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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환절기를 걷다 / 김경태
1.
벚꽃은 흩날리고 떠나는 너의 뒷모습은
출항하는 바다에 비친 등불을 닮았다
괜찮다, 거짓말하며
돌아서는 발걸음
2.
도망치고 싶었다, 장마철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편지 속 글귀들이
책갈피 단풍잎처럼
말없이
부스러진다
3.
여민 옷깃을 풀고 달빛에 기대어 본다
푸른 입맞춤으로 타들어 가는 눈물을
지나는 이 계절 끝에
남겨 둔다,
바람이 차다
[심사평] 시조시인 정수자
■ 자연스러운 시상, 율격의 갈무리 돋보여
위반도 즐기는 현대예술에서 정형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 말을 다시 꺼내는 것은 정형시의 전제 때문이다.
그만큼 시조에서는 형식과 내용의 조화로운 완결미가 중요하다.
정형 구조의 운용 능력이 확연히 드러나는 종장 처리도 중요한 평가 요소다.
어떤 놀라운 발견이나 발상도 정형 속에 녹여 담지 못하면 시조의 위의(威儀)를 놓치는 것이다.
그런 특성을 앞에 두고 김경태·황혜리·조우리·이용규·김나경씨의 작품을 거듭 읽었다.
각기 삶에 육박하는 진정성과 개성적인 발성으로 나름의 시적 개진을 보였다.
30대가 처한 현실의 응전을 발랄하게 그려낸 황혜리씨나 전보다 정제된 서사와 전개를 긴 호흡으로 보여준 조우리씨는 종장의 묘미가 미흡하다는 점에서 밀렸다. 오늘의 현장에서 길어내는 이용규씨의 육성과 청춘이 당면한 현실에 직입해간 김나경씨의 목소리도 진솔한 울림을 담았지만, 그 이면까지 짚는 밀도에는 못 미쳤다. 결국 김경태씨 응모작들에 담보된 장점과 새로움의 가능성을 집어 들었다.
당선작 '환절기를 걷다'는 자연스러운 시상과 율격의 갈무리가 돋보이는 가편(佳篇)이다. 정형 속의 자유를 구가하듯 음절 수를 넘나드는 음보율로 구(句)도 부드럽게 타넘고 있다. 각 환절기에 담긴 '사이'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펼치고 거두는 구조 운용과 종장의 낙차로 빚어내는 여운이 참하다. '푸른 입맞춤으로 타들어가는 눈물'의 힘을 집어올린 만큼, 정형의 영역을 더 뜨겁게 갱신해가길 주문한다.
눈물을 여미고 다시 설 응모자들께 위로와 기대를 전한다. 김경태씨 당선을 축하하며, 당찬 비약을 바란다.
[당선 소감] 김경태
■ 정형 속에 단단히 박힌 언어들이 좋았습니다
연초에 직장 내 근무 부서가 바뀌고 한 해가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직장생활에 기쁨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야근하고 주말 출근도 많았지만 그 시간을 쪼개서 새벽에 한밤중에 책을 읽고 글을 쓰지 않았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겁니다.
제 인생의 절반이 넘는 기간 동안 삶의 일부분을 문학을 위해 떼어놓고 살았습니다. 시조가 좋았고, 정형이라는 틀에 단단히 박혀 있는 언어들이 좋았습니다. 작은 우주 속에 저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글쓰기는 끊을 수 없는 마약인가 봅니다.
고마운 분이 많습니다. 먼저 부족한 저의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정수자 선생님과 조선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글쓰기를 응원해 주신 직장 선후배 동료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제 곁에서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가족들, 언제나 나의 꿈을 지지해 주는 친구 정윤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선작의 영감이 되어준 종석아, 네가 준 제주 녹차는 정말 맛있었어. 널 잊지 않을게.
무수한 인연들로 지금의 제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신춘문예라는 인연으로 더욱 성장해 나가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한겨울 바람이 찹니다. 오늘 밤 따뜻한 제주 녹차 한잔 마시며 잠들고 싶습니다.
―1982년 부산 출생
―단국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평택시청 근무
[2020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선잠 터는 도시 / 정인숙
1.
선잠 털고 끌려나온 온기 꼭 끌안는다
자라목 길게 빼고 순서 하냥 기다려도
저만큼 동살은 홀로 제 발걸음 재우치고
나뭇잎 다비 따라 꽁꽁 언 발을 녹여
종종거릴 필요 없는 안개 숲 걸어갈 때
여전히 나를 따르는
그림자에 위안 받고
2.
정원 초과 미니버스 안전 턱을 넘어간다
목울대에 걸린 울화 쑥물 켜듯 꾹! 넘기고
몸피만 부풀린 도시,
신발 끈을 동여맨다
[심사평] 시조시인 / 이우걸, 이근배
최종까지 심사위원들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한 작품은 ‘물의 어머니’ ‘이정표로 뜨는 달빛’ ‘모죽’ 그리고 ‘선잠 터는 도시’였다. ‘물의 어머니’는 수사가 근사하고 터치가 시원시원해 모던한 느낌이 들었다. 같은 작가의 ‘명자꽃’도 탄력성 있는 언어가 비눗방울이 되어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런 장점에 비해 울림이 부족했다. ‘이정표로 뜨는 달빛’도 표현능력은 무난해 보였으나 내용면에서 너무 단순했다. 그 작품 셋째 수에는 지루할 만큼 눈에 익은 가난 얘기가 나온다. 당선에 값할 만한 내용의 세목이 부족해 보였다. ‘모죽’의 경우 작품 완성도나 내용의 깊이에선 단연 돋보였다. 그래서 여러 번 읽고 토론했지만 어휘 사용면에서나 소재면에서 신선하지 않다는 결점이 눈에 띄었다. 결국 올해의 영광은 ‘선잠 터는 도시’를 쓴 정인숙씨에게 돌아갔다. 시인은 우울한 오늘의 도시를 심도 있게 그렸다. 연필화처럼 희미한 선으로 그린 애잔한 풍경은 경제적 어려움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한 우리의 현실을 상상하게 하는 여운을 머금고 있다. 구성 면에서 의도적으로 ‘1’과 ‘2’로 나눈 것도 충분히 효과적이라고 생각된다. 즉 1부의 경우 인력시장의 가혹한 풍경을 그려놓고 2부는 인력시장 밖의 그늘을 그려놓고 있다. 그리고 2부 종장의 ‘몸피만 부풀린 도시/신발 끈을 동여맨다’는 이 시조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다. 외화내빈의 카오스 속에서도 그 생활에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하는 소시민의 의지가 잘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부디 삶에 뿌리내린 건강한 시정신으로 한국 시조문학사의 내일을 갱신하는 일꾼이 되길 바라며 대성을 빈다.
[당선소감] 정인숙
■ 구원의 시학’을 꿈꾸며
말하듯 쓰는 거야, 말을 글로 쓰라니까 곱씹어 땅 깊이 묻는다. 나의 봄은 늘 춥고 허기졌다. 양볼 가득 말을 넣고 씹고 또 씹는다. 오른쪽으로 씹고 왼쪽으로 씹어도 언제나 배는 고프고 봄은 안 온다. 말이 거짓말을 하자 글은 증거를 남겼다. 질겅질겅 한 쪽에 묻어두고 또 거짓말을 쓰고 더 할 거짓이 없을 즈음 드러나는 진실….
병아리 혓바닥만한 싹이 비척한 땅을 뚫는다. 고물상 앞을 지나다가도 글이 보이면 쭈그려 앉는다. 폐휴지 더미에서도 훔치듯 글을 따먹었다. 거리의 간판들도 내겐 신기한 먹을거리가 되어 입 가득 말을 물고 부르르 손짓하면 휘파람 음률이 생겼다.
봄이다. 봄이 왔다. 똑같은 하루가 왜 이리도 긴 건지. 휘청거리는 다리를 볏단처럼 묶어 간신히 앉는다. “봄이 왔어요.” 허공에 대고 소리친다. 권투경기마냥 잽도 날려본다. 발을 동동 구르다, 통통 뛰다, 신춘으로 온 내 봄을 맞는다.
아차차! 해야 할 인사말도 잊었다.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무대 위 배우처럼 감사 인사드린다. 처음 손을 끌고 길을 알려 주신 백윤석 선배님, 말을 잘 읽을 수 있게 귀한 글 보내주신 박기섭 선생님, 글의 앞뒤와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신 윤금초 교수님, 그리고 생면부지 한 번도 뵌 적 없는, 단단하고 올곧은 글들을 남겨놓으신 명작의 주인들에게 365일 환한 밤을 밝히는 서울 가락시장 사람들, 진솔한 글을 써보라고 다독여주시고 손잡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우리 문학의 중심권에 다가선 시조, 이제 ‘구원의 시학’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한다. 한 번 더 소리 지른다. 여러분, 정인숙 신춘 됐어요. 또박또박 글이 새겨진다. 잘 써보라고.
정인숙 : 1963년 서울 출생, 수산물 거래 개인사업
[2020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야간비행*
-김용균 어머니 생각
허창순
아득한 지평 어디 돌아오지 못할 비행(飛行)
희미한 손전등에 온몸을 의지했던
네 죄는 비정규직이다. 외주의 울에 갇힌
조종간 움켜쥐고 태풍을 건너던 너
관절이 부러지도록 날개를 저어가도
불 꺼진 관제탑에선 끝내 말이 없었다지
낙탄 속 죽지 아래 뜯지 못한 컵라면
부어오른 네 눈앞엔 거짓말들 나뒹굴고
수첩 속 빽빽했던 하루 생떼 같은 내 어린것
날개 다시 반짝 털고 하늘을 날자꾸나
사람만 있는 세상 너라는 별로 떠라
땅에서 못난 이 어미 네 법의 불을 켜마.
*생텍쥐페리 소설, 안전을 무시하고 야간비행 감행
[심사평] 시조시인 김영란
■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약자를 감싸 안으려는 따스함과 긍정의 힘
전국에서 정성스레 보내온 500여 편의 응모작품들을 살폈다. 정형시조의 기본에서 어긋난 작품들은 우선 제외 했다. 1차로 걸러낸 작품 중에서 너무 관념적이거나 식상한 고어 투의 작품들을 다시 내려놓았다. 김정애 문혜영 정두섭 허창순씨의 작품이 남았다.
김정애씨의 작품은 매끄럽게 이끌어가는 실력이 돋보이고 제목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했으나 상투적인 표현이 많아 신선함이 부족했다. 문혜영씨의 경우는 사유의 깊이나 주제를 이끌어가는 힘은 있었지만 음보가 가끔씩 불안하고, 시조 가락의 자연스러움이 아쉬웠다. 정두섭씨는 전반적으로 매끄럽고 언어를 부릴 줄 아는 기교가 뛰어났다. 현대시조의 특징을 잘 살려 옷을 멋스럽게 입은 점도 매력적이고 읽을수록 말맛도 있었지만 조금 가벼운 느낌이 났다. 허창순씨의 작품은 지나친 수사적 기교도 없고 소재 펼치는 방식이나 시상 전개가 자연스럽고 마지막 수까지 이끌어가는 힘도 좋았다.
하나하나 작품을 교차 비교하면서 한참을 고민하다 최종 허창순씨의 ‘야간비행’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약자를 감싸 안으려는 따스함과 긍정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2019년 대한민국에선 매일 평균 3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사고를 당해 사망한다. 직업병까지 합한다면 하루 평균 5~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다. 그 외 알려지지 않은 사례까지 더한다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50년이 다 되어가지만 무엇이 달라졌을까? 고故 김용균군은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참변을 당했다.
누군가 죽어야 안전해지는 나라가 아닌, 일하고 싶은 사람은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나라가 되길 희망한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인사를 보낸다. 더불어 아쉽게 탈락하신 응모자들께는 용기 잃지 마시고 재도전 하시라고 전하고 싶다.
[대표집필 김영란 시인]
[당선 소감] 허창순
손뜨개 코 빠진 자리 메우는 그 치열했던 시간이 따뜻한 치유의 시간이었음에 감사합니다.
선택의 기회도 없이 쥐어진 숟가락으로 비포장 뿌연 먼지 길 위에서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인 우리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소통하고 누군가의 희망의 章이 된다면 기꺼이 그곳에서 우리네 사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훈훈한 밥상머리에 앉아보렵니다.
중학교 때 신문사 주최 시가 당선된 게 꿈의 시작이었는지 안으로만 삭이던 응어리들이 쌓이며 늘 뭔가 써야겠다는 타는 목마름에 단비 같은 길을 열어주신 영주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시조를 처음 가르쳐 주신 양점숙 선생님의 지도와 격려 속에서 경기대 한류문화대학원 시조창작학과에서의 이지엽 지도교수님의 체계적인 심화 지도에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지혜, 지수, 병용 그리고 무한한 글감을 준 든든한 남편과 기쁨을 나누며 마지막 순간에도 아멘으로 떠난 엄마를 주신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경럭
전북 익산 출생, 1960년생
경기대 한류문화대학원 시조창작학과 재학
제11회 전국 가람시조백일장 장원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유향나무, 탐라에 서다 / 이선호
추레한 낯꽃들이 작은 배로 몰려든다
와글대는 무리, 무리, 놉으로 팔려가고
댓바람 유향乳香을 싣고 품 넓은 옷 추스른다
서귀포항 찰진 목새 다목다리 헹궈낼 때
곱지 않은 눈길 너머 타관 땅, 타향 밥에
캐러밴 젖은 눈자위 무비자로 울고 있다
빗기(雨期)에 젖은 하늘 소름 돋는 겨울 냉기
포장박스 한뎃잠에 뼈마디 죄 욱신거리고
허옇게 버짐 핀 얼굴 몸 비비며 버팅긴다
내전으로 움츠러든 갈맷빛 잎새 하나
이에 저에 떠밀려서, 탐라까지 떠밀려서
꽃망울 만개할 봄날 오돌오돌 기다린다
[시조 심사평] 심사위원 고성기, 홍성운
■ 난민과 유향나무 통해 시대 아픔 공감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서 올해로 다섯 번째 시인을 내보낸다. 예심을 통과한 11명의 작품 모두를 숙독했다. 오랜 논의 끝에 4편을 가려냈다.
'호두 그리고 매미'(정경화)는 명징한 이미지와 투명한 시어가 절묘하게 결합된 가편이다. 호두와 말매미, 산돌과 호두 씨앗이 잘 엮였고, "말매미 더늠 대목", "푸른 이마 언저리쯤 두레박을 퍼 올리고"가 주는 울림이 컸다. 게다가 여름 한낮 말매미가 "공명실 한껏 조였다 단숨에 풀어낼 때", "온 우주가 익는 소리"에 이르러서 잠시 숨을 멈추게 했다.
'운주사의 달'(이봉렬)에서는 시상을 자연스레 끌어가는 능력이 돋보였다. 세 번째 수 종장에 이르러 "폐경기 겨울 산속에/ 확!/ 불 지른다/ 진달래가"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시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시편이 낯익다는 뜻이다.
'일출'(김종순)은 새해 새 아침을 여는 작품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작품은 일출의 장면을 노트북 화면과 대비 시켜 그 효과를 세 번째 수 종장 "눈부신 절창 한 구절/ 뿌리째 뽑아 올린다"로 극대화하지만, 드문드문 의미망에 따른 음보가 다소 불안하고 긴장감이 덜했다.
'유향나무, 탐라에 서다'(이선호)는 '지금·여기'에 기반을 둔 사회상을 유향나무를 통해 잘 그려냈다. 유향나무는 아라비아반도 예멘이 주산지다.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제주 예멘 난민 사태'를 외면하지 않았다. 언뜻 거친 표현도 눈에 띄지만, 그게 작품의 현장성을 높이는 효과로 읽히기도 했다. 유향나무의 밑동이나 난민의 다목다리는 차가운 댑바람에 시리지 않을까. 무비자인 난민과 유향나무를 통해 디아스포라의 아픔에 공감하고 평화를 희구하는 시인의 마음을 우리는 높이 샀다.
'시인은 모름지기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며 이선호의 '유향나무, 탐라에 서다'에 힘껏 방점을 찍는다. 시조는 형식이라는 특수성과 시라는 보편성을 다 아울러야 한다. 건필을 기원한다.
[당선소감] 이선호
■ 이제 출발선, 힘찬 항해 시작하겠다
일요일은 종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느라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집에 와서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낯선 번호가 있었다. 지역번호 064. 누굴까? 순간 머리가 멍했다. 그날 저녁 8시쯤 한라일보 담당자와 통화가 되었고 응모작에 대해 몇가지를 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긴 시간을 보낸 후, 이튿날 비로소 당선 소식을 들었다.
먼저 아내에게 알린 뒤 세 자녀에게도 차례로 소식을 전했다. 모두들 기뻐했다. 완성은 아니지만 정식으로 시작됨에 감사하다. 지난 수많은 날들, 시조와 함께한 시간들이 뇌리에 스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나와 함께하고 나를 위로한 보이지 않는 친구, 시조가 고맙다. 시조란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거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거다.
매년 말, 원고를 부치러 우체국에 갈 때마다 설레이곤 했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언젠가 당선통보가 나에게도 온다'는 말을 수 없이 되뇌었다. 아득하게 여겨졌던 문단의 세계, 그 말석에 섰다. 내 안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이야기들을 시조라는 정형의 세계에 녹여내겠다.
걸음마 밖에 할 줄 몰랐던 저를 걷게 해 주신 윤 교수님, 고비 때마다 격려와 질책을 아끼지 않았던 목요모임 학형들, 모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어설프지만 힘찬 항해를 시작하겠습니다.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한라일보에 감사를 드립니다.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라는 걸 잘 압니다. 감사합니다.
▷1975년 충남 보령 출생 ▷한국성서대학교 졸업(신학전공, 사회복지학 석사) ▷제35회 샘터상 수상, 중앙시조백일장 2회 입선 ▷현 아름요양보호사 교육원 전임강사
[2020 부산일보신춘문예-시조 당선작]
진 헤어살롱 / 장남숙
스팸메일 지우듯 싹둑싹둑 잘라내도
낮 불 밝은 살롱은 루머(rumor)가 크는 온실
엉터리 가짜뉴스가 물들이며 치장이다
오랜 날 기다린 듯 끈 풀린 수다들이
해가 긴 오후만큼 끝없이 늘어지고
미용사 장갑 낀 손만 귀 닫고 한창이다
친친 감는 머리카락 뜬 소문 리플레이
들통 난 통화내용 진짜라도 어쩔 건지
까맣게 염색한 세상 알고 보면 새치다
[시조 심사평] 시조시인 전연희
■ 시어 다루는 솜씨·시조 가락 수련 흔적 읽혀
기도하듯 응모작품을 읽어 나갔다. 응모하는 분의 지극한 마음을 헤아리기에 심사하는 동안 설렘과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숙독 끝에 응모자 106명의 389편 중 십여 편의 작품을 골라내고 다시 압축했다. 치매, 실직 등 이미 많이 다룬 흔한 제재, 참신성이 부족하고 진술이 주를 이룬 작품을 내려놓았다. 무리한 비유, 어지러운 단어 나열은 뿌리 없이 자란 무성한 잎 같아 위태롭고, 시적 정신의 부재 속에 튀는 풍자는 시조의 품격을 낮춘다.
‘모래시계 화석’ ‘객’ ‘호두의 집’ ‘설렁탕의 아침’ ‘차광목 속 성지’ ‘진 헤어살롱’을 두고 고심하다 최종적으로 ‘차광목 속 성지’ ‘진 헤어살롱’으로 압축했다. 두 편의 개성은 확연히 달랐다. 그 다른 점이 심사의 어려움이었다.
‘차광목 속 성지’는 발상이 참신하다. 그러나 도발적이고 생경한 단어 선택이 신춘문예의 특권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시어가 생쌀처럼 씹혀 끝내 내려놓게 되었다. 비유에 치우치다 보니 그래서라는 문제가 남는다.
‘진 헤어살롱’은 ‘미용실’이 아닌 ‘헤어살롱’이라는 시어로써 작품 전체에 진짜와 가짜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세태를 풍자적으로 그려낸 점이 시선을 잡았다. ‘진’은 마지막 종장의 ‘염색’한 ‘새치’를 대조적으로 강하게 받쳐 주어 주제를 향한 시어들의 집중력을 읽을 수 있었다. 시어를 다루는 솜씨나 주제를 이끌어 가는 힘, 그리고 시조가락에 대해 수련을 한 흔적으로 읽힌다.
당선을 축하하며 시조단의 새 힘이 될 것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전연희
[당선 소감] 장남숙
■ 겨울 모과나무처럼 꿋꿋하고 치열하게 쓸 터
잎 다 지고도 노랗게 매달린 모과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순간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슴 속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 품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아름다운 우리 시조가 그렇습니다.
시어는 간당간당 손끝에서 흔들리고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애를 태우는 나날이 길어졌습니다. 지독한 짝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십 번의 퇴고를 거쳐 한 편의 작품을 만나는 날은 가슴이 뛰었습니다. 부산시조시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연수를 통해 시조에 입문한 후 그 매력에 빠져 여기까지 왔습니다. 추위에도 저렇게 매달린 모과처럼 꿋꿋하게 치열하게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밝히는 일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점심시간인가 봅니다. 아이들이 모과나무 아래에서 뛰놀고 있습니다. 쓸쓸한 운동장의 아이들은 노란 모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더 환하게 빛날 수 있도록 아이들 가슴마다 꽃 한 송이 심어주겠습니다. 선암의 아이들과 함께 우리 시조를 외우고 쓰겠습니다. 시조의 힘이 아이들을 상상력과 창의력이 강한 아이로 자라게 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가슴 떨리는 기쁨을 안겨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부산일보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조의 길을 함께 걷는도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과도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약력 : 1964년 출생. 부산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 졸업. 선암초등학교 교장.
[2020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고요한 함성 /윤애라
바람도 숨 고르며 앉아 쉬는 파장 무렵
청각 장애 부부가 하루를 결산한다
손목에 감긴 말들이 좌판 위에 떨어지고
하루 종일 졸고 있던 파 한 단에 이천 원
쪽파의 매운 인생 손톱 밑은 아려와도
숨었던 말문이 활짝, 꽃으로 피어난다
입으로 다진 기약 소리로나 묶던 다짐
저 고요한 소란에 싹둑 싹둑 잘려 나간다
반듯한 말들은 어디, 숨을 데를 찾고 있고
달콤한 고백인가 아내 얼굴이 환해진다
젖은 어깨 부딪치며 손으로 가는 먼 길
초승달 온몸을 기울여 남은 달빛 쏟고 있다
[심사평] 시조시인 염창권, 박권숙
■ 인물들 능숙한 비유 통한 형상화 돋보여
예년과 마찬가지로 응모작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성했다. 시조의 국제화를 바라는 마음에 기대어 동봉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와 내용 면에서 우리 시대의 삶을 구체화하는가에 주목해 응모작을 선별했다. 5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최정희의 ‘스파이더맨’은 ‘창(槍)’과 ‘창(窓)’이라는 중의적인 삶의 형태를 안정감 있게 의미화했으나 동봉한 작품이 따라주지 못했다. 박민교의 ‘뭉크의 절규, 숨을 쉰다는 것’은 불모의 현대성을 감각적으로 재현했고, 이복렬의 ‘투신하는 태양-울돌목’도 ‘울돌목’이라는 역사적인 지명을 볼륨감 있는 이미지로 환기했으나, 비판적 감성 그 자체에 머무른 것이 흠이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이은영의 ‘맷돌’과 윤애라의 ‘고요한 함성’이었다. 먼저 ‘맷돌’은 안팎이 혼재된 세계를 자아 내부에 끌어들여, 다독이고 숙성시키다가 마침내 환하게 펼쳐내는 발상이 돋보였다.
이에 비해 ‘고요한 함성’은 노점상을 하는 청각 장애 부부가 몸으로 말꽃을 피워내는 모습을 능숙한 비유를 통해 형상화했다. 이를테면, “숨었던 말문이 활짝, 꽃으로 피”는 생명력이나 “초승달 온몸을 기울여 남은 달빛 쏟고 있다”와 같은 우주적 감성은 대상 세계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작가의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더불어 다른 작품에서도 당선작에 버금가는 기량을 확인 할 수 있어, 이견 없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위로의 말과 함께 내년에 더 좋은 결실로 만날 수 있기를 부탁드린다.
염창권 박권숙 시조시인
[당선 소감] 윤애라
■ 독자 심장 달구는 말들 찾으려 노력할 것
막연하게 행운을 기다리며 이 겨울의 벼랑 끝에 서 있던 나는 뜻밖에 신춘문예 당선의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허공이 내 발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 비로소 발걸음을 한발 앞으로 내딛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조는 줄곧 괄호를 만들어놓고 내게 질문을 했습니다. 정형의 틀은 마치 수학 공식을 외우는 것처럼 힘들고 재미있었지만, 시조의 옥죄는 여유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적합한 표현이 아니라고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던 수많은 밤, 어지러운 말들의 진창에 곤두박였다가도 다시 일어서던 새벽빛, 여전히 괄호는 두 개의 밝은 초승달처럼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봅니다. 독자의 심장을 달구는 말들을 찾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헤매야겠지요. 임중도원(任重道遠),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멉니다. 그러나 이제 떳떳하게 새 자루를 준비하겠습니다.
고향의 파도가 끊임없이 나를 불러도 달려가지 못했는데 국제신문사의 부름을 받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아직도 캄캄하고 먼 길이지만 또렷한 등불을 밝혀주신 심사위원님, 살아 숨 쉬는 말을 가르쳐 주신 권숙월 선생님 노중석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난 십 년 동안 봄과 가을을 함께했던 백수 시조아카데미 회원님들, 글의 지평을 넓혀 주신 김천 문인 협회 선생님들,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우표를 붙여 보내도 소식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서 기쁨으로 울먹이실 나의 부모님 그립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감사의 주인이 되시는 나의 하나님께 이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약력=1963년 부산 출생. 2004년 자유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1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18년 백수문학신인상. 백수 시조아카데미 회원. 김천 문인협회 회원. 현재 논술 교사로 활동 중.
[2020 매일신춘문예]시조 당선작
'비누, 마리안느와 마가렛' / 여운(본명 나동광)
스치는 손길에도 부끄럼을 타는 비누
낯선 뱃길 따라 외따로 건너가서
여윈 섬 가슴에 묻고
마흔 해를 씻었다
병든 사슴 곁에 사슴이 와서 앉듯
파도가 일 적마다 파도를 움켜쥐고
비누는 제 몸을 풀어
흰 포말을 재웠다
마디 굵은 사투리에 향기는 시들어도
맨 처음 온 그대로 닳지도 않은 비누
거품은 섬을 안았다
옹이진 발 감춘다
[심사평] 시조시인 박기섭
문제는 새로움이다. 늘 처음이면서 또 다른 처음을 꿈꾸는 시! 요컨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다. 낯선 비유, 삐딱한 시각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시조는 선험의 형식을 따르는 이 땅 유일의 정형시다. 그렇다고 그 형식에 갇히거나 끌려 다녀서는 낭패다. 형식을 부리되, 작위나 억지가 아닌 자연스러움의 미학에 닿아야 한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전제로 응모작들을 읽어갔다. 전국을 망라한 응모자의 지역 분포는 예년과 다를 바 없었으나, 가파른 인구 고령화 탓인지 노년층의 응모 비율이 부쩍 높아졌다. 응모작 전반의 수준은 상향 평준화 추세가 뚜렷했다. 그러면서 사회현실에 직핍한 서정, 자연과 인간의 결속, 역사의식의 표출 같은 퍽 다양한 미학의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정독과 숙고의 과정에서 '팔분음표 일어선다'·'꽃총포 쏘아 올린다'·'독거 혹은 풍장'·'슴베를 뽑다'·'폐철선을 들다'·'장사리 서신'·'모란이 오는 저녁' 등이 눈길을 끌었다. '도예'·'거짓말'은 20대의 감각이 신선했다. 마지막까지 선자의 손에 남은 작품은 '메가시티 동굴'·'덧니, 날아가다'·'욱', 그리고 '비누, 마리안느와 마가렛'. 앞뒤를 가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어차피 언어의 건축인 시의 완성도 측면에서 '비누,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당선작으로 낙점했다.
당선작은 얼개와 짜임이 견고한 데다 맞춤한 비유와 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누"에 비유된 두 수녀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들이 물 설고 낯선 땅, 그것도 편견과 비탄의 섬 소록도에 온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스치는 손길에도 부끄럼을 타는" 20대에 와서, "마흔 해"가 넘도록 "제 몸을 풀어"낸 것인가? 그 답은 이 작품의 행간에 오롯하다. "낯선 뱃길" 끝의 "여윈 섬"을 안고, 그 섬의 "병든 사슴 곁에"서 가없는 희생과 섬김의 삶을 산 것이다. "파도가 일 적마다 파도를 움켜쥐고" "마디 굵은 사투리에" 끊임없이 사랑의 "향기"를 베푼 것이다. "맨 처음 온 그대로 닳지도 않은 비누"가 한결 같은 그들의 정신을 표상한다. 실존 인물의 삶을 좇는 따뜻한 긍정의 시각을 높이 산다. 영예의 당선을 축하하며, 생을 건 역주를 기대한다.
박기섭(시조시인)
[당선소감]
추위를 타는 자에게 겨울은 길고 더위를 타는 자에게 여름은 길다. 삶의 궤도에서도 길게 느끼는 힘든 계절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길더라도 계절은 바뀌고 활기를 되찾을 때가 오기 마련이다. 빛과 어둠의 순환을 보며 느린 걸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따뜻한 봄과 선선한 가을은 오리라.
특별한 형식 없이 제멋대로 자유시를 쓰다가 만난 시조는 수식어가 많지 않은 절제된 언어의 미와 일정한 구조로 유지되는 소리의 질서와 운율이 가득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한민족의 집단 무의식과 숨결이 깃든 서정적 장르였다. 시조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졌다. 뒤늦게 접했지만 서두르지 않고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비상을 꿈꾸던 초심은 우선 백일장으로 눈을 돌렸다. 백일장은 해마다 봄이나 가을에 전국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백일장 장원으로 뽑힌다고 하더라도 문단에서는 대부분 그것을 등단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등단은 원칙적으로 신문이나 계간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언제까지나 땅바닥에 앉아 허리를 구부린 채 한 시간 혹은 반 시간 안에 주어진 시제에 따라 즉흥적인 시만 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때 익힌 잘못된 버릇은 계속해서 따라다녀 떨쳐버리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좀 더 깊이 있고 세련된 습작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제대로 된 일간 신문 지면을 통해 문단에 데뷔할 결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랜 날을 그렇게 붙잡고 살았는지 계산도 하기 어렵다. 아마 십 년도 넘게 흘러간 것 같다. 물론 중간에 포기했던 시절이 있었다. 매년 늦가을과 겨울 사이 뛰놀던 설렘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열정은 식어버렸다.
찬바람이 스며들어도 끝까지 글줄을 놓지 않고 기다린 덕분인지 갑자기 당선을 축하하는 전화를 받아 떨리던 가슴은 더 떨리고 있다. 모든 이웃이 함께 나누는 정감 어린 시적 소통으로 봄이 올 때까지 한파를 무사히 견딜 수 있기를 바란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같은 손길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훈훈하다.
▶여운(본명 나동광)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입선
구제활동가
[2020 농민신문 신춘문예-시조 당선작]
일인 방송국 / 나동광
인터넷 풀밭 속에
풀빛이 짙어간다
열린 듯 닫힌 틈새 노랗게 핀 민들레
바람에 날린 씨앗은
어디쯤 가 앉을까
미세먼지 경보가 뜬
가택 연금의 나날
해제될 기미도 없이 창틀은 내려앉고
뒤늦게
면회 온 봄비
말더듬이 시늉이다
[심사평] 시조시인 이정환, 이달균
■ 시절가조란 시조 고유 특성 부합…1인 미디어 시대 포착 참신
신춘문예는 화려한 등용문이다. 특히 농민신문사 신춘문예는 역사와 전통이 남다르고, 그동안 시조부문을 통해 배출된 시인들의 활약상도 두드러진다. 우리 심사위원들은 양과 질 모두 풍성한 응모작들을 면밀히 살폈다. 엄정한 정형의 기율 안에서 얼마나 자신의 내면과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고 있는가에 주안점을 두었다. 특히 신인은 ‘새로운 목소리’를 들고 나와야 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했다.
우리는 ‘일인 방송국’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함께 보내온 네편의 작품도 신뢰를 주었다. 오랜 적공의 힘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일인 방송국’은 시절가조라는 시조 고유의 특성에 잘 부합된다. 유튜브를 비롯한 1인 미디어 시대를 포착한 점이 참신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라는 첨단문명을 소재로 했지만 ‘풀밭·씨앗·봄비’와 같은 시어를 통해 서정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좋았다. 화자는 미세먼지로 인해 가택 연금을 당하지만, 일인 방송의 메시지는 자유로운 씨앗처럼 날려 누군가에게는 꿈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설레는 자양분이 되어 새순을 틔울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즉 생물이 아닌 현대문명이지만 쌍방 소통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되는 정보화 시대의 특성을 시조에 잘 녹여낸 것이다.
최종에서 세사람이 남아 겨루었다. 먼저 ‘말 굽는 밤’ 외 네편을 응모한 이의 작품에 눈길이 갔는데, 나름대로 참신한 감각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꼬이고 꼬인 걸까’나 종장에서 ‘그렇게 그렇게 섞여’라고 마무리한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밀도 높은 완결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절차탁마한다면 한사람의 좋은 시조시인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로 ‘야생 사과’ 외 4편을 주목했다. 다섯편 모두 세련된 수사와 이채로운 이미지 구현 및 언어감각이 돋보였다. 그렇지만 작품마다 특이한 시어를 배치해서 시적 효과와는 별개로 돌출되는 점이 흠결이었고, 사유의 깊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울림이 미흡했다. 하지만 개성적인 작품을 쓸 수 있는 기량을 갖췄다고 보았다.
당선자는 당선의 영광에 값하는 가일층의 노력으로 시조문단을 융성케 하는 일에 일조하기를 바란다. 아깝게 골인 직전에서 못 미친 이들의 분발도 빈다.
[당선 소감]
■ “쓰고 지우는 이들과 기쁨 나누고파”
오지의 밤하늘, 장대비 소리 등 여행길 메모가 시심의 원동력
여행을 다니면서 수첩에 적기 시작한 깨알 같은 메모는 메마른 삶에서 시심을 일으키는 커다란 원동력이었다. 일상에서 벗어난 그런 모험에서 생긴 버릇은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오지에서 장기간 체류하는 동안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의식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온갖 시어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낮에 흘린 땀을 시냇가에 가서 씻어내고 장작불로 지은 밥을 먹는 정겨운 식탁과 뒷산에서 한짐 짊어지고 온 과일로 후식까지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 촛불 들고 건너는 외나무다리, 밤마다 바나나로 엮은 지붕 위에 퍼붓는 장대비 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잠을 자고 자명종 대신 새들이 깨우는 해맑은 아침을 맞이하는 나날들. 그 경험들은 저절로 눈앞에 그림처럼 펼칠 수 있는 시적 이미지 자원이다.
봄부터 뿌린 씨앗을 가을에 다 거두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낙엽만 쌓이는 겨울, 나무는 홀로서기를 가르치고 텅 빈 들판은 버리기를 권고한다. 그 뜻을 받아들여 또다시 시작하려고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어느 날 까치가 날아왔다.
오늘도 한편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쓰고 지우는 일을 거듭하는 문학 소년·소녀들은 물론 움츠린 어깨를 펴주고 힘을 실어준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나동광 ▲1957년 충남 서천 출생 ▲문학치유 상담전문가 ▲오지여행가
[2020 뉴스N제주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키오스크(Kiosk) / 윤종영
일하다 밥 때 놓쳐 식당에 들어가니
반기는 사람 없고 무표정 기계들뿐
화면에 다양한 음식 단정하게 놓여 있다
유심히 훑어보며 빠르게 탐색한다
쉽지 않은 음식 주문, 사라지는 시장기
두 손은 공손해지고 식은땀이 흐른다
안내문을 읽고서야 터치를 겨우 한다
카드로 결제하고도 두렵고 어색하다
전광판 낯선 배식구 멀거니 바라본다
[2020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미생(未生) / 김다솜
조간신문 머리말에 걸쳐진 새벽 냄새
해묵은 구두 위로 선선히 내려앉고
뜯어진 인생 한 자락 곱게 기워 접었다
품이 큰 외투 위에 위태로운 가방 한 줄
이력서 너머로는 볼 수 없던 회색 바람
지난달 경리 하나가 사직서를 써냈다
각이 진 사무실 속 구석진 나의 자리
수없이 훑어 내린 기획서 속 오타 하나
내 삶의 오점 하나가 툭 떨어진 어느 오후
김다솜 : 1966년 출생. 경기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