.
285년, 모용외가 습격하여 쳐부수니 의려왕이 자살하였다.
단, [한단고기]에 의하면 일본으로 갔다.
의려왕의 아들들이 도망한 옥저는 심양시瀋陽市 북쪽이며 의라가 있던 곳은 읍루고지挹婁故地라고
와전된 의로懿路다.
진무제가 “부여왕이 대대로 충성했는데 오랑캐에게 망했으나 그 후예들이 나라를 되살리도록 조치하라”고
말했다. 이는 선비족을 경계하기 위하여 선비의 배후인 부여를 살리려고 한 것이다.
앞서 부여를 구하는데 실패했던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을 파직하고, 새로 하잠何龕을
호동이교위로 임명했고, 의라왕이 하잠을 만나러 오니 하잠이 부하 고침賈沈을 보내어 선비족을 물리쳐서
의라가 부여국을 다시 세웠다.
그후 매년 선비 모용외가 부여인을 약탈하여 중국에서 팔아대니 무제가 불쌍히 여겨서 관의 재물로서
(부여인을 노예에서) 속환贖還시켜주고 사주司州와 기주冀州에서 부여인을 팔고사지 못하게 하였다.
윗글을
종합하면 285년경에 대릉하에 살던 부여국이 선비족의 침략으로 망하여 의려依慮왕이
일본에
가서 왜왕(=효령천황이다.)이 되었다.
의려왕이 왜왕 효령천황이 된 시기는 효원천황의 아들 타케하니야스建波迩夜須毘古(248~287)가 패전
하여 전사한 287년부터, 효안천황의 황비인 오시카히메押媛(235~288)가 죽은 288년으로 고려된다.
그후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依羅王이 부여국을 정주定州 땅에 임시로 세웠으나 다시 선비족에게 약탈을
당하여 견디다 못해 역시 일본으로 가서 왜왕이 되었다.
여기서 나중에 도일한 의라왕은 아래에서 10대 숭신천황으로 확증이 되고,
의려왕은 7대 효령천황으로 고증된다.
부여국은
[위지/동이전]에서 예(穢huì)라고도
하였으며 예왕지인穢王之印이라는
국새國璽를
가졌었다.
요녕성 부신阜新市 서북 지방에 있었는데, 고구려 태조대왕(53~146) 때에 고구려의 중국 공격을 저지
하고, 요동왕 공손탁公孫度(194年 卒)의 질녀를 왕비로 맞이했고 의려왕(285年)에 이르러
선비족 모용외에게 쫓겨 일본으로 갔다.
부여는 고구려 태조대왕의 중국 한나라 침공을 저지한 부여왕 위구대尉仇台의 후손이며,
위구대 이후에 간위거簡位居, 마여麻余. 의려依慮, 의라依羅로 부여왕위가 이어져왔다.
효령천황의 이름은 후토니(賊斗邇, 太瓊)이며 그의 수도는 구로다노이호토黑田盧戶궁이다.
이 분이 요서遼西의 부여夫餘(=阜新市)에서 선비족에게 패배하고 대릉하로부터 일본에 도래한
부여왕 의려왕依慮王이다.
그의 도성 려호궁廬戶宮은 의려依慮의 이름에서 비롯된다.
효령천황은 나라현 북갈성군北葛城郡 마판릉馬坂陵에 묻혔다.
(주)
효령천황의 이름 후토니(賊斗邇 = 후로알 = 홀알 = 太瓊)에서 후루賊斗는 홀忽, 즉 크다는 뜻이
있으니 홀한강 홀한성, 홀승골이 그 예다.
그래서 후토니賊斗邇를 거쳐 큰-옥알의 태-경太-瓊으로 바뀌는 것이다.
2. 부여국 의라왕 숭신천황 夫餘國 依羅王 崇神天皇
[記]御眞木入日子印惠命 /[紀]御間城入彦五十瓊殖
의려왕으로부터 부여국을 이어받은 의라왕은 중국 동진의 도움으로 재건하여 다시 요하 부근에 나라를 세웠으나, 거듭되는 모용외의 침략으로 인하여 결국 수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일본 으로 건너와 숭신천황이 되었다. 의라왕의 이동 행로 중에 298년 백제 책계대왕이 전사하였고, 300년에 신라와 교류를 하였다. 숭신천황은 선진화 된 왕권 제도를 수립하고, 대마도에 처음으로 임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318년 백제의 반격으로 숭신천황은 죽고, 의라신사가 세워졌다. |
제
10세 천황으로 기록된 숭신천황崇神天皇은
미마기 이리히고
이니에御間城入彦
五十瓊殖,
御眞木入日子 印惠(277~318) 천황이라고 하였다.
중국 동진東晋에서는 선비족 모용외를 견제하려고, 중국의 장군들을 파견하여 의려의 아들인 의라依羅를
다시 세워 옥저沃沮 부근에 부여국을 재건하였지만, 누차 모용외慕容嵬가 부여국을 쳐서 자몽지야
紫蒙之野(=대릉하 조양시에 두었던 영주營州 12술戌 중에 자몽술紫蒙戌이라는 초소가 있었다.)를 빼앗고,
또 부여인을 약탈하여 중국에 노예로 팔아대고,
다시금 모용외가 북경 이북을 차지하고 끝내 중국 동진으로부터 모용외가 제후로 인정을 받아버리고,
의라왕은 요하 동쪽으로 옮겨 심양시 북계 의로懿路에 다시 의라국을 세웠다.
의라왕이 옮겨가서 살던 곳을 신당서는 읍루挹婁고지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의라依羅국 고지였다.
현재의 지명도 의로懿路(심양시瀋陽市 신성자구新城子區)인데 읍루, 의라, 의로 세 지명이 모두 현지
발음으로 yilou에 수렴한다.
의로懿路는 [대원일통지]에 의하면 그 아래에 모미현慕美縣이 있었으며, 모미현은 당나라 마미주磨米州
였다. 고구려 미마나를 뒤집은 말이다.
마미주는 임나任那, 즉 미마나任那에서 비롯된 말이다.
임나는 서우여 번한의 4세손 번한 임나任那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당나라 때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미마나任那의 이름을 뒤집어서 마미주磨米州로도 불리운 것이다.
의라왕은 도망하듯 일본으로 떠난 부여왕 의려와는 달리, 꽤많은 신민과 군사들을 데리고 도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신기]에서 숭신천황은 왜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사도장군四道將軍을 파견하는데, 그 사도장군들
모두가 중국식 인수印綬를 가졌으므로, 이전까지 왜국의 형편과 비교되지 않는 선진 문명의 증거이다.
의라依羅에게는 국새國璽가 있었다.
[진서晉書]에 소개된 부여의 예왕지인穢王之印이다.
이 예왕지인, 줄여서 예인穢印이라고 불러서,[일본서기]에서 숭신천황의 이름자로서 이니예印惠가
기록되었던 것이다.
숭신천황 이름의 발음은 “이ㄴ예”로서 우리말에서 뒤집힌 것을 고려하면 예인과 일치한다.
또한 중국 발음으로 예(穢huÌ)와 혜(惠huÌ)가 일치한다.
게다가 의라(숭신)왕이 왜국 땅에 쌓은 첫 번째 제방을 의망지依網池라고 한다.
의라依羅의 라羅는 새그물이라는 뜻이 있는데 바로 그물 망網과 호환互換되는 한자이다.
천라지망天羅之網, 혹은 망라網羅라는 단어가 그 예다.
일본 발음은 망網과 라羅를 똑같이 “아마”라고도 읽는데 훈과 발음이 같은 것이다.
따라서 본래 이름은 의라지依羅池인데 후에 의망지依網池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의망지 유적지依網池跡에는 대의라신사大依羅神社가 남아있으니,
대의라신사 의망지적大依羅神社 依網池跡이라고 한다.
그림 12) 의라신사의 의망지적비
숭신천황이 만든 의망지 위에 훗날 의라신사를 세운 것이므로, 숭신천황이 부여 의라왕인 것이 다시
확인된다.
숭신천황은 나라의 기근으로 인하여, 흉흉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야계 아마테라스天照大神와
백제계 구수대왕倭大國魂神과 대물주신大物主神을 동시에 제사 지냈다.
즉 토착 백제세력을 선무한 것이다.
숭신천황은 국가적으로 호구 조사를 처음 실시하고 그에 따른 과역을 부과한 최초의 왕이다.
또한 그의 도읍을 처음으로 제도帝都라고 하였다.
숭신천황 말년에 임나국任那國에서 소나가시치蘇那曷叱智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숭신기]에서 임나는 축자국筑茨國과 2000리 떨어져 있고, 임나의 북쪽에 바다가 있으며 신라의 서남에
있었다고 하였다. 즉 대마도다.
대마도에 인위가라仁位加羅가 있었고 최초의 임나가라였다.
인위仁位의 우리말 발음 이뉘가 숭신천황의 우리말식 이름 이니예와 같기 때문이다.
[수인천황기]에서는 이 임나인 소나가시치가 조공하러 와서 왜왕을 자칭하는 이쓰쓰히고伊都都比古
(이도국의 왕)에게 억류되었다가 수인천황을 찾아오게 되었다.
대마도는 이미 숭신천황의 영토였고, 수인천황 천일창은 시마네현 동쪽 단마국但馬國에 있었다.
이쓰쓰히고伊都都比古는 축자筑紫의 숭신천황이었을 것이며 숭신천황의 사자로서 천일창을 회유하러
찾아간 것이 된다.
훗날 고구려가 대마도를 치고 임나연정을 설치하였다.
위를 종합하면 의라왕이 왜국 땅에 오면서 도중에 대마도를 중심으로 임나를 건설하였고 얼마 후에
사도장군을 파견하여 일본 열도를 정복하고 천황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가야국이 어느날 갑자기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주장되는 것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인데,
그 근원을 숭신천황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임나대마도와 가라국은 원래 별개였고, 임나를 인위가라, 혹은 임나가라라고도 하였을 뿐이며,
이는 부여의 의라왕이 일본 땅에 도래하면서 중간 기착지에 명명한 지명이다.
이 이름이 확산되어 한반도 남부까지 임나가라로 발전한 것이다.
[고사기]에서 의라(숭신)왕에 이르러 왕의 서거연도를 처음으로 기록하였는데 무인년 12월로 기록되었으
며 이는 318년 12월에 해당하며 숭신천황 고분의 묘지 기록 무인년 12월 7일과도 일치한다.
의라의 요하 서쪽 부여국왕 즉위는 모용외에게 부왕이 침탈을 당한 285년경이었고, 동천東遷하여 요하
동북쪽의 의려국 고지 의로에서 개국하여 있다가 수년간 준비하여 298년부터 도일하게 되었다.
일본의 숭신(의라)왕기는 서기 300년에서 318년까지다.
숭신천황의
서거년인 318년에 대혼란이 있다.
318년 3월에 비류대왕의 아들이자 근구수대왕의 쌍둥이 형인 오호우스大碓命가 24세로 전사했다.
백제의 일본 탈환 전쟁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318년 6월에 백제 정벌군의 대장이자 비류대왕의 태자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가 전사했다.
이는 뒷장에 자세하다.
318년 10월에는 대물주신 효안천황의 부인이었던 야마토모모소가 죽었는데 그녀를 위해 거대한
전방후원 고분이 세워졌다. 백제계가 다시금 득세한 것이다.
마침내 318년 12월에 숭신천황이 죽음으로서 부여계의 일본천황 시대는 종막을 고한다.
조작된 일본 역사에서는 수인천황이 숭신천황의 아들로서 이어가지만 실제 수인천황은 가야계 천일창
이었으므로 숭신천황의 아들도 아니고 숭신천황보다도 선대이다.
(주) [대원일통지]에 기록된 발해 모미현慕美縣은 중국 심양시 서북쪽 삼도강자진三道崗子鎭으로 추정
한다. 현지 지명 랑미포狼尾浦가 마미(馬尾, 磨米)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숭신천황의 고향 이름이 바로 이 만주의 임나, 미마나彌摩那였던 것이다.
(주)
한편 의라왕의 옥저 이주로 인한 동천東遷은 고구려나 백제가 달가와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의라국은 철령시 의로에도 오래 있지 못하고, 역시 일본으로 떠나서 일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주)
실제로 서기 298년경 백제 책계대왕의 전사는 맥인貊人과 한인漢人의 침입 때문이었으므로
바로 의라왕과의 전쟁 결과로 추정된다.
의라왕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라와도 교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기 300년경 [삼국사기] 신라 기림왕基臨王 때 기사에서 낙랑,대방 양국樂浪帶方兩國이 귀복하였다는 것이다. 본래 낙랑 지방은 의라국이 세워져 있던 만주이다.
그런데 의라의 남천으로 한반도 남해안 일대에 새로운 낙랑(=낙안읍樂安邑, 순천시順天市), 대방(남원시南原市)이 생겨났던 것이고, 즉 서기 300년에 의라왕이 일본으로 건너가다가 한반도 남부 가야에 일부 영토를 잡고 뿌리내린 것이다. 따라서 그의 도일 시기도 300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