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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지가 넘는 귀신들이 줄을 이어 깊은 밤을 걷는다. 백귀야행을 인간이 마주치면 목숨을 잃기 때문에 행렬이 있는 밤에는 외출하지 않는다고 했다. 귀신들의 정기모임 같은 ‘백귀야행’ 의식은 일본만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소재다. 이마 이치코의 <백귀야행>은 행렬 자체를 이야기하는 만화라기보다는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무섭고도 신비하고, 경외롭지만 한편 친근한 귀신과 요괴들이 매 에피소드마다 게스트 격으로 등장한다. 현재 일본이나 국내 모두 단행본 23권까지 출간되었으니 이제껏 나온 귀신들을 줄 세우면 백귀야행을 하기엔 모자람이 없어 보이긴 한다. 작가 역시 연재처인 <네무키>와의 인터뷰에서 “백귀야행, 이라는 제목은 백귀야행도의 글자(한자)가 예쁘다고 생각해서 채택했고,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는 요괴가 100마리 정도 나오면 되는 걸까? 정도만 생각했다”고 코멘트했다.
<백귀야행>은 작가가 연재 이전에 단편으로 발표했던 ‘정진 끝내는 날의 손님’에서 기본적인 세계관과 인물을 가져와 확장시킨 작품이다. 나름 유서 깊은 집안이라 도쿄 근교에 잡목림이 포함된 넓은 부지에 정원 딸린 커다란 목조주택에 거주하는 3대의 이야기인데, ‘정진 끝내는 날의 손님’은 이 집의 주인인 할아버지, 이름 난 환상문학가였던 이이지마 료(필명 이이지마 가규)가 남긴 유언인 ‘죽은 지 얼마 뒤, 밤에 손님 여덟 명이 찾아올 테니 음식상을 준비하고 맞이하라’를 실행하는 어느 밤의 이야기이다.
문장 속에서 요괴가 걸어 나올 것 같고 책을 읽다 보면 귀신의 숨결마저 느껴질 만큼 뛰어난 소설을 썼던 할아버지는 귀신을 호령하는 사람이었다. 그 영향을 받아 귀신을 볼 수 있는 손자, 이이지마 리쓰는 잡귀들이 붙지 않고 건강하게 커야 한다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여자아이 차림으로 지낸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할아버지 당신이 불러내고 이용한 귀신들이 집안에 남은 사람에게 해를 입힐까봐 제일 큰 요괴 일곱을 식사자리에 초대했고, 가장 가깝게 부리던 수호(?)요괴를 시켜 나머지 요괴들을 잡아먹어 마무리 짓도록 만들어진 자리였다. 영감이 없는 다른 식구들에게는 초대에 응한 손님(?)이 아무도 없는, 그저 형식적으로 상을 차리고 시간을 보냈을 뿐인 어떤 하룻밤에 불과했지만 리쓰에게는 할아버지의 수호령을 물려받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요괴들을 일거에 정리하며 할아버지의 보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환경을 만드는 중요한 밤이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안개처럼 아련한 작가의 작화 스타일이 하룻밤의 으스스하고도 환상적인 이야기와 잘 어우러지며 작가가 담당 편집자에게 처음으로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었다.
첫댓글 오늘아침에는 일송정님댁에 책이
얼마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ㅎㅎ
이 귀신이야기도 재미있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