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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天主實義
마태오 리치(Ricci,M., 利瑪竇1552-1610)
(한자 마태의 중국식 발음 마타이, 헬라어 발음 마타이오 )
1.
2.
아무래도 징샨공원으로 가기 앞에
북당을 세웠던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를 얘기해야겠다.
이 소속의 신부인 마태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가 특히 조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1784년의 이승훈의 북당에서의 영세를 받고,
조선에 들어 와 신자들에게 세례를 준 것이
한국 가톨릭교회 성립의 시원이 되지만,
이 보다 160여년 전에 '천주실의'를
중국 사신으로 북경을 다녀 온
지봉 이수광이 조선에 전래하면서부터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 가톨릭에 대한
자생적 탐구가 밑바탕이 되었다.
마태오 리치가 1500년대 후반
마카오를 거쳐 중국 포교에 나서면서,
중국의 고전들을 섭력하고,
가톨릭의 사상을 중국 사상과 비교하면서 설명한 '천주실의'를
집필하였다.
이 책은 당시 명나라의 대표적 지식인 서광계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이 책을 통해 소위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예수회(중국에서는 耶蘇會이라 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마테오 리치의 일생을 담은 평전인
《비밀의 문》을 읽고서 부터이다.
마테오 리치신부가 온갖 어려움속에서 중국어를 마스트하고,
동서양의 사상들을 비교하면서
크리스토교(가톨릭)를 전파하는 과정에서의 지독한 끊질긴
치열한 희생적 포교행위에 감동을 받았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당시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지만
예수회의 창시자인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1491-1556)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다다 작년 7월에 아내와 함께 유럽의 성모성지를 순례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냐시오 생가가 코스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 한 곳을 가고 싶었는데 이곳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초대 교구를 이끈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파리외방전교회였는데.
이곳도 코스에 포함되어 있었서,
카톨릭 신자이기 이전에
서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조선시대 전공인
나에게는 의미를 더해 주었다.
예수회는 16세기 이후 남미와 아시아를 포함하여 전세계 포교에 있어서 카톨릭 개혁의 전위부대로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한 조직이었다.
이냐시오가 젊은 날 방탕한 생활을 접고 성직으로 귀의하는 삶은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스페인 동남부의 바르셀로나 북쪽 1시간정도의 거리에 있는
로욜라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인이 되어서는 군인이 되었는데,
1521년 프랑스의 프린세스 1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촬스 5세 사이에 벌어진 팜플노나전투에
참가하였으나,
두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고 고향 로욜라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이후 1522년 부상에서 회복된 아냐시오는 몽셀라 순례여행에서
왕의 전사에서 하나님의 영적인 전사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칼을 성모성소에 바치고 나서
그는 만레사에 있는 동굴에서 금식과 탁발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기도에 몰두하였다.
그는 이 고행을 통해 육신의 고통을 제어하고 극복하면서 정신을 더 높은 단계로 승화하는 길을 발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활용되고 있는
카톨릭에서의 '영성수련'의 기본틀을 이때 만들어 냈다.
감각과 신앙의 행위를 결합시키는 독특한 영성수련 방법론은 이후 성화 성물 제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중세이후 미술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예수회의 특징은 우수한 교육기관들을 설립하였다는 점이다.
한국의 서강대학교가 바로 예수회에서 세운 것이다.
전 유럽에 걸쳐 교육기관들을 세웠다.
전도방식은 최고결정자에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왕의 인정을 받아 합법적으로 교세확장을 꾀했다.
특히 예수회 신부들은 뛰어난 학식과 실무능력
그리고 과학기술 특히 수학 천문에 능했다.
마테오 리치는 명나라 황제의 신임을 받는데 실패했지만,
이후 볼모로 청에 억류하고 있던
소현세자와 교류한 아담 샬 등 예수회 신부 등은
청나라 황제들의 신임을 받아
궁정에서 회계업무를 담당하기도 하고,
특히 천문 역법지식을 통해 책력을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
청은 명을 무너뜨리고 이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것이므로,
한족을 다스리는데에는 '天命'에 의한 것이라는
상징적 논리가 다른 황조보다 더 크게 강조될 필요가 있었다.
천명사상이란 중국의 오랜 유교적 전통에 기인하는 것으로,
하늘로부터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즉 천명을 부여받았다는 논리이다.
그런 존재이므로 하늘에 관계되는 비 바람 즉 風雨調順을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비가 안 와서 흉년이 들거나, 홍수 등 자연재해를 입었을시 임금은 덕이 부덕한 탓이라고 근신을 하는 것은
이러한 천명사상에 기인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천명이 떠난 사람은 갈아 치워도 된다는
革命사상이 맹자에 실려 있다.
단오에 왕이 신하에게 단오부채와 얼음을 하사하는 것도
풍우조순을 관장하는 천명을 받은 사람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위이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365일을 과학적으로 해석해 내고
별자리를 관측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이러한 배경에서 황제의 하사금으로
'북당'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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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인 리치(M. Ricci, 利瑪竇, 1552∼1610) 신부가 한문으로 집필한 교리서.
책이름은 저자가 직접 지은 것으로,
서양식 제목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된 토론’(De D대 Verax Disputatio)이다.
제목이 알려 주듯이 이 책은
하나님과 천주교를 논한 한역 서학서이다.
[구성과 내용] 이 책은 크리스토교 문화와 스콜라 철학의 전문적인 교양을 갖춘 서양의 학자인(西士)와 유교 경전에 대한 교양과 유·불·도 3교를 터득하고 있는 중국 선비인 동사(東士) 사이에 대담·토론 형식으로 편술되어 있다.
상·하 2권 8편에 갈쳐,
174항목에 이르는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이 책은 천주교 서적이기는 하지만, 크리스토교 및 서양 사상과 유교 및 동양 사상이 만나는 ‘서학서’인 동시에,
스콜라 철학과 유교 철학이 만나는 ‘철학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각판 직후부터 동양 찰학 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나라에서 주목받아 왔다.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상권의 수편은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그것을 주재하며 안양함’,
2편은 ‘세상 사람들이 천주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
3편은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여 동물의 그것과 크게 다름’,
4편은 ‘귀신과 인간의 혼은 서로 다르며 천하 만물은 한 몸이라고 할 수 없음’이다.
하권의 5편은 ‘불교의 윤회·육도설과 살생을 금하라는 계율은
그릇된 것이며 재계(齋戒)와 소식을 올리는 바른 뜻을 논함,
6편은 ‘하나님의 의지는 소멸되지 않으며 죽은 후에 천당과 지옥의 상벌로써 생시에 행한 선·악에 대해 응보가 주어짐’,
7편은 ‘인간 본성의 본래적 선을 논하고 천주교인의 올바른 학습 방법을 풀이함’,
8편은 ‘서양의 풍습에서 숭상하는 바를 총괄하고 서양 성직자가 결혼하지 않음과 천주께서 서양에 육화한 이유를 밝힘’등이다.
이상 8편의 내용은 먼저 창조, 하나님, 영혼 불멸, 천당·지옥,
상선 벌악, 육화 등 천주교 교리의 기본 문제를 풀이하고,
둘째로, 도교·불교가 공허한 가르침이며 유학의 ‘이’(理)도 만물의 참된 본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밝힌다.
셋째로 유학의 옛 고전에도 이것이 밝혀져 있음을 들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고, 입교 절차를 알려 주는 것으로 요약된다.
[간행 시기] 《천주실의》의 편술 시기와 편각 연도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이견(異見)이 있으나, 편술된 것은 1593∼1596년으로 통론되고 있다. 이 기간에 작성된 초고본이 중국 학자의 주목을 받게 되어 사본으로 일부 사대부 사이에 유포됨으로써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고, 판각을 권유하는 중국 학자들에 의해 1595년 일차적으로 호남성 남창(南昌)에서 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601년 리치 신부가 북경 체류 허가를 얻어 선교 활동을 시작한 후, 그의 친교가 있었던 빙응경(馮應京)이 《천주실의》의 수초본(手草本)을 얻어 보고 천주교에 입교한 후 판각을 계획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판각이 지연됨으로써 이 기간에 일부를 보정하여 1603년 북경 판 《천주실의》가 공간(公刊)되었다.
오늘날 유포되고 있는 판본 서두에 “만력 29년 맹춘곡단 후학 빙응경 근서”(萬曆二十九年 孟春穀旦 後學馮應京謹書)라는 서문이 있어 1601년에 판각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리치 신부 자신이 쓴
“만력 31년 세차계묘 7월 기망 이마두서”(萬曆三十一年 歲次癸卯七月旣望利瑪竇書)의 <서>(序)와 <인>(引)이 실려 있는 판본이 북경 제1 판본 《천주실의》더 1603년에 간행된 것이다.
북경 제1판이 간행된 후 북경 일원의 지식인들 사이에
《천주실의》가 급속히 유포되며 천주에 입각하는 이들이 나타나자, 1604년 제2 판본이 예수회 동양 순찰사(巡察使, visitator)인 발리냐노(A. Valignano, 范禮安, 1538∼1606) 신부의 주선으로 광동성(廣東省) 소주(韶州)에서 간행되었다.
그 후 1607년 리치 신부의 충직한 협력자였던 중국인 학자 이지조(李之藻, 1565∼1630)에 의해 제3 판본이 항주(杭州)에서 판각·간행되었다.
‘천주실의’라는 책이름은 저자인 리치 신부 자신이 지은 것이나, 1615년을 전후하여 크리스토교를 ‘천학’으로 표기하자,
한때 ‘천학실의’(天學實義)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일도 있다
(현재 세계에서 이러한 간행본 4부가 발견되어
박물관 몇 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늘날 세계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천주실의》 사본은 1603년에 판각된 것의 사본이다.
[저술 배경] 리치 신부가 《천주실의》에 거는 기대와 자부심은 대단하여, 이 책을 증보하여 판각하기 위해 간행이 뒤로 미루어졌을 때 “중국은 마치 죽어 가는 환자와 같이 아주 큰 죄악 속에
빠져 있다. 현재 그 중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책뿐이다”라고 적은 바 있다. 명말(明末)의 대학자이며 문신인 서광계(徐光啓, 1562∼1633)나 이지조 등 중국 천주교회 초기의 평신도들 다수가 《천주실의》를 읽고 세례를 받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는 《천주실의》는 중국 선교가 효과를 거두는 계기인 동시에,
중국 사회에서 서학(西學)을 연구하는
학문 활동이 시작되도록 한 책이다.
리치 신부가 이처럼 품격 있는 학문서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그러나 서양 출신의 이국인으로서 이교 세계인 중국의 지식인들을 매료시킬 정도로 한문 구사 능력을 터득하고, 중국의 유학과 도·불교에 관한 해박한 학식을 갖추려고 한 리치 신부의 노력 덕분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1582년 마카오를 통해 중국에 첫발을 들여놓은 리치 신부는 다음해인 1583년 동료 루지에리(M. Ruggieri, 羅明堅, 1543∼1607) 신부와 함께 중국 광동성 조경(肇慶)에 머물게 되었다.
루지에리 신부는 리치 신부보다 불과 3년 앞서 중국에 진출하였으나, 어학 실력이 뛰어나 한문 학습의 성과가 놀라웠다.
그는 1584년에 서양인이 중국어로 쓴 최초의 저서로 후세에 알려진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을 저술한 인물이다.
이런 루지에리 신부와 함께 지내면서 큰 자극을 받아 리치 신부도 한문 공부에 전력을 다하였고 《천주성교실록》의 편술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조경에서 루지에리 신부와 같이 지낸 시간은 그가 뒷날 《천주실의》을 저술할 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리치 신부의 중국어 학습 성과도 놀라웠다.
서양인 최초로 어렵기로 유명한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번역을
시작하여 1594년 번역을 완수하고 서양에서 간행하였다.
이 번역 작업을 통해 리치 신부는 유교의 기본 경서를 통독하고 그 내용에 통달할 수 있었다.
이 번역서는 예수회 신부들에게 중국 고대 사상을 이해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595년 리치 신부는 첫 한역 서학서인
《교우론》(交友論)을 저술하기에 앞서,
중국을 중앙에 위치시킨
한역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판각하여
중국 지식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런 학문적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동서 사상이 만나는 사상서요, 동서 철학이 만나는 철학서이며, 천주교 선교의 ‘고등 호교서’라 할 《천주실의》를 편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향과 의의] 《천주실의》는 중국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많은 명사들이 천주교를 믿도록 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한문 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나라로 급속하게 전파되어, 전통 사회 지식인들의 서양과 서양 문화에 관한 학문적 활동인 서학과 천주교 신앙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를 조성하였다.
한편 유럽 사회에서 동양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환기하게 된
참고서이기도 하였다.
《천주실의》는 1603년 북경 제1판이 간행된 후
10년 이내에 조선·일본·몽고 등
한자 문화권 내의 여러 나라로 급속하게 전파되었다.
조선에서도 일찍이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이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실의 발문>(天主實義跋文)을 지은 후 필사본이 나돌자,《천주실의》를 읽은 후 자기 저서에 그에 관한 글을 수록하는 학자들이 늘어났다.
18세기 중엽에는 호기심에서 《천주실의》를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 탐구욕을 가지고 《천주실의》를 연구하고
이 책의 내용에 깊이 있는 글을 남기는 학자들도 생겨났다
(홍유환, 안정복, 신후담, 이헌경 등).
《천주실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쌓이면서
조선 후기 사회에 천주교의 이질성과 위험성을 문제삼는 움직임과 천주 신앙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수용 실천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은 《천주실의》가 깔아놓은 서학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얻어진 것이다.
《천주실의》는 조선 교회 창설 후에는 한문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서민층을 위해 한글로 번역되어 사본으로 유포되었다.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소는 1603년 간행본의 원문과 조선 후기 사회에 유포되었던 한글 필사본 《쳔쥬실의》를 하나로 묶고 해제를 붙인 후, 1972년 한국교회사 연구자료 4·5호 합집으로 간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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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책이 족쇄이자 열쇠였다는 이야기는 정조의 문체반정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 중심에는 대단히 개혁적인 공안파(公安派) 문제가 있었다.
정조는 ‘보지 않은 책이 없다’고 평가될 정도로 중국의 학술과 문학에 정통했던 호학(好學)의 군주였다.
그는 즉위하기 전부터 중국에서 중요한 서적들을 수입해서 읽었다. 현재 규장각에 있는 많은 책들이 정조 때 수입된 것이다.
그런 그는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공안파의 혁명적인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탄압의 기회를 찾고 있지 않았을까.
■ 천주교 박해의 불똥이 공안파에게 튀다
정조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공안파를 향해 칼끝을 겨눈다.
정조 15년(1791년) 11월7일,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에게 한국에서 가톨릭 순교의 역사가 시작되는 진산사건에 대한 조사 내용을 보고받는 자리였다.
“이런 일은 그 책들을 불속에 던져 넣은 뒤에야 뿌리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형벌을 집행함으로써 충분히 다스려지는 일도 아니다. 사학(邪學)을 물리치려면 먼저 정학(正學)을 밝혀야 한다. 그러므로 일전에 책문 제목을 내면서 명말청초의 문집에 대한 일을 성대하게 말했던 것이다.
대체로 명·청시대의 글은 근심에 싸여 조급하고 기괴한지라 치세를 위한 정도라 볼 수 없다. 그런 것들 가운데 <원중랑집(袁中郞集)>이 가장 심하다. 요즈음 습속을 보면 모두 경학을 버리고 잡서에만 빠져들고 있다.”
정조가 말한 ‘그 책들’은 <천주실의>와 <칠극>이었을 것이다.
앞의 것은 마테오 리치(1552~1610)가 서양 학자와 중국 학자를 등장시켜 대담하는 형식으로 쓴 천주교 교리서이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마테오 리치가 중국의 학예에 얼마나 정통해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라고 한다.
동양의 사상과 문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천주교에 귀의할 것을 설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북경에서 출간된 뒤(1603년) 상당히 빠른 속도로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북아시아로 퍼져나갔다.
출간 다음해인 1604년에 이미 일본에도 전해졌을 정도다.
조선에도 일찍 들어왔다.
그 당시의 학자였던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1614년)에 편목으로 열거되고 있을 뿐 아니라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1622년쯤)에도 편목이 소개되고 촌평까지 실려 있다.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읽혀졌고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벽·권철신·권일신·정약종·정약용·이승훈 등이 천주교 신앙 실천운동을 일으켜 1784년(정조 8년)에 조선천주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뒤의 것은 예수회 신부였던 판토하(Didacs de Pantoja)가 쓴 수신서로 원래 이름은 <칠극대전>(1614년)이다.
이 책도 일찍이 조선에 전해졌고 남인 학자들에게 천주교를 전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이 책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소개했다. 천주교와 유교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일치할 뿐 아니라 천주교가 좀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느낌마저 드러내고 있다.
<칠극> 역시 일찍이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졌다.
그리고 정조 1년(1777년)쯤
천진암, 주어사에서 이루어졌던 강학에서
남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 검토된 것으로 보인다.
진산사건은 이렇게 교세가 확장되어가고 있던
상황에서 벌어진 것으로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정조는 이런 천주교와 같은 사학을 물리치려면 <원중랑집>과 같은 잡서를 읽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원중랑집>은 천주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니 무슨 소린가 싶을 정도로 엉뚱하다.
어쨌든 진산사건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은 사형당했고
천주교 서적들은 압수되어 불살라졌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봐도 이처럼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정작 <원중랑집>에 대해서는 언급만 했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 중국의 경전과 역사서조차 수입 금지
그로부터 1년 뒤 정조 16년(1792년) 10월19일,
정조는 당시의 글이 점점 더 비속해지고 과거에 응시한 문장들조차 패관 소품체가 침투함으로써 경전이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 모든 원인이 중국에서 들어오는 잡서들 때문이라며 책 수입을 전면 금지시킨다.
경전과 역사서조차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명분은 이랬다.
조선에는 이미 충분히 많은 책이 있으니 더 이상 필요 없다.
또 선비들이 중국의 책을 구하려는 것은 글씨가 작고 종이가 얇아 누워서 보기에 편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성인의 말씀을 존경하는 도리가 아니다.
이런 독서 자세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아이들의 교과서였던 <격몽요결>에 나오는 말이다.
“독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꿇어앉아 공경스러운 자세로 책을 대해야 할 것이다.”
중국책 수입을 금지하면서 이런 설명까지 필요했다니 좀 궁색해 보인다.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성균관 시험의 시험지 중에 만일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비록 전편이 주옥같을지라도 하고(下考·가장 낮은 성적)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내일 승보시(陞補試)를 보일 때 여러 선비들을 모아두고 직접 이 뜻을 일러주어 실효가 있게 하라.”(<정조실록> 16년(1792년) 10월19일)
정조는 이날부터 본격적으로 문체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정조가 왜 이렇게 패관 소품체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원중랑집>이 어떤 책인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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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는 중국사람을 대변하는 박학다식의 학자이고,
서사는 가톨릭사상과 스콜라철학을 겸비한 서양학자로
저자 자신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전자의 입을 빌려
전통유학의 사상과 불교·도교를 논하게 하고
후자가 스콜라철학과 선진공맹(先秦孔孟)의 고전을 들어
천주교의 교리를 펴고,
그 사상을 이론적으로 옹위(擁衛)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화형식을 빌려 진술된 문장은 사서육경과
그 밖의 경전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유교서뿐만 아니라 불교·도교서도 자주 활용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맞춤)하지 않고
차근차근 타이르듯이 이끌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승복하지 않을 수 없게 꾸며져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마태오 리치가 중국 학예(學藝)에 얼마나 통달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고어(古語)를 구사하고 성어(成語)·성구(成句)는 가급적 오랜 원형을 찾아 사용하였고,
고사(故事)의 내력을 광범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 책을 편술한 시기는 1593(선조 26)∼1596년으로 보이나,
정식 간행된 것은
저자가 북경(北京)에 거주하게 된 뒤인 1603년의 일이다.
그 뒤 제2판이 발리니아니(Valignani, 范禮安) 신부에 의하여
광둥성(廣東省)사오저우(韶州)에서 간행되고,
1607년 쟝수성(江蘇省)저장(浙江)에서 이지조(李之藻)에 의하여
제3판이 나왔다.
‘천주실의’라는 책이름은
‘De Deo Verax Disputatio’를 번역한 것으로,
직역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다.
내용은 천주교 신앙의 모든 문제를 다루지 않고
몇 가지 중요한 교리,
특히 본질적 문제만을 다루어
마침내 신앙과 계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론을 폈고,
이를 인간의 이성과 자연적인 식견으로 입증하며 전개해 놓았다.
상권의 제1편에서는 인간 지능을 설명하고,
인류의 공통사상과 운동력과 질서의 논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한편,
인간은 신과 그 속성(屬性)에 대한
소극적 인식을 가졌음을 논하였다.
제2편에서는 불교·도교를 논박하고,
유교에 대하여는 제1질료(第一質料)라 할
태극설(太極說)을 제하고는 대체로 찬동하는 논리를 폈다.
실체(實體)와 우연을 설명하면서
신은 모든 완전성을 지닌 실체임을 역설하고,
중국 고대사상에서의 상제(上帝, 하나님)의 성격을
11종의 중국 고대문헌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제3편에서는 천국의 필요성을 말하고 식물의 생장력,
동물의 감각력,
인간의 지적 영혼(知的靈魂)의 차이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것의 단성(單性)·영성(靈性)·불멸성(不滅性)을 논증하고 있다.
제4편에서는 중국 고전에서 예를 지적해 가며
고대신령(古代神靈)에 대한 신앙을 논증하여
인간 영혼이 신령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능과 불능의 차이를 보여주고,
악마와 지옥의 기원에 대한
범신론적 일신론(汎神論的一神論)을 논박하였다.
하권의 제5편에서는 윤회설의 창시자가
피타고라스(Pythagoras)이며
불교가 그것을 채용하여 윤회설을 중국에 전한 것이라고 하고,
만물이 모두 인간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므로
불교에서 살생을 금함이 옳지 않음을 밝혔다.
그리고 크리스토교의 재계(齋戒)의 동기와 본질을 설명하였다.
제6편에서는 참된 뜻에서의 소망과 두려움의 정당성을 밝히고,
그것은 사후(死後)의 상벌로만 옳게 실현됨을 강조하고,
지옥·천국 및 연옥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며
이에 대한 비방을 논증적으로 반박하였다.
제7편에서는 천주에 대한 인간성과 선악,
자유의지와 인간의 목적을 설명하고,
천주(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주축으로 하는
크리스토교설을 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가장 확실한 지식이고,
사랑은 가장 고귀한 덕행임을 설명하고,
종교적 무관심주의의 오류를 갈파하였다.
제8편에서는 유럽의 관습과 천주교 성직자들의 독신제를 설명하고,
중국에서의 잡다한 종교생활을 개탄하면서
중국 고대는 사정이 달랐음을 밝히고 있다.
끝으로, 원죄(原罪)를 말하고
천주강생(天主降生)과 신법공포(神法公布)를 설명하고,
진리의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천주교해략 天主敎解略 Doctrina Christiana≫으로 공부하고
천주교에 귀의하여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우주만물에는 창조주와 주재자가 존재하여 끊임없이
만물을 안양(安養)하고 있으며,
둘째 인간 영혼은 불멸한 것으로
후세에 각자의 행실에 따라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응징이 있음을 밝혔다.
셋째 불교의 윤회설을 배격하고
오로지 사랑의 크리스토교 신앙만이
구원(죄에서 건져줌)을 가져다 주는 것이고,
중국 고경(古經)에 이미 이와 같은 가르침이 밝혀져 있으니 공부하고 귀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천주실의 서문
1. 화평하게 하고 다스리는 일상의 도리는 궁극적으로 마음을 오직 "하나로 함"에 있을 뿐입니다.
2. 따라서 현자와 성인들은
신하들에게 충성스런 마음을 권하였습니다.
충성은 두 마음이 없음을 말합니다.
3 오륜은 군주에 관한 것을 첫째로 삼고,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삼강 중에서 으뜸입니다.
무릇 바르고 의로운 사람들은
그분을 분명히 깨닫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4. 옛날에 사회가 혼란하여 여러 영웅들이 나누어져 전쟁을 하고 있어서 아직 진정한 군주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에도,
의로운 마음을 가진 이들은
정통성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깊이 살펴서
오직 몸을 바쳐 그를 위해 순절하였고,
혹시라도 충성스런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었습니다.
5. 나라에도 주인이 있는데,
천지에 유독 주인[主]이 없겠습니까..?
나라가 하나의 군주에 통섭되는데,
어찌 천지에 두 주인이 있겠습니까..?
6. 따라서 군자라면, 우주의 근본이요,
창조와 생성의 으뜸을 반드시 잘 인식하여 앙모하(바라보)고
사색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사람들 중에는 타락하여
천명(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못된 자들이 있어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고 있습니다.
8. 재주를 부려서 이 세상의 온갖 영화와 권세를 탈취해도 오히려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천주[天主]의 자리까지 넘보려
하려 인간의 자리를 뛰어넘어가 그 천주의 존위 위에 군림하고자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9. 하늘만은 높아서 사다리를 타고도 올라갈 수 없으니,
천주(하나님)의 자리를 가로채려는
인간의 욕망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10. 이에 하나님을 참칭하는 저 못된 인간들은 사악한 이론을 그릇되게 퍼뜨리고 약한 백성들을 기만하고 오도해서
천주의 자취를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11. 망령되이 사람들에게 물적 이득과 행복을 약속해 주고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들을 흠숭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12. 저들[천주를 참칭하는 사악한 인간]이나 이들 [오도되어 사악한 인간을 천주로 받드는 어리석은 사람]
모두가 천주께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13. 이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시어, 세세 대대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 가운데 그 까닭을 생각해 보는 이는
없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14. 어찌 천주를 참칭하는 도둑을 주인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인은 나타나지 않고,
못된 무리들이 서로 부채질하며 날뛰고 있으니 참되고 성실한 도리는 거의 소멸되었습니다.
15. 저는 어려서부터 고향을 떠나 온 세상을 널리 유람하였으며, 이런 천주 모독의 지독한 폐해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16. 저는, 중국이란 요순의 백성들이요, 주공과 고자의 가르침을 배운 민족이니, 천리[천주에 대한 이치]와
천학[천주에 관한 학문]은 결코 달리 고쳐져서 이단으로 오염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또한 간간히 오염된 바 있다고 생각되어, 저는 마음 속으로 그에 대한 논증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저는 먼 나라에서 온 외로운 나그네이므로 저의 언어와 문자는 중국과 달라서 입을 통해서나
손가락을 움직여서는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17. 저의 재질이 못났기에, 분명하게 하고자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용이 혼미해질까 두렵습니다.
18. 저는 오랫동안 개탄하는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20여 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읍소하며 기도했습니다.
19. 천주(하나님)께서 이 살아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어, 잘못을 바로잡아 주실 날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생각해 왔습니다.
20. 어느날 뜻밖에 두어 친우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21. 그들은 비록 제가 중국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를지라도,
도둑을 보고서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면 정말 안 되니
혹시 인자하고 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가 그 외침을 듣고서 분연히 일어나
그 도둑을 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22. 이에 제가 중국 선비들이 우리[천주교 신부]들의 생각을 묻는 질문에 구술로 답한 것이
이제 한 권의 책으로 된 것입니다.
23. 아아! 어리석은 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여기는 것은 마치 장님이 하늘을 보지 못하여
하늘에 태양이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24. 그러나 햇빛은 실재하는데 눈이 스스로 볼 수 없을 뿐이지, 어찌 태양이 없지나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25. 천주의 도리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나 또한 살피려고 하지 않아서
하늘이 주재함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26. 형상은 없지만, 완벽한 눈이어서 보지 못하는 바가 없고, 완벽한 귀여서 듣지 못하는 바가 없으며,
완벽한 발이어서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27. 비유하면 하늘의 주재함은 착한 자식에게는 부모님의 인자한 은덕과 같으나, 못난 자식에게는 재판관의 엄혹한
위엄과 같습니다.
28. 사람들은 천둥 벽력이 단지 고목만을 치고 곧바로 불인[不仁]한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위에 주님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합니다.
29. 이는 천주가 죄를 벌하는 것은 엉성한 것 같으나
놓치는 일이 없으시니, 늦어지면 그만큼 벌이 무거워진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30. 오직 우리들이 이런 주님만을 흠수하는 것은 분향 드리고 제사 지낼 때만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이 되시는
아버지[原父]이시며, 조화시키는 큰 공능을 항상 생각하면서, 우리 불쌍한 인간들은
그분이 반드시 지극한 지혜로써 이 세상을 경영하고,
지극한 능력으로 이 세상을 완성시키고 있으시며,
지극한 선함으로 이 세상에 필요하나 것을 갖추어 주고, 개개 사물과 만류들이 필요로 하는 바를
모두 결함 없이 해 주심 되돌아볼 때 비로서 대륜[大倫]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1. 하지만 배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비록 천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적다 해도, 이 적음의 이로움은
오히려 다른 일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 천주실의를 읽는 이들이 문장이 미미하다고 해서 천주의 뜻을 미미하게 여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32. 천지도 천주(하나님)를 다 실을 수 없거늘,
이 작은 책이 어찌 다 실을 수 있겠습니까..?
때
1603년 7월 보름의 다음날 (7월 16일)
마태오 리치 씀.
마태오 리치(Ricci,M., 利瑪竇1552-1610)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최초로 천주교를 전파한 선교사이다.
마태오 리치의 한자 이름은 이마두(利瑪竇)다.
1571년에 예수회에 들어가 해외 선교의 뜻을 세웠고,
10여 년 뒤인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어를 익힌 후,
중국에 들어가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먼저 중국 광둥 성에서 그 지방을 다스리는 지배자의 허락을 받아 선교를 시작하였으며,
이어 1599년 난징을 거처 1601년 수도 북경으로 나아갔다.
그는 명 황제에게 자명종(탁상 시계)과 대서양금(피아노의 전신),
자신이 저술한 '만국도지(萬國圖志)' 등을 선물하였으며,
그 덕분에 북경에서 자리를 잡고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중국에 오기 전 로마 대학에서
천문학과 천문 기구 제작법, 지리학과 지도학,
수학 등을 교육 받았는데,
그의 수학 교수 중에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 클라비우스(1537~1612)도 있었다.
그는 종교적 교리보다 이런 과학적 지식을 포교의 수단으로 삼았는데,
중국에 살면서 중국 방식을 존중하고 혼천의, 지구의, 망원경 등
서양의 발명품들을 소개함으로써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선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양의 과학 지식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그들에게 소개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번역서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 과
세계 지도 위에 지리학과 천문학적인 설명을 덧붙여 놓은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이다.
또 천주교 교리를 중국어로 번역한 "천주실의" 를 완성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천주교 성립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밖에 서양인들의 친구 간의 우정과 사고방식에 대한
격언 등을 한자로 서술한 "교우론(交友論)" 등이 있으며,
또다른 세계 지도인‘여지산해전도(與地山海全圖)’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서양에 처음 서양 문물을 소개하면서 천주교를 전파한 인물이면서
또한 공자와 유가 사상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가 도입한 서양학으로 인해 서광계, 이지조 같은 관료는
서양의 과학 지식을 배우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의 선교 활동을 도왔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계속하다 1610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