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이모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면서 나도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 때만 해도 교회 갈 때마다 손에 쥐어 주시던 용돈에 눈이 멀어 교회를 다녔던 것 같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에는 나름대로 학생회 활동도 하면서 신앙에 눈을 뜨게 됐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신앙으로부터 많이 멀어지게 되었다. 교회는 일년에 한두 번 연례행사로 참석했고, 친구들 자취방과 학교 동아리방을 전전하며 놀러 다니곤 했다. 당시의 친구들이 지금의 나를 본다면, 나라고 말해도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방황은 적잖은 시간을 요구했고, 어느덧 대학졸업반을 앞둔 겨울이 되었다.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는데, ‘폐결핵’이라는 판정을 받았고, 1년 가까이 치료를 해야 했다. 의사의 말이 “원래 이 병은 못 살던 시절에 자주 걸리던 병인데, 최근 들어 자기 몸 안 돌보고 놀던 젊은 사람들 중에는 가끔 이 병에 걸리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시 내 상황을 가장 정확히 진단한 말일지 모른다. 아무튼 그 순간 내 인생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 그대로 멈춰져 버린 것만 같았다.
약 봉투를 받고 집으로 오는데, 예전에 친구로부터 받았던 편지가 생각이 났다. 고등부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친구인데, 내가 교회에 나오지 않자 보낸 편지였다. 편지의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친구가 적어 놓았던 말씀 한 구절이 내 마음에서 불현듯 떠올랐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히 6:4~6)
생각해 보면 꽤 독한(?) 친구를 사귀었던 것 같다. 친구가 교회에 안 나오면 적당히 좋은 말로 권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무시시한(?) 말씀을 보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 친구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계획은 적중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내 뇌리를 스친 것은 나머지 편지 내용도 아닌, 그 친구가 보냈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에 가서 병에 걸린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씀 드리자, 어머니가 굉장히 미안해 하는 것이었다. 사실 병에 걸린 것이 내 잘못이지 어머니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니었는데, 왜 미안해 할까 의문이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위장에 구멍이 나게 해서라도, 교회에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독한 친구에 독한(?) 어머니까지 둔 것일까? 오죽 답답했으면 자신이 낳은 자식을 아프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을까? 어머니의 이런 간절한 기도가 없었으면, 내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을까?
너무나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의 씨앗을 뿌렸음에도 아직 응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 한 사람의 힘을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그 기도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말씀 한 구절을 심기 위해 펜을 잡고 있는가? 나는 그 한 사람의 힘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 말씀 한 구절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기도하는 그 사람이 나와 같이 고백할 날이 오게 되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