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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할 것을 청한 전 현감 신규의 상소문
숙종실록 32권, 숙종 24년 9월 30일 신축 1번째기사 1698년 청 강희(康熙) 37년
노산군의 왕호를 추복할 것을 청한 전 현감 신규의 상소문
전 현감(縣監)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마음에 품고 있던 바를 진달하였는데, 비답(批答)을 내리기 전에 빈청(賓廳) 대신(大臣) 이하가 마침 입시하였다. 임금이 환시(宦侍)에게 명하여 그 상소를 대신에게 보이도록 했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신(臣)이 삼가 살피건대, 옛날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은 하늘이 내신 성군(聖君)으로서 하청(河淸)200) 의 운(運)을 만나 화란(禍亂)을 평정하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돌아갔습니다. 노산군(魯山君)201) 께서는 어린 나이에 보위(寶位)에 올랐으나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인정하시고 하늘의 명에 응하고, 사람의 뜻에 따라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선위(禪位)한 것을 본받아 별궁(別宮)으로 물러나 상왕(上王)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 때 세조께서는 겸허하게 이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여 종팽(宗祊)의 부탁에 의하여 하는 수 없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목하고 겸허하게 사양하신 미덕(美德)은 요·순[唐虞]의 훌륭함과 맞먹는데, 그 선위를 받은 교서(敎書)를 살펴보면 또한 만세(萬世)에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육신(六臣)202) 의 변(變)이 뜻밖에 나오게 되었으며, 권남(權擥)과 정인지(鄭麟趾) 등이 은밀히 보좌한 논의가 또 따라서 이를 격동시켜, 세조께서 상왕을 보호하려는 은혜로 하여금 유종의 미(美)를 거둘 수 없게 했으니, 육신의 복위(復位) 계획은 다만 노산군에게 해를 끼치게 되었으므로, 충신(忠臣)·의사(義士)의 감회가 지금까지 가시지 않고 있다는 것은 성상께서 환히 알고 계시어 이미 이해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운명은 길고 짧음이 있고 일은 꺼리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한 조각 외로운 분묘(墳墓)가 저 멀리 황폐한 곳에 있은 지 이미 50여 년이 되었으나, 향화(香火)가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종(中宗)께서 등극하시고서 비로소 폐지되었던 은전(恩典)을 거행케 하여, 특별히 승지(承旨)를 보내어 제물을 갖추어 치제(致祭)케 하였습니다. 그 후에 노산군에게 후사를 세워주자는 논의가 이약빙(李若氷)의 상소에서 처음 발의되었는데, 그 때의 대신(大臣)들은 올바르게 의논하지 못하여 심지어 과감하게 말한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불측(不測)한 죄를 받게까지 하였으니, 아!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선조(宣祖) 때에는 또 관찰사(觀察使) 정철(鄭澈)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묘표(墓表)를 개수(改修)하고 제물은 1품(一品)의 의식을 쓰게 하였으니, 우리 열성(列聖)께서 추원 보본(追遠報本)203) 의 은전이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으며, 지하(地下)에서의 한(恨)도 거의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서는 오히려 다하지 못한 바가 있다고 여깁니다. 무릇 왕위에 올랐던 임금으로서 재앙을 만나 폐출(廢黜)된 경우, 한(漢)나라의 창읍왕(昌邑王)과 제(齊)나라의 울림왕(鬱林王)과 우리 나라의 연산군(燕山君)·광해군(光海君)과 같은 이는 모두 혼암(昏暗)한 덕(德)으로 법도를 망쳤으므로 자신이 천명(天命)을 끊은 것이니, 그 칭호(稱號)를 깎아내리고 지위를 낮추어 죽지 않을 정도로 대해주면서, 제(帝)는 왕(王)으로 강등이 되고 왕은 군(君)으로 강등되는 것도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에 선위(禪位)를 한 임금과 같은 경우는 일찍이 말한 만한 실덕(失德)이 없는데, 혹은 일시(一時)의 권의(權宜)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말하기 어려운 사세(事勢)에 몰려서 자리를 사양하고 한가롭게 나가 있는 이야 주(周)나라·한(漢)나라 이후 어느 시대에는 없었겠습니까만, 존호(尊號)의 일컬음을 깍아내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어찌 선위한 일은 쫓겨난 것과는 다르고, 사양한 자취는 적대 관계보다 다르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신(臣)은 굳이 시대가 먼 전대(前代)의 일을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원나라 순제(順帝)에게,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공양왕(恭讓王)에 대해 살아서 대할 때나 죽어서 장사지냄에 있어 모두 제왕(帝王)의 예(禮)를 사용하였습니다. 이성(異姓) 사이에 대(代)가 바뀔 때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더구나 왕실(王室)의 가까운 지친(至親)으로서 주고받는 성대한 일을 행하였는데, 도리어 왕호(王號)를 없애는 것이 옳겠습니까? 노산군이 온 나라에 군림(君臨)한 것은 하루아침이 아니었으며, 온 국민이 모두 사랑하고 추대할 줄 알았으며, 이미 왕위를 사양한 뒤에도 오히려 상왕(上王)이라고 일컬었으니, 당시에도 왕호(王號)를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가령 육신(六臣)이 변을 꾸미는 일이 없었고, 노산군이 그 천명(天命)을 끝까지 누리게 되었으면 장사나 제사 때에 반드시 왕례(王禮)를 사용했을 것은 단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 육신은 천명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복위를 꾀했다가 다만 그 화를 재촉했을 뿐인데, 노산군이야 어찌 거기에 관여함이 있었겠습니까? 관고(貫高)의 변(變)에 조오(趙敖)가 함께 연좌되지 않았던 것은204) 그 모의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까? 그러니 당시 노산군에게 왕호(王號)를 다시 일컬을 수 없었던 것은 혹 사세에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어찌 오늘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성상께서 이미 육신에 대해서는 그 절의(節義)를 아름답게 여기셔서 특별히 정포(旌褒)하시고 사당을 세우도록 윤허(允許)하여 빛나는 편액(扁額)까지 하사(下賜)하셨으니, 육신의 고충 열지(孤忠烈志)는 성상에게 인정을 받아 백대(百代) 이후에까지 더욱 빛나게 된 것입니다. 아! 저 옛 임금을 위하여 절의에 죽은 육신(六臣)은 이미 성상께서 정포해주시는 아름다운 은혜를 받았는데, 더구나 그 육신의 옛 임금으로서 그 모의도 알지 못하였으며, 일찍이 그 덕에 하자도 없었는데도 오히려 편안히 죽지도 못하였고, 제사 때에 왕례(王禮)를 쓰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전하(殿下)의 부족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시대가 바뀌고 일이 지나가 언덕은 이미 평평해졌고 쑥대가 우거지고 풀이 무성하여 여우와 토끼들이 뛰어다니며, 봄바람의 두견새 소리는 시인(詩人)들의 싯귀에 들어가며 보리밥 한식절(寒食節)에는 시골 늙은이들의 탄식 소리를 되삼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무한한 울분이 지하(地下)에서 엉키고 맺혀서 백세(百世)토록 변화하지 않고 있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또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께서 양양(洋洋)하게 오르내리실 적에 외로운 고혼(孤魂)을 다 슬퍼하지 못함이 있는지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왕호(王號)를 추복(追復)하여 제사 때에는 왕례를 쓰며, 그 침원(寢園)을 봉하여 수호군(守護軍)을 더 두고 별도로 사당을 세워서 그 의물(儀物) 갖추는 것을 한결같이 명나라에서 경태제(景泰帝)205) 를 추복한 고사(故事)와 같게 한다면, 법으로 보더라도 참람함이 되지 않고 옛일을 참고하더라도 진실로 인정이나 예절에 부합되는 것이니, 신(神)을 위로할 수가 있게 되어 천심(天心)이 기뻐할 것이며, 인정(人情)도 반드시 흡족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臣)은 중종(中宗)의 폐비(廢妃) 신씨(愼氏)206) 의 일에 대하여 더욱 가슴 아프게 슬퍼하고 있습니다. 연산군(燕山君)이 음학 무도(淫虐無道)하여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우리 중종 대왕께서 밖으로는 군신(群臣)들의 추대(推戴)를 받고 안으로는 모후(母后)의 명을 받아, 잠저(潜邸)에서 용비(龍飛)하여 대통(大統)을 이어받았던 것입니다. 부인(夫人) 신씨(愼氏)는 배필이 된 지 여러 해였으나, 곤범(壼範)에 결함이 없어 곤위(壼位)에 올라, 명분이 올바르고 의리에 순응하여 왕후[翟褕]의 높은 자리에 앉아 신민(臣民)의 하례를 받았으므로, 종묘 사직에 주인이 있고 나라 사람들이 기대를 하였었는데, 원훈(元勳)이었던 박원종(朴元宗) 등은 다만 자신들의 문제만 생각하고 대의(大義)를 돌보지 않고서 종사(宗社)의 계획을 핑계삼아, 정청(庭請)의 논의을 주도하여 군부(君父)를 협박해서 마침내 폐출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경장(更張)하는 초기에 근본을 단정히 해야 하는 교화를 다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삼가 중종께서 정청(庭請)에 답한 내용을 보면, ‘조강지처(糟糠之妻)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였으니, 중종께서 그리워하여 차마 버리지 못한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훈신(勳臣)의 강청(强請)에 못이겨서 은혜를 끊고 인정을 자르고서 폐출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니 박원종 등이 제멋대로 협박한 죄는 어떻게 정의(正義)로운 선비의 논의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삼가 그 때에 정청(庭請)의 계청(啓請)을 보니, ‘의거(義擧) 때에 신수근(愼守勤)을 먼저 제거시킨 것은 대사(大事)를 성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딸이 대내(大內)에 입시(入侍)하고 있으니, 만약에 곤위(壼位)에 있게 되면 인심이 의구심을 갖게 되는데, 인심이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은 종사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협박하는 말입니다. 당초에 신수근을 죽인 것도 이미 반드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는데, 또다시 그것으로써 신씨를 폐출시키는 구실의 자료로 삼고 있으니, 신은 신씨가 연좌된 죄명은 무엇이며 폐출된 것은 무슨 의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옛날 한 소제(漢昭帝) 때에 상관안(上官安)207) 이 모반(謀反)하여 멸족(滅族)의 화를 당했으나, 상관후(上官后)208) 는 그 일에 관여하여 들은 적이 없으므로 폐출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심온(沈溫)도 태종 대왕(太宗大王)에게 죄를 입었으나,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모의(母儀)는 처음처럼 변함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신수근의 죄는 종사에 관계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신씨에게 연루될 수 있겠습니까? 훈신(勳臣)들이 그러한 역모로 억측하여 협박한 것은 국모(國母)의 아버지를 죽인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이 조정에서 있으면서 깊이 두려운 마음을 품고서 훗날의 근심을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죄명도 없고 경우에도 없는 말을 연출하여 몸을 보전하고 은총을 굳히는 계획을 삼았으나, 그것이 결국 스스로 임금을 무시하는 행위에 빠지고 만세(萬世)에 죄를 얻게 됨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은 군자(君子)였습니다. 장경 왕후(章敬王后)209) 가 돌아갔을 때에 상소하여, 박원종 등의 임금을 협박한 죄를 거론하며 신씨가 죄 없이 폐출당한 사유를 극진하게 말하여 위호(位號)를 회복할 것을 계청(啓請)했었는데, 그 말이 엄격하고 강직하여 오늘날 읽어보아도 오히려 늠름한 생기(生氣)가 있습니다. 아깝게도 그렇게 광명 정대(光明正大)한 논의도 당시의 모순된 의논에 의해 막혀서 시행되지 아니하였으니, 신은 매우 애통하게 여깁니다. 그후에 여러 성왕(聖王)이 서로 대를 이어오면서 빠진 전례(典禮)를 강구(講究)하였으나, 이 일만은 추복(追復)하자는 논의가 없으니, 신도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당시에 신씨를 폐출시킨 것은 이미 중종의 뜻이 아니니 위호를 추복하는 것이 어찌 중종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도 때로는 혹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있으니, 오래 되었다고 하여 어렵게 여길 필요가 없는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서는 신씨를 추복하는 일은 늦출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만약 조종(祖宗)들도 미처 못한 일이라 하여 미루신다면, 신은 거기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릉(貞陵)210) 은 폐위(廢位)된 지 2백 년이 넘었으나 현종(顯宗)께서 복위(復位)시켰고, 소릉(昭陵)211) 은 폐위(廢位)된 지 50년이 넘었으나 중종께서 복위시켰습니다. 그 밖에 선비들이 억울하게 화를 당한 이로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같은 무리가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뒤에는 모두 신원되어 여러 조정에서 정포(旌褒)와 추증(追贈)을 받지 않음이 없었고, 그 일이 선왕조(先王朝)에 관계된 일이라고 하여 고쳐야 함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신이 논한 바 두 가지는 그것이 전하의 가법(家法)으로서 전례(典禮)에 있어 거행(擧行)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명의(名義)에 있어서 추복(追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이 상소를 가지고 조정 대신들에게 널리 물으셔서 그냥 두었던 전례(典禮)를 수거(修擧)하여 속히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신다면, 비단 우리 성상께서 전대에 빛나고 후세에까지 빛이 날 성대한 덕이고 아름다운 일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오늘날 인심(人心)을 위로하고 천신(天神)을 감동시킬 크나큰 관건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각각 소견을 말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일이 지극히 중대한 데 관계되므로,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널리 물어 상의해서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로소 비답을 내리기를,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니, 널리 문의해서 조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실록(實錄)》을 참고하게 하였다. 승지(承旨) 송상기(宋相琦)가 청하기를,
"우리 나라의 문집(文集)과 만필(漫筆) 중에서 참고가 될 만한 문자(文字)는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조사해 넣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5책 32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505면
[註 200]하청(河淸) : 중국 황하(黃河)의 물이 맑아지면 성군(聖君)이 나오게 된다는 고사로, 성군이 나오는 운수.
[註 201]노산군(魯山君) : 단종의 복위 이전의 군호(君號).
[註 202]육신(六臣) : 세조 2년(1456)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육신(六臣:사육신)이 주동이 되어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실패한 사건을 말함.
[註 203]추원 보본(追遠報本) :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함. 즉 선대 조상에게 해야 할 도리를 하는 것을 일컫는 말.
[註 204]관고(貫高)의 변(變)에 조오(趙敖)가 함께 연좌되지 않았던 것은 : 관고(貫高)는 중국 한(漢)나라 때 조왕(趙王) 장오(張敖)의 신하. 관고는 고제(高帝)가 조왕을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반란을 일으켜 죽게 되었는데, 끝까지 왕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여 조왕은 이 사건에 연좌되지 않았음. 여기에서 조오(趙敖)라고 한 것은 조왕 오(敖)라는 뜻임.
[註 205]경태제(景泰帝) : 명(明)나라 대종(代宗).
[註 206]신씨(愼氏) : 단경 왕후(端敬王后)신씨를 가리킴.
[註 207]상관안(上官安) : 상관후(上官后)의 아버지.
[註 208]상관후(上官后) : 한 소제(漢昭帝)의 후(后).
[註 209]장경 왕후(章敬王后) : 중종 계비(中宗繼妃) 윤씨(尹氏).
[註 210]정릉(貞陵) : 조선 태조의 비 신덕 왕후(神德王后).
[註 211]소릉(昭陵) : 문종(文宗)의 비 현덕 왕후(顯德王后).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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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열람 단종실록 부록
단종실록 1권, 숙종 24년 전 현감 신규가 욕의를 거행하도록 상소하다
금상(今上) 24년 무인012) 9월에 전 현감(縣監) 신규(申奎)가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삼가 옛일을 살펴보건대,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은 하늘이 내신[天縱] 성인(聖人)으로 하청(河淸)013) 의 운(運)을 만나 화란(禍亂)을 평정[戡定]하셨으니, 하늘이 명하여 인심이 귀복(歸服)하였습니다. 노산(魯山)은 어린 나이에 보위(寶位)를 이어받았으나, 스스로 생각할 때 부족하게 여겨 천도(天道)에 응하고 인사(人事)에 순종하여,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선위(禪位)함을 본받아 자리를 물려 주고 별궁(別宮)으로 가시니, 상왕(上王)이라 칭하였습니다. 세조가 충심으로 읍양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종팽(宗祊)014) 의 부탁으로 애써 천조(踐阼)하셨으니, 옹용 읍손(雍容揖遜)015) 의 미(美)는 당(唐)·우(虞)의 심한 덕과 백중(伯仲)하였습니다. 그 수선(受禪)한 교문(敎文)에 나아가 보면, 또한 만세(萬世)에 할 말이 있다고 하겠으나, 불행하게도 6신(六臣)의 변(變)이 뜻밖에 나왔고, 권남(權擥)·정인지(鄭麟趾) 등의 비밀히 협찬한 의논이 또 따라서, 그 마음을 격동시켜 세조로 하여금 상왕을 보호하는 은혜를 끝까지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6신이 복위(復位)를 도모한 계책이 마침 노산(魯山)을 해침에 족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충신 지사(忠信志士)의 감회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사라지지 않고 있사오며, 예감(睿鑑)이 비치는 바에 벌써 이해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오매, 우신(愚信)의 나루(覶縷)016) 를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운수에는 무너진 것을 다스림이 있으나, 일이 기휘(忌諱)에 관계되어 일편(一片)의 외로운 무덤[孤憤]이 멀리 황추(荒陬)에 있은지 50여 년 동안 향화(香火)가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중종(中宗)께서 보위에 올라 곧 잃었던 전례[墜典]를 들어 특히 승선(承宣)을 보내어 예물을 갖추고 치제(致祭)하였고, 그 뒤에 노산을 위하여 입후(入後)의 의논이 처음으로 이약빙(李若氷)의 상소에서 발단하였는데, 그 때 대신들이 바르게 의논하지 못하여 감언(敢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불측(不測)한 죄(罪)를 받게까지 하였으니, 아아 아깝습니다. 선조[宣朝] 때에 또 관찰사 신(臣) 정철(鄭澈)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묘표(墓表)를 개수하고 제사에 일품(一品)을 쓰는 의식을 썼으니, 우리 열성(列聖)께서 추보(追報)하는 법전이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고, 먼 명도(冥途)의 원한도 거의 위로되어 풀리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신(愚臣)의 생각으로는, 오히려 미진함이 있습니다. 대저 임어(臨御)한 임금으로 화를 만나서 폐출(廢黜)을 당한 이는 한(漢)나라의 창읍왕(昌邑王), 제(齊)나라의 울림왕(鬱林王) 및 우리 조정의 연산(燕山)·광해(光海) 같은 이도, 모두 덕(德)에 어둡고 법도를 망가뜨림으로써 스스로 하늘을 끊어 버렸으니, 그 왕호(王號)를 삭제하고 폄위(貶位)하여 죽이지 않는 것으로 대접하여 제(帝)는 왕(王)으로 강등하고, 왕은 군(君)으로 강등하였으니, 그것 또한 다행한 일입니다. 만일 선위(禪位)한 임금으로 일찍이 실덕(失德)을 말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혹 일시의 권의(權宜)로 나오거나, 혹은 말하기 어려운 사세에 핍박당하여 손위(遜位)하고 취한(就閑)한 사람이 주(周)·한(漢) 이래로 어느 때인들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존호(尊號)의 일컬음을 폄손(貶損)하였음은 아직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전선(傳禪)한 이를 방출(放出)함과 다르다고 아니하겠습니까? 손양(巽讓)의 자취가 적원(敵怨)보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이 반드시 전대(前代)를 멀리 인용하고자 아니합니다. 대명(大明) 고황제가 원나라 순제(順帝)에 대하여, 우리 태조 대왕께서 공양왕(恭讓王)에 대하여 살아서도 대우하고 죽어서는 장사지내되, 아울러 제왕의 예(禮)를 썼습니다. 이성(異姓)간의 혁대(革代)할 즈음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더구나 왕실의 지친(至親)으로 주고받는[授受] 성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도리어 그 왕호(王號)를 제거함이 옳겠습니까?
노산군이 한 나라에 군림하심은 하루아침이 아니고 온나라 사람이 다 사랑하여 떠받들 줄을 알았습니다. 이미 손위(遜位)한 뒤에도 오히려 상왕(上王)이라 일컬었으니, 당싱 왕호를 아직도 제거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가령 6신(六臣)이 변란을 도모하는 거사가 없었더라면, 노산께서 그 명(命)을 고종(考終)하였을 것이니, 장제(葬祭)에 있어서 반드시 왕의 예를 씀은 결코 의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저 6신이 천명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모계(謀計)를 하였으니, 그 화를 제촉했을 뿐입니다. 노산이 또한 다시 어찌 그 사이에 참여하였겠습니까? 관고(貫高)의 변란에 조(趙)나라 장오(張敖)가 함께 같이 연좌되지 않은 것은 그 음모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노산이 다시 왕호를 일컫지 못한 것도 사세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 것에 말미암았음이요, 또한 오늘을 기다림이 있음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성상께서 이미 6신의 절개를 가상하여 특별히 포탄(褒歎)을 가하시고, 그 입사(立祠)를 허락하여 빛나게 액자를 내려 주셨으니, 이것은 6신의 고충(孤忠)과 열지(烈志)가 성명(聖明)의 알아주심을 받은 것이요, 그리고 백대 아래에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아아, 그들은 옛주인[故主]을 위하여 절개로 죽은 여섯 신하로서 벌써 성명의 총미(寵美)한 은혜를 받았는데, 더구나 6신의 옛주인이 그 음모를 알지 못하고, 일찍이 덕에 흠[疵]도 없사온데, 그러나 오히려 죽어서 그 편안함을 얻지 못하고, 제사에 왕례(王禮)를 쓰지 아니하니, 홀로 전하의 민연(愍然)하게 여겨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가 옮기고 일은 지나서, 무덤[丘壠]이 이미 펀펀해지고 봉과(蓬科)가 뒤덮혀 여우와 토끼가 뛰놀으니, 하늘이 거칠어지고 땅이 늙도록 슬픈 한을 달래기 어렵습니다. 토인(土人)들이 서로 전하기를, ‘풍곡(楓哭)이 때로 들린다.’ 하니, 어찌 저 조종(祖宗)의 하늘에 계시는 영령이 양양(洋洋)하게 오르고 내리는 즈음에, 누연(傫然)한 외로운 혼을 혁상(衋傷)치 않음이 있음을 알겠습니까? 이제 만약 왕호를 추복하고 제사에 왕례(王禮)를 쓰며, 그 침원(寢園)을 봉하고, 수호군(守護軍)을 더 두며, 사전(祠殿)을 따로 세워서 그 의물(儀物)을 갖추어 한결같이 중조(中朝)에서 경 황제(景皇帝)를 추복한 고사(故事)와 같게 하신다면, 법제(法制)에 헤아려 볼 때에 참월(僭越)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과 참작할 때에 진실로 정례(情禮)에 합당하여 신리(神理)를 위로할 것이며, 천심(天心)을 기쁘게 할 것이며, 인정도 또한 반드시 흡연(翕然)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도 신의 이 상소를 내려 널리 정신(廷臣)에게 물으시고 광전(曠典)을 추수하여 빨리 욕의(縟儀)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이 일은 지극히 중하고 또 크니, 널리 물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7책 45면
[註 012]무인 : 1698 숙종 24년.
[註 013]하청(河淸) : 황하 물이 5백 년에 한 번씩 맑아짐을 말함.
[註 014]종팽(宗祊) : 종사(宗社).
[註 015]옹용 읍손(雍容揖遜) : 온화하고 겸손함.
[註 016]나루(覶縷) : 자세히 봄.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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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奎 (신규)
자 문보(文甫), 호 취은(醉隱)
출생 1659년(현종 즉위년)~사망 1708년(숙종 34)
본관 : 평산(平山)
주요 관직 : 함양군수|영해부사|진주목사
정의 : 조선 후기에, 함양군수, 영해부사, 진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문보(文甫), 호는 취은(醉隱). 할아버지는 순안현감 신종근(申從謹)이고, 아버지는 무공랑(務功郎) 신찬연(申纘延)이며, 어머니는 이척(李陟)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684년(숙종 10)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98년에 죽음을 각오하고 소(疏)를 올려 세조에 의하여 죽은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킬 것과, 중종반정 때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당한 중종의 비(妃) 신씨(愼氏)를 복위시킬 것을 주장하여, 노산군에게는 단종이라는 존호가 올려졌고 묘소는 장릉(莊陵)으로 추봉되었으나 신비(愼妃)의 복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01년에 함양군수, 1704년에 영해부사, 1706년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뒤 1708년에 병사하였으며 교하(交河)에 장사지냈다. 그 뒤 1739년(영조 15)에 김태남(金台南)의 상소에 의하여 신비가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위되고 묘소가 온릉(溫陵)으로 추봉되자, 이듬해에 단경왕후의 복위에 관한 지난날의 공로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어려서 정태화(鄭太和)의 집에 기거하면서 학문을 익혔다. 저서로는 『취은집(醉隱集)』4권이 전하여진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취은집(醉隱集)』. 『이계집(耳溪集)』. 『평산신씨문헌록(平山申氏文獻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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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隱集(취은집)
저작자 신규. 창작/발표시기 1909년
성격 시문집. 유형 문헌. 권수/책수 4권 2책
간행/발행 신석기, 신석룡. 분야 종교·철학/유교
소장/전승 규장각 도서, 장서각 도서
요약 조선후기 문신·학자 신규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09년에 간행한 시문집.
내용
4권 2책. 목활자본. 1909년 6대손 석기(錫璣)·석룡(錫龍)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의 서문, 권말에 석룡 등의 발문이 3편 있다. 규장각 도서와 장서각 도서에 있다.
권1·2에 부(賦) 1편, 시 183수, 권3에 서(書) 6편, 소(疏) 2편, 서(序) 1편, 문(文) 7편, 잡저 1편, 권4에 부록으로 어제시(御製詩)·묘갈명·연보·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문의 작품적 가치도 크지만,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청복장릉온릉소(請復莊陵溫陵疏)」이다. 이 상소문은 1698년(숙종 24)에 올린 글로,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킬 것과 중종반정 때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된 중종의 비 신씨(愼氏)를 복위시킬 것을 청한 내용이다.
이 소에 의하여 노산군에게는 단종이라는 존호가 올려졌고 묘소는 장릉으로 추봉되었으나, 신비의 복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한 편의 소는 남효온(南孝溫)을 표상할 것을 청하는 내용인데, 이것은 대작(代作)이다. 그밖에 서(序)에 「증박노인시화시서(贈朴老人時華詩序)」, 잡저에 「백룡추일기(白龍湫日記)」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