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길라잡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것들의 주체인 인간은 어디에 있나 생각한다. 재화와 장소라는 단어로 설명되는 자본과 시장에서 왜 사람은 빠진 것일까?
‘은돈 서른 닢’은 예수님을 두고 유다 이스카리옷과 수석 사제들 사이에 오간 값이다. 예수님의 몸값이자, 유다의 수고비이며, 사제들이 매긴 가치이고, 유다의 만족이다. 오가는 금전으로 사람의 아들은 죽음의 길을 걷는다. 무도한 사람들의 금전 거래로 구세주의 마지막 수난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닥칠 불행을 미리 말씀하신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마태 26,24) 예수님 당신께서 맞이하시는 죽음보다도 더한 불행이 그의 손에 있음을 이 말씀을 통해서 길이 남게 하셨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면 무한한 사랑의 보호 안에서 건강히 성장하도록 부모는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한다.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며 아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자기희생도 기쁨으로 삼는다. 만약 이 아기가 어떤 이유로든 죽게 된다면 이는 부모 자신의 죽음보다 더한 불행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뉴스를 통해 접하는 안타까운 사고로 인한 노동자나 무고한 시민의 죽음은 어떠한가. 무지, 태만, 부주의 등으로 사고를 야기한 현장 관리자나 관계자에게 이들의 죽음이 유다 이스카리옷처럼 불행으로 다가올까? 자본과 시장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이들에게는 사람이 아닌 생명이 없는 숫자로만 보일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사람을 셈하며 바라보지는 않는지 깊이 성찰한다. 삶은 숫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