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65년만에 건국포장 받다
-《성서조선》창간, 일제 식민통치 비판하다가 1년간 감옥에 갇혀
이 범 진
▲ 김교신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0년 8월 11일, 광복절을 맞아 선정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338명중 <성서조선>을 창간한 김교신이 포함됐다.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하다가 옥고를 치른 그가 광복 65년 만에 건국포장을 받게 된 것.
1901년생인 김교신은 1942년 <성서조선>의 권두문에 ‘조와(弔蛙)’라는 글을 써 1년간 감옥에 갇혔다. 이는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라는 뜻으로, 어떤 혹한에도 살아남는 민족의 희망을 개구리의 생명력을 빌어 노래했다는 혐의였다.
김교신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서도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을 만나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식민지 조선은 신사 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받는 등 핍박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의 시대에도 김교신은 부활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심한 동결은 고통과 절망을 심각하게 하지만 다시 춘양(春陽)의 기쁨을 절대하게 한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부활에 있고 부활은 봄과 같이 임한다”며 종국에는 승리할 것임을 강조했다.
김교신이 이해한 기독교에 그가 승리에 대한 믿음을 확신한 이유가 있다. ‘힘’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근대성을 기독교의 본질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고 ‘신의 종’이 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랑할 만한 게 하나도 없음을 진정으로 느껴야 진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강자가 추앙받는 시대에 반대로 약함을 내세워 약육강식의 질서를 뒤집어 보고자 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미꾸라지처럼 유영술을 부려 상층으로 상층으로만 사교를 넓히고 지위를 높이며 세력을 펼칠 때에 예수만은 낮은 하수도로 하수도로만 향했다. 거기서 병상(病傷)한 자와 패퇴한 자의 한숨을 들어주시고 눈물을 씻어 주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아 비천과 치욕의 극에까지 내려 가셨다.”
김교신이 그린 기독교의 참된 모습은 이러한 예수의 삶을 본받아, 상향성으로 향하는 힘의 가치관을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무교회주의를 계승했는데, 이때 그는 인간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신 절대중심주의’에 근거해 살아가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즉 그에게 있어 교회는 제도와 건물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증언되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를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함으로써, 조선의 상황에 맞는 ‘조선산 기독교’를 창조해 내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기독교와 민족 정체성을 함께 이어서 봄으로써, 마침내 핍박 가운데서도 일본 당국을 비판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인을 개구리로, 일본의 지배 정책을 겨울로 비유(에 불과)한 글을 트집 잡아, 1년간 옥에 가둘 정도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모든 정치적 언어가 금지된 때였다. 출옥 후 1944년 그는 돌연 흥남의 일본질소비료공장 노동자주택 관리계 직원으로 입사했다. 일본이 운영하던 최첨단 공장이었다. 결국엔 일본의 ‘경제’에 기여를 하게 된 셈인데, 조선 노동자들의 생활 개선과 인격적인 각성을 돕는다는 게 목적이자 명분이었다.
민중과는 거리를 두고 지식인 중심의 활동을 해 왔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어쩌면 약자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던 그에겐 더 자연스러운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교신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노동자들을 돌보던 중 자신도 감염되어 1945년 4월 24일,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출처: 깊이 사색하기>
“아버지, 이제야 독립운동가 인정되셨네요"
- ‘성서조선 필화사건’ 김교신 선생 딸 김정옥씨
보훈처 ‘자료 부족하다’며 외면. 일본 기록 찾아 올해 건국포장. 9월30일까지 유품 등 특별전시
지난 2010년 8월 12일 광주에 사는 김정옥(78·사진)씨는 오랫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 이날 그가 방문한 곳은 빼어난 기독교 사상가이자 마라토너 손기정을 길러낸 참스승 김교신(1901~45) 선생이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1년 동안 복역했던 서울 서대문형무소였다. ‘강제병합100년 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가 새달 30일까지 여는 특별 전시회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의 개막식에 참석하는 길이었다. 김 선생의 넷째딸인 그는 이 전시회에 숟가락·밥그릇 같은 생활용품과 육필 원고 등 선친의 유품들을 기증했다.
<성서조선>은 성서 중심의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일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에게 함께 배운 김 선생과 함석헌 선생 등이 만든 월간 잡지다. 기독교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이 잡지를 “1930년대 이후 조선 민중을 흔들어 깨운 죽비소리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김 선생은 42년 3월치 권두언인 ‘조와’(弔蛙)에서 “지금 우리에게 오는 모든 동상(凍傷)은 춘양(春陽)의 부활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데 없을 수 없는 과정”(중략)이며 “우리의 소망은 오직 부활에 있고 부활은 봄과 같이 확실히 온다”고 적어 필화를 겪는다. 눈 밝은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머지않아 사라질 ‘동상’은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지배, 마침내 다가올 ‘춘양’을 기다리는 개구리는 조선 민족을 뜻한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 글로 인해 김·함 선생 등은 옥고를 치르고 잡지는 폐간되는 아픔을 겪는다.
김 선생은 지난 65돌 광복절에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공적이 인정돼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서훈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씨는 지난 2008년 2월부터 “부친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해 달라”며 국가보훈처에 5번이나 신청을 했지만 돌아온 답은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 뿐이었다. “보훈처에서도 선친이 ‘성서조선’의 주필이고, ‘조와’를 쓴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한대요. 그런데 수형기록 같은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얘기였어요.”
그런데 올해 초 뜻밖의 발견이 이뤄졌다. 지난 3월 민족문제연구소가 일본 후쿠오카에서 손에 넣은 일본 검사 이시카와의 함흥 지역 3·1운동 관련 수사 기록 중에서 ‘김교신’ 이름이 발견된 것이다.
2010년 8월 17일
<출처: 전북신학교 졸업자와 재학생들의 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