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26-북부여의 세움>
☯ 대쥬신 북부 변방 가우리 족의 기세
북부여(北夫餘) 입국(立國)
북만주의 지도를 보면, 만주와 몽고의 국경지대에 븨류[비류(沸流)의 현지음: 비름]호수가 있고, 그 호수 건너편에 만주리가 있다. 바로 그 북쪽엔 가우리[고리(高離),고구려(高句麗)]인들이 옛날부터 자리를 지키며 살고 있었다.
그들도 물론 이웃하고 있는 비류족, 북부여족들과 함께 대쥬신족이다.
비록 쥬신의 변방에 살고 있지만, 그들 스스로 온 누리의 중원(中原)이라고 믿어, 그 이름을 가우[중앙, 한복판]리[땅]이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는 고리(高離), 고려(高麗) 등으로 쓰고, 읽기는 가우리라고 읽는다.
《쥬신 북부 변방 가우리 영역》
※ 흘승골(訖升骨) 혹은 흘승홀: 비류호와 흘릉지 호수 사이를 흐르는 강. 현 중국인들은 烏爾遼河(오이요하)로 쓰고, ‘월쑹허’라고 발음한다. 몽고인들은 HALHINGOL(헐힝골)로 발음한다.
기마족(騎馬族)인 가우리[고구려(高句麗): 나중에 나라 이름이 됨]족은 대단히 용맹스럽고 활달하여 강인한 의지력과 기상으로 주위의 몽고족을 비롯한 다른 종족을 제압하였다.♣
☯ 가우리족 해모수의 역사등장
쥬신제국 최후의 천황 고열가(高列加) 단군(檀君) 57년 임술년 4월8일. 젊고 패기에 넘치는 23살의 청년 장군 해모수(解慕漱)는 이미 노제국(老帝國) 쥬신이 힘을 잃고, 대단군 또한 기력이 없어 변방의 제후국(諸侯國)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남을 심히 걱정하였다.
특히 남쪽의 중화는 중원(中原)의 패권을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전란(戰亂)으로 지새우니 천하가 심히 어지럽고, 또 패망(敗亡)한 많은 장군들이 도적으로 변하여 함부로 쥬신의 변방을 침입,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다.
젊은 장군 해모수는 우리나라 서방(西方)과 남방(南方)의 한구(漢寇: 중국 도적떼들) 들의 노략질을 막고자 남쪽으로 정벌(征伐)을 떠나 아직까지 쥬신의 세력 하에 있는 불쥬신[변조선(卞朝鮮)]의 영지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이리하여 그 자신의 영지(領地)가 정해지자, 그는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宮)을 지었다.
젊은 해모수가 서쪽 오랑캐[한구(漢寇)]들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의 안전을 지키고 있는 사이에, 대단군 고열가(高列加)는 천황위(天皇位)를 버리고 산으로 떠나 버렸다.
배달민족의 위기를 심각하게 느낀 젊은 해모수는 서기전 238년 3월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스스로 대단군위(大壇君位)에 올라 천왕랑[천황랑(天皇朗)]이라 부르니, 이로부터 북부여(北夫餘)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천황위를 버리고 떠난 대부여[쥬신제국은 서기전425년 구물(丘勿)단군 때부터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고쳐 불렀다.]의 단군 고열가가 혹시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므로, 해모수는 경거망동 없이 자중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어느덧 6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한 번 떠난 천황은 다시 돌아올 줄 몰랐다. ♣
♬(말풍선)
“벌써 6년이 지났다. 그 동안 5가[오가(五加)]의 욕살들이 공화 정부를 잘 이끌었으나, 이런 난국(亂國)에 나라의 중심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노라!” (해모수의 생각)
격동하는 동아(東亞)의 세력 분파전에 모든 힘을 집중시켜야 할 위기 상황에서 쥬신제국은 그 구심점이 되는 천황(天皇)을 잃고 갈팡질팡하게 되니, 젊은 천왕랑 해모수는 혁명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대군을 이끌고 서울 백악산(白岳山) 아사달로 질풍같이 진격하여 갔다. 그의 기세에 놀란 오가의 욕살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해모수를 받아들이고, 그를 추대하여 대단군(大檀君)으로 모셨다.
대단군 해모수는 연나라와 새로운 국경 협약을 맺고 만번한(滿番汗)의 서쪽을 국경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중간 100리 땅을 중화족과 쥬신족 모두 살 수 없는 공지(空地)로 합의 하여 더 이상 국경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다.
☯ 목지국(目支國)의 파생
무혈혁명에 성공하여 천황위에 오른 천왕랑 해모수 앞에 대부분의 옛 쥬신 제후국들은 충성을 맹세하였지만, 그 중에는 해모수의 북부여(北夫餘)를 인정하지 않는 제후들도 많았다.
천왕랑은 곧 전국의 총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서기전 220년에는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큰 제사를 모셨다. 또 7월에는 새로운 궁궐 336칸을 지어 그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자제 종친을 중신(重臣)으로 하는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실시하였다.
갑자기 해(解)씨를 중심으로 나라의 주요 관리들이 교체되자, 수천 년 동안 뿌리를 내려온 쥬신계[조선(朝鮮)계(系)] 사람들이 옛 쥬신의 중신들을 중심으로 크게 반발하였다.
재빨리 상황이 위급함을 간파한 해모수는 중앙의 쥬신 사람들을 변방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폈다. 우선 대장군 탁(卓)을 비롯하여 오가(五加)의 욕살들을 말쥬신의 남쪽 지역으로 축출하니, 실망한 일부 쥬신의 집단들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흑룡강(黑龍江) 일대에 넓게 퍼져 살았다.
♬(말풍선)
“그대들 다섯 욕살들은 말쥬신의 남쪽 영지를 각각 떼어 줄 터이니, 즉시 임지로 떠나 단군(檀君)제(祭)를 열심히 올리고, 새 나라를 세워 이 천왕랑의 충성스러운 제후국이 되기 바라겠소.” (천왕랑 해모수)
쥬신제국의 아들 나라 개아지쥬신에게 펴라를 빼앗긴 말쥬신[마조선(馬朝鮮)]은 서울을 지금의 대동강변으로 옮기고, 새로 님ᄀᆞᆷ성[임검성(任儉城)]을 세워 이름을 역시 펴라[평양(平壤)]이라 하니, 이곳이 두 번째 펴라이다.
※ 펴라: 넓은 땅이라는 보통명사
말쥬신은 쥬신 반도의 거의 전부를 그 영지로 하고 있었으나, 북방 지역과 불쥬신을 중요시하는 중앙의 기본정책에 밀려 아직까지 광대한 쥬신 반도의 남부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탁 장군과 오가의 욕살들은 각자의 지역을 떠나 말쥬신으로부터 미추홀 지역 100리 땅을 배정받고, 그곳에 집결하여 우리 역사에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목지국(目支國)을 세웠다. ♣
《목지국의 위치》
※ 목지국
많은 역사서에 월지국(月支國)이라 쓰여 있으나, 목지국(目支國)이 정확한 이름이다. 그 위치는 현 아산군 인주면 밀두리(密頭里) 포구로서, 옛 이름은 미추홀(彌鄒忽)이다. 목지(目支)는 중국 베이징[북경(北京)]의 옛말. 미추와 같은 발음으로서 목지(目支)와 미추(彌鄒)는 같은 지명임이 천관우(千寬宇)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 대연(大然) 김성준(金成俊)씨에 따르면, 미추홀(彌鄒忽)은 우리말 메주골의 이두식 표기라 한다.
☯ 동명왕(東明王) 고진(高震)
서기전 206년. 서압록(西鴨綠)의 고진(高震: 해모수의 동생)은 많은 병을 모아 구려하(句麗河: 지금의 요하遼河)를 건너 서안평(西安平)까지 진격하여 한구(漢寇)들을 몰아내고, 그 동안 잃었던 불쥬신의 북부 영지를 모두 회복하였다. 이에 천왕랑 해모수가 그를 고구려(高句麗)후(候)로 봉하니, 그가 바로 유명한 동명왕(東明王)이시다.
♬(말풍선)
“이 땅은 천지개벽 이래 우리 쥬신족의 땅이다. 네 따위 좀도둑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총 돌격! 한구(漢寇)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 (마상의 동명왕 고진)
고구려 후(候)로 자리를 굳힌 동명왕은 세력을 점점 확장시켜 결국 가우리[고리(高離)]국의 옛 영지를 다 흡수하고, 남쪽으로는 서안평(西安平)을 넘어 내란을 피해 끊임없이 몰려오는 한구(漢寇)들을 쫓아내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니, 후에 한구들이 고진의 장기(將旗)만 보아도 도망가기에 바빴다.
※ 동명(東明)은 우리말로 한몽이며, 신수두 대제(大祭)의 이름이다. 지금까지 고주무[고추모(高鄒牟)]를 동명왕(東明王)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바로 잡는다. §
《 동명왕 고진의 서방 정벌도》
2020.4.12. 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