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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구주백제의 성립과 의자대왕 부부천황
20장. 백제 무령대왕 왜무왕 사마왕의 큐슈 병합 百濟 武寧大王 倭武王 斯麻王 九州 倂合
[記]意祁王 /[紀]億計天皇
498년, 백제 동성대왕이었던 일본의 인현천황이 암살당하고 현종천황의 아들인 무열천황이 즉위한다. 501년, 백제에서는 동성대왕의 손자인 모대대왕이 시해를 당하니 함흥으로부터 무령대왕이 돌아와 백제대왕이 된다. 무령대왕은 506년에 동생인 사아왕을 큐슈의 구다라로 보내어 큐슈에 백제 직할지를 만들었다. 506년, 이후로 백제는 망국 때까지, 큐슈 구다라를 소유하였고, 큐슈가 곧 백제였으므로, 이후로 오늘까지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러오게 되었다. |
무령대왕武寧大王(462~523)이
478년 왜무왕倭武王으로
즉위했으나 고구려 정벌을 위해 함경북도
청진에 나가서 지켰다.
이때 왜국에서는 조정을 맡났던 모후 반풍황녀가 서거하니, 현종천황이 484년에 왜왕위를 빼앗았다.
무령대왕의
479년, 고구려 공격과 함경북도 청진 지배는 현재 지명과 [삼국사기지리지]로 알 수 있다.
485년 모도대왕 때에 백제는 함흥에 우두성牛頭城을 쌓은 기록이 있다.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인 경성鏡城
도호부에는 길주吉州,
명천군明川郡
부령군 富寧郡
등이 속해 있었다.
경성鏡城의 옛이름은 목랑고성木郞古城, 또는 우롱미于籠耳라고 했는데,
왜무왕倭武王이었던 무령대왕과 관련되어서 원래는 무왕고성武王古城, 왜룡미倭龍彌였을 것이다.
그림 3) 근구수대왕 후손 혈통도
경성 남쪽 45리에 제왕산諸王山이 있었는데 제왕산濟王山이 옳은 것이다.
청진 북쪽 부령군富寧郡은 무령군武寧郡이 어원으로 무령대왕武寧大王과 관련된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지리지]에서는 이 곳이 무령대왕의 본 이름이 들어간 고-사마현古斯麻縣이다.
부령군 무릉산은 무령산이 어원이다.
자금 수성천輸城川이 무령산에서 흘러내리는데 본래 용성천龍城川이었다.
즉 무령대왕이 479년 고구려를 공략하러 들어와 있던 곳이다.
용성천의 하구인 청진시淸津市에 청령대왕과 무령대왕의 궁성이 있었을 것이다.
명천군 성명봉聖明峰은 무령대왕의 아들 성명대왕聖明大王을 의미한다.
성명봉에서 내려오는 명간천明澗川은 본래 명왕천明王川이었을 것이다.
성명대왕이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고려된다. (백제 성왕은 성명대왕이라고도 한다.)
길주吉州의 고선화진古宣化津은 무령대왕 동생인 선화천황宣化天皇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길주 서쪽 안반덕산安班德山(1830m)이 역시 무령대왕 동생인 안한천황安閑天皇의 이름일 수도 있다.
길주에는 다신고성, 태신고성 등 오래된 고성이 많이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 지리 이름을 보면 우수주가 초고왕이 처음 개척한
함경남도 함흥이다.
(주) [삼국사기지리지]에서 지리4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의 우수주牛首州가 함경남도 함흥咸興이다.
우수주牛首州는 다른말로 오근내烏根乃라고도 했다는데 함흥 성천강城川江의 이름에 흑말천이 있다.
우수주 벌력천현伐力川縣은 함흥의 성천강城川江 유역이다.
횡천현橫川縣은 함흥 동쪽 호련천瑚漣川부근으로 고려되고 자현磁縣은 함흥 서북쪽 자고성慈古城에
해당한다.
우수주 호원군乎原郡은 北原이라고도 했는데, 함흥 북쪽 홍원군洪原郡이다.
나토군奈土郡은 대제大提라고도 했는데 함흥 남쪽 정평군定平郡이다.
서호西湖 광호廣湖, 동호東湖 등 큰 호수가 많다.
적산현赤山縣은 주이천朱伊川이 흐르는 지금의 함주군청咸州郡廳 자리이다.
사열이현沙熱伊縣은 사수산泗水山을 지나 흐르는 금진강金津江으로 추정되니 함흥 남쪽 정평군 定平郡
위치다. 광산이 많고 고대로부터 쇠를 다스리던 곳이다. 초고대왕의 딸이 살던 수시리 고성이 있다.
근평군斤平郡은 심천현深川縣만 있었는데, 함흥 북쪽 신흥군新興郡으로 고려된다.
양구군陽口郡은 북청군이다. 양구군 저족현猪足縣은 오사회烏斯廻라고 했는데,
이는 일본말로 풀어서 한자로 옮기면 압하천鴨坡河이 된다.
북청군의 북쪽 물 이름이며 그곳의 성대리星垈里 고성은 고대의 철산지이다.
왕기현王岐縣은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이원군利原郡으로 생각되고,
삼현현三峴縣은 삼봉三峰 남쪽 숙신고도肅愼古都로 추정된다.
성천군狌川郡은 창덕성倉德城이 있던 단천군端川郡으로 고려된다.
대양관군大楊管郡은 마근압馬斤押이라고도 했다. 매곡현買谷縣과 고사마현古斯麻縣이 있었는데,
고사마현은 무령대왕 이름이고, 청진 북쪽 수성천輸城川의 근원이 되는 부령군富寧郡이 본래 무령군에서
비롯되므로 고사마현이 된다.
매곡현은 청진시淸津市가 되는데 고말산高抹山이 있다.
급벌산군及伐山郡은 이벌지현 伊伐支縣과 수성천현藪狌川縣이 있었는데,
함경북도 경성鏡城시 북쪽 수성천輸城川을 의미한다.
이벌지현은 경성시가 되고, 수성천현藪狌川縣은 청진시 수성천 남쪽이 되고, 문현현文峴縣은 주을朱乙이 된다.
모성군母城郡은 경성 남쪽 어랑천漁郞川, 어랑군漁郞郡이다.
객련군客連郡은 학성鶴城, 길주吉州 명천明川이다.
천성군淺城郡 비열홀比烈忽은 영흥永興이다. 박평博平이라고도 했으니 그 뜻이 천성과 같고,
영흥을 지나는 용흥강龍興江이 고대에 비류수 沸流水였으니 당연히 비열홀 이름이 유래되는 것이다.
살한현薩寒縣은 전탄강箭灘江이다.
이제까지 비열홀은 안변군安邊郡이라고 알려졌는데 잘못이다.
현재 안변은 천성군淺城郡의 남쪽인 천정군泉井郡의 남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의 국경군인 안변군이 발해의 공격으로 후퇴했기 때문이다.
천정군泉井郡은 원산시元山市에 있던 덕원군德源郡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 지리 2의 해설은 당시 신라 지명만 맞고, 그 내력이 되는 고구려 이름은 거의
틀렸다. 김부식은 통일신라 때에 고구려 유민들이 옮겨온 고구려 지명을 본래 고구려의 지명으로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모도대왕이
웅진의 백제왕이 되고, 청령천황과 왜무왕인 무령천황이 고구려 청진에 공략중인 때에,
모도대왕의 동생인 현종천황은 왜왕위를 찬탈하더니 고구려와 내통하여, 그 처벌로서 488년에 형왕인
모도대왕 인현천황이 일본에 복귀하여 제거당했는데, 이때 왜국 신하들의 반목이 있었다.
484년,
평군진조平群眞鳥가
모도대왕 인현천황을 수행하여 백제에 있는 동안에, 난파소야왕을 보호하던
평군진조의 아들 평군지비平郡志毗가 난파소야왕을 뺏으려는 현종천황과 대반금촌련大伴金寸連에 의해
살해당했었다.
그후 인현천황이 돌아와 현종천황과 난파소야왕을 제거하고 평군진조를 재상으로 하니,
그 아들을 죽인 대반금촌련大伴金寸連은 숨어지내야 했다.
현종천황의 아들 추촌麁寸은 고구려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대반금촌련이 평군진조를 죽였다.
그리고 10살의 어린 추촌麁寸을 천황으로 세우니 무열천황武烈天皇(489~506)이다.
이때
인현천황은 연금되었거나 중병에 들었다.
무열 3년 500년 11월에 백제의 의다랑意多郞이 죽으므로 고전高田에 묘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의다랑은 바로 인현천황의 이름인 의기명意祁命과 관련되며 그의 자字가 도랑島郞이었다.
즉 의다랑意多郞은 모도대왕이었던 인현천황이다. 그의 손자는 의다意多의 반대말인 말다末多이다.
모도대왕의 손자인 백제 모대대왕은 이듬해 501년 12월에 죽었다.
무열천황은 오토하스세와카사자키천황小泊瀨稚鷦鷯天皇이라고도 하였는데
하스세泊瀨가 윤공, 웅략의 전유물로서 그 역시 고구려 피가 섞인 것을 나타낸다.
그의 다른 이름인 추촌麁寸은 “우에끼”로 읽어서, 상성上城을 의미하고 이는 웅략천황이 은퇴하여 죽은
미에현三重縣의 성 이름이다.
또, 무열천황이 수파읍水派邑에 쌓은 상성上城도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미에현에 쌓은 것이다.
[고사기]에서는 현종천황 즉위 전에 현종천황이 죽이는 평군지비平群志毗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무열천황 즉위 전에 나온다.
이는 현종천황과 무열천황이 난파즉어녀설화(=난파소야왕)에 나오는 못된 부자父子라는 확실한 증거다.
무령대왕은
고구려 피가 섞인 무열천황의 폐위를 요구하고 마나麻那
왕자를 일본에 보냈는데 그는 모대대왕
牟大大王(재위 488~501)의 동생으로 고려된다. [삼국사기]에서 모대를 마모摩牟라고도 기록했다.
그러나 대반금촌련大伴金寸連은 마나를 몇년 동안 억류하였다.
504년
무령대왕은 동생인 사아왕斯我王(466~535)과
백제 군대를 함께 보내어 일본 큐슈九州
정벌을
시작하였다. 사아왕이 바로 안한천황安閑天皇이 되었다. 그는 백제 군대로서 큐슈 임나에 상륙하였던 것이다.
사아왕은 법사군法師君을 낳았고 그가 훗날 왜군倭君의 선조가 되었다고 하는데,
왜군은 곧 왜왕倭王을 왜곡한 것이다. 큐슈의 왜국을 가리킨다.
대반금촌대련大伴金寸大連은 백제 침공을 당하여 일단 고구려 피가 섞인 무열천황을 죽였다.
그리고 계체천황繼體天皇을 새 천황으로 끌어들였다.
계체천황은 개로대왕이 미야쯔성宮津城으로부터 후쿠이현福井縣 동북의 모인국毛人國 55국을 정벌할 때에
진부인을 취해 낳았던 아들이라서 무령대왕에게는 서형庶兄이었다.
대반금촌대련은 백제 모도대왕이었던 인현천황의 딸인 수백향황녀手白香皇女(488~526)를 짝지어서
계체천황의 황후로 세웠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 여덟 명의 비妃를 들여서 팔도八島 결혼동맹으로 백제에 맞섰다.
백제 무령대왕은 피붙이인 계체천황을 향한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일찍이 고구려 윤공천황이 점령했다가 그 세력이 많이 남아있는 큐슈 임나를 평정하기 시작하였다.
509년,
백제 사아왕은 일본 큐슈 진출의 첫 사업으로 큐슈 임나의 현읍縣邑에
있는 백제인 후손을 찾아서
호적 정리를 하였다. 큐슈 임나의 백성이 백제의 백성으로 소속을 바꾸는 것이다.
512년, 백제는 큐슈 임나의 상치리上哆唎, 하치리下哆唎, 사타娑陀, 모루牟婁 4현을 차지하였다.
상치리上哆唎는 파자破字하면 상구다리上口多唎니 구마모토熊本市 동북방 구루메시久留米市 일대다.
하치리는 역시 하구다리로서 옛 안라국이 있던 곳으로서 구마모토다.
하치리가 구마모토인 것은 [일본서기/웅략천황기]에서 구마나리熊川를 임나국 하치호리현下哆呼唎縣의
별읍別邑이라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이 구마나리熊川는 구마모토熊本이며 동시에 하치호리현下哆呼唎縣, 즉 하구다라였다.
본래
다라국 중심인 구루메시久留米市가
고구려 고우라산高良山
고모라高牟禮가
되었는데 다시 고구려
이름을 빼고 옛이름 다라국으로 돌아와서 구다라가 된 것이다.
그런데 구다라를 감추기 위해서 구다口多를 합자하여 치哆로 위장한 것이다.
지금도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큐슈의 백제 땅이름 구다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타娑陀는 가고시마鹿兒島 남단의 사다佐多곶과 관련하여 가고시마로 추정된다.
모루현은 지금의 모로군諸縣郡의 위치다. 미야자와현宮岐縣이다.
제諸를 모로로 읽는데 우리말 “모두”의 고어다.
즉, 백제 무령대왕 때에 동생인 사아왕자는 규수 중부와 남부를 점령한 것이다.
이때 백제의 구다리국수哆唎國守로 임명된 수적신압산穗積臣押山은 계체천황이 있는 대화에 사자로 가서
백제랑 싸워 지킬 수 없으니 그냥 주어서 백제와 큐슈를 합병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고,
대화의 대반대련금촌은 큐슈에 사신을 보내려했지만 죽을까봐 아무도 가지 못했다.
513년, 백제는 대마도 남도의 반파국伴跛國이 점령한 대마도 북도인 기문己汶을 내놓으라고 대화조정에
요구하였다. 반파국은 옛 불합국不合國, 즉 불이합도不二合島인 대마도다.
하나지만 둘로 갈려져 합치지 못한 섬이 대마도인데 그 남쪽을 당시 반파국이라 한 것이다.
계체천황은
백제 큐슈왕인 사아왕斯我王에게
인현천황의 딸 춘일황녀를 보내서 달랬다.
사아왕은 시를 지어서 일본 팔도八島를 얻지못하고 고작 여자를 받았다고 한탄하였다.
513년 12월, 계체천황은 사아왕斯我王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는 다음대 천황으로 선언한 것이다.
당시 계체천황은 사아왕을 마로고麻呂古라고 불렀는데,
마로麻呂는 환丸이니, 안한천황의 “한”을 의미한 것이고, 마로고麻呂古는 큰 왕이라는 뜻이다.
안한천황을 한왕漢王이라고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514년,
계체천황은 백제장수 저미문귀姐彌文貴와
사라斯羅의
문득지, 안라安羅의
신기계, 반파의 기전계
등의 성주를 대화조정에 불러서 북대마도의 기문己汶과 체사滯沙를 백제에 내주도록 하였다.
사라斯羅는 지금의 사와라인 큐슈 후쿠오카시福岡市 사와라구早良區 김무성金武城이다.
안라安羅는 이미 백제 사아왕이 점령한 구마모토다.
기문己汶은
임나의 동북에 있고 삼기문三己汶이
있다고 숭신천황 때에 대마도주인 임나도주가 말했다.
[신찬성씨록]任那國奏曰。臣國 東北 有 三己汶地。上己汶。中己汶。下己汶。地方三百里。土地人民亦富饒
지방 300리 크기의 기문은 대마도 북도를 말한다. 좌호천, 인전천, 인위천이 흐르는 3마을이 3기문으로
고려된다. 체사성은 대마도 남도의 성이다.
기문 섬을 백제가 가지니, 반파국은 다시 기문을 돌려달라고 대화조정에 요구한다.
그러다가 반파국伴跛國은 대마도 남도에서 대사성帶沙城(=滯沙) 등을 정비하고, 신라를 약탈한다.
이 신라는 큐슈 서북의 신라인 신량新良 사와라 땅에 해당한다.
이때 본토 신라는 512년에 울릉도를 점령하고 514년에 아나가야阿那伽倻에 소경小京을 설치하는 등,
강군으로서 국경을 확대 중이라서, 대마도 반쪽 반파국에 본토를 공격당할 수준이 아니다.
515년, 구주백제의 사아왕이 보낸 장수 물부련物部連이 사쓰도沙都島를 쳤는데 사쓰천佐須川이 중심에
흐르는 대마도 남도 반파국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파국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문모라汶慕羅로 물러나왔다. 문모라는 미마나, 즉 예전의 대마도
임나다. 지금 대마도 미진美津의 계지천 부근이다.
구주백제왕은 물부련을 기문(대마도 북도)에서 위로하고 귀국시켰다.
이후 523년에 무령대왕이 서거하고 성명대왕聖明大王(~554)이 즉위했다.
503년,
무령대왕 즉위 3년에 산동반도 백제땅을 잃었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고구려 문자명왕 12년, 503년에 백제의 진평군晋平郡을 없앴다고 하였다.
문자명왕은 백제의 식민지를 거의 다 빼앗아서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이 이제 고구려에 속했다고 하였다.
이때가 고구려의 최전성기다.
무령대왕은 고구려에 보복하여 506년에 대동강 건너 평양성을 공략하였으니,
당시 평양성을 쌓던 고구려인들이 도주하였다.
이는 평양성벽 각서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는 평양성을 고구려인들도 한성漢城이라 하였고 이때 한성이 (백제에) 떨어졌다고 기록했다.
그후 무령대왕은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중국에 전하였다.
520년 큐슈를 거의 병합한 백제 무령대왕은 고구려를 여러번 무찔러서 비로소 양나라와 길을 통했
으므로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고, 양나라 무제는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에 봉하였다.
[梁書] 普通二年,王余隆始復遣使奉表,稱 累破句驪,今始與通好,而百濟更為強國 其年,高祖詔曰...
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百濟王
무령대왕릉은
현재 공주에서 발굴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에도 무령대왕의 고분이 있을 것이다.
흠명천황이 바로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직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대형 전방후원고분들이 일본에 많이 남아있다.
(주)
489년, 고구려는 다시 신라를 침범하여 과현戈峴을 지나 호산성狐山城을 함락시켰다.
호산성은 호명산과 같은 곳, 제천으로 추정하나 과현을 알 수 없다.
평안도, 황해도가 백제의 땅이지만, 고구려는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영서嶺西 지방을 장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동천왕이 신라를 쳤던 것도 태백산맥 동쪽으로 내려왔던 것이었다.
492년, 동성대왕東城大王은 백제 북부에 사현성沙峴城과 이산성耳山城을 쌓았다.
당시 이산성은 청천강변인 오늘날의 영변군寧邊郡 이산耳山으로 추정된다.
사현성은 그 북쪽 운산군雲山郡의 사천沙川과 관련되는 것이다.
사천은 현재의 운산읍을 지나는데 직동토성直洞土城이 있다.
494년, 고구려군에게 신라가 살수薩水에서 패퇴하여 견아성犬牙城에서 고전하니 동성왕東城王은
백제군을 보내 고구려군을 쫓았다. 신라의 살수薩水는 강원도 영흥군의 전탄강이다.
살수에서 패하고 쫓겨간 신라군이 보전한 견아성犬牙城은 영흥군 진성봉에 있던 진술성鎭戌城이다.
술戌은 견犬을 바꾼 것이다. 북쪽에 이어지는 천앙봉天仰峰, 또 북쪽의 왕장리旺場里도 개짖는 모습을
의미한다.
495년에 고구려군이 백제 치양雉壤에 쳐들어왔을 때에는, 백제가 신라군의 도움으로 고구려군을 물리
쳤는데 수곡성은 빼앗겼다.
치양稚壤은 영흥군永興郡 서쪽 70리에 있었다는 평주진平州鎭으로서 현재 요덕군耀德郡 선흥면宣興面의
고성古城이 된다.
고구려는 백제가 신라의 견아성을 구원하자 백제의 치양성을 쳤는데, 서로 가까운 곳이다.
이때 백제를 구원한 신라장수의 이름은 덕지德智인데 그의 이름을 붙인 덕지강德池江이 고원군高原郡을
가로지른다. 즉 덕지강과 금야강 하구까지가 5세기말의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고구려가 다시 차지한 수곡성水谷城은 고구려 장곡현이 되었던 정평군定平郡 금진강 서남쪽 세류고성
細柳古城이다. 이곳에 고구려는 석성을 쌓았다.
따라서 동해안에서는 금진강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국경이 형성되었다.
금진강은 고구려, 덕지강은 신라, 백제는 요덕군까지이다.
그리고 무령대왕은 청령천황 이래로 청진, 함흥에 있었다.
(주) 문자명왕 비문
고추대가 조다가 병신년(456)에...(문자왕 출생 기록) 비를 세운다. 비문에...
하늘을 움직였다. 왕은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정동대장군 영호동이교위중랑장 요동군개국공에 배하였다.
신라인과 패수에서 싸워 견아성을 함락하여 보전하고, 의풍성을 세워 (고구려) 국민은 영원히 감사하고
(고구려) 식민도 잊을 수 없다. 나라를 아끼고 안정시키고 선전하였다. 비에 새겨 묘앞에 세운다.
古鄒大加 助多時 在丙申年 [][][][][][]造立碑 玄者 文曰 天動 王恩排僞 使持節都督 遼海諸軍事
征東大將軍 領護東夷中郞將 遼東郡 開國公 與羅人 戰於浿水 陷保犬牙城 [][]宜豊役 (個)恩國民永恩
奴客不忘 生世愛(授)國安 生善战 碑銘於墓前
(주)
동성왕東城王 말기에 압록강 북쪽까지 백제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즉 한반도의 서해안은 압록강까지 백제에게 수복되었다.
496년, 고구려는 다시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이하泥河에서 패퇴하였다.
여기서 이하는 평주진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문자명왕비문]에서 패수(浿水) 견아성(犬牙城)이라고도 하였다.
동해안의 살수와 패수의 하구가 견술성 아래로서 이웃한 것이다.
그러나 497년에 고구려는 다시 우산성을 빼앗았다.
신라 우산성이나 백제 우곡성은 견술성의 서남쪽에 있었다.
502년, 백제 무령대왕武寧大王은 고구려를 침범하였다. 503년에도 백제 무령대왕武寧大王은 금진강
서남의 수곡성水谷城을 다시 회복하려고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506년, 고구려는 백제를 치려다가 실패하였고, 507년에 고구려 문자명왕은 다시 한성漢城을 치려고
횡악橫岳에 주둔하였는데 백제 무령대왕은 횡악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여기서 백제의 한성은 평산 한성이고, 횡악橫岳은 신평군 달보산성으로 추정된다.
이때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이 기록된 것이 <평양성벽 각서>이다.
평양성벽 각서는 일부 남아 있고 일부는 기록만 전하고 있다. 평양성벽 각서중 4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병술년 12월 중에 한성漢城이 함락되어 후부지명 소형관직 문달이름은 여기서 공사를 중단하고 서북쪽
으로 물을 건너갔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 後部 小兄 文達 節 自此 西北行 涉之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구려 남평양성이 고구려 한성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평양성벽 각서는 제1석부터 5석까지 있는데 제 4석은 내성의 대동강 강가 성벽 장경문長慶門에서 발견
되었다.
이곳에서 성벽은 대동강을 따라서 동북과 서남 방향으로 이어졌고 서북쪽으로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
한성은 바로 비문이 발견된 오늘날의 평양성에 대한 당시의 고구려 이름이고 백제 한산성이기도 한 것이다.
다른 네 개의 각서와 마찬가지로, 공사의 시작이나 끝은 정확한 날자가 기록되어야 하지만, 병술년 12월에
한성이 함락되어 공사를 중단하고 황급히 서북으로 도망가다 보니,
그 뒷날에 공사가 중단된 날을 알 수도 없고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비석이 발견된 곳에서 서북으로는 성벽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서북으로 도망간 것이다.
즉 이 기록은 공사를 시작하거나 마친 기사가 아니라 일단 내성을 쌓다가 중단하였던 사실에 대한
뒷날의 기록이다.
백제가
평양의 한산성을 되찾은 것은 5회로 추정된다.
1. 아신대왕阿莘王이 광개토왕에게 빼앗기고, 일본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회복하였으나
광개토왕이 다시 뺏았다.
2. 비유왕毗有王이 말년, 454년 이전에 수복하였으나 475년에 개로대왕이 장수왕에게 다시 빼앗겼다.
3. 동성왕이 484년에 왜국의 지원으로 되찾았으나 502,3년경에 잃었다.
4. 무령대왕武寧大王이 회복하여 동이강국東夷强國이 되었으나 529년, 성명대왕聖明大王 7년에 빼앗겼다.
5. [일본서기]에서 성명대왕聖明大王이 550년경에 평양平壤=南平壤과 한성漢城=平山 漢城을 되찾았으나
한성은 신라에게 내주었다고 하였다. 평양은 고구려에게 내주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거칠부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평양성벽각서>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병술년은 506년이다.
즉, 506년에 무령대왕은 평양 한산성을 수복하였고 다음해 문자명왕의 반격이 있었으나 무령대왕이 이를
물리친 다음에는 무령대왕이 압록강 이북까지 다시 백제 영토로 확보하였다.
512년 고구려군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쳐서 약탈하였는데, 무령대왕武寧大王은 고구려군을
위천葦川에서 무찔렀다. 위천葦川은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남쪽 가물천可勿川(=동로강東路江)으로
추정한다. 가불성이 변하여 가물성, 가물천이 된 것으로 추정한다.
원산성圓山城은 선천군 대원산大圓山의 고성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본래 아단성이 있던 곳인데 개로대왕이 끌려가 죽은 곳이라 원산성이 더 커진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무령대왕武寧大王은 고구려를 여러번 물리쳐서 다시 백제가 동이강국東夷强國이
되었다고 대내외적으로 호언하였고 중국에서는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영동대장군嶺東大將軍 등으로
승진시켜 책봉하였다.
무령대왕이 고구려에 여러번 이겨냈으므로 백제 국경은 압록강 북쪽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에서 무령대왕武寧大王 다음 대인 성명대왕聖明大王 때의 기사에서 밝혀진다.
523년, 성명대왕聖明大王 원년에 고구려 군사가 다시 패수에 쳐내려왔으나 백제 장군 지충志忠이 나가서
막아 싸웠다. 패수는 동해안 금야강이다.
529년에 다시 고구려의 안장왕安臧王이 백제의 혈성穴城을 함락시키고 내려왔다.
안장왕은 백제 장군 연모燕謨가 보기병 3만으로 지키던 오곡五谷(황해도 서흥군 瑞興郡)을 마저 함락시켰다.
그런데 이 혈성穴城은 [삼국사기지리지]에 실린 당나라 장군 이세적李世勣이 당나라 고종에게 올린
표문表文에서 압록강 이북의 성으로 명시되어 있다.
혈성은 요동반도 수암성岫巖城으로 추정된다. 무령대왕武寧大王은 압록강 북쪽 성까지도 일부 수복한 것이다.
오곡五谷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황해도 서흥군이다.
서흥군이 함락되면 백제의 황해도 땅은 멸악산맥 서쪽이 모두 고구려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칠 때에 신라군이 거쳐간 곳도 오곡군이다.
여기서 백제의 혈성穴城을 훗날 혈구穴口라고 부르던 강화도로 생각하면 고구려군이 강화도에서 황해도
오곡군으로 북진하여 쳐들어온 것으로 되기 때문에 어불성설이다.
북한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해석하여 한강 남쪽의 백제군을 일부러 황해도 중심까지 유인하여 격멸했다고
해석한다.
아무튼 이것도 백제군의 수비가 아니라 공격으로 해석되는 것인데
[삼국사기]는 오로지 백제가 수비를 한 것이고 고구려가 공격해 내려온 것이다.
따라서 혈성은 요동반도 수암岫巖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백제 성명대왕聖明大王 때에 고구려는, 한번은 패수 동해안에 내려와서 싸우고,
또 한번은 압록강 이북에서 혈성을 부수고 내려온 황해도 중간에서 전투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제대로 해석하면 성명대왕聖明大王 이전에, 백제 무령대왕武寧大王은 과연 백제가 다시 강국이라
불릴 수 있도록 한반도 서쪽 평야의 대부분을 수복하여 차지하고 다시 중국과 교류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도 압록강 이북의 혈성穴城; 今 岫巖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무령대왕의 죽음과 때맞추어 기회를 잡고 고구려는 다시 남진했던 것이다.
21장. 무령대왕 동생 안한천황과 선화천황 武寧大王 王弟 安閑天皇과 宣化天皇
安閑天皇 [記]廣國押建金日命 /[紀]廣國押武金天皇
宣化天皇 [記]建小廣國押楯命 /[紀]武小廣國押盾天皇
무령대왕이 서거하자 계체천황은 반기를 들어서 먼저 가야의 거제도를 치고 다시 큐슈를 쳤다. 계체 천황의 백제 큐슈 공격에 실패하니 백제는 거제도를 내놓으라고 했고, 백제군은 거제도를 직접 공격을 하다가 공략에 실패하자 일본 대화로 큐슈의 군대를 보내 점령한다. 구주백제왕이던 무령대왕의 동생 사아왕이 대화의 안한천황이 되고, 그 동생 사비왕이 구주백제왕으로 임명되어온다. 안한천황이 535년에 서거하니 사비왕이 대화로 가서 선화천황이 되고 무령대왕의 아들인 사귀왕이 큐슈로 가서 축자 광정성에서 구주백제왕이 된다. 사귀왕은 후일의 흠명천황이다. |
527년, 계체천황 21년에 백제 무령대왕이 서거한 것을 이용하여 계체천황은 대화大和의 군력을 모아서
백제에 맞서기 시작했다.
계체천황은 먼저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에게 6만의 군대를 주어 남가라南加羅(=김해金海)와 녹기탄
彔己吞(거제도巨濟島)을 쳐서 일본 임나에 합병할 생각을 하였다.
근강모야신은 거제도로 건너갔다.
그러나 큐슈 북부의 축자국筑紫國(후쿠오카福岡)의 수장인 반정磐井이 근강모야신을 돕지 않고 중간
에서 훼방을 하였다.
그림 2) 무령대왕이 점령한 4현과 흠명천황이 통일한 구주백제
화국火國(나가사키長埼縣), 풍국豊國(오오이타현大分縣)이 축자와 연합하였으니 큐슈 북부는 계체천황과
다 반대편에 선 것이다.
위의 세 나라는 백제가 지배하는 큐슈 중남부 안라安羅의 이웃으로서, 백제의 눈치를 본 것이다.
계체천황은
축자의 반정磐井을
치도록 물부추록화대련物部麁鹿火大連에게
부월斧鉞을
잡아주며 명령
하였다. 축자국을 이기면 축자이서筑紫以西, 즉 큐슈를 그에게 다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즉 축자 아래의 구주백제까지 없애주기를 바란 것이다.
축자의 반정磐井(475~528)은 528년에 가까스로 토벌당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물부추록화대련物部麁鹿火大連이 축자를 지배한 기록이 없으니, 반정은 죽었어도 그 땅이 왜국
땅이 되지는 않았고 다음 기록으로 보면 백제 땅이 되었다.
오히려 529년 구주백제의 안한천황은 계체천황에게 근강모야신이 이미 건너가 차지하고 있는 가라加羅의
다사진多沙鎭을 요구하였다.
이는 거제도巨濟島 남단 구조라 남쪽의 다대포多大浦로 고려된다.
그 이전까지 백제는 남해도南海島의 미조면彌助面(=美佐岐)을 주요 교통로로 사용하였다.
계체천황은 굴복하여 다사진多沙鎭을 구주백제에 내준다고 약속하였다.
큐슈에서 대화조정의 원정군이 구주백제군에게 패전했던 것이다.
이때
안한천황은 큐슈의 축자에서 물부추록화대련을 물리치고, 큐슈에 광국廣國을
만들었다.
광국廣國은 축자국筑紫國(=복강현福岡縣)과 풍국豊國(=대분현大分縣), 화국火國(=장기현長崎縣)을 합친
것이다.
백제 큐슈 광국의 수도는 지금 후쿠오카福岡縣의 춘일시春日市 춘일신사春日神社 위치다.
훗날, 흠명천황의 광정궁廣庭宮과 황극천황의 미경궁味經宮이 있었던 곳으로 고려된다.
천지천황天智天皇은 장진궁長津宮으로 고쳤다.
안한천황은 이 광국廣國으로부터 다시 대외조정을 향해 역으로 진격하였다.
그동안 신라에게 압박을 받아오던 금관가야는 거제도의 근강모야신에 의지하였고 다사진을 백제에
준다는 것에 반발하였다.
근강모야신은 거제도 구사모라久斯牟羅(=구조라)에 성을 쌓고 2년 동안 머무르면서 백제에 다사진을
넘기지 않았다.
대신 신라는 대마도 임나를 공격하였다.
근강모야신은 웅천熊川(=마산馬山)에 건너가서 신라를 탓하였다.
그러자 신라 진흥왕은 장군 이사부와 군사 3000을 웅천(마산)에 보냈고, 놀란 모야신은 급히 거제도로
후퇴하였다.
금관가야는 2년 동안 거제도를 점거 당하고 도움되는 것이 없으니, 근강모야신에게 실망하여 대화조정에
근강모야신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여의치 않으니 백제와 신라의 군사를 요청하였다.
백제군이 와서 근강모야신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근강모야신이 거제도의 성을 잘 지켜서 버티어냈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본기]에 의하면 531년 3월 백제군이 안라安羅로
나아가 걸둔성乞屯城에
주둔
하였다.
取百濟本記為文.太歲辛亥三月, 進至于安羅, 營乞屯城.
[일본서기]는 乞屯을 脚下宅로 읽으라고 하였다. 각하타脚下宅는 다리하라, 혹은 아시카라로 읽어지는데
다라국의 아스카라朝倉가 된다.
큐슈 조창군朝倉郡에는 귤광정궁橘廣庭宮이 있었다. 즉, 구려橘, 고구려의 광정궁인 귤광정궁이 있었던
것이다.
안라는 큐슈안라, 즉 구주백제의 중심이며 윤공천황의 성장 중심이었다.
이제 백제군은 거제도 공격을 멈추고 대화조정을 치기 위해 바다를 건너 구마모토로 상륙하여 귤광정궁에
있었던 것이다.
함안의 아나가야에는 신라의 소경이 설치되어 있었고, 위 기록은 한반도 안라가 아니니,
걸둔성이 조창군朝倉郡이기 때문이다.
백제
군대가 건너왔다는 소문만으로, 이때 531년 2월 계체천황은 자신의 태자와 황자 모두가 한꺼번에
살해당했다.
이는 [일본서기]에 숨어있는 아래의 한 줄의 기록이다.
“또 듣기에 일본 천황과 태자, 황자 등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훗날 깊이 따져 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又聞, 日本天皇及太子、皇子,俱崩薨. 後勘校子 知之也”
이는
구주백제의 안한천황이 531년, 새로 큐슈에 온 백제군을 이끌고 대화조정을 공격하려고 하니,
대화조정이 먼저 선수를 쳐서 계체천황을 죽이고 환영한 것이고 안한천황의 군대는 저항없이 대화조정에
입성하였다.
이후에 대반금촌대련大伴金寸大連이 살아남는다. 계체천황 일가를 살해한 것은 대화의 성 안에서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된다.
근강모야신은 구주백제 안한천황의 공격을 받는 계체천황을 구출하러 거제도에서 철수하였는데,
도중에 임나에서 죽었다.
개로대왕의 서장자인 계체천황繼體天皇(450~531)은 백제에 대항하여 옹립되고,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근강모야신을 출병시켜서 도전하였으나 끝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계체천황의 능은 오사카에 있고 226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계체천황의
뒤를 이어서 즉위한 왜왕은 안한천황安閑天皇(466~532)이니
백제 무령대왕의 동생인 사아왕斯我王이다.
그의 시호는 광국압건금천황廣國押建金日命이다. 그의 시호에 들어간 건금建金은 금金을 건설했다는
것인데, 바로 지금의 큐슈 구마모토성熊本城을 되찾은 것이다.
이곳은 고구려 윤공천황 이래로 안라일본부가 있던 곳이다.
당시 백제 수도 금강의 웅진성熊津城에 금강이 흐르는데 금강이 본래 곰강이 변한 말이다.
즉 금金은 곰의 차자이다.
사아왕은 큐슈 중심부의 안라국을 되찾아서 곰한성熊本城을 세우고 백제 분국으로 만든 것이다.
웅본 쿠마모토의 배경이 바로 금봉산金峰山, 곰산이다.
안한천황安閑天皇이라는 시호도 안라왕, 아나왕이라는 뜻이다. 마침내 일본 천황까지 되었다.
그러나 안한천황은 자식이 없었고, 이미 노쇠하였다.
사아왕 안한천황이 대화의 천황이 되니, 구주백제의 왕으로는 백제로부터 선화천황宣化天皇(467~539)이
옮겨갔다. 그도 역시 무령대왕의 동생이었다.
그의 시호는 무소광국압순천황武小廣國押盾天皇, 혹은 건소광국압순천황建小廣國押盾天皇이라 했는데
순盾은 다데라고 읽으니 다라국의 왕이었던 것이다.
소광국小廣國은 귤광정궁橘廣庭宮으로 고려된다. 따라서 531년에 백제군을 끌고서 큐슈로 온 장수가
선화천황이다.
즉 대화조정에는 안한천황이 서고, 큐슈 다라국 귤광정궁에 있던 선화천황은 구주백제왕으로 있었다.
5세기부터 백제 지도는 구주백제 영토를 포함하여 다시 그려져야만 한다.
[신찬성씨록]에서 고시촌주는 백제국 호왕의 후예라고 하였다.
古市村主 村主 出自百濟國虎王也
고시촌에 안한천황 고분이 있었다고 전하여 왔으니 안한천황이 백제 호왕虎王이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선화천황宣化天皇(467~539)은
동성대왕이었던 인현천황의 딸을 정비로 내세웠다.
그는 일본의 각 항구에 창고를 지어서 곡식을 저장하였다.
532년에
신라가 임나의 금관가야를 멸망시켰으므로, 임나를 재건하기 위한 시도로서 축자에 거점을 마련
했다. 바로 후쿠오카의 춘일시春日市다.
무령대왕의 아들 사귀왕斯貴王이 535년 선화천황이 대화의 천황으로 떠나간 뒤에 구주백제왕이 되었다.
그는 후쿠오카福岡縣의 춘일시春日市의 춘기광정궁春岐廣庭宮에서 큐슈를 다스리다가 선화천황의 서거
후에 대화로 가서 흠명천황欽明天皇으로 즉위했다.
그가 후쿠오카 춘기광정궁에 있었던 사실 때문에 그의 시호가 아마노쿠니오시하루키비리이하
天國排-春岐廣庭命이 되었다. 춘기광정국은 나중에 춘일신사春日神社가 된다.
무령대왕 때에 큐슈 임나 중남부가 백제로 병합되고,
성명대왕 때에 안한천황으로 인하여 큐슈 임나 전체가 백제 땅이 되고, 일본도 백제계로 다시 통일된
것이다.
나라현奈良縣
회외사檜隈寺에
선화천황의 궁터와 사당이 있다.
선화천황의 후예인 화수왕火穗王은 시히라군志比陀郡의 선조였다.
선화천황의 이름이 우리말로 사비왕斯比王이었다는 근거가 된다.
사아왕斯我王은 자손이 없어서 이름을 남기기 위해 교토 동북방의 사가현滋賀縣을 사아현斯我縣으로
불렀는지 시가현滋賀縣의 옛이름 중에 사아현斯我縣이 들어있다.
22장. 무령대왕 왕자 흠명천황 武寧大王 王子 欽明天皇
[記] 天國押波流岐廣庭命 / [紀] 天國排開廣庭天皇
백제에서 무령대왕의 아들인 사귀왕이 535년, 큐슈의 축자 광국에서 구주백제왕이 되고 539년에 혼슈의 대화조정 천황인 흠명천황이 되었다. 흠명천황은 신라에 복속당한 가야를 다시 백제에 속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죽은 계체천황의 구신들이 가야에서 훼방하였다. 백제 성명대왕은 신라와 동맹하여 신라군과 왜군으로 함께 고구려를 공략하여 평양성을 탈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에게 배신을 당하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
무열천황
때에 백제 무령대왕이 보낸 사아왕斯我君이
왔는데 그의 아들이 법사왕法師君이며
왜왕倭君의
선조라고 하였다.
법사군은 법사왕, 왜군은 왜왕의 낮춤말이다.
여기서 왜倭는 구마모토熊本에서 강을 따라올라가서 큐슈를 횡단하여 산맥을 넘어서가면 교토군京都郡이
된다. 교토군 남쪽은 야마구니가와山國川를 따라내려간 나가쯔시中津市가 된다.
600년에, 일본이 수나라와 외교할 때에는, 이 나가쯔시中津市 구주백제왕의 수도 야마타이野馬臺에서
수나라 사자와 접견이 이루어졌다.
즉, 의자대왕이 구주백제에 있을 때의 수도였고 왜국이라고도 한 것이다. 뒤에 한자로는 산국山國으로
바뀐 것인데, 읽기는 야마山로서 야마대국이나 같다. 야마천의 계곡 이름도 야마계耶馬谿다.
나가쯔시에서는 바로 위에 금천今川(곰천)을 따라서 행교시行橋市가 있고,
그중 어소정御所町이 전방후원분이 세워졌던 주요한 고대 고분 도시다.
나가쯔시 남쪽은 중진평야다.
그 아래에 우좌시宇佐市는 구주백제의 왕으로서 민달천황이 있던 곳이다.
큐슈 동북부인 오오이타현大分縣 우좌시宇佐市 팔번신궁八幡神宮의 기록에 흠명천황 때에 처음으로
광번廣幡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흠명천황이 큐슈 축자현의 광국에서 이곳 오오이타현에도 백제국 광번기를 꽂은 것이다.
그리하여 흠명천황의 후예가 이곳 왜군의 선조가 된 것이다.
이웃한 교토군京都郡 행교시行橋市 부근의 몇 곳에 전방후원고분과 성터, 사원의 유적들이 많고,
이곳에서 일본 천황으로 옮겨간 천황들의 이름자에 그 지명이 인용되어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현재 왜여왕 비미호 시대의 유적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 본토인 대화조정의 천황과, 백제 영토인 구주백제 광국왕廣國王의 역학관계를 추정해보면,
구주백제가 일본의 거의 모든 병력과 병마를 가지고 있었고,
이 구주백제의 왕이자 군사령관은 백제의 태자거나 왕자였다.
구주백제 광국왕은 장차 백제 대왕이 되던지 일본 천황이 된다.
구주백제의 왕과 일본천황의 임명권을 백제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6세기와 7세기 일본 대화조정은 천황직이 종신직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세습권이 없고,
독자 외교권도 없고, 오로지 백제에 조세만 거두어 받치는 백제의 위성국가였다.
단적인 예가 서기 600년 수나라와 일본의 외교문서인데, 이 당시 일본에는 추고천황과 성덕태자가 존재
하고 있었지만, 수나라와 직접 외교한 일본 왜왕 이름은 백제 의자왕자로서 훗날의 서명천황이었으니,
그는 바로 당시 구주백제왕이었으면서 대외적으로 왜왕이라고 칭한 것이다.
구주백제 성립 이후로 일본 대화조정은 구주백제로부터 독립하고 싶었고, 일본 천황의 독립운동은 6세기
초부터 7세기까지 근 200년간 계속된다.
또한 백제가 660년에 본토에서 망한 뒤에도, 구주백제왕으로 선광善廣이라는 의자대왕의 아들이 차례로
이어받았다.
안한천황의 아들로 조작된 무령대왕의 아들 백제 법사왕의 법사法師가 바로 계체천황의 아들로 조작된
흠명천황欽明天皇(510~571)의 이름인 하루끼波流岐다. 본래 춘기春岐에서 유래하여 춘일시春日市가
되었기도 하지만,
天國押-波流岐-廣庭命
이는 [고사기]에서 그렇고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에서는 하류기波留岐,
[원흥사연기元興寺緣記]에서는 하라끼波羅岐였으니 대동소이하다.
현재 한자로는 개開 또는 춘기春岐로 해석해왔으나. 가운데 “류”나 “라”는 어조사였고 앞과 뒤만 의미있다.
일본 최초 사찰이라는 [원흥사연기]에는 춘기광정天國案-春岐-廣庭-天皇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불법을 뜻하는 법法이
하波에
대응하고, 사師가
기岐에
대응한다.
즉 하류기春岐는 법사法師에 해당하고, 광정廣庭은 광법廣法일 수도 있다. 법사와 광법은 불교용어이다.
흠명천황을
가외천황加畏天皇이라고
[일본서기]에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는 가사袈裟를
입은 천황,
즉 가의加衣 천황을 조잡하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동시대에 양나라 무제武帝(재위 502~549)가 가사袈裟를 입고 나라를 다스린 기록이 있는데
이런 유행을 따른 것이다.
일본에
불법이 최초로 전래된 것은, 큰 부처, 혹은 큰 보시意富富杵(=大布施)라고
이름했던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 즉 전지대왕腆支大王이 도래한 때이다.
큰 보시富杵를 한 것인지, 큰 부처意富-富杵라고 불린 것인지 불명하다.
이때 만들어진 치은사置恩寺가 일본 최초 사찰이다. 이때 만들어진 사찰인 것은 전지대왕의 후예의
성씨가 포시씨布施氏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씨족사氏族寺로서 전승되었지만 포시산布施山 치은사置恩寺가 일본 최초 사찰이다.
포시씨布施氏가 부지富杵에서 유래한 것이다. 포시는 재물을 받친다는 의미의 불교 용어다.
전지대왕의 아들 이름에 사용된 불교용어가 불교의 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흠명천황
때에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와 불상이 전래되었다는 것은 큐슈와 무관하다.
큐슈에는 백제군이 진주하면서 이미 불교가 들어갔고 일본 본토에는 흠명천황 때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흠명천황은 이미 백제에서 불교를 접하고 큐슈로 건너갔고 다시 대화로 들어간 것이다.
이름에 오시(押 혹은 忍)가 들어간 천황은 도래인이다.
오시호미忍穗耳, 효안천황倭帶日子國押人命과 그의 형인 오시타라시히코押帶日子命,
그의 부인 오시히메押媛, 그의 아들 히코후쯔오시노마코토比古布都押之信命,
이치베노오시와市邊忍齒王, 윤공황후이자 아신대왕의 딸인 오시카노오호나가쓰히메忍坂大中津比賣命가
있었다.
흠명천황은 그 이름에서 천국天國에서 배排하였으니, 백제에서 왜왕으로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천국압天國押, 혹은 천국배天國排이다.
흠명천황이 백제에서 일본에 올 때 본이름은 사귀왕斯貴王이었다.
그의 대화조정 궁이름이 사귀시마斯貴嶋(법왕제설), 사귀시마斯歸嶋(원흥사연기), 시키師木宮(고사기),
磯城嶋(일본서기)로 각각 기록되었은데 이는 그가 백제 사귀왕斯貴王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무령대왕 사마왕斯麻王, 안한천황 사아왕 斯我王, 선화천황 사비왕斯比王 흠명천황 사귀왕斯貴王,
이렇게 이어진 것이다.
흠명천황은
선화천황의 서거 후에 일본 천황이 되어서 사귀시마斯貴島에
고마궁金刺宮이라는
대궁을
지었다. 金刺宮은 가나사시로 읽지 말고 백제 도성 이름인 고마성으로 읽어야 한다.
사아왕은 안한천황인데 그는 자식을 못낳았다.
따라서 흠명천황은 사아왕의 아들이 아니라 무령대왕의 아들이고, 성명대왕의 동생인 것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곤지대왕인 청령천황도 자식을 못낳았는데 말다왕,
즉 모도대왕이나 무령대왕을 그의 자식이라고 기록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흠명천황을 굳이 사아왕의 아들이 아니라 무령대왕의 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흠명천황은 선화천황의 딸 이시히메石姬를 황후로 세우고 그 동생을 또한 후비로 세웠다.
540년
흠명천황 2년, 아라安羅의
차한지次旱岐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과 졸마卒麻의 한지旱岐과 산반해散半奚의 한지旱岐의 아들과
다라多羅의 하한지下旱岐 이타夷他와, 사이기斯二岐의 한지旱岐의 아들, 자타子他의 한지旱岐 등이
임나의 일본부 길비신日本府吉備臣과 백제에 함께 가서 성명대왕聖明大王(~554)의 칙서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대왕이 임나의 한지旱岐들에게 말했다.
"옛적에 우리 선조 초고대왕肖古大王, 귀수대왕貴首大王의 치세에 아라安羅, 가라加羅, 탁순卓淳의
한지旱岐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고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었다.
자제子弟의 나라가 되어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중략)..록기탄㖨己呑(거제도巨濟島)은 가라加羅와
신라의 경계선에 있어 해마다의 침공으로 패배하였다.
임나任那(구주백제)도 구원해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남가라南加羅(금관가야金官伽倻)는 땅이 협소하여 졸지에 방비할 길이 없고 의탁할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탁순卓淳(=창원昌原)은 상하 둘로 갈라져 있었다.
군주는 스스로 복종하려는 생각이 있어 신라에 내응하였다.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이제 힘을 합하여 임나를 반드시 일으키자."고 하였다.
흠명천황이 성명천황으로부터 교지를 받은 것이니 성명천황의 동생인 것이 확연하다.
그런데
함안咸安의
안라安羅가
이미 신라와 통하였다. 안라는 528년 지증왕 때에 신라가 소경을 두었었다.
성명대왕은 세 사람의 사자를 보내 백제로 귀화하라고 말을 하였다.
이때 안라에는 일본부집사日本府執事와 임나부집사任那府執事가 있었는데 이 둘은 백제에 반격한
계체천황의 유신遺神으로 고려되며 신라와 통하였고 백제나 일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뒤에 위가가군爲哥可君(=현종천황顯宗天皇)이 그들 때문에 쫓겨났다고도 언급하였다.
또한 근강모야신이 임나(=대마도)에서 죽었는데,
이때 임나는 현종천황의 잔류 세력인 좌로마도佐魯麻都 등이 좌지우지하였고, 그는 신라의 관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난데없는 한반도의 임나일본부는 바로 백제에 반기를 들다가 일본 천황 자리에서 쫓겨난
현종천황과 계체천황의 유신들이 가야에 건너와서 웅크리고 발악한 기록이다.
542년, 흠명천황은 전라도의 백제군 수령들에게 임나를 빨리 도모하도록 청하였는데,
백제 성명대왕은 일본의 군사 삼천으로 낙동강 서쪽을 치고 6성을 쌓으라고 권하였다.
이해 성명대왕은 고구려와 힘겹게 전투 중이었다.
523년 백제 무령대왕武寧大王이 죽자마자 고구려가 침략해왔다.
성명대왕 원년에 고구려 군사가 다시 패수에 쳐내려왔으나 백제 장군 지충志忠이 나가서 막아 싸웠다.
패수는 동해안의 패수로서 금야강이다.
529년에 다시 고구려의 안장대왕安臧大王이 백제의 혈성穴城(=단동시丹東市 수암현성岫巖縣城)을
함락시키고 내려왔다.
안장왕은 백제 장군 연모燕謨가 보기병 3만으로 지키던 오곡五谷(=황해도 서흥군瑞興郡)을 마저 함락
시켰다.
따라서 성명대왕은 즉위 7년만에 무령대왕이 회복한 평안도, 황해도, 함경북도 강토를 다시 잃어버렸다.
압록강은 물론이고 황해도 오곡군五谷郡을 돌파당하여 다시 대동강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나서,
성명대왕은 충청남도 부여의 사비성泗沘城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칭하였는데
538년의 일이었다.
예성강 북쪽의 부여면夫餘面은 중기 한성 백제가 스스로 부여라고 칭하였음을 의미한다.
고구려 사비성도 본래 만주의 백제가 요양시에 건설한 사비성이었다.
성명대왕과 흠명천황이 서로 미루다가 가야 정벌의 기회를 놓치고, 백제와 신라는 불안한 동맹이 되었다.
549년, 백제는 신라의 거칠부居柒夫가 죽령 이북의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백제는 한성을 되찾고 대동강의
평양을 뺏어서 백제고지를 되찾았다.
같은 해에 백제 성명대왕이 일시적으로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친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당시 성명대왕은 6군郡을 수복하였는데 평안남도를 포함한다. 여기서 평양은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
으로서 고구려가 짓다가 무령대왕武寧大王에게 함락당했던 오늘날의 평양성이고 한성은 황해도의 평산
한성이다.
그러나 백제는 다시 고구려에 쫓겨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고 되어 있다.
고구려군은
다시 백제의 평산 한성을 차지하였다. 550년,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道薩城(평산한성
平山 漢城,
예성강 서쪽) 등을 쳐서 빼앗았지만,
고구려는 백제 금현성金峴城(금천군衿川郡, 예성강 동쪽)을 함락시켜 반격하였다.
도살성은 장수왕이 백제 왕자, 왕후 등을 도살하였던 평산 한성인 것이다.
이때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타서, 어부지리를 노린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기습
공격으로 두 성을 모두 빼앗아 신라가 차지하였다.
[일본서기]에서는 신라가 백제의 한성을 쳐서 뺏으니 신라의 우두방이 되었는데 우잠군이라 하였고
이는 예성강의 우봉면牛峰面이다.
신라 진흥왕의 돌연한 배반은 신라의 급속한 성장과 백제의 몰락을 촉발하였다.
이해
백제는 금동불상을 일본에 보내고 구원병을 청하였다.
일본은 배 두 척에 무기를 실어서 보내고 병사들도 보냈다.
백제
성명대왕은 둘째왕자 민달천황을 552년에 일본에 보내어서 구주백제의 왕으로 삼았다.
흠명천황이 황태자를 세운 기록 시점이다.
553년
백제는 가야와 신라를 동시에 공격하였다.
554년에 성명대왕聖明大王의 태자 창왕昌王(=위덕대왕威德大王)이 신라와 전투 중에 고립무원의 위기에
빠져서 성명대왕이 직접 구원을 나갔다가 성명대왕이 신라군에게 포위되어 화를 입어서 이만육천의
병사와 함께 화를 입어 참수당하였다.
신라 기록에는 관산성管山城의 싸움에서 신라가 위험에 처하였는데 신라 북쪽의 신주군新州軍이 구원
하였고 삼년산군三年山郡의 장수가 백제왕을 죽였다고 하였다.
관산성管山城은 충청북도 옥천沃川의 고지명이고 삼년산군三年山郡은 보은報恩의 고지명이다.
삼년산성은 보은읍의 동쪽에 있고 관산성은 옥천 서북쪽 환산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562년에
가야가 다시 일어나려고 하니 신라 진흥왕은 이사부와 사다함을 보내서 멸망시켰다.
이때 일본에서 건너갔던 현종천황과 계체천황 구신들의 일본부도 함께 정리되었다.
흠명천황은 군대를 보내어 가야를 되찾으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때 임나십국은
①가라국加羅國(김해金海 금관가야金官伽倻), ②아라국安羅國(함안咸安 아나가야阿那伽倻),
③사이기국斯二岐國(일기도一岐島), ④다라국多羅國(합천陜川 대가야大伽倻),
⑤졸마국卒麻國(진해鎭海 탁순국卓淳國), ⑥고차국高嵯國(고성固城),
⑦자타국子他國(창녕昌寧 비자호국比自㶱國), ⑧산반하국散半下國(진주晋州 반성班城),
⑨걸손국乞飡國(큐슈九州 웅본熊本), ⑩임라국稔禮國(임나=대마도)
등 합해서 10국이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대마도와 일기도, 큐슈에 있던 3국을 제외한 7국을 잃은 것이다.
흠명천황은 회외합판릉檜隈坂合陵에 묻혔는데 138m에 이르는 전방후원고분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