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인석의 처변삼사에서 강조한 "선비 정신"을 토대로 항일 투쟁에 헌신한 5대 가문을 소개하고 있다. ⓒ 고하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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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의 증손자를 제가 잘 알아요. 재산이 아무것도 없어요. 3000석 재산을 나라에 낸 집안인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요."
지난 9월 6일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에서 '5대 항일운동 가문의 투쟁과 삶'을 주제로 강의를 시작한 정운현 교수(현 국무총리 비서실장)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친일파를 엄하게 단죄해야 할 가장 큰 이유로 우리가 친일 문제를 비판하지 않고 그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면 항일 투쟁하며 몸과 재산을 바친 선열들을 세상 사람들이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일본놈들한테 돈 좀 주고 편하게 먹고살지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냐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역설적으로 항일 운동이 미친 짓이 돼버린다"고 말했다.
그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대상으로 삼은 친일파가 7천 명인데 그중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양심선언을 한 사람은 5명밖에 안 된다"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할 때도 과거사위원회가 소환조사권이 있었지만 겨우 한두 명 와서는 질문에 답하거나 침묵했다"고 아쉬움을 털어놨다.
"독립운동가 나오면 망할 집안"
"김동선 기자가 쓴 <명가의 조건>이라는 책 서문을 보면 '명가란 그 명망에 걸맞은 도덕성을 지녀야 한다'고 쓰여 있어요. 벼슬 높은 사람, 돈 많이 번 사람이 있다고 명가가 아니에요. 힘 있는 집안인 세도가와 명망 있는 명가는 달라요."
그는 "일제 때 집에 항일 투쟁하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그 집구석에 망조가 들었다"며 "안동 출생인 석주 이상룡 가문처럼 매부와 처남까지 3대에 걸쳐 10명이 넘는 독립운동가가 나온 집안은 망할 집안으로 보면 된다"고 했다.
석주 이상룡 가문뿐 아니라 의병장 왕산 허위 가문과 하얼빈의 영웅 안중근 가문, 삼한갑족 우당 이회영 가문, 그리고 만주 독립군 일송 김동삼 가문이 전 재산을 항일 투쟁에 바치며 남녀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가족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투쟁가로 처절하게 살아온 명가들이다.
"왕산 허위의 사촌인 허형 집안에서 대표적인 항일 투쟁 인물로 꼽히는 허형식은 2000년 초반에야 국내에 알려졌어요. 이제 10여 년 됐네요.
<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유명한 박도 선생이 중국을 찾아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다 처음 알게 된 허형식을 국내에 알려왔을 때 일간지에서는 제가 처음으로 소개했죠. 이런 분들이 왜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냐면 중국 공산당 소속이어서 그래요. 이념의 갈래만 달랐을 뿐 같은 항일 투쟁인데 말이죠."
▲ 박도 선생은 소설 형식으로 엮은 허형식 평전 <허형식 장군>이라는 책을 냈다. 박도 선생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허형식은 여전히 중국인으로 알려져 왔을 것이다. ⓒ 정운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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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교수는 "육사 이원록은 모친 허길이 허형의 딸"이라며 "그를 저항 시인으로만 생각하는데 너무 편협한 역사 인식"이라고 지적했다. 수감번호가 264번이라 이육사라 불리는 이원록은 저항 시인으로 '광야' '절정' 같은 저항시를 남겼을 뿐 아니라 17차례나 옥고를 치르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에 연루되는 등 의열 투쟁에도 앞장섰다.
그는 "안중근의 막내 여동생으로 알려진 안성녀의 묘가 2005년 발견돼 부산 <국제신문>에 의해 알려졌다"며 "묘비명이 안성녀가 아닌 세례명인 안루시아로 되어 있는데 솔직히 사람들이 어떻게 이 묘가 안성녀 묘인지 알겠냐"고 반문했다. 안성녀는 일제강점기에 독립군 군복을 제작하는 등 항일 투쟁을 함께했다는 증언이 나왔지만, 추가로 기록이 더 나오지 않아 서훈을 받지 못했다.
"안중근은 동학농민전쟁 때 부친인 안태훈과 정부군 편에 서서 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참여해요. 백범 김구는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의 사령관 격이었어요. 백범 김구의 그때 이름이 김창수입니다. 김창수가 이끄는 부대가 안중근 부대와 싸워서 져요.
김창수의 인품을 전해 들었던 안태훈이 김구를 살리기 위해 절에 피해 있던 김창수와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했어요. 나중에는 안태훈이 김창수를 집으로 오게 하는데 그때 안중근과 김창수가 처음 만납니다. 나중에 안중근의 조카이자 안정근의 딸인 안미생이 김구의 며느리가 됩니다. 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돼요."
정 교수는 "의병장 왕산 허위 가문도 석주 이상룡 선생 집안과 겹사돈을 맺었다"며 5대 항일운동 가문의 헌신적인 투쟁 뒤에 가려진 삶을 전했다.
이어 "안중근의 왼손 약지가 해방 후까지 실존해 있었다"며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 선생의 며느리가 그 한 마디를 둘둘 말아서 허리춤에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잊어버려 찾을 수 없게 된 단지 하나가 있었다면, 효창원에 있는 안중근의 묘가 가묘가 아니게 된다"며 아쉬워했다.
'삼한갑족' 우당 이회영 가문을 소개하던 정 교수는 "우당 이회영 가문 5형제 등 가족 대다수는 굶주림과 병, 고문으로 사망하고, 다섯째 성재 이시영만 살아서 해방 후 귀국하는데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했던 백범 김구와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며 "지금 남산에 백범 김구 동상과 성재 이시영 동상이 같이 들어선 건 이시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백범하고 성재하고 화해하라고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 분명한 사실"
"항일투쟁가,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보면 긍지가 없어요. 어떤 분들은 자기 할아버지가 항일투쟁을 했다는 사실도 몰라요. 자기가 항일투쟁한 사실이 후손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말하지 않고 쉬쉬하는 거예요. 실제로 피해를 보니까. 그런 피해 의식이 깔린 거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 투쟁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학생 질문에 정 교수는 "그 말이 조금 과장됐지만 분명한 사실"이라고 답했다. 그는 "의병에서 광복군까지 투쟁하신 분들 후손의 실태가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며 "정부가 '너희들은 너희가 알아서 먹고 살아라'는 식으로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친일파가 단순히 돈이 많아서 흥한 것이 아니라 자식들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지금까지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것"이라며 "항일투쟁을 하면 3대가 망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원인은 교육이었기 때문에 너무 늦었지만 항일 명가의 후손들이 삶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든든한 교육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만드는 비영리 대안매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립니다.
첫댓글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충정의 정신 길히 보존하고 전국민에게 펼쳐나갑시다